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할 수 있습니까? (눅19:1-10)
본문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벤허'라는 영화는 미육군 퇴역 장군인 왈레스(Lew Wallace)라고 하는 소설가가 쓴 작품을 영화화한 것 입니다. 언제나 봐도 스펙타클하고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그런데 왈레스가 이 작품을 쓴 동기는 아주 우연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친구인 봅 잉거졸이라는 사람이 예수의 로맨스에 관해 쓰면 대단히 인기 있는 소설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주 변에는 여인이 들끓었고 스켄달도 있을법하니, 쓰면 베스트 셀러 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그래서 왈레스는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왈레스는 본래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예수를 알아야 했고, 예수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 어야 했습니다.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고 하다가 왈레스는 그 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이 넘쳐 났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에 관한 (about) 이야기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내 책의 중심이 되었고 내 마음의 중심이 되었소." 그래서 그는 벤허의 마지막 장면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토굴에 숨어 지내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는 장면으로 배치합니다. 아 주 감동적인 장면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접한 사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이렇 게 삶이 변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 중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대적하고 비난하는 경우입니다. 바리세인 서기관들 종 교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만나긴 만났지만 불행하게도 예수와 맞섰습니다. 그를 영접하지도 않았고 그를 따르지도 않았 습니다. 오히려 대적하고 비난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 입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추종하지만 변화지 않는 경우입니다. 바로 군중들입니다. 열심히 몰려다니지만 그저 그대로입니다. 기적을 구경하고, 말씀도 잘 듣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입니다. 기적은 기적으로 끝납니다. 교훈은 또 교훈으로 끝납니다. 주옥같은 말씀이지만, 나와 직접적인 상관을 맺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군중들은 예수의 인기가 한창 솟을 때는 박수를 치며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예수가 코너에 몰리자 주먹을 흔들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고 소리칩니다. 그 많은 기적과 그 많은 교훈이 하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렇고 부자 청년이 그랬습니다. 말씀은 좋은 말씀이지만, 나에게 영향을 주는 말씀에서는 선을 긋습니다. 내가 행동해야 하는 말씀일 때는 망설입니다. 내가 변해야 하는 말씀이면 부담스러운 것이 됩니다. 그래서 떠납니다. 세 번째는 따르고 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삶을 맡기고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기적을 목격하고 교훈을 듣는 것에는 군중들과 같지만, 자신의 삶을 던진다는 점에서는 다릅니다. 삶을 맡기니까 자신의 생활이 변합니다. 예수의 교훈대로 살려고 애씁니다. 그의 행동을 모방합니다. 그의 인격을 닮아 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따 릅니다. 중도에 실패도 있고 시행착오도 있지만 결국은 다 변합니다. 처음에는 전혀 함량미달의 인물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참으 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됩니다. 무식꾼에다 천방지축형인 베드로지만, 변화되어 교회의 우두머리 가 되었습니다. 성질이 너무 급해 '천둥번개'라고 불리던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소아시아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변하여, 인도에서 목 베임을 당해 순교할 정도로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경꾼이 아닙니다. 일생을 맡기고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인격이 변화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습관이 변화되고, 행동이 변화되었 습니다. 이 제자들은 모두 일평생을 통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주 극적인 계기로 급하게 변화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만날 그 당시에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삭 개오입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 불렀습니다. 민족 반역자에, 동족 착 취에, 부당이득을 챙기는 부패한 사람입니다. 인정도 없습니다. 험하게 벌어서 돈이면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돈이면 무엇 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철저한 돈의 신봉자였습니다. "돈이면 뭐 든지 되는 세상, 세상의 평판이 무슨 소용이 있나 겉으루야 그렇게 뭐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정작 돈이면 사죽을 못쓰는 족속들이 아닌가 나는 뭐든지 돈으로 한다. 돈 으로 안 되는 게 뭐가 있담. 개 같이 벌어도 절대 돈을 놓쳐서는 안 되." 이렇게 살았습니다. 삭개오에게는 비난 섞인 도덕적인 판단만 빼면 살만했습니다. 권 력도 있었습니다. 여리고의 세관장이었습니다. 돈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2절)하고 부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실제 상황에서 부자라고 명백히 말한 것은 아리마대 요셉과 부자 청년, 그리고 삭개오 이 셋 뿐입니다. 베레아 지방에서 유대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게 되 어 있는 데 그 요단강 길목 여리고에 세관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통관세를 받는 것입니다. 그 때의 징수제도는 로마로부터 총량을 할당받고, 세관에서 자율적으로 거둬 그 총량만 로마에 납부하면 되는 그런 제도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부를 축적할 수 있었 습니다. 이렇게 삭개오는 명실상부한 부자였습니다. 겉으로 보기 에는 부족함 없는 화려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습니다. 이웃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상종을 해 주지 않습니다. 사실은 고독한 생활이었습니다.
