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에 올라가자 (막9:2-8)
본문
요즈음 우리 교회의 유행어는 "변화"입니다. 어떤 분들은 단숨 에 빠르게 달성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차근 차근히 변화를 쌓아 나가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순탄하게 시행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드라마틱하고 요란스럽게 변화를 시행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쨋든 과거의 육체적 모습과 어둠의 모습에서 새 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거룩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니 우리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 리고 변화산에 오르셨습니다.오늘은 우리 교회 여러분 모두를 다 함께 데리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주님과 함께 변화산으 로 등산해 봅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왕위 계 승식의 세자책봉 처럼 아들에게 신적 왕권을 부여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즉위식입니다. 옷이 희어지고 광채가 나는 것은 지상의 존재가 아니라 천상의 존재로 변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세는 두 번째 십계명 돌판을 시내산에서 받을 때, 사십주야를 금식하며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을 내려 올 때는 얼굴에 찬연한 광채가 빛나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할 정 도였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 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출34:29) 모세는 하나님과 만나서 얼굴에 광채가 나게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몸에 밴 것이지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변화 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경험한 자는 변하는 것입니다.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자 모두 서로 옆 사람의 얼굴을 한번 확 인해 보세요. 변화의 광채가 있는지. 천상의 존재로 변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 날개를 단 천사가 된다는 게 아닙니다. 이 때까지 세속적 가치만 따라 살던 내가, 하늘 나라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육체의 쾌 락,눈의 쾌락, 살림살이 자랑에 몰두하는 욕망과 이기심의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변해서 하늘 진리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변화산의 사건을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면, 참 깊 은 진리가 있습니다. 이 희얀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 서는 불필요 했다는 겁니다. 우리 주님은 사실 변화되실 필요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왜요 예수님은 이미 수 많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바람과 파도를 잔 잔케 하면서 이미 충분히 신적인 권위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앉은 뱅이를 일으키면서, 문둥병자를 말끔히 낫게 하시면서 이미 예수님은 충분히 메시야였습니다. 또 수 많은 하늘의 가르침을 통해 이미 하늘의 비밀한 진리를 맡은 자로 이미 충분히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변화산의 사건은 불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이 변화산의 사건을 알리는 것을 금 지 시키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변화산 사건의 진짜 의도는 무엇입니까 왜 이 시점 에서 예수님은 변화산에 올라가셨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제자 교육을 위해서입니다. 핵심 제자들의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대상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였습니다. 예수 자신을 위 해서 불필요한 행동이라면 당연히 제자들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 까 부활 후에 달성될 제자들의 변화를 위해서 이 인상 깊은 변 모사건을 미리 배치하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변화산의 사건은 시점과 내용면에서 다 완벽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타이밍이 딱 맞아 떨어졌다는 겁니다. 타이밍상으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러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기 직전에 변화산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처참한 사형 수로 처형 되기 직전에 바로 신적 하나님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천군과 천사를 동원할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을 가진 신적 광 채를 가진 분과, 채찍과 조롱 끝에 무기력하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가장 나약한 인간과의 극적인 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청각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눈으로는 변형되는 모습과 희고 광채가 나는 옷을 보여주셨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이야기 하는 장면을 보여 주셨습니다. 귀로는 '이는 내 사랑하는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확실히 들려 주셨습니다. 시청 각 교육 만큼 확실한 교육은 없는 것이지요. 듣는 것은 쉬 잊어 버리지만 눈으로 보고 현장을 확인하는 것 만큼 기억에 잘 남는 것은 없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시면 뿔뿔이 흩어질 것 입니다. 어떤 제자들은 예수를 배반하기도 하고 팔아 넘기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소지, 전파, 은닉, 고무, 찬양 하는 것은 모두 죄에 해당할 것입니다. 탄압의 시기가 오고, 제자 들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무기력해지고 의기 소침해 질 것입니다. 과거의 기적이니 메시야니 하늘나라니 하던 것도 다 까맣게 잊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난 직전에 인상 깊은 변화산의 천국 경험을 시킨 것입니다. 성령님강림 이후 이제 제자들의 눈이 뜨여진 이후에는 시청각교육을 통해 경험한 이 변 화산의 사건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빈 무덤과 부활 예수 그리고 변화산의 사건, 이 모두는 한 사건으로 연결되고 한 믿음으로 고백 될 것입니다. 확신에 확신을 더하고 믿음에 믿음 을 더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죽은 예수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담대히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쨋든 또 달리 생각해 보면 변화산 사건을 통해 지상에서 천국 을 경험한 제자들이지만 성령님 강림 이전 까지는 정말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마가 복음서를 보면 편집사적으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첫 번 째 수난예고, 변화산 사건 순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 이후로도 두 번의 수난 예고가 더 있는 것이지요.
