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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행동의 성령님 (행2:37-47)

본문

제자들의 삶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과 함께 있던 3년 간의 공생애 시기,
둘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밖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까지의 약 40일간의 시기,
셋째는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받은 이후 순교하기 까지 의 사역의 시기입니다. 짧게는 40일, 3년에서, 길게는 몇 십년이 되는 시기 까지 차이가 많습니다. 첫 번째 시기,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사역했던 3년 동안은 사 실 제일 소중한 시기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과 함께 숨쉬고 활 동하던 시기였으니까요.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 했고 앞으로도 경험해보지 못할 우주적인 사건에 제자들은 함께 참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제자들은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고 하나님이신 주님과 함께 생활했지만, 사실 제대로 깨닫 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시기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낸 시 기에는, 깨닫기는 했지만 행동하지는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 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 가던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졌고, 도마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 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는 예수님이 낙심한 제자들에게 나타나 확신을 주고 음식 까지 함께 나 누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이 참으로 살아 계신하나님의 아들이신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주 나 의 하나님의 고백에 다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확신하고 마음이 뜨거워 졌을 뿐 그만입니다.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느꼈 을 뿐 그만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여전히 변하지 못했습니다. 여 전히 그들은 복음을 들고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 나가지 못했고, 여전히 마가 다락방에서 불안한 칩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 은 함께 모여 있긴 했지만, 그 제자 공동체가 행동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 이 말씀을 풀어 주실 때 가슴이 뜨거워지긴 했지만, 그저 그만입니다. 그들도 복음을 들고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 나가지 못한 것은 마찬 가지입니다. 머리로 깨닫는 것이 곧 변화를 가능하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알고서도 제대로 안 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 처럼, 엠마오의 두 제자 처럼, 느끼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정렬을 가지 기도 합니다. 그러나 느낌이나 정렬이 참된 영적인 변화를 지속 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 2장을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기, 즉 오순절 성령님 강림 이후 의 제자들을 한 번 보십시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히 딴 판 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불의 혀 같이 갈라지면서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성령님을 받고서 변화의 역사 가 일어 났습니다. 그렇게 견고한 성 처럼 보이던 변화가 단숨에 진행이 됩니다. 겁많아 배반하고 의기소침하던 제자들이 성령님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속 사람 까지 변했고, 그들은 행동을 했습니다. 힘있게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고, 정렬적으 로 함께 모여 친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쁨에 들떠서 재산과 물 건을 나누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외없이 복음을 들고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 나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참으로 대담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 변화와 행동의 분수령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성령님의 역사 가 있습니다. 이렇듯 성령님은 깨닫기는 해도 알기는 해도 믿기는 해도 아직도 행동하지 못하던 것을, 행동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성령님은 머리만 변하고 가슴의 느낌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속사람 까지 변하는 역사를 만들어 줍니다. 성령님이 물론 깨닫게 합니다. 성령님이 물론 믿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알고 느끼던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케 하는 변화와 행동의 파워를 줍니다. 이 게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제자들의 일생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받은 제자들이 어떤 변화를 보인 것입니까 예수님 과 3년 동안 먹고 마시면서도 꿈쩍 않던 변화, 부활하신 주님이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그렇게 나타나셨어도 요지부동이던 변화가, 어떻게 그렇게 한 순간에 온 것입니까 성령님역사의 기막힌 변화 와 행동의 드라마가 있은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선 제자들에게 진정한 마음의 찔림을 주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 하거늘(37절) 성령님은 어찌할꼬 하는 회개를 줍니다. 