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송사의문제 (고전6:1)
본문
오늘은 고린도교회가 부디치고 있었던 세 번째 문제 법정 송사의 문제를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 문화와 기독교 가치는 소위 유대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소위 Judeo christian Value, 유대 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가치관이 결정되어 왔습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그 당시에 가장 강력한 세계를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문화는 희랍문화입니다. 소위 헬라문화, 헬레니즘, 그리스 문화가 전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삶에 더 가까운 전통은 헬라전통, 희랍전통이 아니라 유대적 전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이제 헬라 문화권 안에 전파되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피할 수 없는 두 개의 충돌, 두 개의 문화적 충돌, 유대교적 관습과 희랍적인 관습의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법정 소송의 문제에 관해서도 현저하게 드러난 하나의 정황, 배경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혹은 유대인들은 유대적 전통, 유대교의 문화적 관습에 의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면 법정에 가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족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소위 히브리적 전통 유대사람들의 전통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뭐 정 안되면 교회 시나고그죠 회당에 가서 지도자들에게 해결을 받는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마을의 지도자, 마을 지도자에게 찾아가서 마을의 어른 장로, 장로 그러면 교회 지도자를 생각하지 마시고, 마을의 어른 지도자에게 찾아가서 상담을 하고 '이런 문제 어떻게 해결하면 좋습니까' 하고 그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해결하는 것이 대부분의 그 문제해결의 방식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희랍전통은 달랐습니다. 희랍문화는 법을 만들었고, 법정문화를 발달시켜왔습니다. 아주 상세하고 자세한 법을 만드는 것, 이것이 희랍문화권 안에서 발전되어 갑니다. 희랍사람들은 거의 모든 문제들을, 아주 사소한 문제들까지도 법정에 가서 해결하는 것이 희랍적 삶의 양식, 헬라적 삶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한 복판에 법이 들어와 있었고, 법정 문화가 있었어요. 지금도 그 옛날 성경 시대의 도시들을 발굴하게 되면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이 소위 재판에 관련된 여러 가지 기념비라든지, 재판석, 베마 재판관들이 앉아 있었던 돌, 이 베마 이런 것들이 많이 발굴이 됩니다. 과거에 헬라의 극작가 가운데 아리스토파네스라는 극작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작품 가운데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헬라 사람 두 사람이, 그리스 사람 두 사람이 헬라가 한참 알렉산더를 통해서 전세계를 정복하고 헬라 문화가 전세계로 퍼져갈 때, 어떤 특정한 나라가 헬라 영역에 속해 있는지, 그리스의 영토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방법에 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물어요. '그 나라가 혹은 그 지역이 헬라 땅이냐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할 때 상대방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거기 법정이 있소' 하고 묻습니다. 재판소가 있느냐 재판소가 없다면 아, 거기는 헬라가 아니라고, 거기는 그리스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 정도로 법정 문화가 삶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헬라문화의 전통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까지 다 법정에 가서 해결을 했다는 말이죠. 근데 이것은 유대적 전통,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통의 모습은 아닙니다. 유대적 전통은 문제가 생기면 가급적 어디서 해결을 해요 가족 안에서 또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 삶의 방식이었단 말이죠. 자, 고린도 교회 안에 신자들끼리 문제가 생겼어요. 틀림없이 문제가 생겼어요. 자,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을 할 것이냐 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핵심적인 강조점은 어디 있느냐 8절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8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다 뭐가 강조됐어요. 저희는 너희 형제다. 저희는 너희의 형제들이 아니냐.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형제들이 아니더냐 그러면 어떻게 해결하라는 것이예요. 그러면 가족 안에서 형제들끼리 잘 해결하란 말이예요. 잘 해결하라. 그것도 해결 못하고 어떻게 크리스챤이라고 하느냐 말이지. 잘 좀 해결해 보라. 이것이 바울 사도의 권면의 초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뭐 아마 문제가 좀 복잡하고 해결이 안되고 그러니까, 어떤 주장을 했을까요. 한 사람이 둘 중 한 사람이 뭐예요. 틀림없이 고발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법정에 갈 수밖에 없었던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 바울의 문제는 꼭 그 문제를 가지고 법정까지 가야만 했었더냐 잘못했든 잘못하지 않았든 법정으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간 사람도 책임이 있다. 심지어 바울은 그것도 죄다. 그것도 죄다. 나중에 다시 나옵니다마는, 바울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 그것이 죄인데, 그 죄는 거의 지금까지 말한 음란의 죄라든지 뭐 이런 죄와 마찬가지의 죄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8절 이하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보세요. 지금 법정 송사 문제를 얘기하다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이런 여러 가지 유형의 죄들과 법정 송사의 죄를 동일한 수준에 놓고 바울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법정에 가지 말라고, 할 수 있으면 그 문제를 우리 안에서 해결해야지 법정까지 가지 않아야 한다고 바울이 강조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오늘의 초점이예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첫째 이유. 그것은 성도의 신분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신분을 부인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이 누구냐 우리가 누구냐 크리스챤들이 도대체 누구냐 이 사실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예요. 2절에 보면, "우리는 세상을 판단을 할 자다." 우리가 세상을 판단할 사람들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온 세상을 한 날에 심판하고 판단할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너희들이 그 문제 하나를 해결 못하고 뭐예요. 가서 세상 법정에서 그 문제를 해결함을 받겠다고 거기까지 끌고 가겠느냐 이말이죠. 그것은 성도답지 못하다. 성도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행위다. 성도의 신분을 부인하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우리가 온 세상을 판단할 사람들이예요. 한 날에. 여러분 혹시 판사님을 부러워 해본 분이 계실지 몰라요. 아1 판사, 저도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가 밤낮 '너도 판사돼라, 판사돼라' 그래서 그런 학교 들어갈려다가 떨어진 경험이 있는데, 지금은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어차피 나는 판사가 될테니까. 온 세상을 판단할 자리에 결국은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성경의 선언이예요. 우리가 온 세상을 판단하게 된다. 심지어 3절에 보시면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게 된다. 천사들도 판단하게 된다. 왜 이런 배경이 나왔냐 하면, 우리가 아는 시편에 보시면, 시편 8편 5절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우리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 여러분 천사들의 존재, 천사들은 육체가 없기 때문에 자유한 존재죠. 상당히 자유스러워요.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아무데나 막 다닐 수가 있는 인간보다 어떤 면에서 우월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면 우리가 그 천사들조차 한 날에 판단하게 될 것이다. 판단하게 될 것이다. 천사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판단하는 자리에 우리가 서게 될 존재들이다.
