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치 말라 (요일2:1)
본문
오늘은 2장 1절 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먼저 1절 내 자녀들아, 나의 자녀들아아마 이나의 자녀들아 하고 자기의 독자들에게 부르는 사람은 사도요한 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실 때에 이렇게 자녀들이라고도 말씀하시고 소자로 어린아이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면 다른 사도들은 자기의 독자들을, 혹은 자기의 교회들을 가리켜서 내 자녀들아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글을 쓸 때에도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낳았다고 해서 신앙으로 아버지 됨을 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자기의 독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내 자녀들아 하고 말한 사람은 사도요한 뿐입니다. 이 말씀은 아마 성경에 나타난 대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에게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쓰신 분은 그리스도가 처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제자를 혹 은 자기의 교회를 가리켜서 내 자녀들아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권 위와 영적인 권위와 그리고 또 사랑의, 깊은 사랑의 관계 때문에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마 대부분 예수님 보다 나이가 많았거나 혹 젊은 사람이 조금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을 가리켜서 자녀들이라 그렇게 말하고 병자를 가리켜서도 소자라고 말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와 같은 동양의 사고방식의 연령관계에서는 도저히 못할 일이지마는 예수께서 그리스도께서 다 그 백성들을 자기의 은혜를 입어야 될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 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큰 권위와 사랑의 관계 때문에도 그렇게 말씀 하셨거니와 그가 그들을 다 구속하실 분으로 그들이 다 자기의 자녀들로 취급하실 수 있으셨기 때문에 라 내 자녀들이라고 하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복음서나 그런데 에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직접 구원받은 백성들을 자기의 자녀들이라고 표현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히브리서가 시편을 인용하면서보라 주께서 주신 내 자녀들 이라고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히브리서가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새 인 류의 아버지로 지목을 하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2천년의 기독교 역사상에 내가 아는 대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새 인류의 조상이요 아버지라 그렇게 말한 곳은 없습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하면서 인류의 조상이 대표인 것을 말하였어도 그렇게 그리스도에게 아담이 자기의 후손들에게 자녀관계가 성립한 듯한 그와 같은 관설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와 같이보라 주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새 인류의 조상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 이것을 처음 그랬다는 말이 아 니고 내 글에 그렇게 지목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목한 글에 대해서 화란 교 수들이 반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특히 여기에서 사도요한이 자기의 교회의 독자들을 향해서 자 녀들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사도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영적인 권위 때문에 친교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그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와 같은 그런 친근한 사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내 자녀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사도요한이 이 글을 썼을 때에는 나이가 상당 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연령적으로도라고 한 것은 글을 받는 사람 이 거부감이나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라는 말로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백성들을 깊이 사랑하고 얼마나 애정이 많이 담긴 그런 마음으 로 그를 대하여 편지를 쓰고 있는지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자녀들아 이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쓴다. 뭐하려고 쓰는가 너희들 로 하여금 죄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을 쓴다. 그냥 그가 편지들을 쓰는 것이 단지 영적 유익을 위해서만 그런 관점에서가 아니라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한 성도로써 살게 하 기 위하여 그가 이와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가 이렇게 사도적 증거를 기록하고 그들이 복음의 도를 바로 알아서 죄짓지 못하게 할려고 이 사도가 지금 이와 같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짓는 경우에 있어서 이라고 하는 말로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의 도를 우리가 확실하게 모를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확실하게 알지 못함으로 죄 짓게 된다는 것을 이 문장이 밝히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 로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사도적 증거를 여기에 기록하므로 바로 하나님의 뜻 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죄 짓지 아니하고 성도로서 거룩한 생활을 하 게 하려고 이와 같이 사도적 증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라고 하는 말은 밑에 있는 뜻도 물론 되지요. 그러나 앞에 기록한 지금 1장 에서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것을 사도적 증거하고 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에서 사람들이 실수하고 범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관찰에 의 하면 강단에서 죄에 대해서 바르게 가르쳐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이 죄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므로 죄를 짓는 것인지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성도들이 죄를 짓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 명하고 바르게 선포함으로 백성들로 죄 짓는데서 벗어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에 사실상 우리가 제일 범하기 쉽고 제일 잘 범하는 7계의 경우를 생각할 경우라도 사실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그와 같은 죄를 그렇게 짓게 되는 것은 참으로 어디까지 한 것이 죄를 구성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가르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헐리웃의 영화를 보고 서양사람이 남녀간에 그냥 아무렇게나 만지고 서로 그냥 그렇게. 