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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역된 제사 직분 (히7:11-19)

본문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세우신 인간 제사장은 일정한 기간 동안에 제사드리는 일을 하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가교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앞으로 있을 일을 예표하는 모형이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이러한 모든 제도는 다 없어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온전한 제사만이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아론의 제사장 직분과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을 비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사장 사역이 훨씬더 월등하다는 것을 수차례에 걸쳐서 비교하였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이제 그 비교를 뛰어 넘어서 지금까지 그들이 지켜오던 모든 것이 다 폐하여졌음을 선언하고 있다. 복음은 율법의 보충이 아닌 변역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비교했으나 이것은 비교적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직분의 보충이 아닌 변역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레위 체계와 독톡하게 연관을 맺은 모든 것들은 이제 효력도 없고 소용도 없게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논박 중에서 마무리 작업을 하는 것과 같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그들의 제사가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제사 제도의 폐지는 율법의 폐지를 말하고 율법의 폐지는 신정 행정 제도의 변역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마 5:17-20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한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를 낳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전혀 관계가 없는 단절된 폐지가 아닌 몽학선생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후에 폐지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제는 율법이나 할례를 계속 고집하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변역되었으니 변역된 것을 따르라고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더 나은 소망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1. 제사 직분의 변역의 필요성 복음은 율법의 보충이 아닌 전적인 변역이라고 했다. 변역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전하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온전하다는 것은 어떤 일을 생각한대로 끝까지 마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체험보다 관계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주관적이 것보다 객관적인 것이다. 법정적이고 사활적 국면의 단어다. 교리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만족하고 최종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확보한 하나님의 은총과 복락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불변하는 지위다. 온전함에 속하는 일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영혼과 양심에서의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다. 전자에 속한 것으로는 의, 평화, 빛, 자유, 축복에 대한 기대, 기쁨, 확신등이 있으며 후자에 속한 것으로는 영적 예배가 있다. 온전함을 이루는 것은 교회의 성직의 목적이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일시적으로 유용할른지는 몰라도 영원히 사제직을 독점할 수 없다.
그런데 레위 계통의 제사 제도는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다. 레위 계통의 일은 어느 부분을 보충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들이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온전함을 이룰 수 없다. 울어도 못하고, 참아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은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다. 교회의 상태를 온전케 못하고, 예배하는 것을 온전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완전한 언약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그림자요 상징이었을 뿐이다. 온전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헤의 영광을 나타낼 수가 없다. 다윗과 솔로몬 당시에 최고의 영광에 달하기는 했으나 그것도 온전함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변역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2. 전엣 것의 연약성과 무익성(18,19절) 율법이 무가치하다는 말은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무가치하단 말인가 하지만 이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율법을 받은 사람의 연약성과 더 관계가 된다. 사람들은 율법의 높은 차원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는가 그 이유는 율법에 비추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이며 죄악된 인간인지를 보여주며 아울러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전엣것은 사람의 죄의 오염을 척량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다. 율법에 비추어서 마땅히 죽어야 할 자신을 발견하게 된 자가 절대자 하나님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은 약속하신 이가 올 때가지 주어진 것이다(갈3:19).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완전히 폐하여졌다. 율법의 모든 요구의 만족과 응답과 완성이 이루어지므로 폐지되어졌다. 복음 전파로 폐지되어졌다. 이것은 성전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하기도 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성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3. 제사 직분의 변역 제사 직분의 변역은 필연적으로 율법의 폐지를 가져오게 되었다. 모세의 율법은 제사 제도의 변역과 함께 없어져야 한다. 제사 제도가 바뀌었다는 것은 율법이 바뀌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아론의 제사 직분으로는 교회가 필요로 하고 완전해 질 수 있는 알맞은 조건을 이루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변역되어야만 했다. 변역되었다는 것은 옛 제도가 변형되서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워졌다는 것이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다. 전적으로 새로워진 것이다. 전엣 것이 무가치하다고 해서 전혀 관계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영구성을 가진 것이 못되고 단지 몽학선생과 같아서 참 스승이 오면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 신 32:21과 롬 10:19에서 볼 수 있는 이방 사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신다는 것은 율법의 폐지를 의미한다. 예레미야 31장을 보면 새언약의 말씀이 나온다. 전적으로 새로워진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새로워져야 한다. 성격도 새로워져야 한다.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졌던 오한은 사랑의 사도로 변신되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옛 것을 폐지하고 새로운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의 제사를 드리셨다.
