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는 짐, 지는 짐 (마11:25-30)
본문
현대는 스트레스의 사회입니다. 스트레스는 한국말로 짐이라고 번역하면 좋습니다. 현대인들은 짐을 너무 많이 지고 삽니다. 스트레스를 너무 과중하게 받으면서 산다는 말이지요. 미국에서 스트레스 지수를 조사한 걸 봤습니다. 청소년 젊은 이들의 경우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열가지는 대략 이러합니다.결혼(100) 미혼임신(92) 부모죽음(82) 불구될때(81) 부모이 혼(77) 남자외도 임신(77) 알콜마약중독(76) 부모의 입건(75) 부모별거(69) 형제자매죽음(68) 성인의 경우는 또 조금 다릅니다. 배우자죽음(100) 이혼(73) 별거(65) 투옥(63) 가족죽음 (63) 부상,병(53) 결혼(50) 일에 탈진(47) 결혼 재화합(45) 은 퇴(45) 가족건강에 변화(44) 임신(40). 그밖에도 짐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성문제, 새가족얻을 때, 사업의 재정비, 경제적 지위하락, 친한 친구죽음, 직장의변화, 부부논쟁회수 변 화, 부채가 천만원 넘을 때, 부채상환일이 닥칠 때, 직장의 직 무가 바뀔 때, 아들 딸이 집을 떠날 때, 법적인 문제가 생길 때, 탁월한 성취, 부인이 직장을 그만 둘 때, 자녀학교시작 졸 업, 생활환경의 변화, 습관을 고칠 때, 상관과의마찰, 직장환경 변동, 거주지역바뀔 때, 자녀학교바뀜, 오락취미바뀜, 교회활동 이바뀔때, 사회활동이바뀔 때, 부채가 천만원 이하일 때, 잠습 관변화, 한께살던가족이바뀔 때, 식사습관이바뀔 때, 휴가, 크 리스마스,경미한 법적문제 수 십 가지가 됩니다. 짐을 벗겨 줍니다. 우리 주님은 스트레스를 져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율법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인생의 짐입니다. 苦海의 짐입니다. 짐은 부담입니다. 부하라고도 합니다. 짐이 가벼우면 괜 찮지만, 과부하 되 면 견딜수가 없습니다. 제가 노동상담을 하다보니, 직업병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원 래 산업재해는 업무상재해와 업무상 질병으로 나뉘는 데, 직업 병은 업무상 질병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보통 직업병, 직업병 하는 데, 징확하게 말하자면 업무상 질병이예요. 병은 병인 데 업무와 연과되어 일어난 병이라는 겁니다. 옛날의 업무상 질병 은 주로 중금속이나 유해물질을 다루는 작업장이나, 허리나 손 발 등 특정 부위만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사업장의 사람에게 일 어났습니다. 그러나 최근래의 직업병은 좀 다릅니다. 과로와 스 트레스로 일어납니다. 뇌출혈 및 심장계통의 이상은 전부 과로 나 스트레스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직업병을 인정받으려면 과로의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상사가 얼마나 야단쳤고, 일 독촉을 얼마 했고 등 일과 관련해서 이 사람이 얼마나 스트레스 를 받았나 하는 걸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사람 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일의 량이 몇 시간이상, 스트레 스의 량은 얼마 이상 이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걸 받은 사람 의 견디는 능력에 따라 조그만 과로 조그만 스트레스에도 돌연 사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과부하입니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쉼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쉼표와 느낌표가 많 아야 삶의 질이 높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하고, 쉬지 않고 고민하고, 쉬지않고 짐을 지고 서는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나의 위치가 전부인 줄 압니다. 내 지금의 역할 이 바로 나의 존재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불안이 있습니다. 역할은 역할일 뿐입니다. 역할은 나의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내가 부장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아내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노조 간부 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할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역할이 끝날 때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역할이 기다리 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역할이 내 존재 자체 처럼 됩니다. 이 역할이 아니면 인생이 끝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숨을 끊습니다. 좀 객관화 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내가 지금 여기 있구나, 아 내가 지금 이 역할을 맡고 있구나 이렇게 점검을 해 봐야 합니다. 한국 말 중에 '너죽고 나죽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애인이 변 심하면 끝 까지 아갑니다. 그리고 칼부림을 하고 너죽고 나죽 자 식입니다. 자식이 공부를 좀 못하고 몹쓸 짓을 하면,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 데 하며 너죽고 나죽자입니다. 이혼을 하게 되도 너죽고 나 죽자입니다. 