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허물고 들어오시는 그리스도 (창29:10-22,요4:3-26)
본문
오늘 설교 제목을 잘못 보면 그리스도를 남의 집 담을 허물고 집안 으로 쳐들어가는 강도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너무 많은 벽을 쌓아 하나가 되어야 할 하나님의 세계를 모두 조각을 내어버린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제목을 보면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쌓아올린 이 벽을 허물지 않고서는 싸움이 그치 지 않을 것이고, 진정한 평화가 깃들일 수 없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벽을 허물고 하나님의 세계를 하나로 만드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로 통일된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바로 사람들 이 높이 쌓아올린 벽을 허물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 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셔야 할 하나님의 독생자가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신 사건 자체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는 벽을 허물고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우리 죄 때문에 생긴 높은 벽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막혀 버렸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 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도 아픔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벽을 허물고 우리 인간 속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하여 독생자 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영접할 때 하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부어지면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구원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나 혼자만 체험하는 사건이 아니라 이웃과 피조세계 와 하나님과 함께 만나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안에 들어 오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쌓아 올린 벽과 이웃을 향하여 쌓아올린 벽, 그리고 피조세계를 향하여 쌓아올린 벽 모두를 허무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만나며, 이웃과 만나며, 세계와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구원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개인적 인 사건에 머물지 않고 우주적인 사건과 연결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 자신을 개방하는 사건이며, 동 시에 이웃을 향하여, 세계를 향하여 나 자신을 활짝 열어 놓는 사건입니다. 민족의 장벽을 허무시는 그리스도 요한복음 4장에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와 그로 말미암아 일어난 수가성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쌓아 놓은 벽을 허물고 들 어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유다 지방에서 사역하시다가 다시금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여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보통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베뢰아 지방으로 우회하여 갑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들 사이에 쌓아 놓은 장벽은 역사적으로 오래 되었고, 좀처럼 허물 수 없는 두터운 벽이었습니다.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그들과 섞여 살면서 혼혈족이 된 이후 유대인들은 그들을 더러운 백성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 인들이 예루살렘 재건 당시 사마리아인들의 협력과 동참을 거절하자 그들은 그리심 산에다가 성전을 따로 지었으며, 소위 사마리아 오경을 만들어 그들의 정경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의 장벽은 점점 더 높아졌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상종하면 종교적 으로 더러움을 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남쪽 유다 땅에서 북쪽 갈 릴리 지역으로 가려할 때 중간에 끼어 있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우회하여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당시의 통념(通念)을 깨고 굳이 사마리아 지 역을 통과하여 가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사마리 아인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행하신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혈통이나 신앙이나 전통이나 관습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무조건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 사이에 높은 벽을 쌓아놓고 대립하며 싸우는 것을 그치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명 가운데 하나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에서 이 사건을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그는 두말 않고 판문점을 거쳐 평양에 가실 것입니다. 이념이나 사상에 의한 정치적 군사적 갈등에 개의치 아니하시고 무조건 가시므로 남북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허물고 둘이 하나되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남쪽을 편들지도 북쪽을 편들지도 않으 실 것입니다. 그분은 양쪽이 다함께 그 벽을 허물고 거기서 벗어날 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의 교회가 이런 그리스도의 뜻과 그 삶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공 논리에 사로 잡혀 무조건 북한을 욕하고 미워하던 자세에서 벗어 나 정치적 이념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는 사랑으로 서로 가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 통념의 장벽을 허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이런 만남은 참으로 어색한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유대 남자와 사마리아 여 자는 서로 얼굴을 마주 할 수 없는 높은 장벽으로 가려진 관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를 의식하고 처음에 무척 어색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전통적 관념과 상관없이 자연스레 그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더욱 놀랐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예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여인과 만나셨고, 대화를 나누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 한 남자가 아닌 만민 의 구주 되시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각 기 자기 성을 쌓고 문을 닫아걸고 살아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 든 다양한 문들을 여실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통념화 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거침없이 뛰어넘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 도 그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는 자유함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그녀는 예수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런 통쾌함은 일 찍이 맛본 적이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연스럽게 자기도 통념을 깨고 유대인 남자와 대담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큰 벽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저편에서 먼저 벽을 허물고 다가오자 자신도 기쁨으로 그 벽이 사라진 자유를 느끼며 대화에 나섰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여자에 대한 멸시와 천대는 오늘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천한 자리에 있는 여인을 대화의 상대로 그 격을 높여주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남녀가 평등하다는 진리를 넘어 남녀가 다함께 하나님의 대화의 상대임을 일깨워 주신 놀 라운 사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통념화 된 관습과 전통에 얽매어 살고 있습니다. 