그러므로 율법적 제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히 드리는 예배를 거절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사역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사 제도 대신에 성만찬과 세례의 제도를 주셨다. 복음의 전파로 제사제도와 율법의 규례들은 폐지되었다.
2. 별다른 제사장 이제 변역된 제사 직분을 위해서 별다른 제사장이 필요했다. 별다르다는 말은 ‘알로스’가 아닌 ‘헤테로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부름과 정하심에 따라 세움을 입고 제사장 직분을 행할 자는 레위 지파나 아론의 반차가 아닌 다른 줄기나 반차에서 나온 사람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말이다.
1. 아론의 반차가 아니다. 제사 일은 레위 지파의 특권이었다(출 40:12-16). 이것을 어기면 즉시 심판을 당했다(대하 26:18-21). 웃시야 왕은 이 규례를 어기다가 문둥병에 걸려서 평생을 별궁에서 지내면서 살아야 했다. 누가 뭐라해도 제사 제도는 아론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이었다.
그런데 예외 규정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반차가 아닌 다른 제사장을 주셨다. 이것은 옛 반차에 속한 제사 직분이 하나님에 의해서 폐지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아론의 반차는 짊어지기 힘든 멍에였다. 율법에 의하면 레위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142개의 육체적 흠이나 오점이 없어야 했다고 한다. 또 직분을 감당할 때는 물로써 몸을 씻고 속옷을 입고 띠를 띠고 겉옷을 입으며 그 위에 에봇을 메고 흉배를 붙이고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기름을 부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육체적인 것으로 영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육체를 깨끗하게 하는 그 이상을 못했다. 철저히 육적인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짐은 쉽고 가벼움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통치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 변역된 제사 직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누구에게 돌렸단 말인가
2. 멜기세덱의 반차 하나님은 더 이상 레위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게 하셨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지금까지는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했다. 특히 고라는 레위 지파에 속하였지만 그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레위 반차가 아닌 곳에서 나와서 영원히 제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이다. 시 110:4에 보면 그는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영원한 제사장이 된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세우심을 입은 것이지 아론의 반차를 좇아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른 제사장이시다. 변역된 제사장이시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계속되는 것은 그의 제사 직분의 영원한 계속 효과를 나타낸다. 그는 살아서 지금도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새로운 아론 반차의 제사장을 두는 것은 그의 영원하심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 되므로 교회는 완전을 향하여 진보하게 된다. 이제는 레위 반차를 좇는 율법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주님은 레위의 반차가 아닌 유다의 반열에 속해 있었다(창 47:8-10, 마 1장 ). 메시야는 유다 지파와 다윗의 가계에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레위 지파 제사장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구적 직무로서 이제는 더 이상 레위 지파의 제사장의 존속이 필요 없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이제 아론직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진지하고도 강력하게 논증되어져야 한다.
3. 변역된 제사 직분의 특성 이제는 아론의 반차가 아닌 뛰어난 별다른 제사장 곧 멜기세덱의 직분을 가진자가 필요했으며 모형으로 주어진 제사장에 대한 원형이 필요했다. 레위인 계통의 제사장이 아닌 죄를 없애고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필요했다. 하지만 제사 제도의 변천에 따라 백성들이 겪는 믿음의 시련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1500년 동안의 전통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복음이 전파될 때에 모세의 제도의 중지와 취소를 가르치고 있었기에 분개했다. 스데반을 죽일 때도 그 규례를 고치겠다는 구실로 죽였던 유대인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유대인 중의 일부는 회심한 후에도 여전히 모세의 율법이 유효하다는 신념을 고집하였던 것이다. 충현교회의 40년 스타일이 조금만 바뀌어도 이상한데 1500년의 뿌리가 흔들리니 어찌 쉽게 적용이 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전할 때 율법적 요소를 그대로 지니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직접 폐하여지고 다시 제정된 것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므로 사도는 변역된 제사 제도를 전파해야만 했다. 또한 이스라엘 중에는 다른 성질의 제사 제도에 만족하는 오류를 범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 때 성령님께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기록하므로 후에 일어날 별다른 제사의 예표를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길들여진 습관을 돌이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우리 나라도 유교적 전통 때문에 예수를 믿음 다음에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유교적 관습들이 있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그대로 갖고 있으라고 할 수는 없다. 지난 습관을 포기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전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 나와야 구원을 얻는데 그리스도께 나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반대되는 것을 떠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다.
첫째로 의를 이루셨다. 죄로 힘이 없는 것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의가 필요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고후 5:21).
