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 교회 (계2:12-17)
본문
버가모 교회는 서머나 북쪽에 위치한 고대 아탈리드 왕국의 수도 버가모라는 강변 도시에 세워진 지역 이름을 딴 교회입니다. 버가모 도시는 교통이 발달하고 책을 손으로 베껴쓰던 시대에 20만 권이라는 당시의 숫자로는 실로 기하학적인 도서를 비치한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국제적 학문도시로 과분한 지식욕의 우상이 있고, 황제 숭배 본부인 신전이 있고,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은 뱀인데 아스클레피우스라는 치료의 신을 숭배하는 신전과 제우스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종교적 예배의 중심지로서 우상의 본산지라 할 수 있습니다. ‘버가모’란 이름 자체의 뜻이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과 결혼했다는 영적 타락의 도시에 교회가 세워졌으니, 교회의 시험과 수난을 미루어 예측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버가모 교회를 세 번째로 기록하신 것은, 도시의 중요성에 의함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셋째로 귀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교회는 주권을 하나님에게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 버가모 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다른 곳에 보면 ‘좌우에 날선 이한 검’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검을 가지고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내용을 보나 안보나 어떤 교회라고 짐작이 됩니까 좌우에 날선 검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찔러서 도려낼이 있고, 끊어낼 것 있고, 쪼개낼 것 있고, 빚을 것 있고, 깍을 것 있는 잡탱이 교회요, 잡탱이가 섞여 있다는 것을 가르쳐 말씀합니다. ‘좌우에 날선 검’이라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왜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좌나 우나 전이나 후나 동서남북, 자타, 아무에게나 공평되게 꼭 그대로 이행되고, 그대로 심판되고, 그대로 평가된다는 말입니다. 설교 말씀도 설교하는 목사에게도 설교 듣는 교인에게도 조금도 차이가 없고 꼭 같이 해당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나 미워하는 자에게도 꼭 같이 해당이 되며 좌우라는 것은 모든 주위 전체에게 꼭 같은 동일한 권세를 가지고, 동일한 책임을 지우고, 동일한 심판을 하고, 동일한 보응을 한다는 동일이라는 것을 가리켜서 좌우라 말한 것입니다. ‘좌우’란 전후, 상하, 전부 다 포함한 것을 표시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날선 검’은 아주 뾰족해서 비수검 모양으로 썩썩 아주 잘 드는 칼이란 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세밀과 임의적인 심판의 권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칼’은 끊고 쪼개고 찌르는 것으로 쪼갤 것이 있으면 쪼개고, 찌를 것이 있으면 찌르고, 끊을 것이 있으면 끊는 말씀이란 말입니다. 칼은 의사의 손에 들려지면 수술의 칼로, 어머니 손에 들려진 칼은 음식을 장만하는 칼로, 장수의 손에 들려진 칼은 적을 찌르고, 목을 끊는 칼로 쓰여집니다. 칼인 말씀이 예고할 때에 말씀에 걸리는 입장에 따라 쪼갤 것은 쪼개고, 찌를 것은 찌르고 끊을 것은, 끊는 반면에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긍휼과 자비에 능한 수슬의 칼로, 어머니 손에 들려진 칼로 역사하고, 상해 없는 치유의 복음이 되고, 회개치 아니하고 기회를 놓친 자에게는 정죄와 진노와 심판의 율법이 되어 쪼개고, 찌르고, 끊는 복수의 칼이 됩니다.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아 날선 검으로 찌르고, 쪼개고, 끊어야 할 죄악이 있는 것이 내용을 보기 전에 보여집니다. 버가모 교회의 죄악이 오늘 우리들의 죄악인 것을 알고 찾아서 회개하는 것이 수술의 검으로 복이 될 것이지만, 옮길 기회에 기회를 지나쳐 버리면 구원의 은혜가 지나고 나면 심판 즉 복수의 칼이 온다는 것이 성경역사입니다.