두 번의 수 난예고가 더 나온 후에야 예수님은 고난의 현장인 예루살렘 성 으로 입성합니다. 최고의 신이 최고의 저주를 받으며 최고의 고난의 현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천상의 예수님이, 인간의 가장 천 한 저주를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변화는 이런 것입니다. 최고의 자유를 가진 인간, 최고의 능력을 소유한 자가, 섬기고 고난 받 고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깨닫지 못하면 제자들 처럼 눈 뜬 소경이되고 귀 열린 귀머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세 차례의 수난 예고에도, 변화산의 변모에도, 예루살렘의 입성에도, 최후 의 만찬 때에도, 세족식 때도, 십자가에 처형되던 때도, 무덤에 묻힌 뒤에도,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요 성령님으로 인한 자신의 변화가 달성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때 까지 랍비로만 이해했습니다. 지금 변화의 순간 에도 랍비로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5절) 마치 가룟 유다가 한번도 주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고 랍비로만 부른 것처럼, 베드 로도 이 변화의 계시를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래동안 머물고 싶다는 생각으로만 꽉찼을 뿐입니다. 초막을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참으 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구원의 메시야라는 것,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 이것을 먼저 깨달아야 했습니다. 초막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고백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요. 사실 우리는 얼마나 본질보다 현상에 초점을 맞추는지 요. 예수 그리스도 자체 보다 그가 주신 축복에 대해 초점을 맞 추는지요. 창조주 주님이신 그분 자체에 대한 찬미 보다, 그가 베푼 기적과 초능력의 역사 에 대해 관심을 집중 시키는지요.
그 에게서 온 축복과 기적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 자체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고백이 우리를 변 화 시키는 것이지요. 오늘 변화산의 기사를 꼼꼼히 읽어 보면, 변모한 것은 예수님이 지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단지 천국을 본 것에만 머 물렀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천국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말하 자면, 예수님의 변화는 보았지만 자신은 변하지 않은거죠. 언제 진짜 변했습니까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입니다. 성령님 강림 이 후입니다. 기적을 보든 천국을 보든 보는 것, 구경하는 것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의 이갸기, 남의 사건, 남의 천국, 남의 변화, 이것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천국이 소중한 것입니다. 나의 변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님이 바로 나에게 와서 나 에게 구체적인 변화가 시도되야 합니다.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 을 보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모세가 되어야 합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초기 제자들 공동체에 성령님이 불의 혀 같이 내 리고 나서야 이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변화를 나타내 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변화 가 내것이 되었습니다. 바로 나의 변화입니다. 남의 변화가 나의 변화가 되면 혁명적인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3장5절에 '물과 성령님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딱 맞아 떨어 지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 말씀 하실 때에 '성령님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이끌리라'(요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이 변화산의 사건이 제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었을까요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이없이 십자가에 처형되셨을 때도 이 변화산의 사건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무덤에 묻히고, 서슬 퍼런 탄압의 시절 부활 소식이 유언비어 처럼 떠 돌 때에도, 이 변화산의 사건을 눈으로 그려 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 로는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충만히 받고 목 내 놓고 부활을 증 거하러 길거리로 쏟아질 때는, 영화 처럼 이 변화산의 사건 한 장면 한 장면이 다시 돌아 갔을 것입니다. 