둘째로 평화를 이루셨다. 하나님과 화목을 온전히 이루셨으며 평강을 이루셨다(롬 5:10, 사 9:6).
셋째로 영적인 빛을 비주어주셨다(요일 2:8).
넷째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도록 하셨다(히10:19-22). 구약 시대에는 지성소에 아무나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제는 누구나 다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다섯째로 장래의 상태를 열어 보여주셨다. 썩지 않을 것으로 만들어주셨다(딤후 1:10). 여섯째로 기쁨을 주시기에 온전하셨다(롬 14:17, 벧전 1:8). 일곱째로 주 안에서 자랑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고전 1:29-31). 이 온전함에 참여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것이 없이 외양적 형식과 의식으로 영광과 만족을 얻으려는 시도는 그리스도의 제사 직분에서 보다 레위의 제사 직분에서 찾으려고 하는 의식주의적 죄악이다. 그리스도야 말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분이다(롬 10:4). 이것은 분명 변역되어진 제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변형되어진 제사 직분에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다.
1.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않았다. 아론의 제사 직무는 육체를 좇아 되는 것이었다. 짐승을 바치는 것은 육체적인 것이었다. 직분도 혈통으로 계승되었다. 섬기는 것도 육체적 정결을 중점으로 하였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의 반차가 아니므로 이것을 좇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다.
2.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았다. 육체를 따라 된 것이 아니기에 영원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 직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직무로 내세워 드러내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명을 따라 행하셨다. 피로 생명을 구속하셨다. 자기 피로 자기 교회를 구속하셨다(행 20:28).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항상 살아 있는 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참 생명이 있다. 오직 주 안에만 생명이 있을 뿐이요 영생이 있다.
3.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는다. 옛날 제사장 제도는 50세가 지나면 은퇴를 해야만 했다. 지금 목사는 70세면 은퇴한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 할찌라도 은퇴를 해야 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 계시며 그 곳에서 제사장 사역을 하고 계시므로 은퇴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4. 더 좋은 소망이 되었다. 소망은 목적하는 것 그 자체를 말한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율법 아래에 속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율법이 부적합할 때 하나님은 온전케 하시는 것을 도입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어주셨다. 이제부터 우리는 복된 소망을 가져야 한다. 복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딛 2:3). 멀리 있던 것이 이제는 가까와졌다. 이 소망이 실현되고 성취된다는 점에서 더 좋은 소망이 된다. 인간의 범죄를 하나님은 단순간에 멸하고 다시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가 아닌 6일 동안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가르치고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인식하도록 역사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점차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전에 여러 세기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기다리게 하신 것이라고 J. Owen은 말했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자를 즉시에서 처벌하신다면 이 세상에 살아 남아 있을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소망 가운데 기다리도록 하신 것이다.
5.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였다. 전에는 레위인들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하였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동일하게 나갈 수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갈 동등한 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그 길을 열어 놓으셨다. 요 14:1-3의 말씀과 같이 아버지의 임재에 들어가게 되었다. 롬 5:2의 말씀과 같이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가게 되었다. 히 4:16의 말씀과 같이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결론 예수님은 죄와 변절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를 해결해 주셨다. 우리 속의 죄와 그것의 결과인 두려움, 부끄러움을 제거하셨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신분에서 구원되고 회복되었다. 전에는 멀리 있던 우리가 이제 에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지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순종함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모두 예수님이 하신 것이다. 이제는 자유함을 누릴줄 알아야 한다. 자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매여서 사는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자유를 누릴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다. 적대감으로 갖는 거리가 너무 멀다. 고의로 멀어진 우리를 위해서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낮아져야만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이런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은 율법으로 접근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아니 율법이 못하는 것을 온전히 이루어주셨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이제 변역된 제사직은 영원한 것이므로 다시는 변역이 없다. 오직 그 분께 나가기만 하면 된다. 주님께서 이미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줄을 잘타야 한다. 학문의 줄, 가문의 줄, 금전의 줄, 권력의 줄을 잘 타야 한다. 이런 것들을 잘타면 스스로 일어서는 것 보다는 훨씬 더 빨리 일어설 수 있다. 혼자 일어서기는 힘든 세상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혼자서 일어설 수도 있고 일어 선 사람도 많다. 그러나 구원은 다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줄을 따라야만 얻을 수 있다. 레위의 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줄에 서도록 하자. 돈줄, 며에줄, 권력줄에 서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줄에 서서 영원한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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