사 실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삭개오(카이오스)는 '청결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전통적인 유대이름입니다. 전통적인 유대 이름을 가졌지만 유대인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청결한 사람'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이름에 걸맞게 살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름과 정 반대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한편으로는 철옹성처럼 튼튼히 버티고 서 있는 사람, 다른 한 편 으로는 깊은 고독에 몸부림 치는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 그 삭개 오가 오늘 급하게 변한 것입니다. 무엇이 이 변화를 가능하게 했습니까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 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 워하며 영접하거늘"(5-6절) 바로 예수와의 만남이 이런 극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예수와의 만남, 그토록 오래동안 시달리던 고독과 양심의 괴로움, 허무와 죄의식 이런 것이 한 순간에 해결되는 만남이었습니다. 평생을 철옹성처럼 버틸 것 같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까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 이, 어떻게 이렇게 단숨에 변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삭개오도 변하고 베드로도 변하고, 요한도 변했습니다. 옹니에 최씨도 변할 수 있습니다. 지존파도 변하고, 조세형이도 변합니다. 하나님 앞 에서 포기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가능 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고집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미리 예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 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삭개오도 성격이 급했는가 봅니다. 뽕나무에서 급하게 내려왔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급 하게 변합니다. 마지못해 만나는 만남이 아닙니다. 체면도 평판도 다 집어 던졌습니다. 온 몸을 던져 만난 것입니다. 기쁨에 벅차 만났습니다.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이래야 합니다. 이왕 나의 존재를 맡기려면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환경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그걸로 되는 게 아 닙니다. 얼마전 제가 봉사하는 상담기관에서 부탁을 받았습니다. 딸이 다 방으로 술집으로 전전하는걸 잡아 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빨리 여관으로 와 달라는 겁니다. 딸을 시내 여관에 잡아 놓고 심부름 센타 사람들 시켜서 딸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들어가 가출한 딸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전혀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습니다. 어떻게든지 다시 다방에 보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겁니다. 그래도 잘 이야기하해서 겨우 집으로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아마 다시 가출을 했을 것입니다. 수갑을 채우기 전에는 안됩니다. 마음이 돌아서야 되지요. 환경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변하면 환경은 대부분 극복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건 환 경이 아닙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천하가 변해도 내가 안 변하면 그 뿐입니다. 내가 변하면 천하가 다 변하는 겁니다. 삭개오는 오늘 이 마음을 기울인 것입니다. 즐거워하며 영접하면 서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마음을 기울이는 만남 뒤에 어떤 변화가 찾아 왔습니까 "주여 보시옵소서"(8절)입니다. 랍비가 아니고 '주여'입니다. '보시옵소 서'는 자신의 결심이 확고한 것이라는 걸 내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재산의 절반을 내 놓겠다고 합니다. 전통적 으로 랍비들은 구제를 할 때 수입이나 재산의 20%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50%를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배가 넘습니다. 토색한 것은 구약의 규정은 20%를 얹어서 보상해 주도록 속건제에서 규 정하고 있습니다. (레6:5) 그런데 네 배를 갚겠다고 합니다. 300% 를 더 얹어 주는 것입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것은 목숨을 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돈 많은 사람들이 더 벌벌 떱니다. 제가 우리 교우에게 들 은 사실인데, 시내 중심에 빌딩을 몇 채 가지고 임대료를 한 달 에도 수천 만원씩 거두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 임 대료 받으러 다니면서 그 세든 사람에게 오히려 짜장면 얻어먹는 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독하게 벌어야 돈이 모이지요. 이렇게 돈 버는 사람, 돈이 곧 목숨입니다. 