없던 눈물이 흐르고, 교만한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성령님을 받으라 그리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르리니" 그러니 성령님과 회개는 늘 동시에 주장되고 있습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성령님이 있습니다. 1907년 한국 회 부흥 운동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이걸 경험할 수 있습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한국 초대교회에 성령님의 체 험을 동반한 엄청난 신앙운동이었습니다. 강원도와 원산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모였는데 그 중에 남감 리교 선교사 하디(R. A. Hardie)목사가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드리렸습니다. 이 간증이 한국교인들에게 감명 을 주었을 뿐 만 아니라 그들도 성령님을 갈망하기에 일으렀습니다. 1907년 1월 6일부터 10여일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사경회 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인 모든 성도들도 성령님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날에 회개 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는데, 개인의 내면적인 죄 뿐 아니라 도 덕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해서는 뉘우침과 용서 를 비는 실천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사경회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이어 사람이 일어서서는, 죄를 자복하고 넘어져서는 죄 의식에 고민하면서 땅을 쳤다 어떤 때는 죄 자복이 있은 후 온 청중이 통성기도를 하는 데, 또 다시 죄를 자복하고 나서는 온 청중은 울음 바다가 되었다. 이렇게 기도회는 새벽 두시 까지 자 백과 울음과 기도로 계속 되었다" 마치 오늘 본문의 37절 처럼 초대교회를 탄생시킨 회개 운동이 일어 난 것입니다. 성령님의 결 과입니다.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도 그랬고, 한국 평양의 초대 교회도 그랬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우선 어찌할꼬의 회개를 줍니다. 또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화시킵니다. 성령님을 받은 무리들은 곧 변화를 보입니다.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에 힘쓰고 찬양에 몰입합니다. 물건을 통용하고 나눔을 실천 합니다. 겁쟁이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 변화는 일회적이고 스쳐가는 사건이 아닙니다. 일평생 진행되는 평생 작업입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이니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화가 되는 겁니다. 주님을 내 마음 속에 성령님으로 모셨으니 주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성령님은 구체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알고 깨달은 것을 추진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은 일명 성령님행전이라고도 합니다. 그 만큼 성령님의 활동이 생생하게 나타 난 현장을 보도한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의 영어 이름은 ACTS입니다. 영화 찍을 때 '액션'의 그 액션입니다. '액션배우' 할 때의 그 액션입니다. 말하자면 행동 모음입니다. 어떤 행동 모음입니 까 성령님의 활동 모음입니다. 성령님이 사람들을 변화 시키고, 성령이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든 그 현장 보고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보도는 탬포가 빠릅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따라 잡기가 힘듭니다. 그만큼 성령님의 역사는 급하고 강하게 몰아칩니다. 구체적이고 생생합니다. 때문에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정지화면이 아닙니다. 동화상입니다. 액션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받았는데도 정지 화면인 사람, 아 직도 충만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연약한 우리에게 추 진력을 가져다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는 고급입니다. 옵션도 다 달았습니다. 운전도 베테랑입니다. 그러나 연료가 없으면 다 무용지물입니다. 실제로 추진하게 하는 파워는 성령님이 주십니다. 성령님을 헬라어로는 "프뉴마"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분명히 인 격이지만 숨과 같이 바람과 같이 묘사된 것은, 변화의 힘과 영적 실천의 에너지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 자체가 에너지는 아니 지만 성령님은 에너지를 주로 주십니다. 영적 실천의 동력을 주 십니다. 정지 상태의 화면을 움직이게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치않고 어떻게 신앙 생활이란 발전의 터 빈을 돌릴 수 있습니까 생각하면 지루하고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에너지만 있으면 쉽습니다.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까닭에 연약한 인간은 믿음의 행진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대, 예수님의 시대, 그러나 지금은 성령님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현시도 부활 승천 이후에는 사라졌습니다. 재림 때 분명한 모습으로 자 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생생한 모습으로 지금도 주도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믿음의 아들 딸들에게 생활 구석 구석 에서, 지탱하고 위로하고 변화시키고 행동하게 합니다. 영적인 생활인 크리스챤의 삶은 모두 성령님의 에너지로 됩니다. 영적인 생활이니 성령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삶의 영역에 성령님 이 얼마나 주도적인 역사를 하시는지를 한번 살펴 보십시다.