주님의 위로 13절 상반절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의 입장, 처지, 형편, 사정을 대 도서관이 있고, 황제 숭배의 본부가 있고, 뱀신전 제우스 신전등 우상숭배의 본산지라는 것과 당하는 역경, 애로, 고난, 고통을 잘 아시고, 위로하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교양함에 있어서 단점보다 장점 찾기에 먼저 주력하여, 우리에게 희망을 준 후에 단점을 세밀히 살펴 고치도록 교양하는 시은의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처지, 입장, 형편, 사정을 다 보고 계시고, 행동록에 언행심사 일체를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입장, 형편, 사정을 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친히 주님께서 그 입장, 그 형편, 그 사정을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입장, 형편, 처지, 사정을 만든 가운데(요소 중)에는 사람도 들었고, 돈도 들었고, 권세도 들었고, 지식도 들었고, 마귀도 짐승도 물질도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만드신 주님이 그 모든 것을 다 활용해 가지고 우리 구원에 필요한 현실을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 현실은 주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주권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도 방해할 자가 없고, 주님의 예정대로 주권 의지대로 만드신 것임을 확정을 지워야 합니다. ‘사탄의 위가 있는 데라’는 말은 사탄이 뚜렷한 형체를 가지고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란 말입니다. 버가모에 뱀신, 제우스신, 황제 숭배의 본당이 있어 국가적으로 강압에 의하여 의무적으로 숭배하게 하는 신전을 ‘사탄의 위’라고 말합니다. 뚜렷한 형체, 단군 신전, 일본신사, 향교, 충혼탑, 각종 위인들의 동상 등 뚜렷한 형체를 가지되, 그대로 있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국가 의식이나, 강제적으로 절하게 하거나, 섬기게하여 하나님 두려움보다 더 두려워서 숭배토록 하는 그 곳이 사탄의 위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곳입니다. 왜정시대 때는 신사 참배 안한다고 퇴학도 당하고 감옥에도 가고 형을 받아 죽기도 했는데, 그때 신사가 있었던 그곳이 사탄의 위가 있는 데입니다. 사람이 진실한 신앙을 가지지 아니하면 우상 숭배를 안할 수 없습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유익한 것 더 필요한 것 더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보다 위에나 앞에 두면 우상인데, 우상숭배의 원인은 자신의 불신에 있고, 자기 우상을 버리기 전에는 우상 숭배를 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칭찬 13절 중반절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내 이름을 굳게 잡아”:‘내 이름’은 주님이 하시는 진리와 영감 역사를 말합니다. 주님의 인도, 주님의 뜻은 주님의 지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굳게 잡아 전적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증인’은 보고 들을 사실을 그대로 증거하는 사람으로, 증인이 사실대로 증거하지 아니하면 위증죄가 성립되므로 증인은 진실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충성된 증인은 누구의 증인일까 주님의 증인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주님은 원형이고, 원형이신 한 분 주님을 나타내는 증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증인은 주님은 이렇다, 주님의 사상과 행위는, 주님의 뜻은, 명령은, 요구는, 평가는, 비판은 이렇다, 주님의 어떠하심을 그대로 주님이 원형이라면 주님을 모형적으로 나타내는 자입니다. 증인 노릇을 충성되게 순교로 끝을 마친 안디바와 꼭 같이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다가, 안디바와 같이 순교는 못했으나, 안디바의 순교에 동참한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칭찬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사탄의 위가 있는 그 곳에서, 우상숭배의 본산지에서, 정치적 종교적 탄압과 핍박을 물리치기가 어려운데도 싸워 이기기가 심히 어려운데도, 주님의 증인 노릇을 충성되게 하다가 놋으로 만든 황소 속에 들어가 불에 녹아 순교를 당한 안디바와 같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주님의 증인으로 같이 동참 하였고, 전적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 주님의 인도, 주님과 동행을 끝까지 놓지 않고, 믿음을 사수하고, 어려운 시험과 고난을 잘 견딘, 믿음 저버리지 아니한 것을 주님께서 아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순교’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최고의 상급이요, 영광된 축복이며, 심히 드물고 귀한 것입니다. 순교는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애를 다 바치고 제일 귀한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하여 바치지 않고는 만족이 없는 성도와, 주님과 맺은 정절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 정절을 지키는 정절의 신부적 성도와, 이러한 성도가 어서 떠나 주님을 만나 보고 싶은 간절한 성도에게 정한 생명대로 다 살게 하신 후, 마지막 별세시 평소에 잠재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최종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랑하기 어려운 입장을 주시고, 주님 사랑하는 모양 그대로 하늘 나라에 옮기려는 하나님이 인치시는 역사가 순교입니다.
