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을 향하여 (창35:1-15)
본문
저희둘째 아이를 국민학교에 입학시키고 나서 얼마 동안 학교에 다니는 것이 기특해서 학교에 갈 때나 집에 올 때 뒤를 쫓아가거나, 미리 오는 길목에 나가 있던 적이 있었습니다. 조그만 녀석이 가방을 매고 학교에 다니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스럽던 지요. 아마 이 무렵의 아이들을 둔 대부분 부모들의 마음이 저와 똑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지요. 그래서 자주 이 녀석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지켜보곤 했었습니다. 이 녀석이 학교에 갈 때나 집에 올 때는 그냥 오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가게마다 서서는 이리저리 살피고 기웃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어떤 때는 한참을 서서 살피기도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계속해서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면서 집으로 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엎치면 코 다을 만큼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3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때도 제법 많았습니다. 아마 이 녀석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어떤 때는 이 녀석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학교엘 다니는 건지 길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기 위해서 학교엘 다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야곱도 지난 시간 살펴봤던 야곱의 삶 역시 그런 삶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벧엘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로 가지 않았습니다. 벧엘 가까운 세겜 땅에 머문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 말씀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겜과 벧엘의 거리가 48km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하루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벧엘로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야곱에 세겜 땅에 머문 기간을 10년 가까운 세월로 봅니다. 이렇게 10년이 흘러가는 동안 하룻길이면 갈 수 있는 벧엘을 가지 않고 세겜 땅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죠. 이런 정황을 볼 때 야곱이 세겜 땅에 얼마나 푹 빠져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가야 할 목적지도 잊어버린 체 야곱은 세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벧엘에 올라가야 할 사람인지 세겜에 머물러 있어야 할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은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야곱이 이런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속여 세겜에 거하고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을 한 일입니다. 이 일은 야곱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야곱은 이 지역의 나그네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나그네라면 그 지역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생활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이 한 행동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자 야곱은 앞으로 어떻게 처신을 해야할지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34:30절은 야곱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을 하고있습니다. “” 이 구절에서 야곱이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앞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제는 자신의 생명이 보호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이 일을 겪기 전 세겜에서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가야할 벧엘로 가지 않고 10여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 지냈다면 제법 이곳 생활에 흠뻑 취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쳐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마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그래 참 나의 인생은 기구한 인생이었어, 그래, 고생한 뒤에 낙이 온다고 하더니만 이제야 이렇게 멋진 곳에서 평안히 지내게 되는구나” 하고 나름대로 위안을 삼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해야 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말이야 이제 좀 평안히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만약 야곱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여기에 머문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요 그가 30여년 전 형의 눈을 피해 도망을 치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돌아와 이곳을 하나님의 전으로 삼겠습니다고 약속을 했던 것은 어떻게 됩니까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헤브론을 보여 주시면서 이곳에 약속의 땅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던 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나 자신이 하나님께 한 약속을 까마득히 잊어 버린 체 세겜의 매력에 미혹되어서 거기서 세월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터져야 이런 야곱이 디나가 강간을 당한 일과 아들들이 살인을 한 일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이겠죠. 머물러서 안될 곳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을 것입니다. 문제가 터져야 깨닫는 것 야곱, 이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항상 문제가 터지고 어려움을 당해야 깨달음이 옵니다. 그래야 “아하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말합니다. 미리 “그래 이 길은 잘못된 길이야” 하고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문제가 터지고 어려움을 당해야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넘어지는 그 문제에 늘 넘어지기도 합니다. 넘어지고서는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회계하고 돌이키죠. 한 번 넘어지면 그것으로 끝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그 문제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넘어질 때마다 회계하고 돌이킵니다. 물론 회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낳겠지만 넘어지지 않는 것이 더 낳습니다. 여러분들을 자주 넘어지게 하는 그런 문제가 있다면 금식을 해서라도 해결을 하십시오. 왜 늘 그런 문제들을 달고 사십니까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야곱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처럼 넘어지고 터지고 깨지고 나서 손들고 옵니다. 해서는 곤란합니다. 몇몇 전문적으로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망쳐 놓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넘어지고 터져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넘어지고 터져서 돌아온 이야기가 물론 우리들에게 은혜도 되지만 너무 자신이 당한 이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나머지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그만 동경을 합니다. “야 나도 그런 경험을 한 번 가져 봐야지” 그래서 넘어지지 않고 평탄하게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은 바보가 되고 넘어진 사람이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넘어지고서는 회계하는 것을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더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랑하는 교회에서는 간증을 부탁해도 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인데 제 이야기는 간증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간증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겸손한 마음으로 드러내서 듣는 사람들은 그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서는 간증을 하라는 것입니다. 