물론 요새는 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그건 영화에서의 이야기이고 젊은 세 대에서의 이야기이고 그리고 정상적인 남여간의 접촉할 수 있는 정상적인 데가 손에서 손 악수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혹시 부인이 좀 지체가 높아서 그에게 존경을 표시할려고 할 때에는 손등에다가 이렇게 입맞춤으로 존경을 표시해 줍니다. 정상적인 기독교의 윤리가 적 용되는 사회에서 다른 남자가 다른 여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선은 손 대는 것은 악수 하는 거기까지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으로 여자 몸을 만져도 여자의 등뒤에다 손을 갖다 대도 이렇게 해도 그것쯤이야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서양의 합당한 예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요사이는 성도들이 문란해져서 많이 그렇지요. 그냥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요새 젊은이들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남녀간의 육체적인 접촉이 너무 과도해요.내가 사는 곳에 공원이 있어서 가끔 조깅하다 보면 젊은 남녀들이 몸을 비벼대 고 부딪쳐대는 것이 낮에 공원에서 저러고 있다가 해가 지면 그냥 헤어질까 헤어질 수 있 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보기에 그럴 것 같지 안 해요. 그 다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요. 특히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많이 진행되는데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정상적인 기독교 윤리 사회에서 남자간에 여자간에 바른 육체의 손 댈 수 있는 곳 은 손 뿐입니다. 손에서 악수하는 선 뿐입니다. 지금 미국 남부의 어느 목사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자기들의 조상의 청교 도 윤리로 복귀하기를 바라서 기독교 학교를 다시 세웠습니다. 내가 기억은 분명하게는 못 하겠지만 개인 개인 남녀간이 아니라도 개인개인의 경우에라도 상호간의 거리가
1.5m이라 든가 내가 분명히는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하여튼 말할 때에도 너무 그렇게 딱 붙이지 못 하도록 개인 개인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애정을 나타낼 때 몸을 많이 이렇 게 남의 등에다 눈대고 이렇게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같은 성이라도 자기 몸에 이렇게 바 르지 않게 몸을 갖다 대는 것을 모욕으로 압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등을 두드리고 몸을 많 이 만지지요. 남녀간에 뿐만 아니라 남자끼리도. 이런 것도 다 바른 예절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참 7계를 말하고 7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한국교회에서 금기로 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이 금기가 아닙니다. 하는 것이 범하는 것이 금기요. 범하지 못하게 하려 면 그 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남의 남녀의 몸에 손대는 것이 악수하는 선 이상을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정상적인 기독교의 법 입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 교회가 이런 것을 가르쳤습니까 지금은 적어졌는지 모르지만 성가대상에 9달 반이 많았습니다. 어찌 그러고도 버젓이 다닐 수 있었는지 당사자도 아무런 죄 의식도 없거니와 교회를 그걸 보기 를 예사로 봅니다. 분명하게 바르게 가르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법이 무엇 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백성들로 죄 짓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도요한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바로 자기의 편지의 독자들이 죄 짓지 못하 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지난번 시간에 죄에 대해서 그 근본규정을 하나님에 대한 증오라, 곧 적대감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죄 짓는 사람들이 일반 죄가 아니라 성도들이 기 때문에 물론 근본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적대감은 옛날 감정이 솟아나서 그러기는 하지 요. 그러나 여기서 성도들이 죄를 짓는 경우에 죄를 지으면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을 바로 행하지 못하고 어그러뜨리는 것을 여기서 죄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가 무엇이 냐고 하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남, 하나님의 법에 거슬림,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짐 그것이 죄 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죄 짓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행동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바로 죄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하게 백성들이 죄 짓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말씀 봉사자들의 책임 인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절로 뜻을 다 알고 안 짓겠지 하면 참으로 큰 오산입니다. 성도들이 예수 믿었기 때문에 절로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죄 짓지 않도록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죄 짓지 않을려면 말씀의 봉사자들이 죄 짓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혹은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돌이키면 그것로 은혜 받았으니다 되는 줄로 알지마는 은 혜 받아서 새 사람들이 되었으면 그 다음부터서의 일은 새 실재로 사는 것이 성도들의 그 다음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 다음에 죄 짓고 그 다음 돌아가서 죄 짓고 또. 그런 줄로 그것이 당연한 줄로 알지마는 죄 짓지 아니하고 새 실재로 사는 것이 성도들의 바른 일 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말씀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쳐서 성도들로 하여금 죄를 피하도 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바로 너희들로 하여금 죄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노라하는 것에 서 배울 교훈입니다. 성도들이 죄 짓지 아니하고 죄를 피하기 위해서 사도가 지금 사도적 증거를 기록하고 교 훈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사도적 증거를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적 증거 가 무엇입니까 그 중심이 무엇입니까 이 요한일서 강해에서 계속적으로 말해왔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것이 사도적 증거의 핵심 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피 흘리신 일이 생겼습니까 그것은 죄를 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서 있고 십자가를 믿는 자들이 죄를 아무렇게나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피하는 것이, 피해야 하는 것이 성도들의 지상 과제 입니다. 성도들이 죄를 아무렇게나 알고 성도로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아무렇게나 하고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피하고 바로 설 때 만이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피하고 살 때 만이 사도적 증거에 부착해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경우에도 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죄 짓 고서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책임은 성도들 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게 하여 죄를 피하도록 늘 가르치는 일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사도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