주님의 책망 14절-15절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나’란 충성된 안디바의 순교에 동참한 자나, 그러나 안디바는 충성된 증인으로 순교로 완전승리를 했으나, 안디바의 완전승리에 동참한 승리자들은 미결승리를 했기 때문에 앞으로 시험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제일되는 성공, 영광은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서 하나님과 동행되는 그때에 생명이 끊어져서 다시는 침노 받을것이 없는 완전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있나니”:‘책망할 것’은 ‘그냥 그리하면 안된다’ 하는 정도의 그러한 죄악이 아니고, 더 강한 책망을 받아야하는 극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선포요, 바로 그 책망은 사형입니다.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은 책망할 것 두어가지란 말씀입니다.
첫째로, ‘발람의 교훈’ 이것을 주님이 심히 미워하셔서 책망하셨습니다. ‘거기’란 사탄의 위가 있는 거기서 한쪽 머리는 그때에 믿음 배반치 아니하려고 생명 내놓고 안디바가 순교를 당하는 그 위치, 그 자리에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을 주님이 심히 미워하셔서 책망하셨습니다. ‘두어 가지’는 둘 이상의 복수를 가르치나, 한 가지 일수도 있는 작은 수를 말합니다. 두어 가지 책망은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을 말합니다. 교훈의 껍데기로 보기에는 둘로 나타났으나, 실상은 하나인 동일한 교훈입니다. 껍데기는, 단체는, 형체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 둘이나, 교훈의 내용, 알맹이는 꼭 같은데, 교훈과 사상을 전달하는 것은 하나는 발람이고, 하나는 니골라당입니다. 껍데기는 백으로, 천으로 바꿔질지라도 속에 알맹이는 하나인 것을 외모로 보지 말고 알맹이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발람의 교훈은 민22:1-31까지 읽어 보면 있습니다. 발람은 이방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선지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아주 유력한 사람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 번민하다가, 선지 발람에게 복술의 예물을 보내 발람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해서 망하게하고, 자기들은 복을 빌어 강하게 해 달라고 교섭을 위해 장로들을 보냈습니다. 첫 번째 교섭 때는 사신을 유숙하게하고 하나님께 물어 이르시는 대로 대답하겠다 한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 복 받은 자니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하심으로 귀족들을 발락에게 돌려보냈습니다. 두 번째 교섭 때는 발락이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발람에게 보내 높여 크게 존귀케 하겠다고 할 때, 집에 금과 은을 가득 채워 줄지라도 하나님 말씀 어기고 더도 덜도 못하겠다 하면서, 무언가에 끌려 사신을 유숙하게 했다가 발람이 밤에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러 왔거든 가라는 말을 듣고 나귀에 안장을 얹어 따라 나섰습니다. 사신을 따라가는 도중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막아서서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다 해도 끝끝내 발락에게 가서 제단을 세 번이나 쌓으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모압을 저주하여 하라는대로 아니하고 하나님 시키시는대로 생명 내놓고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이스라엘은 죄만 지으면 망하니까 우상제물 먹고 행음하면 하나님이 당장 절단낸다는 것을 발락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미디안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칼로 발람을 죽여버렸습니다. 발람은 껍데기로는 하나님을 상대하여 섬기고, 생명 내놓기까지 열심이었으나 그 속에 중심은 돈과 예물, 명예와 존대 받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다 발람을 더 끄는 더 센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유다서에는 “불의의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셋째로 기뻐하시고 중하게 귀하여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 주권주의요, 미워하시고 노여워하시고 진노의 칼을 가시는 것은 발람의 교훈 세상지애주의 발락 주권주의(인본주의)입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지시를 경히 여기고, 세상 것 위하여 하나님 백성을 해하려는 자와 손을 잡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불신하면서, 이해간 순종할 각오도 없이 자기 뜻 먼저 정하고난 뒤, 하나님께 문의하는 거짓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로는 이스라엘 축복하고, 행동은 발락에게 협조하는 이중적 행동으로 이스라엘을 우상의 제물과 행음케하여 이스라엘이 염병으로 이만 삼천명이 죽고, 자신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피살을 당하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우상의 제물’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 위치에 두고 자기의 최고의 지도자로 거기에 최고로 추종할 자로, 최고로 권위를 가진 자로, 어쨌든지 최종은 자기가 그것이 끄는대로 갈 수 있는 그것이 우상이요, 그 생활하게 하는 것이 우상제물 먹는 것입니다. 