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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 곧 언약궤를 잃어버린 자의 말로 (삼상4:17-22)

본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참으로 사랑하셔서 그들이 원하고 찾기 전에 성막과 회막과 불기둥을 주셔서 안으로 밖으로 좌우로 그들을 보호 해 나가신 것을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 가운데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이런 사실이 우리 신앙과 마음 밖에 있지 않게 하시고 내 마음 안에 들어와서 내 모든 생을 주께 맡기고 주로 말미 암아 승리에 승리를 누리는 아름다운 광경이 우리 중에 일어나게 하시기 를 바랍니다. 부족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사 또 다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주셨 사오니 이 시간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사람 앞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무 릎을 꿇고 물음을 묻는 귀한 일들이 일어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법궤는 다른 말로 하면 언약궤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 법궤요, 언약궤입니다. 언약궤가 없는 사람, 언약궤를 잃어버린 사람은 패망합니다. 땅 위의 많 은 사람들, 신자들의 승패를 여러 가지로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이 일생 동안 아무 과오 없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살다가 끝을 맺으면 승리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안에서 보장 받고 있는 사람, 그 약속의 말씀이 자기를 보장해 주는 사람, 그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는 사람만이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시기 원합니다. 본래는 법궤(언약궤)가 없었습니다. 언제부터 이 법궤가 노출되는가 하 면 출애굽한 후부터입니다. 그 전에는 언약궤라는 명칭도 없고 법궤라는 명칭도 없습니다. 애굽 사람에게는 유월절이 없습니다. 유월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유월 절의 혜택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유월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월절을 통해서 승리하게 됩니다. 사느냐, 죽느냐, 멸 망이냐, 구원이냐 하는 것이 유월절로 인해 좌우됩니다. 그 유월절을 지내고 광야로 갈 때에 비로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등장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백성이 원한 것이 아닙니다. '불기둥이 있어야 되 겠습니다. 구름기둥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앞으로 가야겠습니다. 뒤로 가 야겠습니다.' 하고 백성들이 먼저 요구해서 불기둥, 구름기둥이 등장한 것 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원하기 전에 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백성을 안고 진행합니다. 앞에서 뒤에서 좌우에서 그 백성을 품고 어린아이 하나라도 홍해를 다 건 너기까지 돌봅니다. 좌우로 진행하면서 이스라엘을 돕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이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품에 안으셨다.' 하는 것이 애굽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실존이 법궤로 불기둥으로 나타나서 보호하는 것, 안는 것, 진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도 그렇습니다. 신자나 신자 아닌 사람들이나 먹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입고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환경과 처지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분 명히 애굽 사람에게 없는 것이 신자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법궤입니다. 언약궤입니다. 이 언약궤는 나를 해치거나 나를 손해 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100% 나를 보호해 줍니다. 좌우로 이 약속의 사실이 나를 보장해 줍니다. 이제 신앙의 사람이 이것을 아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또 아는 데에서 지나서 신앙해야 합니다. 참 중요합니다. 그 후에 광야에 나와서 회막과 성막이 등장합니다. 법궤도 언약궤도 하나님의 실존을 대신하는 것이고 이 회막과 성막도 하나님의 실존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회막과 성막, 또 불기둥과 구름기둥 이 무엇을 대신했습니까 누구를 대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불기둥과 구름기둥, 또 회막과 성막은 백성들을 백의 하나, 천의 하나를 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주는 것도 아니고 상처를 입는 것도 아닙니다. 100% 보호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그들이 원하기 전에 있었던 것이 구름기둥 불기둥, 회막과 성막입니다. 나중에 가서는 성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것 이 없으면 안됩니다. 먹는 것이 부족하고 입는 것이 부족하고 모든 것이 결핍해도 회막과 성막, 성전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실존을 대신하시는 것이 무엇입니 까 오늘 나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실존을 대신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불기둥, 구름기둥이었습니다. 또 회막과 성막 이었습니다. 나아가서 법궤, 언약궤였습니다. 그 후에는 성전이 하나님의 실존을 대신했습니다. 이 기구 안에 있으면 승리고, 기구 밖에 있으면 멸 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기구가 어떤 것입니까 구름기둥 같이 불기둥 같 이 회막과 성막 같이 법궤 같이 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가지고 있는 성전 같이 우리를 감싸고 나가는 기구가 어떤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여기는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심령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런 기구가 없어도 괜찮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법궤 없는 행진이 없었습니다. 법궤 없이 행진을 승리 한 일이 없었습니다. 저들의 승리는 저희 힘에 있지 않고 선한 생활과 양 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저들에게 주신 이 법궤에 있었습니다. 법궤 없이는 이 백성이 무용지물이고 하나님의 법궤도 이 백성이 없이는 무용지물입니다. 잘 알아야 됩니다. 이 법궤가 아무에게나 어디서나 법 궤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법궤는 믿는 사람에게 가장 귀합니다. 믿는 사람 없이, 이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이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이, 법궤가 다 무용지물이 될 뿐입니다. 