간증을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왜 우리들이 시간을 드려서 야곱의 인생을 이렇게 살펴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넘어지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야곱이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의 이야기를 살피면서 그래 야곱도 그랬는데 나쯤이야 하면 곤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야곱과 같은 이런 경험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리 미리 주의하시고 조심하셔서 바른 길 넘어지지 않는 길로 다니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나타나시는 하나님 야곱은 이렇게 넘어진 후에야 자신이 머물지 말아야할 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미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그런 입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이 이 사건이 일어나고난 후에 가장 크게 고민했던 문제가 무엇이었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좀 전에 34:30절에서 살펴 본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을 야곱은 이렇게 표현을 해 놓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가 나게 하였도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이 가는 곳마다 죽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죠. 바로 이 문제가 야곱에는 큰 고민거리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야곱이 머물고 있는 세겜 땅에 있자니 그것도 문제죠 그렇다고 해서 세겜 땅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자니 가는 도중에 죽음의 냄새를 맡고 달려 들 사람들이 걱정이죠. 이러 지도 저러치도 못하는 것이 야곱의 입장이었습니다. 일어나 올라가라 바로 이렇게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함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일어나야합니까 그렇습니다. 실패의 자리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유혹 받은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죠 예,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벧엘은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리, 약속의 자리 하나님께서 계시는 자리입니다. 이곳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유혹 받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곳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올라갈 수 없습니다.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여기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사실은 벧엘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이 벧엘까지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어디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들을 유혹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실패의 자리 세상의 자리에서 전혀 일어나지도 않은 채 벧엘로 올라가려 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일어나야 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들의 자리를 점검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세겜에 앉아 있다면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벧엘로 향해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단을 쌓으라 야곱은 올라가라는 명령 외에 또 어떤 명령을 받습니까 거기서 단을 쌓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과거에 하나님께 한 약속을 다시 기억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했던 약속을 한 번 볼까요 28:20-22절을 보시겠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이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기 돌아와서 단을 쌓겠노라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 약속을 상기시킬까요 이곳에서 재단을 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너의 아들들이 한 행동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널 지켜 주겠노라고 말하지 않았니 그저 너는 순종하고 벧엘로 올라가기만 하여라” 하는 말씀이죠. 10동안이나 머뭇거리며 순종하지 않은 야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로하시며 다시 명령을 내리시고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저 같으면 포기를 했어도 벌써 포기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몇 년 동안 기다리셨죠 그렇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20년 집에 돌아오는 길 10년 모두 얼마입니까 그렇습니다. 30년을 기다리시면서 사람을 만들었어요. 저는 3년을 하고서도 허덕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30년을 줄기차게 기다리시면서 사람을 만들어 가세요. 참 대단하잖아요. 이렇게 멋진 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이에요. 기다리고 참고 인내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난 날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만난 야곱, 그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고 흥분을 한 것 같습니다. 함께 3절 말씀을 볼까요 “” 이 구절에서 야곱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곤란 중에 있을 때마다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여러 번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때를 살펴보면 공교롭게도 야곱이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그가 처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야곱에의 인생의 위기였습니다. 홀홀 단신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먼길을 여행해야만 했던 야곱, 그가 그날 밤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인해 잠 못 이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타나나셔서 저를 위로해 주시며 지켜주시마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가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삼촌에게 계속 속고 낙심할 때 그 때 역시 야곱에게는 무료하고 따분한 그리고 억울한 세월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점박이 가축들을 보여 주시며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될 것이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칠 때 야곱을 추적하던 라반을 막아서시던 하나님, 그리고 또 지금 이 순간 아들이 한 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타나셔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은 자신이 “위기다”고 생각을 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위기 가운데 있을 때마다 잊지 아니 하시고 나를 만나주시고 나에게 힘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에게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까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렇게 나타나십니다. 우리들이 어려운 환경에 있을 때 우리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나타나셔서 우리들을 붙잡으십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모래 위에 발자국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다시 소개해 드립니다. “” 이 시가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들은 비록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짐을 져 주시고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러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 어떤 구절이 야곱의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보십시다. 야곱이 어떻게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새로워 졌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살펴 본대로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이 그는 말씀 앞에서 이에로 반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열매입니다. 종종 믿음을 말로 오해를 하는 것을 봅니다. 