우상은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새긴 우상과 형상우상입니다. 새긴 우상은 조각뿐만 아니라, 각종 지식, 사상, 기술 등을 판에 칼로 새기듯 새겼다는 말이요, 형상우상은 쇠, 나무, 돌, 금, 철로 형상을 만들거나, 만들지 않아도 그 자체 그대로가 사람의 흥망성쇠, 생사화복, 성공실패가 좌우된다고 생각하여 필요와 유익하다고 인정하여 소원하는 것이 만든 것입니다. 우상이 만들어지는 순서는
첫째 단계는 자기에게 유익하고 필요해서 가지려는 유혹이요,
둘째 단계는 자기의 생사화복, 흥망성쇠, 성공실패에 절대 필요하고 이것 없으면 안된다 할 때 우상된 때요,
셋째 단계는 하나님과 진리는 버려도 당장 화나 낭패가 안되지만 이것은 버리면 당장 현실적으로 손해 낭패를 당하기 때문에 안 당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진리를 내놓고 그것 가지려 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됩니다. ‘우상숭배’란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절한다’ 말은 그것이 시키는대로 복종하는 종되는 것이요 ‘섬긴다’ 말은 그것이 좋게 해야 유익이 있겠다하여 그것을 소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 섬기는 자의 죄값은 사망과 멸망 뿐인데, 당대 뿐 아니라 자손 3-4대까지 미칩니다. ‘행음’은 세상하고 짝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간부라고 하고, 하나님을 본 남편이라고 호세아서에서 말했고, 약4:4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며, 그것이 음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님이 시기하기까지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접하는 것이지, 세상이 좋아서 아름다워서 따라가려고 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발람과 니골라 같이 껍데기 대외 명분은 하나님만 이용해 먹고, 속은 우상제물 먹게하고, 행음하게 하여, 이만사천명이 죽었는데, 하나님이 분해 하시니까 비느하스가 현장에 간음하는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이니 하나님의 분이 풀려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분히 여기는 것을 제자식이라고 제게 속한 것이라고 슬슬 둘러 맞추면서 그거는 이렇고 저렇고 변명하고 옹호하면, 하나님의 노를 더 격발시켜 망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노를 풀어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노여움과 같은 심정으로 책망하고 야단치면 하나님이 노를 푸시고 야! 너무 그러지 마라 인간이 연약한거 아니가 그만 참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권면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버가모 교회에 이런 중대한 죄가 있으니 주님은 용서의 길을 열어 주시고, 회개를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특권을 받았으나 회개의 시기를 놓치면 도리어 하나님의 노가 축적되고, 진노에 대한 보응도 맹렬하십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침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4-5)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니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하셨습니다. 범죄에 대한 낙망은 불신에 속하고, 사죄만 믿고 죄와 투쟁에 진력하지 않는 사람은 언약의 보혈을 불결한 것으로 여기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히10:29)에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회’는 잘못된 죄를 깊이 원통하게 뉘우치고 후회하는 것이요. ‘개’는 잘못된 데서 방향을 돌이켜 전환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모범자, 베드로는 “닭 울기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이 원통해서 첫 닭이 울면 깜짝 놀랐고 밖에 나가서 울면서 회개 하였다고 전해지고, 비자 앞에서 부인했던 예수님을 공회 앞에서 증거하여 비겁자가 용감한 자로 나타나 회개했고, 주님 뵈올 면목이 없다고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범죄에 대하여 생각하면 견딜수 없고 뼈가 꺽어지는 것과 같고 심장이 터지는 듯 아픈 것이 회개자의 심령입니다. 회개자의 태도는 다윗이 범죄하였을 때, 나단이 책망할 때 즉시 회개하고 자기 앞에 다가올 하나님의 징벌을 면해달라고 자기의 수치나 죄를 숨기거나 변호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끊어질까 두려워하여 간구했습니다.