남녀의 관계가 그렇고, 지역간의 갈등이 그렇고, 빈부의 차이에 대한 갈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양극화된 대립과 갈등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가 다르지만 대립과 갈등이 아닌 보 완과 협력 관계로 만드신 창조주의 뜻을 우리가 올바로 헤아리지 못하 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의 주역 사상에서 말하는 음양관계는 상호 반발하면서도 밀접 한 관계를 가지면서 태극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극 문양을 보 면 청홍이 일직선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깊숙이 들어가 있는 곡선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서양의 이원론(二元論)은 완전히 대립적인 관계를 나타내지만, 동양의 음양사상은 대립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마침내 태극으로 통일되는 일원론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한 성으로 통일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각기 그 특성을 인정하시면서 조화와 협력을 이루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남녀 관계를 비롯한 모든 이원론적 대립과 갈등 관계를 보완과 협력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획기적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통념을 깨시고 창조주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깨우 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특히 사회적 통념에 의해 억눌 린 약자들의 굴레를 깨트리시고 그 억압에서 그들을 풀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굴레에 의해 억압당하는 약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굴레를 깨트리고 그들을 풀어 자유하게 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를 억 압하던 모든 관습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 을 올바로 이해하여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자유롭게 행동하고 창조적 인 삶을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야곱은 우리의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인정해 주시고 그에게 아브라함에 게 주셨던 약속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 벧엘의 꿈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의 부족함에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서 자기 스스로 자기를 얽어매었던 굴레에서 자유할 수 있었 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들이 스스로의 벽안에서 움츠려 있을 때 그 벽을 허물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며, 우리를 들어 올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조적 장벽을 허무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 여인이 가지고 있던 생수 에 관한 관념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은사를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 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며,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물을 길러 10㎞ 이상 걸어온 여인에게 이 말은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그 우물 깊은 곳에서 막 솟아난 생 수를 준다는 말씀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이 물을 마 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 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물에서 긷는 생수와 구별된 영적인 생수가 있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그 생수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처음에 물을 달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었지만, 이제 와서는 주객이 바뀌어 여인이 예수님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대단히 종교적 심성이 깊은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그는 단순한 샘물에 관한 관심에서 대화를 시작하였으나 대화가 진전되면서 그 여인은 그 이상의 어떤 신비한 샘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즉각적으로 예수님에게 그 생수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이런 관심을 한층 더 끌어올리시기 위하여 새 로운 국면으로 대화를 발전시키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자 그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면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의 남편도 사실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므로 그녀의 삶을 알고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 예언자라고 판단한 여인은 스스로 종교적 관심사에 대하여 화두(話頭)를 꺼냈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 렘에서도 아닌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 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 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아버지가 되시기에 모든 자녀들이 그에게 예 배를 드려야하기 때문에, 장소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 살렘이나 그리심 산이 문제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림이 중 요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신 것 입니다. 이 대화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낱 보잘 것 없는 여인, 이혼을 밥먹듯 하며 살아온 여인, 별로 기대할 것 없는 따분한 삶을 살아가던 소망 없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녀를 짓누르던 장벽이 허물어지자 그 속에서 잠자던 신앙이 깨어 일어나고 단번에 기대하였던 메시야를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갖는 여 자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물질문명에 길들여진 생각 을 바꾸어 영의 세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에 의해 높이 쌓여진 우리의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우리 속 에 잠든 영을 불러 깨우시며, 우리로 물질 세계를 넘어 넓게 펼쳐진 영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되지 못하 고 나뉘어진 교회들의 높은 담을 허무시고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신앙 전통과 형식을 절대시하면서 다른 신앙 전통은 배타 적으로 무시하는 교회들의 높은 벽을 그리스도께서 허무시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므로 하나될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 안에 영접하십시 오.