삭개오도 그랬습니다. 온갖 비난 다 얻어먹으면서 개같이 벌은 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피 같은 돈을 오늘 펑펑 내 놓는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쳤거나, 아니면 진짜 가치관이 변 한 것입니다. 주머니가 회개해야 진짜 회개한다고 했는데, 정말 삭개오는 진짜 회개하는 것입니다. 진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허투루 해 보는 것도 아닙니다. 과시용도 아닙니다. 홍보용은 더구나 아닙니다. 과시 잘 하는 사람 돈 못 벌어요. 감정에 이끌리는 사람 돈 못 벌어요. 피도 눈물도 없어야 돈을 버는 것입니다. 냉정해야 돈 벌 어요. 이런 사람이 재산의 절반을 구제비로 내 놓고, 부정한 수입 은 네 배나 도로 갚는다고 합니다. 이건 거의 전 재산을 내 놓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총 소유 재산 의 절반은 구제비로 이미 나갔습니다. 나머지 돈으로는 부정축제 를 원상 회복시키는데 씁니다. 이 정도면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재산에 의지하는 삶이 아닙니다. 빽이나 힘이 재산에 서 나올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것이 삭개오 변화의 위대한 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네 있는 재산을 다 팔아 구제비로 내 놓고 나를 쫓으라고 합니다. 결국 이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똑같은 부자에, 똑같이 예수님을 만났는데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요.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18:24-25)
그런데 이 말을 바꾸면 이렇게 표현해도 됩니다. '재산이 있는 자 가 변화되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 고. 그렇습니다. 집착하는 사람은 변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 어놓으면 변합니다. 제가 보니 모두들 자기 세계에 집착해 있습니다. 이게 옳다고 잘 바꾸지 않습니다. 물론 무조건 헤딱 헤딱 바꾸는 것도 문제지만,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열어 놓아야 합니다. 진리 앞에서는 무조 건 자신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제 생각 다 있고, 제 습관 다 있고, 제 주장 다 있고. 그러면 하나님 말씀은 어디에 가 미칩니까 하나님 말씀이면 무조건 무릎 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따지지 말고 무조건 엎어져 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말씀의 수용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빨리 변합니다. 고집을 부리지 마세요. 자존심을 내 세우지 마세요. 합리화하지 마세요. 말씀은 말씀입니다. 적당히 지키려면 안치키는 것이 좋습니다. 부자 청년은 적당히 지키려다가 큰 코를 다치고 물러났습니다. 적당히 종교 생활하려 면 곤란한 지경에 빠집니다. 예수를 따라다니던 2천년 전 팔레스 틴의 군중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밀물처럼 예수를 따라다니다가, 십자가 앞에서는 썰물처럼 예수를 빠져나갑니다.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어떤 혁명가가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 내가 젊었을 때 나는 혁명가였고, 하나님께 드린 나의 기도는 "주여, 저에게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소서"였네. 내가 중년에 이 르러 내 인생의 반이 덧없이 흘렀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기도 내용을 바꾸었다네. "주여, 저에게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 시킬 힘을 주소서." 이제 내가 늙고, 여생을 헤아리게 되면서부터 나의 우둔함을 눈치채게 되었다네. 지금의 내 기도는 "주여, 저에게 저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일세. 내가 처음부터 진작 이런 기도를 했더라 면 내 인생을 허송하지 않았을거야." 그렇습니다. 자신을 변화시킬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평생기도 의 주제는 '나의 변화'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사람의 깊숙이 까지 변한 삭개오에 게 우리 주님은 이렇게 축복의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 함의 자손임이로다"(9절)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이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이 될 수 있 다 이 말입니다. 이 사람도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변화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변화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변화 되었다고 자만하지 말고,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변 화가 불가능하다고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에다 목숨을 걸로 살던 삭개오도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 세요. 우리 주님께 몸과 마음을 맡기세요. 주님이 우리를 변화 시 켜 주실 것입니다. 