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회개의 열매는 땅의 아름다운 소산(생명, 평안, 부요)을 먹고(사1:18), 거역하면 칼(환난, 고통, 죽음)에 삼킨다고 했습니다. 16절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분이시므로 얼른 회개하면 좋을텐데, 인자와 용납과 길이 참으셔도 하나님의 애만 태우고 회개치 아니하면 회개를 권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진노와 심판의 주님으로 임하여 노와 분으로 진노를 쏟게 됩니다.(진노의 날, 노아홍수, 소돔고모라, 아말렉) “복빎을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되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에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임한다’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지 아니하고, 주관적으로는 심령이 완패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이야 오지 아니하리라 하는 그때에 임하심으로 멸망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내 입의 검으로’:회개의 기회를 놓친 자에게 말씀의 검으로 싸워서 끊을 것을 끊고, 제할 것을 제하여 완전 판결을 보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어떻게하든지 긍휼히 여겨주시고, 참고 기다려 주시지만, 회개 안하면 속히 임하여 입의 검으로 싸워서 소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노를 푸는 방법은 “회개” 뿐입니다. ‘그들과 싸우리라’:‘그들’이라 함은 선민을 대적하는 자들은 물론이려니와 택자라도 회개치 아니할 때에는 주님과 싸우는 적이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을 거져두지 아니하시니,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주님의 약속 1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기는 그에게는’:믿음 저버리지 아니하고 발람의 교훈 지키는 죄를 회개하여 자기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으로 전부를 삼고, 하나님을 최고로 삼고, 하나님을 제일 두려워하고, 자기에게 하나님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을 말씀합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란 ‘만나’는 영의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하고, 힘을 주고, 복음에 약속된 전부를 실제로 다 소유하게 하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말씀의 정확무오를 믿게하고 애착하고 알게하는 것이요, 성경의 가치성, 권위성을 알게하여 실행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감추인 만나는 성령님의 감화감동을 말씀합니다. 성경은 아무나 읽어도 읽을 수 있지만, 그 속에 감추인 것, 영감이 있는데 이것은 아무나 성경을 읽어도 그 속의 감추인 것, 영감은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자기 모든 언행심사를 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먹는 것이요, 인격의 양식입니다. “또 흰돌을 줄터인데”:‘흰 것’은 성결, ‘돌’은 주님을 상징한 것으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2:4-5) 하셨으니, 성결하신 주님을 올바로 발견하여 올바로 믿고, 하나님 형상대로의 자기로 변화시켜 주시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십니다.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령님의 은사를 자기가 받고, 성령님의 은사를 받고 보니, 예수님 같이 성결하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돌 위에 긁어 각을 하여 새 이름을 기록한 것 같이, 그 돌은 흰 돌인데, 성결한 생활과 하나님 형상대로의 닮은 변화된 그 사람에게 새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주님의 사활의 대속의 은혜를 실지로 느끼고, 깨달아,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않고, 입고 사는 그런 행위를 하는 새 운동, 새 역사, 새 대속의 제물이 되어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가지고, 예수님과 꼭 같은 자가 되어서, 대형으로 사죄시키고, 대행으로 칭의시키고, 대 화목으로 화친시키고, 대생으로 영생시키는 예수님의 증인 노릇 한다는 말입니다.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자가 없느니라 배움이나 연구나 들음으로는 도무지 가질 수 없고 실제 이대로 살아서 체험한 사람이 알지 그 전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라고 하신 것은 복음이면 어떤 형편, 환경, 사정, 입장에서도 해결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 체험, 믿어보고, 살아본 신앙의 간증임을 ‘내가’로 표현한 것입니다. 복음은 내가 직접 행하여 체험해 보아야만 그 역사를 알 수 있지, 그 전에는 모르는 비밀의 세계입니다.