죽일려는 상대편도 하나의 독립된 개체입니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도 죽을 필요가 없어요. 나는 그 상대방의 부속물이 아닙니다. 최 후의 순간에도 나는 나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현실로 당하면 어렵습니다. 너무 소중해서 그렇습니다. 자 한번 보세요. 97년 최근에 일어난 자살 사건의 신문 보 도 머릿글입니다. 입시스트레스 우울증증세 고교중퇴생 투신자살, 딸 혼수고 민 아버지 비관자살, 가게임대료 못내 고민 탕수육집 주인 자 살, 부모이혼 여중생 외로움 투신자살, 70代 치매노인 2명 투신 자살, 신병비관 노부부 자식들에 부담 안주려… 동반자살, 간경변환자인 남편 술을 끊게 하기 위해 자살,뇌수막염 아들 고통 못보겠다母子 동반자살, 경영난 비관 40代 中企사장 목매 자살, 20代주부 거식증고민 자살, 승진누락 비관 40대회사 원 자살, 명퇴 40대,퇴직금 주식투자 끝내 자살, 과기원교수 실력비관 자살…가르칠 것이 걱정 쪽지남겨. 이것이 오늘의 각박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대는 생존 경쟁의 시대입니다. 짐이 너무 커졌습니다. 신문에 보도된 자살만도 이렇습니다. 개인에 따라 다 다르지만 더 이상 인생의 수레 바퀴를 끌어 갈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 때문에 삶 을 중단한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도 보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로 오너라"했습니다.(28절) 비신앙인이든 신앙인이 든 우리 주님의 이 말씀에 좀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아 니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이 현실적인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 습니다. 삶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찌들린 너와 나의 모습 이 너무 안스럽습니다. 생명을 포기하기 까지 하는 걸 보니 너 무 안타깝습니다. 짐을 지고도 가볍게 가면 문제가 없겠지요. 너무 무거워서 그렇습니다. 견디기가 힘들어서 그래요. 과부하 입니다. 한번 보십시다. 짐의 종류와 짐의 모양이 다를 뿐이지, 창세기 이래로 인간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지 않는 시대가 있었습 니까 짐중에도 가장 큰짐은 존재의 짐입니다. 존재하는 것 자 체가 짐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 자체가 짐입니다. 에덴 동 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에덴동산의 바깥 생활 자체가 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삶 자제가 짐이요, 저주였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 덤풀과 엉컹퀴를 내리라"(창3:18) 죄와 죽음과 심판의 처절한 운명을 안고 가는 인간 자체가 견 디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기본 짐에다 자신의 짐을 덤으로 더 얹어 놓습니다. 소유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짐의 무게를 더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기본적 인 짐을 해결 하면 짐은 훨신 가볍워 집니다. 이제 짐을 내려 놓으세요. 우리 주님이 져주십니다. 이제 스트 레스에서 해방 되세요. 우리 주님이 풀어주십니다. 그리고 때로 좀 쉬어 보세요. 제가 '교회 좀 나오세요' 그러면 '바빠서요' 그럽니다. 얼마나 바쁘면 쉬자는 데도 바쁘다고 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주일에 꼭 쉽니다. 거룩하게 쉬니까 얼마나 잘 쉬는 거예요. 영혼이 안식을 하니 잘 쉬는 겁니다. 한 주일을 돌아 보고 또한 주일을 준비하는 겁니다. 확실한 재충전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예배 순서 시작에 보면 '예배는 우리 삶의 초 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라고 꼭 써넣습니다. 그래요. 주일 예배가 확실하면 한 주일의 삶의 초점도 분명해 질 겁니다. 이게 거룩한 안식이예요. 칠일에는 거룩하게 영혼의 안식을 취하며 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짐을 벗는 행위입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한사람은 지지 않을려고 새벽부터 한밤중 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 분 일하고 10 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 가면서 일했습니다. 두사람은 결과를 비 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요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더랍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 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다른한친구 가 점잖게 설명했습니다. " 나는 10 분씩 쉴때마다 도끼날을 갈 았다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과 쉼의 리듬이 중요합니다. 일도 중요하지만 쉼은 더 중요합니다. 엿새 도 중요하지만 하루의 거룩한 안식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주님은 분주한 그대를 향해 쉼의 초청을 하고 있는 것 이지요. 주님 안에서의 거룩한 안식입니다. 기억하세요. 나는 정말 거룩한 쉼을 쉬고 있는가 자문해 볼 일입니다. 