특히 초막 셋을 짓자 고 성급한 제안을 하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부활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제자들은 성령님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다시 만나고 부터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변화산의 천국 장면이 골수에 각인이 되어 서 더 확실하게 천국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의 눈과 사람의 협박을 두려워하는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유 대인의 법정이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 하고 윽박지르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칠 정 도가 되었습니다. 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젠 우리 변화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변화산에 같이 오르자고 도전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늘 나라의 변화가 나의 변화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하늘 나라를 여러분에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변화된 세계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하늘 나라의 능력과 파워를 경험하고 고난의 현장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변화산의 능력과 파워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접수하러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다구니 쓴 귀 신이 있는 산 아래 마을로! 십자가의 고난이 있는 현장 예루살렘 으로! 갔습니다. 삶의 현장 고난의 현장으로 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성령님강림 사건 이후의 변화를 보세요. "은과 금은 내 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하늘의 능력과 파워를 앉은뱅이 장애자를 섬기는 데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늘의 능력과 파 워를 받아서 복음증거와 봉사 실천에 쓰시기 바랍니다. 변화산 은 '여기가 좋사오니'(5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산 아래로 내려올 때(9절)'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고난 주간입니다. 브라 질의 리우 카니발 처럼 고난절 전에 고기를 먹어치우고 광란의 삼바축제를 벌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고난절 전에 신적 광 채를 가져야 합니다. 고난의 현장으로 가기 전에 이 신적 광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새 사람으로 변화 되고서야 고난과 섬 김의 현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셋째는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하세요. 창조주를 창조주 로 대접하세요. 주인을 주인으로 대접하세요. 주는 그리스도시 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말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생활의 현 장에, 습관과 의식에, 시간과 관심에, 여가와 취미생활에, 미래 와 계획에, 재산과 소유에, 가정과 자녀에게, 주님이 진정 나의 주인임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 소유를 양도하는 겁니다. 핸들 을 양보하는 거예요. 주님을 주님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손님 이나 객이 아닌 진짜 주인으로 대접하세요. 이것이 변화된 삶입니다. 신비한 변화입니다. "마지막 까지도 주님 외면하던 내가, 그렇게 고집하며 버티던 내가, 이젠 나의 모든 것 버리고 내 모든 인생을 주님께 맡겨 버 리게 되었어요. 이제는 모든 게 변화 되었어요. 내 인생의 모든 것 다 바뀌어 버렸어요.이젠 나의 눈과 가슴이 열리고, 벅찬 감사 소망이 한 없이 넘쳐요. 그 신비한 변화, 아직도 이유 알 수 없어, 다만 주님 모신 후에 일어난 것이랍니다." 복음성가의 가사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고 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능력을 누리 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변화산의 사건을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면, 참 깊 은 진리가 있습니다. 이 희얀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 서는 불필요 했다는 겁니다. 우리 주님은 사실 변화되실 필요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왜요 예수님은 이미 수 많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바람과 파도를 잔 잔케 하면서 이미 충분히 신적인 권위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앉은 뱅이를 일으키면서, 문둥병자를 말끔히 낫게 하시면서 이미 예수님은 충분히 메시야였습니다. 또 수 많은 하늘의 가르침을 통해 이미 하늘의 비밀한 진리를 맡은 자로 이미 충분히 확증하셨습니다. 더 이상 변화산의 사건은 불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이 변화산의 사건을 알리는 것을 금 지 시키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변화산 사건의 진짜 의도는 무엇입니까 왜 이 시점 에서 예수님은 변화산에 올라가셨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제자 교육을 위해서입니다. 핵심 제자들의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대상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였습니다. 