마태복음 19장 28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이 당신의 열 두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세상이 새로워진다.' '그날에 나를 좇는 너희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어떻게 해요. '심판하게 된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정도에서 약속이 끝나지 않습니다. 특별히 계시록에 보면 계시록 한번 찾아보세요. 요한계시록 2장,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 계시록 2장을 보세요. 26절부터 보시면 요한계시록 2장 26절에 보시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 가운데서 그 당시에 많은 신앙적인 박해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신앙의 승리를 권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무슨 권세를 주신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 우리가 온 세계를 다스리는 자리에 서게 된다. 자 3장, 요한계시록 3장 21절 보세요. 계시록 3장 21절 같이 읽어요. 시작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제가 언젠가 이 말씀을 드렸는지 모릅니다만, 중동 지방에 그 왕들이 전통적으로 앉는 의자는 왕 혼자만 앉는, 스페이스가 왕 혼자만 딱 앉으면 맞는 그런 의자가 아니라 좀 옆으로 넓은 의자예요. 그런 의자를 중동 지방의 왕들이 많이 앉았습니다. 지난번 터키 성지 순례를 할 때에도 제가 그 안내를 하면서 제 뒤에 따라오는 분들에게 그 의자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상당히 넓은 의자예요. 충성스러운 신하, 공을 세운 신하에게 왕이 포상하는 특권 중의 하나는 뭐냐면, 신하보고 '이리 올라올지어다. 내 옆에 앉을 지어다.' 그래서 왕의 옆에 같이 앉아요. 자, 그 보좌가 어떤 보좌입니까 왕은 거기 앉아서 뭐예요. 왕은 거기 앉아서 온 나라를 통치합니다. 그 통치의 상징인 왕이 앉는 보좌, 신하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 최고의 특권이 있다면 뭐예요. 신하보고 "올라 오라! 옆에 앉을지어다." 그러면 옆에 딱 앉는단 말이예요. 그 순간만은 그 사람도 뭐예요. 왕이예요. 왕과 같이 앉아서 왕이예요. 그 자리에서 명령하면 왕의 권위가 있는 거예요. 왕의 권위가 있다. 여기 신앙의 승리자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시기를 그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겠다. 그것이 성경에 왕 노릇 한다는 표현으로 나오죠. 나중에. 계시록 20장 보세요.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보세요. 자 요한계시록 20장 6절입니다. 다 같이 시작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로다" 자 신앙에 승리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는 삶이 약속돼 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진짜 믿으십니까 정말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굉장한 사람들이네요. 온 세상을 다스릴 자들이예요. 그렇게 비리비리 앉아 있을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예요. 우리가. 왕노릇 할 분들이란 말이죠. 주님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고 만국과 열방들을 다스리는 놀라운 권세를 한 날에 누리게 될 것이다. 한번 옆에 있는 분 쳐다보시면서 '굉장한 분이시네요.' 한번 해 보세요. 근데 왜 이렇게 쪼다 같이 앉아 계십니까 네, 왕노릇 할 사람들이다. 이런 당당한 신분, 이런 영화로운 신분, 이런 굉장한 정체성을 가진 왕 같은 제사장 아니 실제로 왕 노릇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자들. 온 세상을 판단하고 다스릴 자들이 겨우 문제 하나 해결 못하고 세상 법정에 나가서 '판사님, 이 문제 해결해 주세요. 제가 억울해요' 그래야 할 사람들이냐 이 말이죠. 성도의 신분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말이죠.
둘째로, 왜 법정에 가지 말아야 하느냐
둘째 이유 성도의 무지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5절 같이 읽어보세요. 본문의 5절, 고린도전서 6장 5절, 다 같이 시작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한다. 너희 가운데서 두 사람 사이에 성도들끼리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좀 판단하고 도와줄 지혜 있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그렇게 없더냐. 그래서 세상 법정으로 갔더냐. 부끄러운 일이로다. 부끄러운 일이로다. 이 말이죠. 실제로 요즘 우리 주변에 그리스도인들끼리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래서 온 나라 앞에 부끄러움이 되고 있는 문제를 보십시오. 성경 말씀이 얼마나 진리예요. 얼마나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어요. 한국교회 자존심에 먹칠을 당하고, 전도에 방해가 되고 말이죠. 그게 할 일이예요. 그게. 권사님들이 하실 일입니다. 그 중에 나하고 성경공부한 사람도 있어요. 우리 교회에서도 나올까봐 걱정이예요. 나는. 부끄러운 일이다 말이죠.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 너희 중에 이것을 중재할 사람이 도대체 없더냐 이말이죠.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고린도전서 1장서부터 지혜가 강조되었습니다. 지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지혜에 대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누가 더 똑똑하냐라는 그 지혜의 자랑을 하고 지혜의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막상 인간관계가 비틀리고 외곡될 때, 그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교회 공동체가 막대한 피해와 충격을 주고 있었단 말이죠. 그러면 너희들의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지. 자랑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지. 부끄러운 일이다. 말이지. 부끄러운 일. 얼마나, 그때나 지금이나 성경의 말씀은 얼마나 그대로 진리입니까 어1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안에 법조인들이 법조인 선교회를 만들고 주일 날마다 법적인 문제에 관해서 무료로 상담과 카운슬링을 해 드리고 있습니다. 또 가정 상담실이 있어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연구하고 공부를 하신 그런 분들이 가정 문제도 돕고 있고, 일차적으로 우리가 그런 분들을 통해서 도움을 얻으려고 노력을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법정에 가기 전에 이런 문제를 우리끼리 되도록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세상 앞에 부끄러움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4절에 보시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교회적 안목에서 볼 때는 판사라고 할지라도, 세상 판사라고 할지라도 그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예요. 거듭난 사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들이 더 중요한 사람들인데,