성전으로 나가서 내전과 외전을 두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지만 이 외전과 내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것을 보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의 생활이 이 성전을 끌어 안고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성전 자체 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든 생활을 보호하고 감싸고 인도하고 승리하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노력보다도 아름다운 소행보다도 없으면 안될 것이 바로 이 법궤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든지 눈 멀었든지 헐벗었든 지 살인자나 음행자나 절도나 누구든지 언약궤 앞으로 나가면 그는 완전 히 보장을 받습니다. 늘 말씀드리는 대로 신앙은 우리의 삶에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것, 순종하는 것, 이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바로 신앙 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지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열조들에게 주 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들이 이 법칙을 떠나서는 사는 길이 없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법칙은 그렇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법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내용입니다. 법궤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시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음에 품어야 할 것을 취해서 품고, 버릴 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취할 것이 무엇이고 버릴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먼저 생각 해야 될 줄로 압니다. 지난 번에 임산에서 지내면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고모라 소돔이 멸 망 받은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이 말씀과 상관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모라 소돔이 왜 멸망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알지 못하 면 여러분이 왜 멸망 받는지 모릅니다. 조건은 많이 있습니다. 그 고모라 소돔에도 한 집 건너서 술집이었다고 합니다. 놀음꾼들, 술, 주색잡기 등등 죄악이 관영한 도시였습니다. 그렇지 만 하나님의 법 앞에서 고모라 소돔이 멸망 받은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 니까 뭐가 없어서 멸망 받았습니까 의인이 없어서 멸망 받았습니다. 의 인이 몇 명이 없어서 멸망 받았습니까 한 명이 없어서 멸망 받았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는 공동 번역에 있는 내용이 '고모라 소돔에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죄 없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 하나로 인하여서 많은 죄인을 탕감하겠다. 용서하겠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 칙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 니 그를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차별이 없는 의라.' 로마서에 나오는 이 '의'라는 말씀이나 '의인'이라는 말씀이 똑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고모라 소돔에는 이름을 다 댈 수 없는 극한 죄들이 가득히 쌓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기 의인이 한 사람만 있어 도 내가 그 의인을 인하여서 소돔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 둑질하고 간음하고 죄들이 말할 수 없이 많지만 의인 한 사람이 있으면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이런 진리를 아십니까 성경이 의인, 죄 없는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들을 때에 볼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의인이 되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자 리잡게 됩니다. 또한 죄 없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런 노 력을 아무리 해 봐도 그 노력에는 승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노력은 일찍 버려야 됩니다. 반면에 내가 가져야 될 것, 취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의인입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나를 위한 의인이 내게 있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 의인을 인해서 나를 심판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 의인은 주님을 말씀합니다. 나 스스로 의인 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을 끝내고 이미 나를 위해서 나타나신 의인,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는 것도 다른 것에 있지 있지 않습니다. 이런 내용에 있는 것을 바로 알아야 됩니다. 우선 이 런 문제를 생각하고 다음으로 생각할 것이 많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음의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세상을 떠난다 해도 내가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는 것은 나를 위한 의인 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신하실 의인은 바로 주님 자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는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의'는 나를 대신해 서 죽으시고 사신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자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더 추구할 것이 없습니다. 생활을 아무리 개조해 나간다 해도 거기서 거기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의인이 없습니다. 실인죄는 안 지었을지라도 간음죄를 지었을 것이고 간음죄를 안 지었을지라도 시기와 분쟁이 있을 것이고 사람 앞에서 죄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의인 되시는 주님은 자기의 의를 가지고 자 기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의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대 앞에서 나를 위해 의인된 직무를 다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고모라 소돔에서 하실 일을 혼자 알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에게 접근해서 이 소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이 야기했습니다. 