말을 들어보면 그럴듯하게 잘 하는데 삶을 사는 것을 보면 이에가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라든지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늘 “이에”로 반응을 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시든 “이에”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하십니까 오늘 이 야곱처럼 이에로 반응을 하십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토씨들을 다는지 저는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하다 별의별 이유를 다 가다 부치며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에” 이외에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늘 이에로 반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야곱이 반응한 이에는 어떤 것입니까 2절 말씀을 보면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에게 벧엘에 올라 가기 전 세 가지 해야 할 것을 명령을 합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신상을 버리고 첫 번째는 버려야 할 것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야곱의 가족들을 무엇을 하고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신도 겸하여 섬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기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 것이죠. 여러분 야곱의 이 모습을 가만히 보십시오. 야곱이 지금까지 하나님도 여러 번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감격도 했었습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께 두손을 번쩍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상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교회에 다닌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나는 우상이 없어, 나는 예수를 믿고 많은 체험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 이렇게 생각을 하면 오해입니다. 야곱도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 직접 하나님을 뵈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자신의 가족이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한 것과 상관이 없이 내가 체험을 한 것과 상관이 없이 내게도 우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이 무엇입니까 예,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보이는 우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더 많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물질도 될 수 있고 명예도 될 수 있습니다. 가족도 될 수 있고 출세도 될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자신이 성취하고 싶은 꿈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가 다변화되면 될수록 우리들의 우상도 그만큼 많아집니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하던 것들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우리들을 사로잡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요즘 사로잡혀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을 빼앗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벧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들을 버리십시오. 이 시간 이 여러분들의 우상을 과감하게 던져 버릴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결케 하고 다음으로 야곱이 명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정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자신을 정결케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은 실제로 자신을 물로 씻는 것을 말합니다. 목욕 제게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씻어 정결케 하라고 명령했을까요 단순히 몸을 깨끗케 하기 위함이었을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몸을 깨끗케 하는 일을 통하여 마음을 깨끗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결케 한다는 말은 단순히 몸을 씻는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을 정결케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 까요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자신을 정결케 할 수 있을까요 성경 한 곳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어떻게 우리들을 정결케 할 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죄를 자백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죄를 낱낱이 하나님께 고백을 드리는 일이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깨끗케 하신다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죄를 낱낱이 아뢰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무리 작은 죄라도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회계해야 할 죄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여러분들을 정결케 하시기 바랍니다. 의복을 바꾸고 마지막으로 야곱이 명령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의복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들이 입고 있었던 의복을 새롭고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들이 입고 있었던 옷은 세상을 살아왔던 옷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세상의 때가 묻어 있었습니다. 이런 의복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는 그런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우리들도 영적인 부흥의 장소인 벧엘에 올라가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입고 있는 옷을 잘 살펴보십시오. 때묻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쉽게 옷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번에 교회 수리를 하는데 천정에 페인트를 칠하는 것을 구경만 해도 옷에 묻더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들을 구경만 해도 옷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때를 묻힌 옷을 입고서는 벧엘로 올라 갈 수 없습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엡 4:22-25)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교훈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벗어야 할 것이 있고 입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벗어야 할 것을 벗고 입어야 할 것을 입고 있으십니까 이것을 제대롭게 하지 못하면 우스운 꼴을 당합니다. 어느 목회자는 새벽기도 시간에 정신없이 나오다 보니 속옷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이런 모습으로 약속의 장소인 벧엘에 서시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벗어야 할 것을 마땅히 벗으십시오. 그리고 입어야 할 것을 입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상수리 나무아래 묻고 이런 야곱의 명령에 대해서 야곱과 함께한 무리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까요 4절 말씀을 보죠 “” 야곱의 명령대로 이방신상을 다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귀고리까지 주었다고 기록하고있습니다. 당시 귀고리는 이방신을 섬기는 수단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신상들을 다 내어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랬더니 이것들을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예,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 아마 이중에는 값나가는 물건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념으로 간직할 만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모든 것을 미련 없이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벧엘을 향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상수리나무 아래와 같은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다 묻어둘 그런 장소가 필요한 것이죠.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상수리나무 아래가 있습니까 나의 옛적인 자아, 나의 옛 성품, 나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 세상적인 가치관, 이런 것들을 파 묻으셨습니까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계신 곳인 벧엘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파묻은 상수리나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이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하고 벧엘을 향해 출발을 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그 주변 사람들에게 야곱의 일행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일행을 추격할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사실입니다. 