그런데 세상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느냐 부끄러운 일이로다. 왜 우리가 법정에 가는 것을 조심해야 되느냐 세 번째 이유. 그것은 성도 모두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모두의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6절의 말씀입니다. 6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그 다음 7절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여기 7절 말씀에 허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너희가 피차에 송사함으로, 서로 서로 그 문제를 가지고 고발함으로 법정에 간 그 자체가 완연한 허물이다. 완연한 허물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허물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다른 단어로 바꾼다면 패배라는 말이예요. 완전한 패배라는 말이예요. Defeat! 패배로다. 이것은 '너희들이 다 졌다.' 둘 다 이미 졌다. 이 말이예요. 뭐, 처음에는 동기가 어쨌든, 누가 실제로 잘했든 잘못했든지 간에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법정까지 갔다는 그 자체가 두 사람이 다 패배한 것이다. 두 사람이 다 패배한 것이다. 비록 법정에서 한 사람의 승리로 끝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볼 때,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또 세상적으로 볼 때 그것은 두 사람이 다 패배한 것이다. 그 말이죠. 이미 그것은 패배다 그 말이죠. 이것은 부부싸움하고 똑 같아요. 부부 싸움에서 승리자가 있습니까 부부가 싸워서 한 사람이 승리했다고 하십시다. 그게 승리입니까 승리예요 싸워서 한 사람이 승리해서 승리자가 되어서 갈라졌습니다. 승리입니까 부부싸움에는 승자가 없어요. 부부싸움에는, 부부싸움에는 패자가 둘 다 패배자가 될 뿐이예요.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에 그것을 극복하면 두 사람이 다 승리자가 되거나, 두 사람이 다 패배자가 되는 게임, 그것이 부부의 게임이예요. 두 사람이 다 승리자가 되거나, 두 사람이 다 패배자가 되던가, 그리스도인들끼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의 문제도 결국 두 사람이 다 승리자가 되던가, 아니면 두 사람이 다 패배자가 되던가. 그러니까 법정까지 가는 추태를 부리기 전에 미리 그 문제 해결하면 두 사람이 다 승리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뭐예요. 두 사람이 다 패배자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완전한 패배다. 그것을 해결 못하고 법정에 갔어. 완전한 패배로다. 이 말이예요. 바울이. 강력한 강조가 있어요. 그것은 이미 완전한 패배를 드러낸 것이다. 온 나라 앞에 그리스도인들의 패배를, 교회의 패배를, 그리스도인들의 시시함을 나타낸 것이란 말이예요. 그런 문제 치사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온 세상 앞에 부끄러움을 드러내놨단 말이죠. 그러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여기 7절에서 무슨 단어가 강조됩니까 차라리! 차라리 한 사람, 둘 중의 한 사람이 뭐예요. 차라리 손해를 보지, 차라리 희생을 하지, 차라리 속아버리고 말지,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고 교회의 이미지를 명예를 수호하고, 크리스챤의 자존심을 지켰더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말이예요. 이 세상에서 손해를 좀 볼지 모르죠. 그렇게 해서. 자존심 좀 구길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지킬 수 있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을1. 두가지 강조된 단어가 차라리, 차라리 두 번 반복되죠. 그 단어가 한 번 입니까 두 번입니까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쏙는 것이 낫지 않느냐. '차라리 차라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그런데 왜 그것이 문제를 풀지 못하냐면 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존심의 문제예요. 존심.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자존심. 내가 자존심을 굽힐 수 없다. 이거죠. 특별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자꾸만 권리를 부추기는 시대입니다. 권리. 권리. 아동의 권리, 여성의 권리. 그래서 내 권리를 놓칠 수 없다. 내가 희생당할 수가 없다. 이것이 사람들의 심리예요. 되도록 이면 손해 안보고 되도록 이면 자존심 안 짓밟히고 그러다가 교회를 짓밟고 만단 말이죠. 교회의 분위기를 짓밟고 말이죠. 제가 굉장히 저에게 신앙 생활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책자 하나가 있어요. 아주 작은 책이예요. 우리 책방에 있어요. 제목이 '합당한 희생 파인애플 이야기'. 제가 이 책의 스토리를 발견하고 너무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아 갖고, 우리 교회 김두화 목사님께 부탁해서 옛날에, 아주 옛날, 아득한 옛날에 한 처음 옛날 태초에 번역을 한 책입니다. 파인애플 스토리. 얼마나 책이 내용이 재미있는지 몰라요. 쉽게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아프리카의 뉴기니아라는 정글지대에서 일어난 실화입니다. 실화. 한 선교사님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의료 선교사님이 파인애플이 먹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기 클리닉 옆에다가 파인애플 농장을 만든 거예요. 파인애플 농장. 그래 세월이 지나가요. 3년이 지나야 파인애플을 따먹을 수가 있어요. 그 3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파인애플, 파인애플' 꿈에도, 깨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파인애플을 기다려요. 3년 만에 드디어 파인애플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그래 딸 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딸 때가 딱 돼서 가보니까 없어졌어요. 다 없어졌어요. 거기 원주민들이 다 따먹은 거예요. 화가 났어요. 어떤 놈들이 따 먹었느냐 말이죠. 예, 결국 자기가 병원에서 치료해 주는 사람들이예요.다. 그 사람들, 자기가 도와주는 사람들이 가서 다 따먹은 거란 말이예요. 그래 막 조사를 해 봐요. 그래 조사를 해 봤더니 그 파인애플 농장을 만들 때 거들고, 다 거 심고 자기가 수고비까지 주었던 그 사람들이 다 따먹은 거란 말이죠. 도대체 왜 따먹었느냐 말이지, 당신들 수고비까지 주면서 내가 일했는데, 근데 정글의 법칙은 심은 사람이 주인이다. 우리가 심었으니까 우리가 주인 아니냐 말이예요. 딱 그 머리 속에 그 생각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심었으니까 우리 거다. 그래 확 나 갖고서 말이죠. 어쩔줄을 몰라요. 병원 문을 닫아 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그 밭에 못 오도록 셰파트를 갖다가 경계를 개를 갖다 놓고 경계를 해 보기도 하고, 그래도 안돼요. 그래 나중에는 꽤를 내 갖고, 반반씩 갈라먹자! 파인애플을 또 심으면서 이번에는 반은 당신거고 반은 우리꺼다. 잘 설명을 했어요. 근데 또 다 따 먹었어요. 자기 꺼 반도 다 따 먹고 또 와서 선교사 걸 따먹는다 말이예요. 어1 그러니까 얼마나 화가 나요. 