셋째로 귀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시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교회는 주권을 하나님에게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 버가모 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다른 곳에 보면 ‘좌우에 날선 이한 검’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검을 가지고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내용을 보나 안보나 어떤 교회라고 짐작이 됩니까 좌우에 날선 검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찔러서 도려낼이 있고, 끊어낼 것 있고, 쪼개낼 것 있고, 빚을 것 있고, 깍을 것 있는 잡탱이 교회요, 잡탱이가 섞여 있다는 것을 가르쳐 말씀합니다. ‘좌우에 날선 검’이라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왜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좌나 우나 전이나 후나 동서남북, 자타, 아무에게나 공평되게 꼭 그대로 이행되고, 그대로 심판되고, 그대로 평가된다는 말입니다. 설교 말씀도 설교하는 목사에게도 설교 듣는 교인에게도 조금도 차이가 없고 꼭 같이 해당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나 미워하는 자에게도 꼭 같이 해당이 되며 좌우라는 것은 모든 주위 전체에게 꼭 같은 동일한 권세를 가지고, 동일한 책임을 지우고, 동일한 심판을 하고, 동일한 보응을 한다는 동일이라는 것을 가리켜서 좌우라 말한 것입니다. ‘좌우’란 전후, 상하, 전부 다 포함한 것을 표시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날선 검’은 아주 뾰족해서 비수검 모양으로 썩썩 아주 잘 드는 칼이란 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세밀과 임의적인 심판의 권위를 뜻하는 말입니다. ‘칼’은 끊고 쪼개고 찌르는 것으로 쪼갤 것이 있으면 쪼개고, 찌를 것이 있으면 찌르고, 끊을 것이 있으면 끊는 말씀이란 말입니다. 칼은 의사의 손에 들려지면 수술의 칼로, 어머니 손에 들려진 칼은 음식을 장만하는 칼로, 장수의 손에 들려진 칼은 적을 찌르고, 목을 끊는 칼로 쓰여집니다. 칼인 말씀이 예고할 때에 말씀에 걸리는 입장에 따라 쪼갤 것은 쪼개고, 찌를 것은 찌르고 끊을 것은, 끊는 반면에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긍휼과 자비에 능한 수슬의 칼로, 어머니 손에 들려진 칼로 역사하고, 상해 없는 치유의 복음이 되고, 회개치 아니하고 기회를 놓친 자에게는 정죄와 진노와 심판의 율법이 되어 쪼개고, 찌르고, 끊는 복수의 칼이 됩니다.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아 날선 검으로 찌르고, 쪼개고, 끊어야 할 죄악이 있는 것이 내용을 보기 전에 보여집니다. 버가모 교회의 죄악이 오늘 우리들의 죄악인 것을 알고 찾아서 회개하는 것이 수술의 검으로 복이 될 것이지만, 옮길 기회에 기회를 지나쳐 버리면 구원의 은혜가 지나고 나면 심판 즉 복수의 칼이 온다는 것이 성경역사입니다.