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런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곱과 같이 모든 것들을 묻고 스스로를 정결케 한다면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져도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시대가 바꼈기 때문에 지금 이런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는 이렇게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믿음의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입니다. 야곱과 같이 모든 것들을 묻고 새롭게 출발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벧엘에 도착을 했습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을 출발한지 10년만의 일이며,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한지 30년만의 일입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야곱은 다시 이 벧엘에 도착을 해서 그가 하나님께서원한 대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립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9절에 다시 복을 주셨노라고 말합니다. 10절에 이름이 바껴진 것을 다시 확인하십니다. 즉, 다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심으로 이제는 야곱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처음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개명이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 후 야곱은 야곱으로 살지 않고 이스라엘로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야곱으로 살았습니다. 그랬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포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다시 저에게 나타나셔서 이름을 고쳐 주시고 이름대로 살 기회를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한 두번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성도라 일컬음을 받고 성도처럼 살지 못한다고 해서 “그래 너는 틀렸어” 하고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고 우리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랑하는 아무개야 너는 성도란다 성도처럼 살아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멋진 하나님이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에게 이런 은혜만 넘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1절 이하의 말씀을 볼까요 “”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스스로를 밝힙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 이것은 야곱의 전 생애를 걸쳐서 역사 하셨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온 지난날들을 바라보아라 어떠냐 불가능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네가 살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전능한 내가 있었기 때문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어지는 모든 약속도 바로 이 전능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어떤 약속을 하십니까 “” 어떻습니까 이 구절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가 살폈던 아브라함이 생각납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다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꿈을 보여 주시면서 이런 꿈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라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이런 하나님을 만나 뵙고 감격합니다. 그의 감격이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보십시다. 14,15절입니다. “” 이것이 바로 벧엘에서 야곱이 한 일입니다. 이 때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간 얼마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던 일, 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생하던 일, 그래도 그 가운데 역사 하신 하나님, 이러저러한 것들이 그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을 것입니다. 이런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벧엘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이런 감격이 있는 벧엘로 올라가십시다. 우리가 가는 길에 유혹의 땅인 세겜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에 눈 돌리지 말고 벧엘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십시다. 야곱이 가족들과 함께 했던 자들에게 명했던 것처럼 버릴 것은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고 벧엘을 향하여 가십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벧엘로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야곱에 세겜 땅에 머문 기간을 10년 가까운 세월로 봅니다. 이렇게 10년이 흘러가는 동안 하룻길이면 갈 수 있는 벧엘을 가지 않고 세겜 땅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죠. 이런 정황을 볼 때 야곱이 세겜 땅에 얼마나 푹 빠져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가야 할 목적지도 잊어버린 체 야곱은 세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벧엘에 올라가야 할 사람인지 세겜에 머물러 있어야 할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은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야곱이 이런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경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속여 세겜에 거하고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을 한 일입니다. 이 일은 야곱을 곤경에 빠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야곱은 이 지역의 나그네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나그네라면 그 지역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생활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이 한 행동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자 야곱은 앞으로 어떻게 처신을 해야할지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34:30절은 야곱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을 하고있습니다. “” 이 구절에서 야곱이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의 앞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제는 자신의 생명이 보호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이 일을 겪기 전 세겜에서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가야할 벧엘로 가지 않고 10여년 가까운 세월을 이곳에서 지냈다면 제법 이곳 생활에 흠뻑 취해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쳐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마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그래 참 나의 인생은 기구한 인생이었어, 그래, 고생한 뒤에 낙이 온다고 하더니만 이제야 이렇게 멋진 곳에서 평안히 지내게 되는구나” 하고 나름대로 위안을 삼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해야 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말이야 이제 좀 평안히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만약 야곱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여기에 머문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요 그가 30여년 전 형의 눈을 피해 도망을 치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돌아와 이곳을 하나님의 전으로 삼겠습니다고 약속을 했던 것은 어떻게 됩니까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헤브론을 보여 주시면서 이곳에 약속의 땅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던 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나 자신이 하나님께 한 약속을 까마득히 잊어 버린 체 세겜의 매력에 미혹되어서 거기서 세월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터져야 이런 야곱이 디나가 강간을 당한 일과 아들들이 살인을 한 일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이겠죠. 