참고참고 하다가 안돼서 그러면 다 가지라고 이건 포기하고 다른 데 하면서 이제 이건 당신들 거고, 이제 이건 내 꺼라고, "당신 꺼, 내 꺼당신 꺼, 내 꺼" 교육을 시킨 다음에 그 밭을 포기하고 또 새로 파인애플을 또 심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을까요. 자기 꺼 따먹고 또 와서 따먹어요. 화를 참지 못하고, 안식년에 선교사가 왔다가 미국에 왔다가 세미나 크리스찬 라이프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교훈을 받아요. 거기서 어떤 은혜를 받느냐 하면 '모든 건 하나님 거다. 니 것도 없고, 내 것도 없고 하나님 거다.' 철저하게 그것을 깨달았어요.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 말씀이 그에게 부디쳐 왔어요. 그래서 파인애플 생각하면서 화가 나서 왔다가 내가 이걸 너무 내 꺼, 니 꺼 내 꺼 이것을 주장했구나. '이건 당신 꺼, 이건 내 꺼' '당신 꺼, 내 꺼' 그래서 하나님의 건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와서 다 따먹을 수도 있지, 이 마음이 바뀌어 갖고 갔어요. 그래 다시 뉴기니아의 농장에 가서 다시 또 파인애플을 심었어요. 그래 따먹어요. 하나님 꺼 하나님의 자녀들이 와서 먹는구나, 내비뒀어요. 그러니까 신기하거든 선교사가 화를 안내니까. 신기해 갖고서, 물어봐요, "선교사님 왜 화를 안내십니까" 그러니까 "아1 이거 다 하나님 꺼라 내가' 아니 하나님 꺼라고 그러는게 아니라 그 전에 이런 말을 합니다. "뭐 이건 다 내가 누구한테 주었다"고 그랬어요. "내가 누구한테 다 줬기 때문에 나는 걱정이 없다고" 그러니까 빤히 쳐다보더니 "선교사님, 이제야말로 크리스챤이 되셨군요." 그래요. "이제 크리스챤이 되셨군요." 그래요. 그 다음에 또 와서 다시 와서 물어봐요. "아까 선교사님이 드렸다고 그랬는데 도대체 누구한테 드렸냐"고 "다 드렸다고 그랬는데 누구한테 드렸냐"고 그래서 "아, 하나님께 드렸다."고, "창조주 하나님께 드렸다"고 그러니까 막 수근거리고 걱정을 하기 시작해요. 자기들이 도둑질한게 누구 걸 도둑질 한 거예요. "아 우리가 하나님 걸 도둑질했구나." 그 다음에서부터 뭐가 일이 안되면 낚시질 가서 고길 못 잡고 왔다든지, 남편이 발목을 삐든지 그러면 서로 수근 거려요. "우리가 하나님 거 도둑질해서 그렇다"고 "하나님 거 도둑질해서 그렇다."고 "하지말자!" 그래서 다 끝났어요. 그래서 도둑질 안하고 다 갖고 와서 선교사님 이건 다 선교사님 거니까 선교사님 잡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이건 내 꺼 아니라'고 여러분도 같이 먹자'고 그러면서 파인애플을 오래간만에 같이 다시 먹으면서 감사한다는 얘기예요. 그런 짤막한 얘기예요.
그런데 너무나 축복이 되는 얘기예요. 우리가 '니 꺼 내 꺼' 그러다가 밤낮 신경질내고 그러는데, 다 하나님의 거다. 파인애플 스토리예요. 얼마나 재미있는 스토리예요. 그래서 제가 이 얘길 읽고 너무 축복을 받아 갖고, 우리 와이프하고 결혼 초기에 막 싸움이 일어나고 그러면 우리가 약속을 했어요. 서로 니 꺼 내 꺼, 니가 잘났다. 내가 잘 났다. 이런 일이 생겨서 당신과 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때는 우리가 이 스토리를 기억하자. 그래서 그 때마다 우리가 누군가가 이걸 기억하기 위해서 "파1" 그러면 파인애플 스토리를 기억하자. 그래서 한 10년 동안은 열심히 그랬어요. 요즘은 안 하는데, 이 책 읽고 나서 우리는 10년 동안은 우리는 부부 싸움이 일어나고 신경질 나고 그러면 쳐다보다가 "파1" 그러면. 그 문제를 해결해요. 다 같이 "파1" 옆에 사람 쳐다보고 "파1" 무슨 뜻이예요. 파인애플 스토리를 기억하십시다. 이 말이예요. 그래야 우리 모두가 승리할 수 있어요. 우리 모두가 승리해요. 우리 모두가 승리합니다. 물론 이 문제는 법정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주의할 점은 이것이 넌 크리스찬하고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세상에 살다보면 넌 크리스찬과의 문제는 법정에서 해결돼야 해요. 그럴 경우들이 많아요. 바울도 어땠어요. 바울이 로마의 법정에 끌려갔잖아요. 불신자들에 의해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데에서는 바울이 자기의 문제를 억울한 점을,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해결해 달라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신자하고의 문제는 다루어질 수도 있어요. 또 물론 신자들끼리의 문제도 완전히 법정에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하느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오늘 이 시대가 법적인 문제가 초대 교회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고, 또 사람이 악해졌습니다. 이런 신자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꾸만 신자니까 고발 안 할테지, 수요일날 성경공부하고 있으니까 고발 안 할테지, 그러니까 저사람을 골탕 먹이자. 의도적으로 뭐 이럴 때도 하지 말아야 하느냐 전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그러나 본문의 교훈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할 수 있으면 가지 말아야 돼요. 할 수 있으면 법정 가지 말아야 돼요. 할 수 있으면 우리끼리 해결해야 돼요.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지혜를 빌려 해결해야 돼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되면 내가 지금은 손해 당하는 것 같지만, 지금은 희생당하는 것 같지만, 뭐예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 인생을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파인애플 스토리를 다른 말로는 다른 제목을 '합당한 희생' 내가 희생을 했지만, 내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은 합당한 희생, 가치 있는 희생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희생했더니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셨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권사님들 싸움하지 않고 누군가가 희생을 하고 "그래 내가 잘못 했지" 라고 했으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지킬 수가 있었겠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 살다가 보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아야 해요. 크리스찬이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아야, 극복할 줄 알아야 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교회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주의 영광을 나타낼 줄 아는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대교인들은 혹은 유대인들은 유대적 전통, 유대교의 문화적 관습에 의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면 법정에 가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족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소위 히브리적 전통 유대사람들의 전통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뭐 정 안되면 교회 시나고그죠 회당에 가서 지도자들에게 해결을 받는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마을의 지도자, 마을 지도자에게 찾아가서 마을의 어른 장로, 장로 그러면 교회 지도자를 생각하지 마시고, 마을의 어른 지도자에게 찾아가서 상담을 하고 '이런 문제 어떻게 해결하면 좋습니까' 하고 그분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해결하는 것이 대부분의 그 문제해결의 방식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희랍전통은 달랐습니다. 