예수 자신을 위 해서 불필요한 행동이라면 당연히 제자들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 까 부활 후에 달성될 제자들의 변화를 위해서 이 인상 깊은 변 모사건을 미리 배치하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변화산의 사건은 시점과 내용면에서 다 완벽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타이밍이 딱 맞아 떨어졌다는 겁니다. 타이밍상으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러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기 직전에 변화산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처참한 사형 수로 처형 되기 직전에 바로 신적 하나님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천군과 천사를 동원할 수 있는 창조의 능력을 가진 신적 광 채를 가진 분과, 채찍과 조롱 끝에 무기력하고 처참하게 죽어가는 가장 나약한 인간과의 극적인 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청각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눈으로는 변형되는 모습과 희고 광채가 나는 옷을 보여주셨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이야기 하는 장면을 보여 주셨습니다. 귀로는 '이는 내 사랑하는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확실히 들려 주셨습니다. 시청 각 교육 만큼 확실한 교육은 없는 것이지요. 듣는 것은 쉬 잊어 버리지만 눈으로 보고 현장을 확인하는 것 만큼 기억에 잘 남는 것은 없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시면 뿔뿔이 흩어질 것 입니다. 어떤 제자들은 예수를 배반하기도 하고 팔아 넘기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소지, 전파, 은닉, 고무, 찬양 하는 것은 모두 죄에 해당할 것입니다. 탄압의 시기가 오고, 제자 들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무기력해지고 의기 소침해 질 것입니다. 과거의 기적이니 메시야니 하늘나라니 하던 것도 다 까맣게 잊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난 직전에 인상 깊은 변화산의 천국 경험을 시킨 것입니다. 성령님강림 이후 이제 제자들의 눈이 뜨여진 이후에는 시청각교육을 통해 경험한 이 변 화산의 사건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빈 무덤과 부활 예수 그리고 변화산의 사건, 이 모두는 한 사건으로 연결되고 한 믿음으로 고백 될 것입니다. 확신에 확신을 더하고 믿음에 믿음 을 더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죽은 예수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담대히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쨋든 또 달리 생각해 보면 변화산 사건을 통해 지상에서 천국 을 경험한 제자들이지만 성령님 강림 이전 까지는 정말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마가 복음서를 보면 편집사적으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첫 번 째 수난예고, 변화산 사건 순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 이후로도 두 번의 수난 예고가 더 있는 것이지요.
두 번의 수 난예고가 더 나온 후에야 예수님은 고난의 현장인 예루살렘 성 으로 입성합니다. 최고의 신이 최고의 저주를 받으며 최고의 고난의 현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천상의 예수님이, 인간의 가장 천 한 저주를 받으러 가는 것입니다. 변화는 이런 것입니다. 최고의 자유를 가진 인간, 최고의 능력을 소유한 자가, 섬기고 고난 받 고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깨닫지 못하면 제자들 처럼 눈 뜬 소경이되고 귀 열린 귀머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세 차례의 수난 예고에도, 변화산의 변모에도, 예루살렘의 입성에도, 최후 의 만찬 때에도, 세족식 때도, 십자가에 처형되던 때도, 무덤에 묻힌 뒤에도,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요 성령님으로 인한 자신의 변화가 달성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때 까지 랍비로만 이해했습니다. 지금 변화의 순간 에도 랍비로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5절) 마치 가룟 유다가 한번도 주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고 랍비로만 부른 것처럼, 베드 로도 이 변화의 계시를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래동안 머물고 싶다는 생각으로만 꽉찼을 뿐입니다. 초막을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참으 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구원의 메시야라는 것,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 이것을 먼저 깨달아야 했습니다. 초막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고백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요. 사실 우리는 얼마나 본질보다 현상에 초점을 맞추는지 요. 예수 그리스도 자체 보다 그가 주신 축복에 대해 초점을 맞 추는지요. 창조주 주님이신 그분 자체에 대한 찬미 보다, 그가 베푼 기적과 초능력의 역사 에 대해 관심을 집중 시키는지요.