주님의 위로 13절 상반절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의 입장, 처지, 형편, 사정을 대 도서관이 있고, 황제 숭배의 본부가 있고, 뱀신전 제우스 신전등 우상숭배의 본산지라는 것과 당하는 역경, 애로, 고난, 고통을 잘 아시고, 위로하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교양함에 있어서 단점보다 장점 찾기에 먼저 주력하여, 우리에게 희망을 준 후에 단점을 세밀히 살펴 고치도록 교양하는 시은의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처지, 입장, 형편, 사정을 다 보고 계시고, 행동록에 언행심사 일체를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입장, 형편, 사정을 보고 계실 뿐만 아니라, 친히 주님께서 그 입장, 그 형편, 그 사정을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입장, 형편, 처지, 사정을 만든 가운데(요소 중)에는 사람도 들었고, 돈도 들었고, 권세도 들었고, 지식도 들었고, 마귀도 짐승도 물질도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만드신 주님이 그 모든 것을 다 활용해 가지고 우리 구원에 필요한 현실을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 현실은 주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주권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도 방해할 자가 없고, 주님의 예정대로 주권 의지대로 만드신 것임을 확정을 지워야 합니다. ‘사탄의 위가 있는 데라’는 말은 사탄이 뚜렷한 형체를 가지고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란 말입니다. 버가모에 뱀신, 제우스신, 황제 숭배의 본당이 있어 국가적으로 강압에 의하여 의무적으로 숭배하게 하는 신전을 ‘사탄의 위’라고 말합니다. 뚜렷한 형체, 단군 신전, 일본신사, 향교, 충혼탑, 각종 위인들의 동상 등 뚜렷한 형체를 가지되, 그대로 있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국가 의식이나, 강제적으로 절하게 하거나, 섬기게하여 하나님 두려움보다 더 두려워서 숭배토록 하는 그 곳이 사탄의 위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곳입니다. 왜정시대 때는 신사 참배 안한다고 퇴학도 당하고 감옥에도 가고 형을 받아 죽기도 했는데, 그때 신사가 있었던 그곳이 사탄의 위가 있는 데입니다. 사람이 진실한 신앙을 가지지 아니하면 우상 숭배를 안할 수 없습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유익한 것 더 필요한 것 더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보다 위에나 앞에 두면 우상인데, 우상숭배의 원인은 자신의 불신에 있고, 자기 우상을 버리기 전에는 우상 숭배를 안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칭찬 13절 중반절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내 이름을 굳게 잡아”:‘내 이름’은 주님이 하시는 진리와 영감 역사를 말합니다. 주님의 인도, 주님의 뜻은 주님의 지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굳게 잡아 전적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증인’은 보고 들을 사실을 그대로 증거하는 사람으로, 증인이 사실대로 증거하지 아니하면 위증죄가 성립되므로 증인은 진실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충성된 증인은 누구의 증인일까 주님의 증인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주님은 원형이고, 원형이신 한 분 주님을 나타내는 증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증인은 주님은 이렇다, 주님의 사상과 행위는, 주님의 뜻은, 명령은, 요구는, 평가는, 비판은 이렇다, 주님의 어떠하심을 그대로 주님이 원형이라면 주님을 모형적으로 나타내는 자입니다. 증인 노릇을 충성되게 순교로 끝을 마친 안디바와 꼭 같이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다가, 안디바와 같이 순교는 못했으나, 안디바의 순교에 동참한 버가모 교회에 대하여 칭찬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사탄의 위가 있는 그 곳에서, 우상숭배의 본산지에서, 정치적 종교적 탄압과 핍박을 물리치기가 어려운데도 싸워 이기기가 심히 어려운데도, 주님의 증인 노릇을 충성되게 하다가 놋으로 만든 황소 속에 들어가 불에 녹아 순교를 당한 안디바와 같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주님의 증인으로 같이 동참 하였고, 전적 주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 주님의 인도, 주님과 동행을 끝까지 놓지 않고, 믿음을 사수하고, 어려운 시험과 고난을 잘 견딘, 믿음 저버리지 아니한 것을 주님께서 아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순교’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최고의 상급이요, 영광된 축복이며, 심히 드물고 귀한 것입니다. 순교는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애를 다 바치고 제일 귀한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하여 바치지 않고는 만족이 없는 성도와, 주님과 맺은 정절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 정절을 지키는 정절의 신부적 성도와, 이러한 성도가 어서 떠나 주님을 만나 보고 싶은 간절한 성도에게 정한 생명대로 다 살게 하신 후, 마지막 별세시 평소에 잠재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최종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랑하기 어려운 입장을 주시고, 주님 사랑하는 모양 그대로 하늘 나라에 옮기려는 하나님이 인치시는 역사가 순교입니다.