희랍문화는 법을 만들었고, 법정문화를 발달시켜왔습니다. 아주 상세하고 자세한 법을 만드는 것, 이것이 희랍문화권 안에서 발전되어 갑니다. 희랍사람들은 거의 모든 문제들을, 아주 사소한 문제들까지도 법정에 가서 해결하는 것이 희랍적 삶의 양식, 헬라적 삶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한 복판에 법이 들어와 있었고, 법정 문화가 있었어요. 지금도 그 옛날 성경 시대의 도시들을 발굴하게 되면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이 소위 재판에 관련된 여러 가지 기념비라든지, 재판석, 베마 재판관들이 앉아 있었던 돌, 이 베마 이런 것들이 많이 발굴이 됩니다. 과거에 헬라의 극작가 가운데 아리스토파네스라는 극작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작품 가운데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헬라 사람 두 사람이, 그리스 사람 두 사람이 헬라가 한참 알렉산더를 통해서 전세계를 정복하고 헬라 문화가 전세계로 퍼져갈 때, 어떤 특정한 나라가 헬라 영역에 속해 있는지, 그리스의 영토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방법에 관해서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물어요. '그 나라가 혹은 그 지역이 헬라 땅이냐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할 때 상대방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거기 법정이 있소' 하고 묻습니다. 재판소가 있느냐 재판소가 없다면 아, 거기는 헬라가 아니라고, 거기는 그리스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 정도로 법정 문화가 삶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 헬라문화의 전통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까지 다 법정에 가서 해결을 했다는 말이죠. 근데 이것은 유대적 전통,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통의 모습은 아닙니다. 유대적 전통은 문제가 생기면 가급적 어디서 해결을 해요 가족 안에서 또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 삶의 방식이었단 말이죠. 자, 고린도 교회 안에 신자들끼리 문제가 생겼어요. 틀림없이 문제가 생겼어요. 자,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을 할 것이냐 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핵심적인 강조점은 어디 있느냐 8절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8절을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다 뭐가 강조됐어요. 저희는 너희 형제다. 저희는 너희의 형제들이 아니냐.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형제들이 아니더냐 그러면 어떻게 해결하라는 것이예요. 그러면 가족 안에서 형제들끼리 잘 해결하란 말이예요. 잘 해결하라. 그것도 해결 못하고 어떻게 크리스챤이라고 하느냐 말이지. 잘 좀 해결해 보라. 이것이 바울 사도의 권면의 초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뭐 아마 문제가 좀 복잡하고 해결이 안되고 그러니까, 어떤 주장을 했을까요. 한 사람이 둘 중 한 사람이 뭐예요. 틀림없이 고발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법정에 갈 수밖에 없었던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 바울의 문제는 꼭 그 문제를 가지고 법정까지 가야만 했었더냐 잘못했든 잘못하지 않았든 법정으로 그 문제를 가지고 간 사람도 책임이 있다. 심지어 바울은 그것도 죄다. 그것도 죄다. 나중에 다시 나옵니다마는, 바울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 그것이 죄인데, 그 죄는 거의 지금까지 말한 음란의 죄라든지 뭐 이런 죄와 마찬가지의 죄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8절 이하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보세요. 지금 법정 송사 문제를 얘기하다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이런 여러 가지 유형의 죄들과 법정 송사의 죄를 동일한 수준에 놓고 바울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법정에 가지 말라고, 할 수 있으면 그 문제를 우리 안에서 해결해야지 법정까지 가지 않아야 한다고 바울이 강조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오늘의 초점이예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첫째 이유. 그것은 성도의 신분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신분을 부인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이 누구냐 우리가 누구냐 크리스챤들이 도대체 누구냐 이 사실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이예요. 2절에 보면, "우리는 세상을 판단을 할 자다." 우리가 세상을 판단할 사람들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온 세상을 한 날에 심판하고 판단할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너희들이 그 문제 하나를 해결 못하고 뭐예요. 가서 세상 법정에서 그 문제를 해결함을 받겠다고 거기까지 끌고 가겠느냐 이말이죠. 그것은 성도답지 못하다. 성도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행위다. 성도의 신분을 부인하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우리가 온 세상을 판단할 사람들이예요. 한 날에. 여러분 혹시 판사님을 부러워 해본 분이 계실지 몰라요. 아1 판사, 저도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가 밤낮 '너도 판사돼라, 판사돼라' 그래서 그런 학교 들어갈려다가 떨어진 경험이 있는데, 지금은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어차피 나는 판사가 될테니까. 온 세상을 판단할 자리에 결국은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성경의 선언이예요. 우리가 온 세상을 판단하게 된다. 심지어 3절에 보시면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게 된다. 천사들도 판단하게 된다. 왜 이런 배경이 나왔냐 하면, 우리가 아는 시편에 보시면, 시편 8편 5절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우리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다. 여러분 천사들의 존재, 천사들은 육체가 없기 때문에 자유한 존재죠. 상당히 자유스러워요.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아무데나 막 다닐 수가 있는 인간보다 어떤 면에서 우월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면 우리가 그 천사들조차 한 날에 판단하게 될 것이다. 판단하게 될 것이다. 천사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판단하는 자리에 우리가 서게 될 존재들이다.