그러면 그가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 통념화된 관습과 생각, 그리고 이념과 교리의 벽을 허물어 여러분을 자유하게 하실 것 입니다. 그런 벽에 가려져 전혀 보지 못하였던 새로운 영의 세계를 보 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 새로운 삶 을 누리게 될 것이며, 이웃과 새롭게 만나고 세계와 하나되는 경험을 갖게 되는 통전적(通全的)인 구원을 맛보게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나약함과 죄악에 매이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우리의 벽을 허물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 며, 그의 친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벽 뒤로 물러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피하지 마십시오. 그가 여러분 안에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모든 막힌 벽을 허무시도록 그를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전에 맛보지 못한 참 자유를 맛보며, 삶의 기쁨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벽을 무너뜨림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세계를 향하여 활짝 자신을 열어놓아 영의 세계를 호 흡하면서 새로운 역사에 동참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안에 들어 오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쌓아 올린 벽과 이웃을 향하여 쌓아올린 벽, 그리고 피조세계를 향하여 쌓아올린 벽 모두를 허무시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만나며, 이웃과 만나며, 세계와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것이 바로 구원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개인적 인 사건에 머물지 않고 우주적인 사건과 연결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 자신을 개방하는 사건이며, 동 시에 이웃을 향하여, 세계를 향하여 나 자신을 활짝 열어 놓는 사건입니다. 민족의 장벽을 허무시는 그리스도 요한복음 4장에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와 그로 말미암아 일어난 수가성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쌓아 놓은 벽을 허물고 들 어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유다 지방에서 사역하시다가 다시금 갈릴리로 가시고자 하여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보통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베뢰아 지방으로 우회하여 갑니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들 사이에 쌓아 놓은 장벽은 역사적으로 오래 되었고, 좀처럼 허물 수 없는 두터운 벽이었습니다.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그들과 섞여 살면서 혼혈족이 된 이후 유대인들은 그들을 더러운 백성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 인들이 예루살렘 재건 당시 사마리아인들의 협력과 동참을 거절하자 그들은 그리심 산에다가 성전을 따로 지었으며, 소위 사마리아 오경을 만들어 그들의 정경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의 장벽은 점점 더 높아졌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상종하면 종교적 으로 더러움을 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남쪽 유다 땅에서 북쪽 갈 릴리 지역으로 가려할 때 중간에 끼어 있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우회하여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당시의 통념(通念)을 깨고 굳이 사마리아 지 역을 통과하여 가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사마리 아인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행하신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혈통이나 신앙이나 전통이나 관습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무조건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 사이에 높은 벽을 쌓아놓고 대립하며 싸우는 것을 그치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명 가운데 하나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에서 이 사건을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그는 두말 않고 판문점을 거쳐 평양에 가실 것입니다. 이념이나 사상에 의한 정치적 군사적 갈등에 개의치 아니하시고 무조건 가시므로 남북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허물고 둘이 하나되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남쪽을 편들지도 북쪽을 편들지도 않으 실 것입니다. 그분은 양쪽이 다함께 그 벽을 허물고 거기서 벗어날 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의 교회가 이런 그리스도의 뜻과 그 삶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공 논리에 사로 잡혀 무조건 북한을 욕하고 미워하던 자세에서 벗어 나 정치적 이념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는 사랑으로 서로 가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 통념의 장벽을 허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이런 만남은 참으로 어색한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유대 남자와 사마리아 여 자는 서로 얼굴을 마주 할 수 없는 높은 장벽으로 가려진 관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를 의식하고 처음에 무척 어색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전통적 관념과 상관없이 자연스레 그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더욱 놀랐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예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여인과 만나셨고, 대화를 나누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 한 남자가 아닌 만민 의 구주 되시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각 기 자기 성을 쌓고 문을 닫아걸고 살아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 든 다양한 문들을 여실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통념화 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거침없이 뛰어넘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 도 그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는 자유함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그녀는 예수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런 통쾌함은 일 찍이 맛본 적이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연스럽게 자기도 통념을 깨고 유대인 남자와 대담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큰 벽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저편에서 먼저 벽을 허물고 다가오자 자신도 기쁨으로 그 벽이 사라진 자유를 느끼며 대화에 나섰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여자에 대한 멸시와 천대는 오늘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천한 자리에 있는 여인을 대화의 상대로 그 격을 높여주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남녀가 평등하다는 진리를 넘어 남녀가 다함께 하나님의 대화의 상대임을 일깨워 주신 놀 라운 사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통념화 된 관습과 전통에 얽매어 살고 있습니다. 