더구나 주 님의 자녀된 우리가 아직도 이 주님의 쉼의 초청을 누리지 못하 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 보십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6.25 때 한국에 온 미군들이 군 트럭 짐칸에 사람들을 태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이 한참가다 뒤를 돌아보니 차 뒤 짐칸 에 탄 한국인들이 모두다 여전히 짐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있었습니다.이상히 여긴 미군은 차를 세우고"왜 짐을 내려놓지 않고 여전히 힘들게 머리에 이고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러 자 그들은 대답하길 "차에 태워주는 것만해도 감사한데 어떻게 그럴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고도 짐을 다 그대로 지고 있으면 믿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온갖 스트레스를 다 쌓으면서 산다 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짐을 벗겨 주시는 주님에게 몸을 맡기세 요, 우리의 짐을 져 주십니다. 이제는 짐을 내려 놓고 안식할 때입니다. 우리의 짐을 지고서는 주님의 짐을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짐을 질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짐을 지게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서 다 져주신다고합니다. 그러면 끝입니까 아닙니다. 짐을 내려 놓게 하고, 복을 주고 그게 다 라면 미신과 다를 바가 무에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그 런 종교가 아닙니다. 그 다음은 기쁨으로 지는 하나님 나라의 짐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짐입니다. 신앙은 짐을 벗으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짐을 벗고 동시에 주님의 짐을 집니다. 섬김, 베품, 나눔, 희생, 고난, 좁 은 길, 이건 전부 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걸 짐으 로 여기지 않아요. 기쁨으로 합니다. 취미 생활 처럼 앤돌핀이 나오는 짐이예요. 운동 처럼 즐겁고 좋아요. 자발적인 짐입니다. 감격적인 짐이예요.
보세요, 전부 마음이 문젭니다. 똑 같은 곳에 놀러가도 기분에 따라 짐이 되기도 하고 놀이가 되기도 합니다. 유쾌하지 않은 사람과 가면 짐이 되고 즐거운 사람과 가면 놀이가 됩니다. 등 산, 수영, 조깅도 즐거움으로 하면 운동이지만, 강제로 하면 노 동이 됩니다. 새벽기도도 즐거움으로 하면 기쁨의 기도지만 강 제로 하면 노동이 됩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영혼이 안식을 얻은 후의 짐은 가볍습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 이 쉼을 얻으리니"(29절)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라. 이는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지기 쉽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짐은 지기 쉽습니다. 주님이 주신 짐은 지기 쉽습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예수믿고 나 서 진 짐이 더 무겁습니까 더 어려운 짐입니까 제대로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결과입니다. 짐 자체의 무게가 나가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게운 짐도 쉽고 가볍게 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을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로부터 듣습니다. 사도바울은 고생도 낙이요, 기쁨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서는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이 고해와 같은 세상 빨리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 주세요'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쉬라고 하시면 쉬겠습니다.입니다. 송명희씨 전신장애자면서 그녀가 쓴 주옥같은 시 기억하시지 요 전신불구의 장애자의 몸으로 인생을 지탱하기는 너무 힘겨 운 짐입니다. 그러나 송명희씨는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 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라고 기쁨의 찬송 을 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찬송의 가사입니다. 짐을 져야 합니다. 주님의 짐은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짐입니다. 인간으로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믿고 났더니 온 갖 거추장스러운 것이 다 따라 붙는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걸리는 것이 많고 양심에 찔리는 것이 많고 도통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합니다. 짐입니다. 더 나 아가면 고난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이 짐은 가볍습니다. 이 짐은 지기가 쉽습니다. 이 짐은 지고 나면 보람이 있습니다. 이 짐은 영생의 짐입니다. 이 짐은 기쁨의 짐입니다. 