마태복음 19장 28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이 당신의 열 두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세상이 새로워진다.' '그날에 나를 좇는 너희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어떻게 해요. '심판하게 된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정도에서 약속이 끝나지 않습니다. 특별히 계시록에 보면 계시록 한번 찾아보세요. 요한계시록 2장,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 계시록 2장을 보세요. 26절부터 보시면 요한계시록 2장 26절에 보시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 가운데서 그 당시에 많은 신앙적인 박해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신앙의 승리를 권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무슨 권세를 주신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 우리가 온 세계를 다스리는 자리에 서게 된다. 자 3장, 요한계시록 3장 21절 보세요. 계시록 3장 21절 같이 읽어요. 시작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제가 언젠가 이 말씀을 드렸는지 모릅니다만, 중동 지방에 그 왕들이 전통적으로 앉는 의자는 왕 혼자만 앉는, 스페이스가 왕 혼자만 딱 앉으면 맞는 그런 의자가 아니라 좀 옆으로 넓은 의자예요. 그런 의자를 중동 지방의 왕들이 많이 앉았습니다. 지난번 터키 성지 순례를 할 때에도 제가 그 안내를 하면서 제 뒤에 따라오는 분들에게 그 의자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상당히 넓은 의자예요. 충성스러운 신하, 공을 세운 신하에게 왕이 포상하는 특권 중의 하나는 뭐냐면, 신하보고 '이리 올라올지어다. 내 옆에 앉을 지어다.' 그래서 왕의 옆에 같이 앉아요. 자, 그 보좌가 어떤 보좌입니까 왕은 거기 앉아서 뭐예요. 왕은 거기 앉아서 온 나라를 통치합니다. 그 통치의 상징인 왕이 앉는 보좌, 신하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 최고의 특권이 있다면 뭐예요. 신하보고 "올라 오라! 옆에 앉을지어다." 그러면 옆에 딱 앉는단 말이예요. 그 순간만은 그 사람도 뭐예요. 왕이예요. 왕과 같이 앉아서 왕이예요. 그 자리에서 명령하면 왕의 권위가 있는 거예요. 왕의 권위가 있다. 여기 신앙의 승리자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시기를 그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겠다. 그것이 성경에 왕 노릇 한다는 표현으로 나오죠. 나중에. 계시록 20장 보세요.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보세요. 자 요한계시록 20장 6절입니다. 다 같이 시작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로다" 자 신앙에 승리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는 삶이 약속돼 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진짜 믿으십니까 정말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굉장한 사람들이네요. 온 세상을 다스릴 자들이예요. 그렇게 비리비리 앉아 있을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예요. 우리가. 왕노릇 할 분들이란 말이죠. 주님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하고 만국과 열방들을 다스리는 놀라운 권세를 한 날에 누리게 될 것이다. 한번 옆에 있는 분 쳐다보시면서 '굉장한 분이시네요.' 한번 해 보세요. 근데 왜 이렇게 쪼다 같이 앉아 계십니까 네, 왕노릇 할 사람들이다. 이런 당당한 신분, 이런 영화로운 신분, 이런 굉장한 정체성을 가진 왕 같은 제사장 아니 실제로 왕 노릇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는 자들. 온 세상을 판단하고 다스릴 자들이 겨우 문제 하나 해결 못하고 세상 법정에 나가서 '판사님, 이 문제 해결해 주세요. 제가 억울해요' 그래야 할 사람들이냐 이 말이죠. 성도의 신분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말이죠.
둘째로, 왜 법정에 가지 말아야 하느냐
둘째 이유 성도의 무지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5절 같이 읽어보세요. 본문의 5절, 고린도전서 6장 5절, 다 같이 시작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한다. 너희 가운데서 두 사람 사이에 성도들끼리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좀 판단하고 도와줄 지혜 있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그렇게 없더냐. 그래서 세상 법정으로 갔더냐. 부끄러운 일이로다. 부끄러운 일이로다. 이 말이죠. 실제로 요즘 우리 주변에 그리스도인들끼리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래서 온 나라 앞에 부끄러움이 되고 있는 문제를 보십시오. 성경 말씀이 얼마나 진리예요. 얼마나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어요. 한국교회 자존심에 먹칠을 당하고, 전도에 방해가 되고 말이죠. 그게 할 일이예요. 그게. 권사님들이 하실 일입니다. 그 중에 나하고 성경공부한 사람도 있어요. 우리 교회에서도 나올까봐 걱정이예요. 나는. 부끄러운 일이다 말이죠.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 너희 중에 이것을 중재할 사람이 도대체 없더냐 이말이죠.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고린도전서 1장서부터 지혜가 강조되었습니다. 지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지혜에 대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누가 더 똑똑하냐라는 그 지혜의 자랑을 하고 지혜의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막상 인간관계가 비틀리고 외곡될 때, 그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교회 공동체가 막대한 피해와 충격을 주고 있었단 말이죠. 그러면 너희들의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지. 자랑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지. 부끄러운 일이다. 말이지. 부끄러운 일. 얼마나, 그때나 지금이나 성경의 말씀은 얼마나 그대로 진리입니까 어1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안에 법조인들이 법조인 선교회를 만들고 주일 날마다 법적인 문제에 관해서 무료로 상담과 카운슬링을 해 드리고 있습니다. 또 가정 상담실이 있어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연구하고 공부를 하신 그런 분들이 가정 문제도 돕고 있고, 일차적으로 우리가 그런 분들을 통해서 도움을 얻으려고 노력을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법정에 가기 전에 이런 문제를 우리끼리 되도록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세상 앞에 부끄러움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4절에 보시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교회적 안목에서 볼 때는 판사라고 할지라도, 세상 판사라고 할지라도 그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예요. 거듭난 사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들이 더 중요한 사람들인데,