본 회퍼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이런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 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말씀을 접한 사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이렇 게 삶이 변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 중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대적하고 비난하는 경우입니다. 바리세인 서기관들 종 교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만나긴 만났지만 불행하게도 예수와 맞섰습니다. 그를 영접하지도 않았고 그를 따르지도 않았 습니다. 오히려 대적하고 비난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 입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추종하지만 변화지 않는 경우입니다. 바로 군중들입니다. 열심히 몰려다니지만 그저 그대로입니다. 기적을 구경하고, 말씀도 잘 듣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입니다. 기적은 기적으로 끝납니다. 교훈은 또 교훈으로 끝납니다. 주옥같은 말씀이지만, 나와 직접적인 상관을 맺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군중들은 예수의 인기가 한창 솟을 때는 박수를 치며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예수가 코너에 몰리자 주먹을 흔들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고 소리칩니다. 그 많은 기적과 그 많은 교훈이 하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렇고 부자 청년이 그랬습니다. 말씀은 좋은 말씀이지만, 나에게 영향을 주는 말씀에서는 선을 긋습니다. 내가 행동해야 하는 말씀일 때는 망설입니다. 내가 변해야 하는 말씀이면 부담스러운 것이 됩니다. 그래서 떠납니다. 세 번째는 따르고 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삶을 맡기고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기적을 목격하고 교훈을 듣는 것에는 군중들과 같지만, 자신의 삶을 던진다는 점에서는 다릅니다. 삶을 맡기니까 자신의 생활이 변합니다. 예수의 교훈대로 살려고 애씁니다. 그의 행동을 모방합니다. 그의 인격을 닮아 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따 릅니다. 중도에 실패도 있고 시행착오도 있지만 결국은 다 변합니다. 처음에는 전혀 함량미달의 인물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참으 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됩니다. 무식꾼에다 천방지축형인 베드로지만, 변화되어 교회의 우두머리 가 되었습니다. 성질이 너무 급해 '천둥번개'라고 불리던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소아시아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변하여, 인도에서 목 베임을 당해 순교할 정도로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경꾼이 아닙니다. 일생을 맡기고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인격이 변화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습관이 변화되고, 행동이 변화되었 습니다. 이 제자들은 모두 일평생을 통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주 극적인 계기로 급하게 변화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만날 그 당시에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삭 개오입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 불렀습니다. 민족 반역자에, 동족 착 취에, 부당이득을 챙기는 부패한 사람입니다. 인정도 없습니다. 험하게 벌어서 돈이면 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돈이면 무엇 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철저한 돈의 신봉자였습니다. "돈이면 뭐 든지 되는 세상, 세상의 평판이 무슨 소용이 있나 겉으루야 그렇게 뭐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정작 돈이면 사죽을 못쓰는 족속들이 아닌가 나는 뭐든지 돈으로 한다. 돈 으로 안 되는 게 뭐가 있담. 개 같이 벌어도 절대 돈을 놓쳐서는 안 되." 이렇게 살았습니다. 삭개오에게는 비난 섞인 도덕적인 판단만 빼면 살만했습니다. 권 력도 있었습니다. 여리고의 세관장이었습니다. 돈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2절)하고 부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실제 상황에서 부자라고 명백히 말한 것은 아리마대 요셉과 부자 청년, 그리고 삭개오 이 셋 뿐입니다. 베레아 지방에서 유대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게 되 어 있는 데 그 요단강 길목 여리고에 세관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통관세를 받는 것입니다. 그 때의 징수제도는 로마로부터 총량을 할당받고, 세관에서 자율적으로 거둬 그 총량만 로마에 납부하면 되는 그런 제도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부를 축적할 수 있었 습니다. 이렇게 삭개오는 명실상부한 부자였습니다. 겉으로 보기 에는 부족함 없는 화려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습니다. 이웃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상종을 해 주지 않습니다. 사실은 고독한 생활이었습니다.