그런데 누가 누가 어떤 한 사람이 , 죄를 짓는다면 아버지에게 아버지 곁에 우리가 대언자라, 혹은 중보자를 혹은 변호자를 갖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제까지 죄를 피하게 하였고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빛에 거하는 자들이 어둠에 있을 수 없고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는 사도가 또 분명히 같은 1절에 같은 앞에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고 하는 사도가 이어서 말하기를 누가 죄를 지 으면, 우리는 죄를 피해야 할 자들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무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죄의 책임은, 죄과는 벗었어도, 그래서 의인 되었어도, 우리 에게서 죄의 근원이 다 제거되어 버린 것이 아닙니다. 죄의 뿌리가 다 없어져 버려서 그 이 상 완전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 절이 분명하게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소위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입니다. 물론 이 완전주의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는 그노시스주의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의에 깊은 그노시스의 지식을 받아 가짐으로 완전에 이르러서 죄가 다 없어져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죄에서 다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해야될 일은 죄와의 싸움에서 죄를 벗는 일입니다. 이 요한일서 강해를 듣던 한 학생이 와서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화가 그러면 어디에 필요가 있어서 그와 같이 했습니까그렇게 어떤 학생이 묻길래 내가 답하 기를바로 그렇게 하십시오. 성화 과정을 통해서 우리로 죄와 투쟁하게 하십니다. 성화의 형벌에다가 우리에게 상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성화의 과정을 펼치게 하셨 다 고 답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었으므로 죄를 근본적으로 지을 수 없는 자들 입니다. 그러나 작은 죄들을 짓는 일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서 아직도 완전히 하나님의 저주가 걷혀지 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저주와 정죄가 다 그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 니 우리 속에서 죄의 그 근본 뿌리까지 다 제거되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 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죄 짓지 아니한 것은 은혜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본성대로 하면 죄 짓는 역사 밖에 다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은혜의 역사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의롭게 되 고 거룩하게 되어도 죄를 다 벗어나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지금 완전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우리에 게 더 가깝게는 성결교회라고 할 것입니다. 성결교회는 성결을 주장함으로 감리교회에서 분 립되어 나왔습니다. 물론 감리교회도 마찬가지의 교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처음 예수 믿 을 때 받은 은혜는 초급은혜이고, 두번째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완전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감리교와 성결교의 주장입니다. 특별히 성결운동, 성결주의자들의 주장이 우리 주변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두 번 은혜를 받으면 완전해져서 더 이상 죄 짓지 않는다고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신학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어떻게 가르치 느냐가 문제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적 증거에 의하면 사도적 가르침에 의하면누가 죄를 지으면 이라고 하 였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다 죄를 지을 수 있게 되는거지요. 우리가 죄를 짓고 실수에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 긋나서 행동하는 일을 하면, 그러면 그걸로 우리 죄에 대해서 이미 끝이냐 죄의 값은 사 망이어서 아무리 작은 죄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거슬러 범해지기 때문에 그의 값은 사망이 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아버지에게, 아버지 곁에 중보자가, 혹은 대언자가, 혹은 변호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변호인이 계시기 때문 입니다. 그는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거기에는 3인칭 단수로 되어 있는데, 가졌다고 하는 것은우리가 대언자를 아버지에게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성도가 죄 지으면 그 사람 만의 문제가 아니고 성도들 전체, 교회 전체의 일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죄 지으면 그 사람 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몸의 지체 일부가 죄를 지었으니 우리의 일 입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해야 될 것임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요한복음에는 보혜사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요한 일서 2장 1절에는 대언자라, 혹은 중보자라 혹은 변호사로 번역을 했습니다. 물론 초대교회 가 이 대언자 혹은 중보자에 대한 바른 이해를 다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대언자로, 변호해 주는 분으로 기록한 곳은 바로 요한의 글들 뿐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항상 중보 대언자 혹은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 고 성령님이 대언자, 보혜사이실 때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착해서 그에게 종속해서 만이 그러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재판의 경우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이렇게 불러 들여온 사람을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법정에서 자기의 일을 변호하기 위해서 바로 변호해 주기 위해서 크게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이끌어 왔습니다. 그런데 희랍세계에서 그와 같은 일이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 같으면 증인이지요. 뿐만 아니 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단지 그냥 로 증인으로 어떤 사실을 사실대로 증거해주는 그런 경우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의 경우를 변호 해주고 법으로 부터 보호 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입니다.
