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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에 오르자 (눅9:26-36)

본문

예수님과 함께 산 위에 올라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곳에서 너무나 황홀한 체험을 했습니다. 한 순간에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의 삶 속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변화산에 오르십시오. 성지 이스라엘을 찾아서 다볼산인지 하는 곳에 등산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산에 오르기 위해서 갖춰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변화산은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는 곳입니다. 세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서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라간다면 변화산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도자되시며 그분의 생애는 우리가 일생을 통해서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주여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 라”(히12:3)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그분의 모습을 마음 속에 간직하십시오. 그분의 성품을 배우십시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배우십시오.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것과 같은 완전한 영광은 아니더라도 그분의 후광은 입게 될 것입니다. 소년 시절부터 큰 바위 얼굴을 마음 속에 그리며 살았던 사람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그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산골 오두막에 사는 어니스트라는 소년은 자기 집 앞 바위산을 바라보며 사는데, 사람들은 그 바위산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같아서 “큰 바위의 얼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전설에 따르면 언젠가는 그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장엄하고 인자한 성자같은 훌륭한 인물이 이 고장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어니스트는 그 예언이 성취되어 그 성자를 만나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그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항상 수양을 하였다. 처음에는 큰 바위의 얼굴을 닮았다는 억만장자가 나타났으나 사실은 인색하기 짝이 없는 장사꾼이었으며 후에 보니 굶어죽었던 것이다. 다음에 대장군이 나타났으나 무자비한 무인에 지나지 않았다. 세번째로 대통령감이 나타났다. 웅변이 뛰어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 같았으나 그 사람도 장엄과 인자를 겸하지 못한 사람에 불과하였다. 네번째로 천하에 제일 가는 천재적인 시인이 나타났다. 시는 장엄하였는데 사람을 만나보니 시만큼 사람이 뛰어나지 못하여 어니스트는 실망을 하였다. 이제 어니스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전도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석양녘에 숲속에서 일생의 신앙과 수양이 높은 정열적인 설교를 할때, 동네 사람들과 천재적인 시인은 바로 한 고장에서 같이 살아온 농부며 전도사인 어니스트 노인이 저 전설에 나오는 큰 바위 얼굴임을 비로서 알았다. 어니스트는 장엄과 자비라는 인간이 가질 최고의 자격을 구비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시인이 외쳤다. “보시오, 보시오, 저 어니스트야말로 바로 큰 바위의 얼굴 그 사람입니다!” 마침내 그 예언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신은 누구의 형상을 닮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오랫동안 마음에 사모해오고 있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한낱 시골소년인 어니스트가 평생을 바쳐 큰 바위의 얼굴을 사모하며 닮고자 했을때 그속에서 예언은 서서히 실현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닮고자 평생 노력하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변화산은 기도로 올라가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올라가신 것은 기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일 주일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는데, 그 질문을 하시기 직전에도 그분은 따로 기도하셨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그분이 기도하신 경우가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깊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에게도 기도가 그처럼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밤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산을 찾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중에 변화되셨습니다. 29절에 “변화되었다”로 번역된 단어는 내부로부터의 어떤 변화가 외부를 바꾸어놓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변화는 내부의 가리워졌던 것이 외부로 드러나와 보여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 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17:24)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죄 있는 사람은 그분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롬3:23). 그분의 영광을 똑바로 바라보고 살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막에서도 하나님의 존전을 상징하는 지성소를 큰 휘장으로 막아서 설령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쳐다보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0절은 이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지적해 줍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희 육 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셔야 했던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해 줍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을 대신하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또한 죄 있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도 자신의 영광을 가려줄 육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가려져 있던 영광이 변화산 위에서 일시적이나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 안에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내주하십니다. 자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 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3-4) 그러나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외부로 나타나게 될 수 있는가 입니다. 변화산에서 보듯이 그 방법은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허물 많은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변화산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40일간 산 위에서 하나님과 대화한 후에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셋째로, 변화산은 주님의 말씀을 힘입어 올라가는 곳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변화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산 위에서 벌어진 광경에 넋이 빠졌습니다. 베드로는 그 신비적인 체험을 계속 가지기 위해서 예수님께 그 자리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세 제자를 산 위로 데려가셔서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은 27절의 말씀을 이루게 하시고 이들이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더욱 굳게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야의 고난이 옳은 것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신비적인 체험에 집착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구름이 그 장면을 곧 가리게 하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결국 변화산 위에는 주님의 영광과 함께 주님의 말씀만이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겪지 못하는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체험에 집착하거나 머무르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상대적으로 격하시키지 마십시오. 그러면 신앙의 성숙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나지(롬10:17) 신비적인 체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도중 가까스로 작은 나뭇 가지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는 천길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하나님, 만약 당신께서 살아 계신다면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믿겠으며, 당신이 살아계신 것을 증거하겠습니다”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인간이란 위경에 처하면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 “아닙니다. 정말 저를 구해주시면 생명 바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 왔다. “네 결심이 대단하구나. 좋다. 너를 구해주마. 그러니 이제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아라.” 이 말을 들은 사나이는 분개하며 말했다.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으라구요 제가 미친 놈인줄 아십니까”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어느덧 변화산 위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과 아들 삼형제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남편의 직업은 선장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바다에서 폭풍우에 휘말려 배와 함께 최후를 마쳤다는 비보가 날아들어왔다. 그리고 나서 세월은 흘렀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렸건만 큰 아들도 남편의 뒤를 이어 배를 탔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또한
둘째 아들도 한사코 말리는 어머니 몰래 선원이 되었다가 그도 역시 얼마 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막내 아들조차 장래 선원이 되겠다고 하였다. 어머니와 모든 친척들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 네 사람이 바다에 미친 까닭을 몰라 이 부인은 이웃에 사는 목사님꼐 그 원인을 알아 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한참 동안 집안을 살펴보던 목사님은 방에 걸려있는 그림과 사진을 당장 떼어내고 대신 다른것을 걸도록 권하였다.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 정도로 시원한 바다 그림과 선장 차림의 멋있는 아버지의 사진이 아들들의 마음을 바다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부인은 바다 그림 대신 산과 농촌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린 그림을 걸었다. 얼마 후 막내 아들은 선원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대신 농부가 되어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 것은 무의식 중에 우리의 마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자기 암시에 빠지고 만다. 텔레비전을 지나칠 정도로 보는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모두 광고 노래인 것들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믿는 자들 역시 우리의 눈이 현 세상에 집중되어 있다면 우리의 영혼 역시 세상의 욕망과 어지러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미래의 그림을 우리들의 마음속에 걸어놓고 매일 바라보게 된다면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그림은 어디에 있는가 화랑에서 살 수 있는가 아니다 미래의 그림은 바로 성경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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