그 말을 들고 아브라함이 간구하는 간구는 자기를 위한 간 구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한 애달픔, 안타까움이 아니고 고모라 소돔을 위 한 애달픔입니다. 또 고모라 소돔 중에서도 롯의 일가입니다. 말씀을 보면 '내가 한 번만 구하옵나니 용납하시고 들어 주시옵소서' 하 면서 의인 50명부터 시작해서 점점 내려가서 의인 10명만 있어도 소돔 성 을 멸망하지 않을 것을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 으로 일이 끝났습니다. 그 후에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롯을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창세기 19:29) 하나님이 롯을 멸망하는 땅에서 구원하신 것은 롯의 검고 흰 점을 찾아 서 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롯이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소돔성 에서 죽은 사람과 동일한 과오와 허물이 있다 해도 하나님은 말씀은 '아 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입니다. 이런 말씀을 여러분이 아주 절박하게 신앙으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롯 이 잘한 것이 없습니다. 롯에 대해서는 '잘했다 잘못했다, 죄인이다 의인 이다' 하는 것을 논하지 않습니다. 논하지 않고 하나님이 롯이 살던 그 땅 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 앞에서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나를 기점으로 말 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 중보자 되신 주님뿐 입니다. 또 하나 말씀하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롯에 대해서 중보자의 역할 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중보자를 보시고 롯을 용납했습니다. 그렇지만 아 브라함이 롯을 위해서 손톱 하나도 희생한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롯 에 대한 중보자 역할을 했지만 롯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이 희생당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중보자 되신 주님은 여러분을 대신하신 그 의인되신 주님은 말로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친히 내 모든 형편과 사정을 당신의 것 으로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들어갑니다. 언제까지 내 일생이 끝날 때까 지. 내 일생의 끝날까지 나를 위해서 계시는 것이 중보자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선하고 악한 것은 논할지라도 나를 위한 중보자이신 주 님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 또 그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신앙의 부족입니다. 신앙의 어리석음, 신앙의 무식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위해서 희생당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해서 희생을 당하셨는데 주님과 나의 차이는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에 비할 수가 없는 차이입니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그 차이와 그 위치에서 나를 대신해서 간구하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 되느냐, 저렇게 해서 되느냐 하는 것은 생각할지라도 주님이 내 중보자로 대속자로 오시는 것을 믿는 일, 의지하는 일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내 아버지라 부르고 겁 없이 그 앞에 나가는 일이 결핍한 것입니다. '성자의 구함을 성부가 들으사 외면치 못하고 다 응낙하시네 나 거듭난 자 된 것을 나 거듭난 자 된 것을 성령님도 증거하시네.' (부록 찬송 2장) 이런 찬송의 가사가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마른 땅에 물이 스며들듯 이 스며들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과오와 더러움에 이 사실이 스며 들기를 바랍니다. 또한없이 진지한 기도로, 찬송으로 그 앞에 나아가시기 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가 없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죄 가 없어서 허물이 없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가나 안 땅에 인도한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 언약궤와 동행하는 사람은, 말씀과 동행하는 동행자는 그 언약궤가 말씀이 그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단을 건너는 사람들을 누가 보장 했습니까 요단을 건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바다를 건너간 것이 아닙니다. 또 그들의 힘으로 바다가 갈라진 것도 아닙니다. 법궤, 약속의 말씀 자체가 그 말씀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보장! 이 사실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 외에는 구원 얻을 수 있는 어떤 조건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이 법궤와 함께 걷고 있습니까 약속과 함께 걷고 있습 니까 예사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약속된 것을 여벌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자기 생활도 귀하기는 하지만 자기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법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데 있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할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38절까지 읽으면 귀한 말씀이 많습니다. 그 중 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할 곳이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안에 거할 곳이 있으면 족할텐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질 못하니까, 없으니까 나를 죽이려고 한다.' 참 귀중한 말씀입니다. 라합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안고 살고 있느냐, 들어가면서 나가면 서 넘어지면서 일어서면서 약속의 말씀과 함께 나날을 보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독생자로 말미암아 주시는 약속의 말씀 안에서 나가면서 들어가면서, 넘어지면서 일어나면서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까 다른 것이 다 필요하지만 언젠가는 그 필요한 것들이 다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이 완성하기까지는 피치 못합니다. 끊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떠나는 사람은 패망입니다. 멸망 당합니다. 이제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없어서는 안될 귀한 언약의 말씀을 저버리는 사람, 잊어 버리는 사람-고의로 잊어 버렸든지 타의로 잊어 버렸든지 잊 어 버린 사람의 말로입니다. 