그런데 이는 구약에서 그 기원을 갖습니다. 특별히 요한에게 나타나 있는 의 관념은 전적으로 구약으로 부터 왔습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 이 자기의 가족들을 위해서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자주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무엘 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변호하고 백성들의 편을 들어서 기도 해준 것이 있습니다. 심지어 버림받은 사울 까지도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끝까지 변호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변호하여 하나님 앞에 대언자로 일했습니다. 그 외에도 에스겔, 다니엘 혹은 그와 같은 선지자들도 백성들을 위하여 비는 자들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사상에 의하면 자기의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변호 해주고 옹호 해주는 것으로 봐 왔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에서는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속할 수 있고 변호하고 이렇게 변증해 주는 그와 같은 기능을 행하는 것으로 보 았습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에게는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해서 변호해 주고 합당 하게 옹호해 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바로 변호해 주고 대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주 강조적으로 이 문장을 썼는데 아버지에게 대언자가 있는데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라. 예수 그리스도 .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혹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의인이라는 말이 강조 되어 있습니다. 이 이란 말로 강조하므로 사도요한에게 있어서는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대언자는 한 분 뿐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요한복음에 나타나있는 보혜사를 대언자라고 한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런데 거기에 반드시 주어가 붙어 있습니다.그가 와서 세상에 대해서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책망하리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가 어떻게 일을 할 것이냐 대언자 노릇 을 할 때 어떻게 할 것이냐 분명히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내가 말한 것에 부착해 가 지고한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님께서 보혜사로 혹은 대어자로 일하실 때에는 그냥 독자적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속해서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서 만이 대 언자 노릇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대언자는 다른 보혜사를 보내신 이 라고 했는데 그 말씀 자 체가 자기 자신 만이 대언자임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다른 보혜사라. 라는 말은 별도의 보혜사가 아니라 예수님 자리에 대신 와 있는 그 보혜 사의 뜻으로 다른 보혜사 입니다. 전혀 별개로 이렇게 둘이 있다 그런 뜻이라기 보다는 예수 없는 자리에 예수님 자리를 대신해서 혹은 어떤 이의 말한 대로 하면 예수의 다른 Ego 다른 자아로 와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님이 대언자로 일할 때는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계심이고 그 대신 들어와서 일하신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있는 대언자는, 혹은 변호사는 변호인은 예수 그리스도 의로우신 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에게 합당하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경우를 변호해 주고 그리고 용 서해 주기를 빌 수 있는 분 이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의인이시기 때문에! 여기서 의인이란 말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듯 그냥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서 바르게 사는 의로운 사람이라, 흠없는 사람이다그런 뜻으로 의인이 아니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인이라고 할 때 그 의인은 그냥 하나님의 법도대로 흠없이 완전하 게 살은 구약에 나타난 그런 의인의 뜻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뜻 을 온전하게 이룬 자 이기 때문에 그가 의인 이십니다. 그가 온전하게 이룬 의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기본 뜻은 세상을 구원하시고 속량하심이 하나님의 근본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희생물로 붙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 에 다시 회복시켜 돌이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참으로 의인 이시고 그 만이 의인 이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근본 뜻 입니다. 세상 창조를 하나님께로 회복시키시고 속량하는 일을 이루었기 때문 입니다. 바로 그가 그의 속량에 기초해서 그의 의에 기초해서 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변호하고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사탄과 양심의 고소가 우리들에게 대항해서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고소가 올라갈 때마다 자기의 의에 자기의 희생에 근거해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 고 그들이 그렇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황과 그 연약함을 들어서 우리들을 변호 해주 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렇게 피 흘리사 구속하셨기 때문 뿐만 아니라 그 가 친히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실수하고 범죄할 경우에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 앞에 아뢰이고 자기의 희생에 근거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라고 변호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지금도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처음 구속받은 것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구할 수 있는 것은 다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 입니다. 