그 에게서 온 축복과 기적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 자체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고백이 우리를 변 화 시키는 것이지요. 오늘 변화산의 기사를 꼼꼼히 읽어 보면, 변모한 것은 예수님이 지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단지 천국을 본 것에만 머 물렀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천국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말하 자면, 예수님의 변화는 보았지만 자신은 변하지 않은거죠. 언제 진짜 변했습니까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입니다. 성령님 강림 이 후입니다. 기적을 보든 천국을 보든 보는 것, 구경하는 것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의 이갸기, 남의 사건, 남의 천국, 남의 변화, 이것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천국이 소중한 것입니다. 나의 변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님이 바로 나에게 와서 나 에게 구체적인 변화가 시도되야 합니다.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 을 보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모세가 되어야 합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초기 제자들 공동체에 성령님이 불의 혀 같이 내 리고 나서야 이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변화를 나타내 보일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변화 가 내것이 되었습니다. 바로 나의 변화입니다. 남의 변화가 나의 변화가 되면 혁명적인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3장5절에 '물과 성령님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딱 맞아 떨어 지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 말씀 하실 때에 '성령님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이끌리라'(요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이 변화산의 사건이 제자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었을까요 나중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이없이 십자가에 처형되셨을 때도 이 변화산의 사건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무덤에 묻히고, 서슬 퍼런 탄압의 시절 부활 소식이 유언비어 처럼 떠 돌 때에도, 이 변화산의 사건을 눈으로 그려 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 로는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충만히 받고 목 내 놓고 부활을 증 거하러 길거리로 쏟아질 때는, 영화 처럼 이 변화산의 사건 한 장면 한 장면이 다시 돌아 갔을 것입니다. 특히 초막 셋을 짓자 고 성급한 제안을 하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 베드로가 이제는 예수부활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제자들은 성령님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다시 만나고 부터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변화산의 천국 장면이 골수에 각인이 되어 서 더 확실하게 천국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의 눈과 사람의 협박을 두려워하는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유 대인의 법정이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 하고 윽박지르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칠 정 도가 되었습니다. 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젠 우리 변화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변화산에 같이 오르자고 도전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늘 나라의 변화가 나의 변화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하늘 나라를 여러분에게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변화된 세계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하늘 나라의 능력과 파워를 경험하고 고난의 현장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변화산의 능력과 파워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접수하러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다구니 쓴 귀 신이 있는 산 아래 마을로! 십자가의 고난이 있는 현장 예루살렘 으로! 갔습니다. 삶의 현장 고난의 현장으로 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성령님강림 사건 이후의 변화를 보세요. "은과 금은 내 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하늘의 능력과 파워를 앉은뱅이 장애자를 섬기는 데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늘의 능력과 파 워를 받아서 복음증거와 봉사 실천에 쓰시기 바랍니다. 변화산 은 '여기가 좋사오니'(5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산 아래로 내려올 때(9절)'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고난 주간입니다. 브라 질의 리우 카니발 처럼 고난절 전에 고기를 먹어치우고 광란의 삼바축제를 벌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고난절 전에 신적 광 채를 가져야 합니다. 고난의 현장으로 가기 전에 이 신적 광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새 사람으로 변화 되고서야 고난과 섬 김의 현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셋째는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하세요. 창조주를 창조주 로 대접하세요. 주인을 주인으로 대접하세요. 주는 그리스도시 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말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생활의 현 장에, 습관과 의식에, 시간과 관심에, 여가와 취미생활에, 미래 와 계획에, 재산과 소유에, 가정과 자녀에게, 주님이 진정 나의 주인임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 소유를 양도하는 겁니다. 핸들 을 양보하는 거예요. 주님을 주님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손님 이나 객이 아닌 진짜 주인으로 대접하세요. 이것이 변화된 삶입니다. 신비한 변화입니다. "마지막 까지도 주님 외면하던 내가, 그렇게 고집하며 버티던 내가, 이젠 나의 모든 것 버리고 내 모든 인생을 주님께 맡겨 버 리게 되었어요. 이제는 모든 게 변화 되었어요. 내 인생의 모든 것 다 바뀌어 버렸어요.이젠 나의 눈과 가슴이 열리고, 벅찬 감사 소망이 한 없이 넘쳐요. 그 신비한 변화, 아직도 이유 알 수 없어, 다만 주님 모신 후에 일어난 것이랍니다." 복음성가의 가사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고 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능력을 누리 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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