남이 안하는 도둑질을 해서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니고 남이 안하는 간음을 해서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궤를 떠난 사람이 어떤 심령 상태에 있었는가, 어떤 신앙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는가, 또 성경은 그들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이들이 멸망 받기 전에 그 신앙 상태가 (생활보다는 신앙입니다.) 어떠했는가 하는 것 을 통해서 나의 신앙의 상태와 내용을 점검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 큰 유 익이 됩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사무엘상2:12) 엘리의 두 아들은 이방 사람이 아닙니다. 제사장이요, 제사장의 아들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불량하다, 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여호와 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납득이 안가는 소리입니다. 오늘 교회에서 자라서 교회에서 늙은 사람을 향해서 '당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성령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 노발대발할 것입니다. 차라리 저 밖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를 알지 못해서 멸망받는 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해서 여호와 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불량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무엇이 불량합니까 도덕적인 생활에 불량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불량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량한 사람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하심과 길이 참으심과 독 생자 되신 주님을 내어주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그의 의를 나에게 입히시는 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목사라도 장로라 도 어떤 사람이라도 불량한 사람입니다. 이 불량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못 받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하다고 하는 것은 생활의 불량보다는 신 앙의 불량입니다. 불량이라고 하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불량한 자입니다. 살인 강도라도 윤락 여 인이라도 용납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도 자기를 위해서 중보자 되신 주님을 보내 주신 하나님을 알거나 자기를 위해서 보혈을 흘려 주신 그 주님을 아는 자에게는 절대 불량한 생명이라고 안합니다. 이를 알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용서하심과 길이 참으심 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마음 속에 있지 않은 신앙 그 자체가 (무엇을 한 다 해도) 불량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법궤를 알지 못하면 불량한 사람들입니다. 법궤의 뜻 과 법궤가 감당할 수 있는 그 효능을 알지 못하고 제 멋대로 스스로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삶이 바로 불량한 삶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불량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불량합니다. 무엇이 불량한 것인가 하면,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떠나는 것과 스 스로 웅덩이를 파는 생활이 바로 불량한 생활입니다. 나는 이 말씀에 대해 서 여러분들이 이해하도록 널리 깊이 말을 다 못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이 무엇을 가리켜서, 무엇 때문에 그들을 불량한 사람이라고 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보통 가정의 평범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면 노발 대발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불량 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불량한 채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 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 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음이었더라. (사무엘상 2:16-17)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일에 있어서 주고 받는 말입니다.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 대로 취하라.' 먼저는 무엇입니 까 반드시 기름을 태운 후에-'하나님 앞에 헌납한 후에, 하나님께서 흠 향하신 후에' 라는 말입니다. 흠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이 줄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흠향한 후에 먹어도 음식은 그 맛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흠향하시는 것은 음식 을 흠향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의 신앙을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흠향하신 후에 기름을 태운 후에 마음 대로 취하라, 네 것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슨 대답을 했습니까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이것이 불량한 사람 의 예배입니다.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만 해도 오늘 우리 교회들 안에 이런 사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신앙의 상태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참 귀합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17절) 참 귀한 말입니다. 이 소년들, 멸망 받는 이 사람들의 죄가 하나님 앞에 참 큽니다.