은혜 만이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자, 오늘은 1절까지 만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셨기 때문에 은 혜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범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고 또 우리 의 기도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변자가 되시사 우리의 모든 사정을 하나님 앞에 변호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입히시도록 이와 같이 대언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목한 글에 대해서 화란 교 수들이 반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좋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특히 여기에서 사도요한이 자기의 교회의 독자들을 향해서 자 녀들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사도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영적인 권위 때문에 친교의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그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와 같은 그런 친근한 사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내 자녀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사도요한이 이 글을 썼을 때에는 나이가 상당 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연령적으로도라고 한 것은 글을 받는 사람 이 거부감이나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라는 말로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백성들을 깊이 사랑하고 얼마나 애정이 많이 담긴 그런 마음으 로 그를 대하여 편지를 쓰고 있는지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자녀들아 이것들을 내가 너희에게 쓴다. 뭐하려고 쓰는가 너희들 로 하여금 죄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을 쓴다. 그냥 그가 편지들을 쓰는 것이 단지 영적 유익을 위해서만 그런 관점에서가 아니라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한 성도로써 살게 하 기 위하여 그가 이와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가 이렇게 사도적 증거를 기록하고 그들이 복음의 도를 바로 알아서 죄짓지 못하게 할려고 이 사도가 지금 이와 같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짓는 경우에 있어서 이라고 하는 말로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의 도를 우리가 확실하게 모를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확실하게 알지 못함으로 죄 짓게 된다는 것을 이 문장이 밝히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 로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사도적 증거를 여기에 기록하므로 바로 하나님의 뜻 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죄 짓지 아니하고 성도로서 거룩한 생활을 하 게 하려고 이와 같이 사도적 증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라고 하는 말은 밑에 있는 뜻도 물론 되지요. 그러나 앞에 기록한 지금 1장 에서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것을 사도적 증거하고 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에서 사람들이 실수하고 범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관찰에 의 하면 강단에서 죄에 대해서 바르게 가르쳐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이 죄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므로 죄를 짓는 것인지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성도들이 죄를 짓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 명하고 바르게 선포함으로 백성들로 죄 짓는데서 벗어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에 사실상 우리가 제일 범하기 쉽고 제일 잘 범하는 7계의 경우를 생각할 경우라도 사실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그와 같은 죄를 그렇게 짓게 되는 것은 참으로 어디까지 한 것이 죄를 구성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가르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헐리웃의 영화를 보고 서양사람이 남녀간에 그냥 아무렇게나 만지고 서로 그냥 그렇게. 물론 요새는 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그건 영화에서의 이야기이고 젊은 세 대에서의 이야기이고 그리고 정상적인 남여간의 접촉할 수 있는 정상적인 데가 손에서 손 악수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혹시 부인이 좀 지체가 높아서 그에게 존경을 표시할려고 할 때에는 손등에다가 이렇게 입맞춤으로 존경을 표시해 줍니다. 정상적인 기독교의 윤리가 적 용되는 사회에서 다른 남자가 다른 여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선은 손 대는 것은 악수 하는 거기까지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으로 여자 몸을 만져도 여자의 등뒤에다 손을 갖다 대도 이렇게 해도 그것쯤이야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서양의 합당한 예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요사이는 성도들이 문란해져서 많이 그렇지요. 그냥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요새 젊은이들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남녀간의 육체적인 접촉이 너무 과도해요.내가 사는 곳에 공원이 있어서 가끔 조깅하다 보면 젊은 남녀들이 몸을 비벼대 고 부딪쳐대는 것이 낮에 공원에서 저러고 있다가 해가 지면 그냥 헤어질까 헤어질 수 있 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보기에 그럴 것 같지 안 해요. 그 다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요. 특히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많이 진행되는데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정상적인 기독교 윤리 사회에서 남자간에 여자간에 바른 육체의 손 댈 수 있는 곳 은 손 뿐입니다. 손에서 악수하는 선 뿐입니다. 지금 미국 남부의 어느 목사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자기들의 조상의 청교 도 윤리로 복귀하기를 바라서 기독교 학교를 다시 세웠습니다. 내가 기억은 분명하게는 못 하겠지만 개인 개인 남녀간이 아니라도 개인개인의 경우에라도 상호간의 거리가