머물러서 안될 곳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을 것입니다. 문제가 터져야 깨닫는 것 야곱, 이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항상 문제가 터지고 어려움을 당해야 깨달음이 옵니다. 그래야 “아하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말합니다. 미리 “그래 이 길은 잘못된 길이야” 하고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문제가 터지고 어려움을 당해야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넘어지는 그 문제에 늘 넘어지기도 합니다. 넘어지고서는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회계하고 돌이키죠. 한 번 넘어지면 그것으로 끝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그 문제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넘어질 때마다 회계하고 돌이킵니다. 물론 회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낳겠지만 넘어지지 않는 것이 더 낳습니다. 여러분들을 자주 넘어지게 하는 그런 문제가 있다면 금식을 해서라도 해결을 하십시오. 왜 늘 그런 문제들을 달고 사십니까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야곱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처럼 넘어지고 터지고 깨지고 나서 손들고 옵니다. 해서는 곤란합니다. 몇몇 전문적으로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망쳐 놓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넘어지고 터져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넘어지고 터져서 돌아온 이야기가 물론 우리들에게 은혜도 되지만 너무 자신이 당한 이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나머지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그만 동경을 합니다. “야 나도 그런 경험을 한 번 가져 봐야지” 그래서 넘어지지 않고 평탄하게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은 바보가 되고 넘어진 사람이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넘어지고서는 회계하는 것을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더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랑하는 교회에서는 간증을 부탁해도 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인데 제 이야기는 간증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간증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겸손한 마음으로 드러내서 듣는 사람들은 그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서는 간증을 하라는 것입니다. 간증을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왜 우리들이 시간을 드려서 야곱의 인생을 이렇게 살펴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넘어지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야곱이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의 이야기를 살피면서 그래 야곱도 그랬는데 나쯤이야 하면 곤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야곱과 같은 이런 경험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리 미리 주의하시고 조심하셔서 바른 길 넘어지지 않는 길로 다니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나타나시는 하나님 야곱은 이렇게 넘어진 후에야 자신이 머물지 말아야할 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미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그런 입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이 이 사건이 일어나고난 후에 가장 크게 고민했던 문제가 무엇이었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좀 전에 34:30절에서 살펴 본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을 야곱은 이렇게 표현을 해 놓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가 나게 하였도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이 가는 곳마다 죽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죠. 바로 이 문제가 야곱에는 큰 고민거리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야곱이 머물고 있는 세겜 땅에 있자니 그것도 문제죠 그렇다고 해서 세겜 땅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자니 가는 도중에 죽음의 냄새를 맡고 달려 들 사람들이 걱정이죠. 이러 지도 저러치도 못하는 것이 야곱의 입장이었습니다. 일어나 올라가라 바로 이렇게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함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일어나야합니까 그렇습니다. 실패의 자리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유혹 받은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죠 예,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벧엘은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리, 약속의 자리 하나님께서 계시는 자리입니다. 이곳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유혹 받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곳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올라갈 수 없습니다.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여기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우리들도 사실은 벧엘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이 벧엘까지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어디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들을 유혹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실패의 자리 세상의 자리에서 전혀 일어나지도 않은 채 벧엘로 올라가려 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일어나야 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들의 자리를 점검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세겜에 앉아 있다면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벧엘로 향해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단을 쌓으라 야곱은 올라가라는 명령 외에 또 어떤 명령을 받습니까 거기서 단을 쌓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과거에 하나님께 한 약속을 다시 기억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했던 약속을 한 번 볼까요 28:20-22절을 보시겠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이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기 돌아와서 단을 쌓겠노라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 약속을 상기시킬까요 이곳에서 재단을 쌓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너의 아들들이 한 행동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널 지켜 주겠노라고 말하지 않았니 그저 너는 순종하고 벧엘로 올라가기만 하여라” 하는 말씀이죠. 10동안이나 머뭇거리며 순종하지 않은 야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로하시며 다시 명령을 내리시고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저 같으면 포기를 했어도 벌써 포기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몇 년 동안 기다리셨죠 그렇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20년 집에 돌아오는 길 10년 모두 얼마입니까 그렇습니다. 30년을 기다리시면서 사람을 만들었어요. 저는 3년을 하고서도 허덕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30년을 줄기차게 기다리시면서 사람을 만들어 가세요. 참 대단하잖아요. 이렇게 멋진 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이에요. 기다리고 참고 인내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난 날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만난 야곱, 그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고 흥분을 한 것 같습니다. 