기도는 성령님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나니"(롬8:26) 했습니다. 말씀도 성령님이 필 요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까 성령님을 받아 읽어야 말씀 의 감동이 되 살아 납니다. 선교도 성령님활동의 결과입니다.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 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님이 임해서 활동하는 것이 복음증거의 일입니다. 성령님 없이 선교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 라"(요4:24)했습니다. 성령님에 이끌리는 예배라야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봉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빌3:3)했습니다. 봉사도 성령의 능력으로 할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방언, 예언, 병 고침, 지식말씀, 교사, 위로주는 일, 이 모든 성령님의 은사들은 봉사하기 위한 은사입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것도 성령님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란과 호색과 분냄 과 오직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 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인격의 변화는 오직 성령님 의 에너지로 되는 일입니다. 어떻게 육체의 사람이 자기의 습관 을 고치고 말씀과 인격의 사람이 됩니까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자 기를 쳐 복종시키는 거룩한 투쟁도, 인격의 변화도 모두 성령님의 활동으로서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듯 믿음의 사람은 일거수 일투족이 성령님의 결과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님으로 진행하며 성령님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영적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성령님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성령님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때문에 매일 매일의 삶에서 성령님의 충만을 구 할 일입니다. 무엇 보다 먼저 성령님에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님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전 삶 은 성령님의 삶입니다. 올브라이트 박사는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를 했습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육체적인그리스도인, 능력의 그리스도인이 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육체적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지배가 충만히 행사되지 못해 번번히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무기력하고 패배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반대로 능력에 찬 그리스도인(Powerful Cristian)은 성령님의 지배가 충만 히 달성되어 성령님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은 적은게 현실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힘겨운 믿음의 생활을 합니다. 기쁨은 사라지고 의무감에만 매여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실천에 매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한 짐씩 지고 죽을 맛 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전투에서 패배에 패배를 거 듭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 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는 있지만, 깨 닫기는 하지만 진정한 변화가 없습니다. 행동이 없습니다. 바로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때문에 성령님 충만한 믿음의 수레 바뀌를 굴릴일입니다. 성령님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바람 처럼 자유롭게 역사 하지만 바람 처럼 가볍게 율법의 실천을 넘습니다. 자! 이제 전환점을 이룰 때입니다. 혁명적 변화를 이룰 때입니다. 언제까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앵무새 처럼 이런 말만 반복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이런 시스템의 쳇바퀴 를 굴릴 것입니까 이제는 성령님의 지배가 충만히 달성 되도록 하십시다. 마가 다락방에서 온 무리가 함께 모여 무릎을 꿇고 열심히 기도할 때에 성령님이 충만히 임했습니다. 무엇보다 무릎을 꿇을 일 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는 자에게 성령님을 충만히 부어 주십니다. 그러니 무기력을 느끼 면 그 장소가 어디든지 무릎을 꿇을 일입니다.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이든지 무릎을 꿇을 일입니다. 우리 육체의 무릎을 꿇는 것 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무릎을 꿇을 일입니다. 그러면 오순절 후의 제자들 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증인된 자로서 승리의 삶을 살 것입니다. 성령님은 혁명적 변화를 줍니다. 성령님은 행동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탈출하게 합니다. 이 시간 기도의 겸손의 무릎을 꿇고 성령님의 지 배를 간절히 구하는 여러분에게 이런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주님, 저희들은 연약합니다. 저희들은 때때로 패배하고 무기력 한 삶을 이렇게 꾸려갑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마음에는 원 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곤고한 생활입니다. 기쁨은 사라지고 의무감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힘겨운 삶입니다. 윱법의 짐을 한 짐씩 지고 거룩한 전투에서 연전 연패를 하고 있습니다. 하오니 저희로 하여금 기도의 무릎을 꿇게 하여 주옵소서. 전심으로 갈 망하는 당신의 아들 딸들에게 성령님을 충만히 부어 주옵소서. 변 화하게 하여 주옵소서. 행동하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 원칙을 실 천하는 승리의 증인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이름 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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