1.5m이라 든가 내가 분명히는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하여튼 말할 때에도 너무 그렇게 딱 붙이지 못 하도록 개인 개인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애정을 나타낼 때 몸을 많이 이렇 게 남의 등에다 눈대고 이렇게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같은 성이라도 자기 몸에 이렇게 바 르지 않게 몸을 갖다 대는 것을 모욕으로 압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등을 두드리고 몸을 많 이 만지지요. 남녀간에 뿐만 아니라 남자끼리도. 이런 것도 다 바른 예절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참 7계를 말하고 7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한국교회에서 금기로 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이 금기가 아닙니다. 하는 것이 범하는 것이 금기요. 범하지 못하게 하려 면 그 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남의 남녀의 몸에 손대는 것이 악수하는 선 이상을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정상적인 기독교의 법 입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 교회가 이런 것을 가르쳤습니까 지금은 적어졌는지 모르지만 성가대상에 9달 반이 많았습니다. 어찌 그러고도 버젓이 다닐 수 있었는지 당사자도 아무런 죄 의식도 없거니와 교회를 그걸 보기 를 예사로 봅니다. 분명하게 바르게 가르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법이 무엇 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백성들로 죄 짓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도요한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바로 자기의 편지의 독자들이 죄 짓지 못하 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지난번 시간에 죄에 대해서 그 근본규정을 하나님에 대한 증오라, 곧 적대감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죄 짓는 사람들이 일반 죄가 아니라 성도들이 기 때문에 물론 근본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적대감은 옛날 감정이 솟아나서 그러기는 하지 요. 그러나 여기서 성도들이 죄를 짓는 경우에 죄를 지으면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을 바로 행하지 못하고 어그러뜨리는 것을 여기서 죄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가 무엇이 냐고 하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남, 하나님의 법에 거슬림, 하나님의 뜻에 어그러짐 그것이 죄 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죄 짓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행동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바로 죄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하게 백성들이 죄 짓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말씀 봉사자들의 책임 인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절로 뜻을 다 알고 안 짓겠지 하면 참으로 큰 오산입니다. 성도들이 예수 믿었기 때문에 절로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죄 짓지 않도록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죄 짓지 않을려면 말씀의 봉사자들이 죄 짓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혹은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돌이키면 그것로 은혜 받았으니다 되는 줄로 알지마는 은 혜 받아서 새 사람들이 되었으면 그 다음부터서의 일은 새 실재로 사는 것이 성도들의 그 다음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 다음에 죄 짓고 그 다음 돌아가서 죄 짓고 또. 그런 줄로 그것이 당연한 줄로 알지마는 죄 짓지 아니하고 새 실재로 사는 것이 성도들의 바른 일 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말씀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쳐서 성도들로 하여금 죄를 피하도 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바로 너희들로 하여금 죄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노라하는 것에 서 배울 교훈입니다. 성도들이 죄 짓지 아니하고 죄를 피하기 위해서 사도가 지금 사도적 증거를 기록하고 교 훈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사도적 증거를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적 증거 가 무엇입니까 그 중심이 무엇입니까 이 요한일서 강해에서 계속적으로 말해왔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것이 사도적 증거의 핵심 입니다. 왜 그리스도가 피 흘리신 일이 생겼습니까 그것은 죄를 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서 있고 십자가를 믿는 자들이 죄를 아무렇게나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피하는 것이, 피해야 하는 것이 성도들의 지상 과제 입니다. 성도들이 죄를 아무렇게나 알고 성도로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아무렇게나 하고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피하고 바로 설 때 만이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피하고 살 때 만이 사도적 증거에 부착해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경우에도 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죄 짓 고서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책임은 성도들 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게 하여 죄를 피하도록 늘 가르치는 일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사도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