그런데 그들의 죄목이 무엇입니까 살인하는 것, 간음하는 것, 도적질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탐하는 것이 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죄들입니다. 이것이 다 죄목으로 들 어갑니다. 그러나 여기 이 소년들의 이 죄목은 그런 것에 들어갑니까, 안 들어갑니까 그런 것에 안들어가도 하나님 앞에서 멸망 받는 죄는 얼마라 도 풍성합니다. 잘 알아야 됩니다. 그들의 손에 죄가 큰데 한가지로 말해서 여호와의 제사법을 그들이 멸 시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를 원합니다만 좀처럼 이 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제사법을 멸시한다.' 멸시하는 사람 들이 참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가득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입니까 제사하는 법이 정해져 있습니다. 제법이 있는데 그 제법을 따르지 않으면 곧 제사를 무시 하는 처사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죄를 범했어요 아브라함이 살인했습니까, 도적질했습 니까 간음했습니까, 탐심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윤리와 도덕적으로 죄를 범해서 죄의 보상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제법을 무시했습니다. 무시한 것이 무엇입 니까 제사는 반드시 쪼개서 놓아야 됩니다. 산 것을 못 드리고 반드시 쪼 개야 하는데 쪼개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반드시 쪼개서 놓아야 하나님이 흠향하시는데 쪼개지 않고 산 채로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라고요 다른 것은 다 쪼개어 놓았는데 안 쪼개 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새입니다. 지극히 작은 새 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했습니 까, 노했습니까 제사 후에 아브라함에게 바로 그늘이 왔습니다. 컴컴한 그늘이 왔습니다. 여기에 대한 보상이 오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가서 고난을 받은 것이 어떤 죄의 보상입니까 여러분이 알면 참 놀랄 일입니다. 다른 죄의 보상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 술을 먹어서 노름을 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극악 무도 한 살인죄를 범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사법을 어겼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가 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보냈습니다. 엄청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 브라함이 제사법을 멸시한 것이 이스라엘 전 민족에게 보응이 온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법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법이 있는데 무엇입니 까 찬송만 드리면 됩니까 기도만 하면 됩니까 봉사 헌신만 하면 됩니 까 찬송, 기도, 봉사, 헌신, 출석 모두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 핵심은 무엇 입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서 제물이 되신 것을 아는 것,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갑니까, 제물 없이 나갑니까 돈 얼마를 가지고 나가면 제물이 됩니까 그걸 가지고 나가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을 제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받는 제물이 무엇입니까 어기면 안되는 것이 무엇입 니까 예배도 안되고 봉사도 안되고 기도도 안되면 무엇입니까 여러분, 기도할 때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기도하고 나서 맨 끝에 뭐라고 합니까 누구의 이름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세상 없이 다른 것을 다 해도 주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으면 법에 어긋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름 외에는 받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보자의 이름입니다. '성자의 구함을 성부가 들으사 외면치 못하고 다 허락하시네.' 외면치 못합니다. 다 들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아주 미약합니다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기도나 예배나 찬송이나 헌금이나 모든 일에 내 이름으로는 안됩니다. 내 이름으로는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반드시 주님의 이름, 중보자의 이름으로 드려야 상달됩니다. 신약의 제사법도 그렇고 구약의 제사법도 그렇고 제사법을 어기면 안됩니다. 자, 지금 멸망 받는 이 소년들은 무엇을 어겼습니까 하나님의 제사 법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의 제사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 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 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 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사무엘상 2:22-25)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사람이 사람에 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판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 범죄함에 대해서 누가 중보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중보자가 없습니다. 참 귀한 말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엘리가 그 아들들이 저주 받을 일을 할 때 하나도 금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3:13) 우리가 생각해 보면 자녀가 도덕 적인 범죄를 행하면 그 아버지가 어떻게 합니까 자녀를 방치해 둡니까 그냥 방치하고 너 갈 데로 가라고 내버려 둡니까 다소 강약이 있을지라 도 그 일 때문에 울고 불며 그 아이에게 말할 수 없는 관심을 쏟습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면에서 멸망을 자청하는 자녀를 막는 아버지는 참 드 뭅니다. 우리가 다 믿음의 아들들이요, 또 믿음의 아버지이신 바울이나 앞 서 간 성도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멸망을 자청하는 자녀를 용납하지 못하면서 신앙면으로 멸망을 자청하는 자녀를 묵인하고 그냥 방 치하는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지 이루 형용할 수 없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사무엘상 2:30) 이름만 존중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을 존중히 여 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존중히 여기고 주님이 죽어서 나에게 주시는 의를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존중히 여깁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수없이 참석하고 제단에 수없이 참석하면서도 주님 을 존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누구 같이 여기 멸망 받는 소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누구의 아들입니까 엘리의 두 아들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더라면 하나님의 제사법을 존중히 여겼을 것입니다. 말씀을 존중히 여겼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보다 하나님의 죽으심과 사심보다 사람이 사람 앞에서 가지는 존중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 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 존중히 여기지 않는 자를 멸시합니다.