믿음을 가 진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우리 교회의 주보 앞면에는 "예수 그리스도 자유케 하사 섬기 게 하신다(Jesus Christ sets free to serve)"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를 주시고 그래서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의 짐에서, 율법의 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의 짐, 섬기는 짐을 지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자세 히 보세요, 이짐은 우리의 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짐입니다. 근 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짐입니다. 천국의 짐입니다. 우리의 멍 에가 아닙니다. 주님의 멍에입니다. 베드로는 거꾸러 십자가에 매달리는 짐을 졌습니다. 도마는 톱 에 썰려죽는 짐을 졌습니다. 데미안은 몰라카즈 섬에서 일평생 나환자를 섬기는 짐을 졌습니다. 테레사는 캘커타에서 일평생 부랑자와 빈민들을 섬기는 짐을 졌습니다. 그러나 너무 너무 고 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 도 없습니다. 고난도 눈물이요, 어려움도 기쁨입니다. 더 깊은 섬김을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는 짐을 가볍게 지는 교우들을 볼 때면 아름답습니다. 아마 교회 주방의 벽지를 공사하라고 명령 받고서, 먹고 살기 위해 주방 벽지 공사를 했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교회 페인트칠을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꽂을 주일 마다 준 비하라는 걸 의무로 알고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어 요 얼마나 무겁겠어요 그런데 전부 짐이 아니라고 합니다. 몰 래하는 기쁨을 가지고 합니다. 이것이 기쁨입니다. 이것이 가벼 운 짐입니다. 이것이 지기 쉽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일의 내용 은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더 무거울 수 있어요! 그러나 마음 중심에 주님의 일이다. 주님의 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과 나 만의 일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헌 신입니다. 주님과 나 와의 기쁨입니다. 한 번도 이런 경험 못하신 분들이 있지요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짐을 지면서 기뻐지는 경험 이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 이 예수 믿는 기분입니다. 모나미 153(Mon Ami 153) 이야기 잘 아시지요 모나미 볼펜을 자세히 보면 '모나미 153'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모나미 회사 사장님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었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될 때에는 절망에 빠지고 교회도 게을리 했다고 합니다. 짐이 너무 커 서 그렇습니다. 그때 요한 복음이 생각 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절망에 빠진 고기잡이 전 문가 제자들은 갈릴리 바닷 가에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큰 물고기가 153 마리나 잡혔습니다. 요한 복음 21장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자인 제자 요한이 몇 마리인지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히 목격 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나의 친구 되시는 예수님 153 마리 고기 를 잡아 주신 걸 기억해서, 사업의 짐이 무거울 때, 사업이 절 망에 빠질 때, 주님을 모시고 경영을 하면서 풍성한 결실을 얻 고, 또 그 풍성한 사업의 결실을 예수님의 정신 대로 사용하자는 결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짐은 나의 수고로 해결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개 입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무거운 짐을 해결하신 분들은, 우리 주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의 짐을 기쁨으로 지시는 특권을 누리 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사람 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일의 량이 몇 시간이상, 스트레 스의 량은 얼마 이상 이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걸 받은 사람 의 견디는 능력에 따라 조그만 과로 조그만 스트레스에도 돌연 사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과부하입니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쉼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쉼표와 느낌표가 많 아야 삶의 질이 높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하고, 쉬지 않고 고민하고, 쉬지않고 짐을 지고 서는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나의 위치가 전부인 줄 압니다. 내 지금의 역할 이 바로 나의 존재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불안이 있습니다. 역할은 역할일 뿐입니다. 