그런데 누가 누가 어떤 한 사람이 , 죄를 짓는다면 아버지에게 아버지 곁에 우리가 대언자라, 혹은 중보자를 혹은 변호자를 갖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제까지 죄를 피하게 하였고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빛에 거하는 자들이 어둠에 있을 수 없고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는 사도가 또 분명히 같은 1절에 같은 앞에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고 하는 사도가 이어서 말하기를 누가 죄를 지 으면, 우리는 죄를 피해야 할 자들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무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죄의 책임은, 죄과는 벗었어도, 그래서 의인 되었어도, 우리 에게서 죄의 근원이 다 제거되어 버린 것이 아닙니다. 죄의 뿌리가 다 없어져 버려서 그 이 상 완전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 절이 분명하게 사도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소위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입니다. 물론 이 완전주의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는 그노시스주의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의에 깊은 그노시스의 지식을 받아 가짐으로 완전에 이르러서 죄가 다 없어져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죄에서 다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해야될 일은 죄와의 싸움에서 죄를 벗는 일입니다. 이 요한일서 강해를 듣던 한 학생이 와서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화가 그러면 어디에 필요가 있어서 그와 같이 했습니까그렇게 어떤 학생이 묻길래 내가 답하 기를바로 그렇게 하십시오. 성화 과정을 통해서 우리로 죄와 투쟁하게 하십니다. 성화의 형벌에다가 우리에게 상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성화의 과정을 펼치게 하셨 다 고 답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었으므로 죄를 근본적으로 지을 수 없는 자들 입니다. 그러나 작은 죄들을 짓는 일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서 아직도 완전히 하나님의 저주가 걷혀지 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저주와 정죄가 다 그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 니 우리 속에서 죄의 그 근본 뿌리까지 다 제거되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 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죄 짓지 아니한 것은 은혜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본성대로 하면 죄 짓는 역사 밖에 다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은혜의 역사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서 의롭게 되 고 거룩하게 되어도 죄를 다 벗어나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지금 완전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우리에 게 더 가깝게는 성결교회라고 할 것입니다. 성결교회는 성결을 주장함으로 감리교회에서 분 립되어 나왔습니다. 물론 감리교회도 마찬가지의 교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처음 예수 믿 을 때 받은 은혜는 초급은혜이고, 두번째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완전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감리교와 성결교의 주장입니다. 특별히 성결운동, 성결주의자들의 주장이 우리 주변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두 번 은혜를 받으면 완전해져서 더 이상 죄 짓지 않는다고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신학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어떻게 가르치 느냐가 문제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적 증거에 의하면 사도적 가르침에 의하면누가 죄를 지으면 이라고 하 였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다 죄를 지을 수 있게 되는거지요. 우리가 죄를 짓고 실수에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 긋나서 행동하는 일을 하면, 그러면 그걸로 우리 죄에 대해서 이미 끝이냐 죄의 값은 사 망이어서 아무리 작은 죄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거슬러 범해지기 때문에 그의 값은 사망이 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아버지에게, 아버지 곁에 중보자가, 혹은 대언자가, 혹은 변호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변호인이 계시기 때문 입니다. 그는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거기에는 3인칭 단수로 되어 있는데, 가졌다고 하는 것은우리가 대언자를 아버지에게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성도가 죄 지으면 그 사람 만의 문제가 아니고 성도들 전체, 교회 전체의 일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죄 지으면 그 사람 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몸의 지체 일부가 죄를 지었으니 우리의 일 입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해야 될 것임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요한복음에는 보혜사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요한 일서 2장 1절에는 대언자라, 혹은 중보자라 혹은 변호사로 번역을 했습니다. 물론 초대교회 가 이 대언자 혹은 중보자에 대한 바른 이해를 다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대언자로, 변호해 주는 분으로 기록한 곳은 바로 요한의 글들 뿐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항상 중보 대언자 혹은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 고 성령님이 대언자, 보혜사이실 때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착해서 그에게 종속해서 만이 그러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재판의 경우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이렇게 불러 들여온 사람을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법정에서 자기의 일을 변호하기 위해서 바로 변호해 주기 위해서 크게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이끌어 왔습니다. 그런데 희랍세계에서 그와 같은 일이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 같으면 증인이지요. 뿐만 아니 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단지 그냥 로 증인으로 어떤 사실을 사실대로 증거해주는 그런 경우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의 경우를 변호 해주고 법으로 부터 보호 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입니다.