그런데 세상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느냐 부끄러운 일이로다. 왜 우리가 법정에 가는 것을 조심해야 되느냐 세 번째 이유. 그것은 성도 모두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모두의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6절의 말씀입니다. 6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그 다음 7절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여기 7절 말씀에 허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너희가 피차에 송사함으로, 서로 서로 그 문제를 가지고 고발함으로 법정에 간 그 자체가 완연한 허물이다. 완연한 허물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허물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다른 단어로 바꾼다면 패배라는 말이예요. 완전한 패배라는 말이예요. Defeat! 패배로다. 이것은 '너희들이 다 졌다.' 둘 다 이미 졌다. 이 말이예요. 뭐, 처음에는 동기가 어쨌든, 누가 실제로 잘했든 잘못했든지 간에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법정까지 갔다는 그 자체가 두 사람이 다 패배한 것이다. 두 사람이 다 패배한 것이다. 비록 법정에서 한 사람의 승리로 끝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볼 때,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또 세상적으로 볼 때 그것은 두 사람이 다 패배한 것이다. 그 말이죠. 이미 그것은 패배다 그 말이죠. 이것은 부부싸움하고 똑 같아요. 부부 싸움에서 승리자가 있습니까 부부가 싸워서 한 사람이 승리했다고 하십시다. 그게 승리입니까 승리예요 싸워서 한 사람이 승리해서 승리자가 되어서 갈라졌습니다. 승리입니까 부부싸움에는 승자가 없어요. 부부싸움에는, 부부싸움에는 패자가 둘 다 패배자가 될 뿐이예요.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에 그것을 극복하면 두 사람이 다 승리자가 되거나, 두 사람이 다 패배자가 되는 게임, 그것이 부부의 게임이예요. 두 사람이 다 승리자가 되거나, 두 사람이 다 패배자가 되던가, 그리스도인들끼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의 문제도 결국 두 사람이 다 승리자가 되던가, 아니면 두 사람이 다 패배자가 되던가. 그러니까 법정까지 가는 추태를 부리기 전에 미리 그 문제 해결하면 두 사람이 다 승리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뭐예요. 두 사람이 다 패배자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완전한 패배다. 그것을 해결 못하고 법정에 갔어. 완전한 패배로다. 이 말이예요. 바울이. 강력한 강조가 있어요. 그것은 이미 완전한 패배를 드러낸 것이다. 온 나라 앞에 그리스도인들의 패배를, 교회의 패배를, 그리스도인들의 시시함을 나타낸 것이란 말이예요. 그런 문제 치사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온 세상 앞에 부끄러움을 드러내놨단 말이죠. 그러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여기 7절에서 무슨 단어가 강조됩니까 차라리! 차라리 한 사람, 둘 중의 한 사람이 뭐예요. 차라리 손해를 보지, 차라리 희생을 하지, 차라리 속아버리고 말지,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고 교회의 이미지를 명예를 수호하고, 크리스챤의 자존심을 지켰더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말이예요. 이 세상에서 손해를 좀 볼지 모르죠. 그렇게 해서. 자존심 좀 구길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지킬 수 있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을1. 두가지 강조된 단어가 차라리, 차라리 두 번 반복되죠. 그 단어가 한 번 입니까 두 번입니까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쏙는 것이 낫지 않느냐. '차라리 차라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그런데 왜 그것이 문제를 풀지 못하냐면 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존심의 문제예요. 존심.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자존심. 내가 자존심을 굽힐 수 없다. 이거죠. 특별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자꾸만 권리를 부추기는 시대입니다. 권리. 권리. 아동의 권리, 여성의 권리. 그래서 내 권리를 놓칠 수 없다. 내가 희생당할 수가 없다. 이것이 사람들의 심리예요. 되도록 이면 손해 안보고 되도록 이면 자존심 안 짓밟히고 그러다가 교회를 짓밟고 만단 말이죠. 교회의 분위기를 짓밟고 말이죠. 제가 굉장히 저에게 신앙 생활의 여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책자 하나가 있어요. 아주 작은 책이예요. 우리 책방에 있어요. 제목이 '합당한 희생 파인애플 이야기'. 제가 이 책의 스토리를 발견하고 너무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아 갖고, 우리 교회 김두화 목사님께 부탁해서 옛날에, 아주 옛날, 아득한 옛날에 한 처음 옛날 태초에 번역을 한 책입니다. 파인애플 스토리. 얼마나 책이 내용이 재미있는지 몰라요. 쉽게 말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아프리카의 뉴기니아라는 정글지대에서 일어난 실화입니다. 실화. 한 선교사님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의료 선교사님이 파인애플이 먹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기 클리닉 옆에다가 파인애플 농장을 만든 거예요. 파인애플 농장. 그래 세월이 지나가요. 3년이 지나야 파인애플을 따먹을 수가 있어요. 그 3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파인애플, 파인애플' 꿈에도, 깨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파인애플을 기다려요. 3년 만에 드디어 파인애플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그래 딸 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딸 때가 딱 돼서 가보니까 없어졌어요. 다 없어졌어요. 거기 원주민들이 다 따먹은 거예요. 화가 났어요. 어떤 놈들이 따 먹었느냐 말이죠. 예, 결국 자기가 병원에서 치료해 주는 사람들이예요.다. 그 사람들, 자기가 도와주는 사람들이 가서 다 따먹은 거란 말이예요. 그래 막 조사를 해 봐요. 그래 조사를 해 봤더니 그 파인애플 농장을 만들 때 거들고, 다 거 심고 자기가 수고비까지 주었던 그 사람들이 다 따먹은 거란 말이죠. 도대체 왜 따먹었느냐 말이지, 당신들 수고비까지 주면서 내가 일했는데, 근데 정글의 법칙은 심은 사람이 주인이다. 우리가 심었으니까 우리가 주인 아니냐 말이예요. 딱 그 머리 속에 그 생각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심었으니까 우리 거다. 그래 확 나 갖고서 말이죠. 어쩔줄을 몰라요. 