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 하나님의 심정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심령과 신 앙을 하나님은 존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법궤를 자기의 생활보다 존중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존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좀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존중히 여깁니다. 이 점을 여러분이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보혈과 주의 의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들을 블레셋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전쟁에다 맡겼습니다. 이들은 모릅니다. 왜 이런 전쟁이 일어났는지 그 배후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어쩌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 실은 하나님께서 블레셋 전쟁을 일으키시고 그 전쟁에다가 이들을 맡긴 것입니다. 심판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이 주시는 제사법을 어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그냥 남겨 두시지 않습니다. 전쟁은 여지 없이 패했습니다. 패전 의 원인은 법궤를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에게 법 궤를 빼앗기면서 여지 없이 패망했습니다. 그 패전의 소식을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고합니다. '전쟁에서 많은 희생 자들이 생겼습니다. 당신의 두 아들은 모두 전사했습니다. 또 여호와의 법 궤는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겼습니다.' (16-17) 엘리가 의자에 앉아서 그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이방 사람에게 빼앗 겼다는 말을 듣고 기절해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즉사했습니다. 엘리의 며느리는 마침 해산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자기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각중에 진통이 와서 아기를 낳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태어난 아 기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겼 다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안심하라 네가 아들 을 낳았다'고 했으나 그 말에는 대답지도 않고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났다.'는 말을 남기고 죽어 갔습니다. 여러분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없는 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영광입니까 남이 가지고 있지 못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영광 입니까 세상 일이 잘 되니까 내가 기쁘고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에게서 블레셋으로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 이 사람들이 한 말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하는 것입니다. 땅 위에 있는 동안에 내려 주신 약속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영광처럼 소 중히 들립니까 남이 안 가지고 있는 약속이 내 안에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영광입니까 참 귀합니다. 그것으로 영광을 삼는 사람은 하나님 이 그 영광과 함께 영광으로 대접할 것이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그대로 취급할 것입니다. 내 영광은 내 생명의 영광은 땅의 것이 아닙니다. 내게 주시는 말씀 그 말씀이 나에게 실현될 때에 실제화 될 때에 바로 그것이 내 영광입니다. 법궤가 그렇게 귀하지만 약속이 그렇게 귀하지만 아무에게나 법궤가 귀 한 것이 아닙니다. 또 아무에게나 이 법궤가 복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복됩니까 이 법궤하고 동일한 말이 무엇입니까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곧 언약 의 말씀입니다. 말씀과 동일한데 그 말씀이 누구에게나 복된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 한해서 그 약속이 복됩니다. 우리에게 사람이 많다 해도 누구에게나 복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존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 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 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 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사무엘상 5:1-4) 말씀을 계속해서 보면 참 귀한 말씀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 라엘 사람에게는 그렇게 귀한데, 블레셋 사람들한테는 복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화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을 때는 다시 없는 복이었는 데 이 사람들이 빼앗아 갔을 때는 복이 아니고 화가 되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 십인을 죽이신지라.'(6:19) 법궤를 들여다 보는 사람이 멸망했습니다. 또 법궤를 붙들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멸망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은) 들여다 보는 것도 아니고 구경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것 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 수 없어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법궤가 우리 땅에 있으면 우리가 죽겠다. 망하겠다. 법궤를 다시 돌려 보내야 되겠다.' 하고 돌려 주 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들이 빼앗아 가고 저들이 돌려 줍니다. 안 돌려 주 면 안됩니다. 그것이 6장에 있습니다. 젖 나는 소 둘을 취해서 (송아지는 집에 가두고) 새 수레를 메우고 그 위에 법궤를 실었습니다. 법궤가 본처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 갑니다. 여 기서 소는 목회자를 말씀합니다. 이 암소에게 송아지가 있지만 그 새끼를 뒤로 하고 새끼가 우는데도 돌아 보지 않고 법궤를 그대로 끌고 갑니다. 법궤가 돌아온 후에 수레는 부숴서 나무로 했습니다. 또 소는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라 그 말입니다. 법궤가 이렇게 귀하지만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귀합니다. 라합에게는 붉은 줄이 생명처럼 귀하지만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이 붉은 줄이 크게 귀할 것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오늘도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만 라합의 붉 은 줄 같이 하나님의 약속이 그만큼 귀한 사람이 있고 귀하지 않은 사람 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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