역할은 나의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내가 부장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아내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노조 간부 의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할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역할이 끝날 때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역할이 기다리 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역할이 내 존재 자체 처럼 됩니다. 이 역할이 아니면 인생이 끝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숨을 끊습니다. 좀 객관화 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내가 지금 여기 있구나, 아 내가 지금 이 역할을 맡고 있구나 이렇게 점검을 해 봐야 합니다. 한국 말 중에 '너죽고 나죽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애인이 변 심하면 끝 까지 아갑니다. 그리고 칼부림을 하고 너죽고 나죽 자 식입니다. 자식이 공부를 좀 못하고 몹쓸 짓을 하면, 내가 어떻게 너를 키웠는 데 하며 너죽고 나죽자입니다. 이혼을 하게 되도 너죽고 나 죽자입니다. 죽일려는 상대편도 하나의 독립된 개체입니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도 죽을 필요가 없어요. 나는 그 상대방의 부속물이 아닙니다. 최 후의 순간에도 나는 나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현실로 당하면 어렵습니다. 너무 소중해서 그렇습니다. 자 한번 보세요. 97년 최근에 일어난 자살 사건의 신문 보 도 머릿글입니다. 입시스트레스 우울증증세 고교중퇴생 투신자살, 딸 혼수고 민 아버지 비관자살, 가게임대료 못내 고민 탕수육집 주인 자 살, 부모이혼 여중생 외로움 투신자살, 70代 치매노인 2명 투신 자살, 신병비관 노부부 자식들에 부담 안주려… 동반자살, 간경변환자인 남편 술을 끊게 하기 위해 자살,뇌수막염 아들 고통 못보겠다母子 동반자살, 경영난 비관 40代 中企사장 목매 자살, 20代주부 거식증고민 자살, 승진누락 비관 40대회사 원 자살, 명퇴 40대,퇴직금 주식투자 끝내 자살, 과기원교수 실력비관 자살…가르칠 것이 걱정 쪽지남겨. 이것이 오늘의 각박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대는 생존 경쟁의 시대입니다. 짐이 너무 커졌습니다. 신문에 보도된 자살만도 이렇습니다. 개인에 따라 다 다르지만 더 이상 인생의 수레 바퀴를 끌어 갈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 때문에 삶 을 중단한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도 보니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로 오너라"했습니다.(28절) 비신앙인이든 신앙인이 든 우리 주님의 이 말씀에 좀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아 니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이 현실적인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 습니다. 삶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찌들린 너와 나의 모습 이 너무 안스럽습니다. 생명을 포기하기 까지 하는 걸 보니 너 무 안타깝습니다. 짐을 지고도 가볍게 가면 문제가 없겠지요. 너무 무거워서 그렇습니다. 견디기가 힘들어서 그래요. 과부하 입니다. 한번 보십시다. 짐의 종류와 짐의 모양이 다를 뿐이지, 창세기 이래로 인간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지 않는 시대가 있었습 니까 짐중에도 가장 큰짐은 존재의 짐입니다. 존재하는 것 자 체가 짐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 자체가 짐입니다. 에덴 동 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에덴동산의 바깥 생활 자체가 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삶 자제가 짐이요, 저주였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 덤풀과 엉컹퀴를 내리라"(창3:18) 죄와 죽음과 심판의 처절한 운명을 안고 가는 인간 자체가 견 디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기본 짐에다 자신의 짐을 덤으로 더 얹어 놓습니다. 소유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짐의 무게를 더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기본적 인 짐을 해결 하면 짐은 훨신 가볍워 집니다. 이제 짐을 내려 놓으세요. 우리 주님이 져주십니다. 이제 스트 레스에서 해방 되세요. 우리 주님이 풀어주십니다. 그리고 때로 좀 쉬어 보세요. 제가 '교회 좀 나오세요' 그러면 '바빠서요' 그럽니다. 얼마나 바쁘면 쉬자는 데도 바쁘다고 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주일에 꼭 쉽니다. 거룩하게 쉬니까 얼마나 잘 쉬는 거예요. 영혼이 안식을 하니 잘 쉬는 겁니다. 한 주일을 돌아 보고 또한 주일을 준비하는 겁니다. 확실한 재충전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예배 순서 시작에 보면 '예배는 우리 삶의 초 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라고 꼭 써넣습니다. 그래요. 주일 예배가 확실하면 한 주일의 삶의 초점도 분명해 질 겁니다. 이게 거룩한 안식이예요. 