함께 3절 말씀을 볼까요 “” 이 구절에서 야곱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곤란 중에 있을 때마다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여러 번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때를 살펴보면 공교롭게도 야곱이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그가 처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야곱에의 인생의 위기였습니다. 홀홀 단신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먼길을 여행해야만 했던 야곱, 그가 그날 밤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인해 잠 못 이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타나나셔서 저를 위로해 주시며 지켜주시마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가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삼촌에게 계속 속고 낙심할 때 그 때 역시 야곱에게는 무료하고 따분한 그리고 억울한 세월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점박이 가축들을 보여 주시며 이것들이 다 네 것이 될 것이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칠 때 야곱을 추적하던 라반을 막아서시던 하나님, 그리고 또 지금 이 순간 아들이 한 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타나셔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은 자신이 “위기다”고 생각을 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위기 가운데 있을 때마다 잊지 아니 하시고 나를 만나주시고 나에게 힘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에게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까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렇게 나타나십니다. 우리들이 어려운 환경에 있을 때 우리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나타나셔서 우리들을 붙잡으십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모래 위에 발자국이라는 시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다시 소개해 드립니다. “” 이 시가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들은 비록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짐을 져 주시고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러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 어떤 구절이 야곱의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보십시다. 야곱이 어떻게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새로워 졌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살펴 본대로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이 그는 말씀 앞에서 이에로 반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열매입니다. 종종 믿음을 말로 오해를 하는 것을 봅니다. 말을 들어보면 그럴듯하게 잘 하는데 삶을 사는 것을 보면 이에가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라든지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늘 “이에”로 반응을 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시든 “이에”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하십니까 오늘 이 야곱처럼 이에로 반응을 하십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토씨들을 다는지 저는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하다 별의별 이유를 다 가다 부치며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에” 이외에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늘 이에로 반응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야곱이 반응한 이에는 어떤 것입니까 2절 말씀을 보면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에게 벧엘에 올라 가기 전 세 가지 해야 할 것을 명령을 합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신상을 버리고 첫 번째는 버려야 할 것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신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야곱의 가족들을 무엇을 하고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방신도 겸하여 섬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기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 것이죠. 여러분 야곱의 이 모습을 가만히 보십시오. 야곱이 지금까지 하나님도 여러 번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감격도 했었습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께 두손을 번쩍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상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교회에 다닌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나는 우상이 없어, 나는 예수를 믿고 많은 체험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 이렇게 생각을 하면 오해입니다. 야곱도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 직접 하나님을 뵈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자신의 가족이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한 것과 상관이 없이 내가 체험을 한 것과 상관이 없이 내게도 우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이 무엇입니까 예,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보이는 우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더 많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물질도 될 수 있고 명예도 될 수 있습니다. 가족도 될 수 있고 출세도 될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자신이 성취하고 싶은 꿈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가 다변화되면 될수록 우리들의 우상도 그만큼 많아집니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하던 것들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우리들을 사로잡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요즘 사로잡혀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을 빼앗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벧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들을 버리십시오. 이 시간 이 여러분들의 우상을 과감하게 던져 버릴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결케 하고 다음으로 야곱이 명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정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자신을 정결케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말씀일까요 이 말씀은 실제로 자신을 물로 씻는 것을 말합니다. 목욕 제게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씻어 정결케 하라고 명령했을까요 단순히 몸을 깨끗케 하기 위함이었을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몸을 깨끗케 하는 일을 통하여 마음을 깨끗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결케 한다는 말은 단순히 몸을 씻는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을 정결케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 까요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자신을 정결케 할 수 있을까요 성경 한 곳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어떻게 우리들을 정결케 할 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죄를 자백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죄를 낱낱이 하나님께 고백을 드리는 일이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깨끗케 하신다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죄를 낱낱이 아뢰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무리 작은 죄라도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회계해야 할 죄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여러분들을 정결케 하시기 바랍니다. 의복을 바꾸고 마지막으로 야곱이 명령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의복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들이 입고 있었던 의복을 새롭고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들이 입고 있었던 옷은 세상을 살아왔던 옷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세상의 때가 묻어 있었습니다. 