사 실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삭개오(카이오스)는 '청결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전통적인 유대이름입니다. 전통적인 유대 이름을 가졌지만 유대인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청결한 사람'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이름에 걸맞게 살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름과 정 반대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한편으로는 철옹성처럼 튼튼히 버티고 서 있는 사람, 다른 한 편 으로는 깊은 고독에 몸부림 치는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 그 삭개 오가 오늘 급하게 변한 것입니다. 무엇이 이 변화를 가능하게 했습니까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 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 워하며 영접하거늘"(5-6절) 바로 예수와의 만남이 이런 극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예수와의 만남, 그토록 오래동안 시달리던 고독과 양심의 괴로움, 허무와 죄의식 이런 것이 한 순간에 해결되는 만남이었습니다. 평생을 철옹성처럼 버틸 것 같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까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 이, 어떻게 이렇게 단숨에 변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사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삭개오도 변하고 베드로도 변하고, 요한도 변했습니다. 옹니에 최씨도 변할 수 있습니다. 지존파도 변하고, 조세형이도 변합니다. 하나님 앞 에서 포기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가능 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고집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미리 예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 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삭개오도 성격이 급했는가 봅니다. 뽕나무에서 급하게 내려왔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급 하게 변합니다. 마지못해 만나는 만남이 아닙니다. 체면도 평판도 다 집어 던졌습니다. 온 몸을 던져 만난 것입니다. 기쁨에 벅차 만났습니다.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이래야 합니다. 이왕 나의 존재를 맡기려면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환경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그걸로 되는 게 아 닙니다. 얼마전 제가 봉사하는 상담기관에서 부탁을 받았습니다. 딸이 다 방으로 술집으로 전전하는걸 잡아 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어머니가 빨리 여관으로 와 달라는 겁니다. 딸을 시내 여관에 잡아 놓고 심부름 센타 사람들 시켜서 딸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들어가 가출한 딸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전혀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습니다. 어떻게든지 다시 다방에 보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겁니다. 그래도 잘 이야기하해서 겨우 집으로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아마 다시 가출을 했을 것입니다. 수갑을 채우기 전에는 안됩니다. 마음이 돌아서야 되지요. 환경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변하면 환경은 대부분 극복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건 환 경이 아닙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천하가 변해도 내가 안 변하면 그 뿐입니다. 내가 변하면 천하가 다 변하는 겁니다. 삭개오는 오늘 이 마음을 기울인 것입니다. 즐거워하며 영접하면 서 온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마음을 기울이는 만남 뒤에 어떤 변화가 찾아 왔습니까 "주여 보시옵소서"(8절)입니다. 랍비가 아니고 '주여'입니다. '보시옵소 서'는 자신의 결심이 확고한 것이라는 걸 내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재산의 절반을 내 놓겠다고 합니다. 전통적 으로 랍비들은 구제를 할 때 수입이나 재산의 20%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50%를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배가 넘습니다. 토색한 것은 구약의 규정은 20%를 얹어서 보상해 주도록 속건제에서 규 정하고 있습니다. (레6:5) 그런데 네 배를 갚겠다고 합니다. 300% 를 더 얹어 주는 것입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것은 목숨을 내 놓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돈 많은 사람들이 더 벌벌 떱니다. 제가 우리 교우에게 들 은 사실인데, 시내 중심에 빌딩을 몇 채 가지고 임대료를 한 달 에도 수천 만원씩 거두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 임 대료 받으러 다니면서 그 세든 사람에게 오히려 짜장면 얻어먹는 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독하게 벌어야 돈이 모이지요. 이렇게 돈 버는 사람, 돈이 곧 목숨입니다. 삭개오도 그랬습니다. 