칠일에는 거룩하게 영혼의 안식을 취하며 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짐을 벗는 행위입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한사람은 지지 않을려고 새벽부터 한밤중 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 분 일하고 10 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 가면서 일했습니다. 두사람은 결과를 비 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요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더랍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 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다른한친구 가 점잖게 설명했습니다. " 나는 10 분씩 쉴때마다 도끼날을 갈 았다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과 쉼의 리듬이 중요합니다. 일도 중요하지만 쉼은 더 중요합니다. 엿새 도 중요하지만 하루의 거룩한 안식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주님은 분주한 그대를 향해 쉼의 초청을 하고 있는 것 이지요. 주님 안에서의 거룩한 안식입니다. 기억하세요. 나는 정말 거룩한 쉼을 쉬고 있는가 자문해 볼 일입니다. 더구나 주 님의 자녀된 우리가 아직도 이 주님의 쉼의 초청을 누리지 못하 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 보십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6.25 때 한국에 온 미군들이 군 트럭 짐칸에 사람들을 태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이 한참가다 뒤를 돌아보니 차 뒤 짐칸 에 탄 한국인들이 모두다 여전히 짐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있었습니다.이상히 여긴 미군은 차를 세우고"왜 짐을 내려놓지 않고 여전히 힘들게 머리에 이고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러 자 그들은 대답하길 "차에 태워주는 것만해도 감사한데 어떻게 그럴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고도 짐을 다 그대로 지고 있으면 믿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온갖 스트레스를 다 쌓으면서 산다 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짐을 벗겨 주시는 주님에게 몸을 맡기세 요, 우리의 짐을 져 주십니다. 이제는 짐을 내려 놓고 안식할 때입니다. 우리의 짐을 지고서는 주님의 짐을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짐을 질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짐을 지게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주님께서 다 져주신다고합니다. 그러면 끝입니까 아닙니다. 짐을 내려 놓게 하고, 복을 주고 그게 다 라면 미신과 다를 바가 무에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그 런 종교가 아닙니다. 그 다음은 기쁨으로 지는 하나님 나라의 짐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짐입니다. 신앙은 짐을 벗으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짐을 벗고 동시에 주님의 짐을 집니다. 섬김, 베품, 나눔, 희생, 고난, 좁 은 길, 이건 전부 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걸 짐으 로 여기지 않아요. 기쁨으로 합니다. 취미 생활 처럼 앤돌핀이 나오는 짐이예요. 운동 처럼 즐겁고 좋아요. 자발적인 짐입니다. 감격적인 짐이예요.
보세요, 전부 마음이 문젭니다. 똑 같은 곳에 놀러가도 기분에 따라 짐이 되기도 하고 놀이가 되기도 합니다. 유쾌하지 않은 사람과 가면 짐이 되고 즐거운 사람과 가면 놀이가 됩니다. 등 산, 수영, 조깅도 즐거움으로 하면 운동이지만, 강제로 하면 노 동이 됩니다. 새벽기도도 즐거움으로 하면 기쁨의 기도지만 강 제로 하면 노동이 됩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영혼이 안식을 얻은 후의 짐은 가볍습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 이 쉼을 얻으리니"(29절)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라. 이는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지기 쉽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짐은 지기 쉽습니다. 주님이 주신 짐은 지기 쉽습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예수믿고 나 서 진 짐이 더 무겁습니까 더 어려운 짐입니까 제대로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결과입니다. 짐 자체의 무게가 나가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게운 짐도 쉽고 가볍게 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을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로부터 듣습니다. 사도바울은 고생도 낙이요, 기쁨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서는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이 고해와 같은 세상 빨리 하나님 나라에 데려가 주세요'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쉬라고 하시면 쉬겠습니다.입니다. 송명희씨 전신장애자면서 그녀가 쓴 주옥같은 시 기억하시지 요 전신불구의 장애자의 몸으로 인생을 지탱하기는 너무 힘겨 운 짐입니다. 