병원 문을 닫아 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그 밭에 못 오도록 셰파트를 갖다가 경계를 개를 갖다 놓고 경계를 해 보기도 하고, 그래도 안돼요. 그래 나중에는 꽤를 내 갖고, 반반씩 갈라먹자! 파인애플을 또 심으면서 이번에는 반은 당신거고 반은 우리꺼다. 잘 설명을 했어요. 근데 또 다 따 먹었어요. 자기 꺼 반도 다 따 먹고 또 와서 선교사 걸 따먹는다 말이예요. 어1 그러니까 얼마나 화가 나요. 참고참고 하다가 안돼서 그러면 다 가지라고 이건 포기하고 다른 데 하면서 이제 이건 당신들 거고, 이제 이건 내 꺼라고, "당신 꺼, 내 꺼당신 꺼, 내 꺼" 교육을 시킨 다음에 그 밭을 포기하고 또 새로 파인애플을 또 심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을까요. 자기 꺼 따먹고 또 와서 따먹어요. 화를 참지 못하고, 안식년에 선교사가 왔다가 미국에 왔다가 세미나 크리스찬 라이프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교훈을 받아요. 거기서 어떤 은혜를 받느냐 하면 '모든 건 하나님 거다. 니 것도 없고, 내 것도 없고 하나님 거다.' 철저하게 그것을 깨달았어요.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 말씀이 그에게 부디쳐 왔어요. 그래서 파인애플 생각하면서 화가 나서 왔다가 내가 이걸 너무 내 꺼, 니 꺼 내 꺼 이것을 주장했구나. '이건 당신 꺼, 이건 내 꺼' '당신 꺼, 내 꺼' 그래서 하나님의 건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와서 다 따먹을 수도 있지, 이 마음이 바뀌어 갖고 갔어요. 그래 다시 뉴기니아의 농장에 가서 다시 또 파인애플을 심었어요. 그래 따먹어요. 하나님 꺼 하나님의 자녀들이 와서 먹는구나, 내비뒀어요. 그러니까 신기하거든 선교사가 화를 안내니까. 신기해 갖고서, 물어봐요, "선교사님 왜 화를 안내십니까" 그러니까 "아1 이거 다 하나님 꺼라 내가' 아니 하나님 꺼라고 그러는게 아니라 그 전에 이런 말을 합니다. "뭐 이건 다 내가 누구한테 주었다"고 그랬어요. "내가 누구한테 다 줬기 때문에 나는 걱정이 없다고" 그러니까 빤히 쳐다보더니 "선교사님, 이제야말로 크리스챤이 되셨군요." 그래요. "이제 크리스챤이 되셨군요." 그래요. 그 다음에 또 와서 다시 와서 물어봐요. "아까 선교사님이 드렸다고 그랬는데 도대체 누구한테 드렸냐"고 "다 드렸다고 그랬는데 누구한테 드렸냐"고 그래서 "아, 하나님께 드렸다."고, "창조주 하나님께 드렸다"고 그러니까 막 수근거리고 걱정을 하기 시작해요. 자기들이 도둑질한게 누구 걸 도둑질 한 거예요. "아 우리가 하나님 걸 도둑질했구나." 그 다음에서부터 뭐가 일이 안되면 낚시질 가서 고길 못 잡고 왔다든지, 남편이 발목을 삐든지 그러면 서로 수근 거려요. "우리가 하나님 거 도둑질해서 그렇다"고 "하나님 거 도둑질해서 그렇다."고 "하지말자!" 그래서 다 끝났어요. 그래서 도둑질 안하고 다 갖고 와서 선교사님 이건 다 선교사님 거니까 선교사님 잡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이건 내 꺼 아니라'고 여러분도 같이 먹자'고 그러면서 파인애플을 오래간만에 같이 다시 먹으면서 감사한다는 얘기예요. 그런 짤막한 얘기예요.
그런데 너무나 축복이 되는 얘기예요. 우리가 '니 꺼 내 꺼' 그러다가 밤낮 신경질내고 그러는데, 다 하나님의 거다. 파인애플 스토리예요. 얼마나 재미있는 스토리예요. 그래서 제가 이 얘길 읽고 너무 축복을 받아 갖고, 우리 와이프하고 결혼 초기에 막 싸움이 일어나고 그러면 우리가 약속을 했어요. 서로 니 꺼 내 꺼, 니가 잘났다. 내가 잘 났다. 이런 일이 생겨서 당신과 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때는 우리가 이 스토리를 기억하자. 그래서 그 때마다 우리가 누군가가 이걸 기억하기 위해서 "파1" 그러면 파인애플 스토리를 기억하자. 그래서 한 10년 동안은 열심히 그랬어요. 요즘은 안 하는데, 이 책 읽고 나서 우리는 10년 동안은 우리는 부부 싸움이 일어나고 신경질 나고 그러면 쳐다보다가 "파1" 그러면. 그 문제를 해결해요. 다 같이 "파1" 옆에 사람 쳐다보고 "파1" 무슨 뜻이예요. 파인애플 스토리를 기억하십시다. 이 말이예요. 그래야 우리 모두가 승리할 수 있어요. 우리 모두가 승리해요. 우리 모두가 승리합니다. 물론 이 문제는 법정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주의할 점은 이것이 넌 크리스찬하고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세상에 살다보면 넌 크리스찬과의 문제는 법정에서 해결돼야 해요. 그럴 경우들이 많아요. 바울도 어땠어요. 바울이 로마의 법정에 끌려갔잖아요. 불신자들에 의해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데에서는 바울이 자기의 문제를 억울한 점을,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해결해 달라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신자하고의 문제는 다루어질 수도 있어요. 또 물론 신자들끼리의 문제도 완전히 법정에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하느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도. 오늘 이 시대가 법적인 문제가 초대 교회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고, 또 사람이 악해졌습니다. 이런 신자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꾸만 신자니까 고발 안 할테지, 수요일날 성경공부하고 있으니까 고발 안 할테지, 그러니까 저사람을 골탕 먹이자. 의도적으로 뭐 이럴 때도 하지 말아야 하느냐 전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그러나 본문의 교훈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할 수 있으면 가지 말아야 돼요. 할 수 있으면 법정 가지 말아야 돼요. 할 수 있으면 우리끼리 해결해야 돼요.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지혜를 빌려 해결해야 돼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되면 내가 지금은 손해 당하는 것 같지만, 지금은 희생당하는 것 같지만, 뭐예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 인생을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파인애플 스토리를 다른 말로는 다른 제목을 '합당한 희생' 내가 희생을 했지만, 내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은 합당한 희생, 가치 있는 희생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희생했더니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셨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권사님들 싸움하지 않고 누군가가 희생을 하고 "그래 내가 잘못 했지" 라고 했으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지킬 수가 있었겠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 살다가 보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아야 해요. 크리스찬이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아야, 극복할 줄 알아야 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교회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주의 영광을 나타낼 줄 아는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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