남녀의 관계가 그렇고, 지역간의 갈등이 그렇고, 빈부의 차이에 대한 갈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양극화된 대립과 갈등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가 다르지만 대립과 갈등이 아닌 보 완과 협력 관계로 만드신 창조주의 뜻을 우리가 올바로 헤아리지 못하 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의 주역 사상에서 말하는 음양관계는 상호 반발하면서도 밀접 한 관계를 가지면서 태극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극 문양을 보 면 청홍이 일직선으로 나뉘어져 있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깊숙이 들어가 있는 곡선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서양의 이원론(二元論)은 완전히 대립적인 관계를 나타내지만, 동양의 음양사상은 대립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마침내 태극으로 통일되는 일원론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한 성으로 통일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각기 그 특성을 인정하시면서 조화와 협력을 이루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남녀 관계를 비롯한 모든 이원론적 대립과 갈등 관계를 보완과 협력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획기적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통념을 깨시고 창조주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깨우 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특히 사회적 통념에 의해 억눌 린 약자들의 굴레를 깨트리시고 그 억압에서 그들을 풀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굴레에 의해 억압당하는 약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굴레를 깨트리고 그들을 풀어 자유하게 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를 억 압하던 모든 관습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 을 올바로 이해하여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자유롭게 행동하고 창조적 인 삶을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야곱은 우리의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인정해 주시고 그에게 아브라함에 게 주셨던 약속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 벧엘의 꿈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의 부족함에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서 자기 스스로 자기를 얽어매었던 굴레에서 자유할 수 있었 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들이 스스로의 벽안에서 움츠려 있을 때 그 벽을 허물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며, 우리를 들어 올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조적 장벽을 허무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 여인이 가지고 있던 생수 에 관한 관념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은사를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 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며,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물을 길러 10㎞ 이상 걸어온 여인에게 이 말은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문자 그대로 그 우물 깊은 곳에서 막 솟아난 생 수를 준다는 말씀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이 물을 마 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 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물에서 긷는 생수와 구별된 영적인 생수가 있음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그 생수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처음에 물을 달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었지만, 이제 와서는 주객이 바뀌어 여인이 예수님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대단히 종교적 심성이 깊은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그는 단순한 샘물에 관한 관심에서 대화를 시작하였으나 대화가 진전되면서 그 여인은 그 이상의 어떤 신비한 샘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즉각적으로 예수님에게 그 생수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이런 관심을 한층 더 끌어올리시기 위하여 새 로운 국면으로 대화를 발전시키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자 그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면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의 남편도 사실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므로 그녀의 삶을 알고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 예언자라고 판단한 여인은 스스로 종교적 관심사에 대하여 화두(話頭)를 꺼냈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 렘에서도 아닌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 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 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아버지가 되시기에 모든 자녀들이 그에게 예 배를 드려야하기 때문에, 장소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 살렘이나 그리심 산이 문제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림이 중 요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신 것 입니다. 이 대화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낱 보잘 것 없는 여인, 이혼을 밥먹듯 하며 살아온 여인, 별로 기대할 것 없는 따분한 삶을 살아가던 소망 없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녀를 짓누르던 장벽이 허물어지자 그 속에서 잠자던 신앙이 깨어 일어나고 단번에 기대하였던 메시야를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갖는 여 자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물질문명에 길들여진 생각 을 바꾸어 영의 세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에 의해 높이 쌓여진 우리의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우리 속 에 잠든 영을 불러 깨우시며, 우리로 물질 세계를 넘어 넓게 펼쳐진 영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되지 못하 고 나뉘어진 교회들의 높은 담을 허무시고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신앙 전통과 형식을 절대시하면서 다른 신앙 전통은 배타 적으로 무시하는 교회들의 높은 벽을 그리스도께서 허무시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므로 하나될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 안에 영접하십시 오.
그러면 그가 여러분이 가지고 있던 고정 관념, 통념화된 관습과 생각, 그리고 이념과 교리의 벽을 허물어 여러분을 자유하게 하실 것 입니다. 그런 벽에 가려져 전혀 보지 못하였던 새로운 영의 세계를 보 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 새로운 삶 을 누리게 될 것이며, 이웃과 새롭게 만나고 세계와 하나되는 경험을 갖게 되는 통전적(通全的)인 구원을 맛보게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나약함과 죄악에 매이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우리의 벽을 허물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 며, 그의 친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벽 뒤로 물러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피하지 마십시오. 그가 여러분 안에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모든 막힌 벽을 허무시도록 그를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전에 맛보지 못한 참 자유를 맛보며, 삶의 기쁨을 느끼실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벽을 무너뜨림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세계를 향하여 활짝 자신을 열어놓아 영의 세계를 호 흡하면서 새로운 역사에 동참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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