그러나 송명희씨는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 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라고 기쁨의 찬송 을 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찬송의 가사입니다. 짐을 져야 합니다. 주님의 짐은 우리가 마땅히 져야할 짐입니다. 인간으로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믿고 났더니 온 갖 거추장스러운 것이 다 따라 붙는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걸리는 것이 많고 양심에 찔리는 것이 많고 도통 불편하기 짝이 없다고 합니다. 짐입니다. 더 나 아가면 고난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이 짐은 가볍습니다. 이 짐은 지기가 쉽습니다. 이 짐은 지고 나면 보람이 있습니다. 이 짐은 영생의 짐입니다. 이 짐은 기쁨의 짐입니다. 믿음을 가 진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우리 교회의 주보 앞면에는 "예수 그리스도 자유케 하사 섬기 게 하신다(Jesus Christ sets free to serve)"라고 써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를 주시고 그래서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의 짐에서, 율법의 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의 짐, 섬기는 짐을 지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자세 히 보세요, 이짐은 우리의 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짐입니다. 근 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짐입니다. 천국의 짐입니다. 우리의 멍 에가 아닙니다. 주님의 멍에입니다. 베드로는 거꾸러 십자가에 매달리는 짐을 졌습니다. 도마는 톱 에 썰려죽는 짐을 졌습니다. 데미안은 몰라카즈 섬에서 일평생 나환자를 섬기는 짐을 졌습니다. 테레사는 캘커타에서 일평생 부랑자와 빈민들을 섬기는 짐을 졌습니다. 그러나 너무 너무 고 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 도 없습니다. 고난도 눈물이요, 어려움도 기쁨입니다. 더 깊은 섬김을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는 짐을 가볍게 지는 교우들을 볼 때면 아름답습니다. 아마 교회 주방의 벽지를 공사하라고 명령 받고서, 먹고 살기 위해 주방 벽지 공사를 했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교회 페인트칠을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꽂을 주일 마다 준 비하라는 걸 의무로 알고 짐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어 요 얼마나 무겁겠어요 그런데 전부 짐이 아니라고 합니다. 몰 래하는 기쁨을 가지고 합니다. 이것이 기쁨입니다. 이것이 가벼 운 짐입니다. 이것이 지기 쉽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일의 내용 은 하나도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더 무거울 수 있어요! 그러나 마음 중심에 주님의 일이다. 주님의 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과 나 만의 일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헌 신입니다. 주님과 나 와의 기쁨입니다. 한 번도 이런 경험 못하신 분들이 있지요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짐을 지면서 기뻐지는 경험 이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 이 예수 믿는 기분입니다. 모나미 153(Mon Ami 153) 이야기 잘 아시지요 모나미 볼펜을 자세히 보면 '모나미 153'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모나미 회사 사장님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었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될 때에는 절망에 빠지고 교회도 게을리 했다고 합니다. 짐이 너무 커 서 그렇습니다. 그때 요한 복음이 생각 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절망에 빠진 고기잡이 전 문가 제자들은 갈릴리 바닷 가에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큰 물고기가 153 마리나 잡혔습니다. 요한 복음 21장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자인 제자 요한이 몇 마리인지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히 목격 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나의 친구 되시는 예수님 153 마리 고기 를 잡아 주신 걸 기억해서, 사업의 짐이 무거울 때, 사업이 절 망에 빠질 때, 주님을 모시고 경영을 하면서 풍성한 결실을 얻 고, 또 그 풍성한 사업의 결실을 예수님의 정신 대로 사용하자는 결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짐은 나의 수고로 해결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개 입하셔야 합니다. 자신의 무거운 짐을 해결하신 분들은, 우리 주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의 짐을 기쁨으로 지시는 특권을 누리 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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