온갖 비난 다 얻어먹으면서 개같이 벌은 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피 같은 돈을 오늘 펑펑 내 놓는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쳤거나, 아니면 진짜 가치관이 변 한 것입니다. 주머니가 회개해야 진짜 회개한다고 했는데, 정말 삭개오는 진짜 회개하는 것입니다. 진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허투루 해 보는 것도 아닙니다. 과시용도 아닙니다. 홍보용은 더구나 아닙니다. 과시 잘 하는 사람 돈 못 벌어요. 감정에 이끌리는 사람 돈 못 벌어요. 피도 눈물도 없어야 돈을 버는 것입니다. 냉정해야 돈 벌 어요. 이런 사람이 재산의 절반을 구제비로 내 놓고, 부정한 수입 은 네 배나 도로 갚는다고 합니다. 이건 거의 전 재산을 내 놓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총 소유 재산 의 절반은 구제비로 이미 나갔습니다. 나머지 돈으로는 부정축제 를 원상 회복시키는데 씁니다. 이 정도면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재산에 의지하는 삶이 아닙니다. 빽이나 힘이 재산에 서 나올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것이 삭개오 변화의 위대한 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네 있는 재산을 다 팔아 구제비로 내 놓고 나를 쫓으라고 합니다. 결국 이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똑같은 부자에, 똑같이 예수님을 만났는데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요.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18:24-25)
그런데 이 말을 바꾸면 이렇게 표현해도 됩니다. '재산이 있는 자 가 변화되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 고. 그렇습니다. 집착하는 사람은 변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 어놓으면 변합니다. 제가 보니 모두들 자기 세계에 집착해 있습니다. 이게 옳다고 잘 바꾸지 않습니다. 물론 무조건 헤딱 헤딱 바꾸는 것도 문제지만,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열어 놓아야 합니다. 진리 앞에서는 무조 건 자신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제 생각 다 있고, 제 습관 다 있고, 제 주장 다 있고. 그러면 하나님 말씀은 어디에 가 미칩니까 하나님 말씀이면 무조건 무릎 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따지지 말고 무조건 엎어져 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말씀의 수용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빨리 변합니다. 고집을 부리지 마세요. 자존심을 내 세우지 마세요. 합리화하지 마세요. 말씀은 말씀입니다. 적당히 지키려면 안치키는 것이 좋습니다. 부자 청년은 적당히 지키려다가 큰 코를 다치고 물러났습니다. 적당히 종교 생활하려 면 곤란한 지경에 빠집니다. 예수를 따라다니던 2천년 전 팔레스 틴의 군중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밀물처럼 예수를 따라다니다가, 십자가 앞에서는 썰물처럼 예수를 빠져나갑니다.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어떤 혁명가가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 내가 젊었을 때 나는 혁명가였고, 하나님께 드린 나의 기도는 "주여, 저에게 세상을 뒤엎을 힘을 주소서"였네. 내가 중년에 이 르러 내 인생의 반이 덧없이 흘렀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기도 내용을 바꾸었다네. "주여, 저에게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변화 시킬 힘을 주소서." 이제 내가 늙고, 여생을 헤아리게 되면서부터 나의 우둔함을 눈치채게 되었다네. 지금의 내 기도는 "주여, 저에게 저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주소서"일세. 내가 처음부터 진작 이런 기도를 했더라 면 내 인생을 허송하지 않았을거야." 그렇습니다. 자신을 변화시킬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평생기도 의 주제는 '나의 변화'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사람의 깊숙이 까지 변한 삭개오에 게 우리 주님은 이렇게 축복의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 함의 자손임이로다"(9절)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이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이 될 수 있 다 이 말입니다. 이 사람도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변화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변화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변화 되었다고 자만하지 말고,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변 화가 불가능하다고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에다 목숨을 걸로 살던 삭개오도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 세요. 우리 주님께 몸과 마음을 맡기세요. 주님이 우리를 변화 시 켜 주실 것입니다. 본 회퍼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이런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 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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