이런 의복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는 그런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우리들도 영적인 부흥의 장소인 벧엘에 올라가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입고 있는 옷을 잘 살펴보십시오. 때묻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쉽게 옷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번에 교회 수리를 하는데 천정에 페인트를 칠하는 것을 구경만 해도 옷에 묻더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들을 구경만 해도 옷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때를 묻힌 옷을 입고서는 벧엘로 올라 갈 수 없습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엡 4:22-25)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교훈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벗어야 할 것이 있고 입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벗어야 할 것을 벗고 입어야 할 것을 입고 있으십니까 이것을 제대롭게 하지 못하면 우스운 꼴을 당합니다. 어느 목회자는 새벽기도 시간에 정신없이 나오다 보니 속옷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이런 모습으로 약속의 장소인 벧엘에 서시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벗어야 할 것을 마땅히 벗으십시오. 그리고 입어야 할 것을 입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상수리 나무아래 묻고 이런 야곱의 명령에 대해서 야곱과 함께한 무리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까요 4절 말씀을 보죠 “” 야곱의 명령대로 이방신상을 다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귀고리까지 주었다고 기록하고있습니다. 당시 귀고리는 이방신을 섬기는 수단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신상들을 다 내어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랬더니 이것들을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예,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 아마 이중에는 값나가는 물건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념으로 간직할 만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모든 것을 미련 없이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벧엘을 향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상수리나무 아래와 같은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다 묻어둘 그런 장소가 필요한 것이죠.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상수리나무 아래가 있습니까 나의 옛적인 자아, 나의 옛 성품, 나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 세상적인 가치관, 이런 것들을 파 묻으셨습니까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계신 곳인 벧엘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파묻은 상수리나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이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하고 벧엘을 향해 출발을 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그 주변 사람들에게 야곱의 일행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일행을 추격할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사실입니다. 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런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곱과 같이 모든 것들을 묻고 스스로를 정결케 한다면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져도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시대가 바꼈기 때문에 지금 이런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는 이렇게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믿음의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입니다. 야곱과 같이 모든 것들을 묻고 새롭게 출발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벧엘에 도착을 했습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을 출발한지 10년만의 일이며,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한지 30년만의 일입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야곱은 다시 이 벧엘에 도착을 해서 그가 하나님께서원한 대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립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9절에 다시 복을 주셨노라고 말합니다. 10절에 이름이 바껴진 것을 다시 확인하십니다. 즉, 다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심으로 이제는 야곱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처음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개명이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 후 야곱은 야곱으로 살지 않고 이스라엘로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야곱으로 살았습니다. 그랬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포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다시 저에게 나타나셔서 이름을 고쳐 주시고 이름대로 살 기회를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한 두번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성도라 일컬음을 받고 성도처럼 살지 못한다고 해서 “그래 너는 틀렸어” 하고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고 우리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랑하는 아무개야 너는 성도란다 성도처럼 살아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멋진 하나님이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에게 이런 은혜만 넘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1절 이하의 말씀을 볼까요 “”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스스로를 밝힙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 이것은 야곱의 전 생애를 걸쳐서 역사 하셨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온 지난날들을 바라보아라 어떠냐 불가능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네가 살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바로 전능한 내가 있었기 때문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어지는 모든 약속도 바로 이 전능한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어떤 약속을 하십니까 “” 어떻습니까 이 구절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가 살폈던 아브라함이 생각납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다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꿈을 보여 주시면서 이런 꿈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라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이런 하나님을 만나 뵙고 감격합니다. 그의 감격이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보십시다. 14,15절입니다. “” 이것이 바로 벧엘에서 야곱이 한 일입니다. 이 때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간 얼마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던 일, 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생하던 일, 그래도 그 가운데 역사 하신 하나님, 이러저러한 것들이 그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을 것입니다. 이런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벧엘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이런 감격이 있는 벧엘로 올라가십시다. 우리가 가는 길에 유혹의 땅인 세겜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에 눈 돌리지 말고 벧엘을 향하여 힘차게 걸어가십시다. 야곱이 가족들과 함께 했던 자들에게 명했던 것처럼 버릴 것은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고 벧엘을 향하여 가십시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