그런데 이는 구약에서 그 기원을 갖습니다. 특별히 요한에게 나타나 있는 의 관념은 전적으로 구약으로 부터 왔습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 이 자기의 가족들을 위해서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자주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무엘 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변호하고 백성들의 편을 들어서 기도 해준 것이 있습니다. 심지어 버림받은 사울 까지도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끝까지 변호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도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변호하여 하나님 앞에 대언자로 일했습니다. 그 외에도 에스겔, 다니엘 혹은 그와 같은 선지자들도 백성들을 위하여 비는 자들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사상에 의하면 자기의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변호 해주고 옹호 해주는 것으로 봐 왔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에서는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속할 수 있고 변호하고 이렇게 변증해 주는 그와 같은 기능을 행하는 것으로 보 았습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에게는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해서 변호해 주고 합당 하게 옹호해 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바로 변호해 주고 대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주 강조적으로 이 문장을 썼는데 아버지에게 대언자가 있는데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라. 예수 그리스도 .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혹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의인이라는 말이 강조 되어 있습니다. 이 이란 말로 강조하므로 사도요한에게 있어서는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대언자는 한 분 뿐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요한복음에 나타나있는 보혜사를 대언자라고 한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런데 거기에 반드시 주어가 붙어 있습니다.그가 와서 세상에 대해서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책망하리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가 어떻게 일을 할 것이냐 대언자 노릇 을 할 때 어떻게 할 것이냐 분명히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내가 말한 것에 부착해 가 지고한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님께서 보혜사로 혹은 대어자로 일하실 때에는 그냥 독자적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속해서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서 만이 대 언자 노릇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에게 있어서 대언자는 다른 보혜사를 보내신 이 라고 했는데 그 말씀 자 체가 자기 자신 만이 대언자임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다른 보혜사라. 라는 말은 별도의 보혜사가 아니라 예수님 자리에 대신 와 있는 그 보혜 사의 뜻으로 다른 보혜사 입니다. 전혀 별개로 이렇게 둘이 있다 그런 뜻이라기 보다는 예수 없는 자리에 예수님 자리를 대신해서 혹은 어떤 이의 말한 대로 하면 예수의 다른 Ego 다른 자아로 와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님이 대언자로 일할 때는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계심이고 그 대신 들어와서 일하신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있는 대언자는, 혹은 변호사는 변호인은 예수 그리스도 의로우신 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에게 합당하게 하나님 앞에 우리의 경우를 변호해 주고 그리고 용 서해 주기를 빌 수 있는 분 이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의인이시기 때문에! 여기서 의인이란 말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듯 그냥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서 바르게 사는 의로운 사람이라, 흠없는 사람이다그런 뜻으로 의인이 아니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인이라고 할 때 그 의인은 그냥 하나님의 법도대로 흠없이 완전하 게 살은 구약에 나타난 그런 의인의 뜻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뜻 을 온전하게 이룬 자 이기 때문에 그가 의인 이십니다. 그가 온전하게 이룬 의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기본 뜻은 세상을 구원하시고 속량하심이 하나님의 근본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희생물로 붙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 에 다시 회복시켜 돌이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참으로 의인 이시고 그 만이 의인 이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근본 뜻 입니다. 세상 창조를 하나님께로 회복시키시고 속량하는 일을 이루었기 때문 입니다. 바로 그가 그의 속량에 기초해서 그의 의에 기초해서 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변호하고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사탄과 양심의 고소가 우리들에게 대항해서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고소가 올라갈 때마다 자기의 의에 자기의 희생에 근거해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 고 그들이 그렇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황과 그 연약함을 들어서 우리들을 변호 해주 시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렇게 피 흘리사 구속하셨기 때문 뿐만 아니라 그 가 친히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실수하고 범죄할 경우에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 앞에 아뢰이고 자기의 희생에 근거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라고 변호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지금도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처음 구속받은 것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구할 수 있는 것은 다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 입니다. 은혜 만이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자, 오늘은 1절까지 만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셨기 때문에 은 혜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범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고 또 우리 의 기도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변자가 되시사 우리의 모든 사정을 하나님 앞에 변호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입히시도록 이와 같이 대언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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