주님의 책망 14절-15절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나’란 충성된 안디바의 순교에 동참한 자나, 그러나 안디바는 충성된 증인으로 순교로 완전승리를 했으나, 안디바의 완전승리에 동참한 승리자들은 미결승리를 했기 때문에 앞으로 시험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제일되는 성공, 영광은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서 하나님과 동행되는 그때에 생명이 끊어져서 다시는 침노 받을것이 없는 완전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있나니”:‘책망할 것’은 ‘그냥 그리하면 안된다’ 하는 정도의 그러한 죄악이 아니고, 더 강한 책망을 받아야하는 극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선포요, 바로 그 책망은 사형입니다.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은 책망할 것 두어가지란 말씀입니다.
첫째로, ‘발람의 교훈’ 이것을 주님이 심히 미워하셔서 책망하셨습니다. ‘거기’란 사탄의 위가 있는 거기서 한쪽 머리는 그때에 믿음 배반치 아니하려고 생명 내놓고 안디바가 순교를 당하는 그 위치, 그 자리에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을 주님이 심히 미워하셔서 책망하셨습니다. ‘두어 가지’는 둘 이상의 복수를 가르치나, 한 가지 일수도 있는 작은 수를 말합니다. 두어 가지 책망은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을 말합니다. 교훈의 껍데기로 보기에는 둘로 나타났으나, 실상은 하나인 동일한 교훈입니다. 껍데기는, 단체는, 형체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 둘이나, 교훈의 내용, 알맹이는 꼭 같은데, 교훈과 사상을 전달하는 것은 하나는 발람이고, 하나는 니골라당입니다. 껍데기는 백으로, 천으로 바꿔질지라도 속에 알맹이는 하나인 것을 외모로 보지 말고 알맹이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발람의 교훈은 민22:1-31까지 읽어 보면 있습니다. 발람은 이방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의 선지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아주 유력한 사람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 번민하다가, 선지 발람에게 복술의 예물을 보내 발람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해서 망하게하고, 자기들은 복을 빌어 강하게 해 달라고 교섭을 위해 장로들을 보냈습니다. 첫 번째 교섭 때는 사신을 유숙하게하고 하나님께 물어 이르시는 대로 대답하겠다 한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 복 받은 자니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하심으로 귀족들을 발락에게 돌려보냈습니다. 두 번째 교섭 때는 발락이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발람에게 보내 높여 크게 존귀케 하겠다고 할 때, 집에 금과 은을 가득 채워 줄지라도 하나님 말씀 어기고 더도 덜도 못하겠다 하면서, 무언가에 끌려 사신을 유숙하게 했다가 발람이 밤에 하나님께서 너를 부르러 왔거든 가라는 말을 듣고 나귀에 안장을 얹어 따라 나섰습니다. 사신을 따라가는 도중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막아서서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다 해도 끝끝내 발락에게 가서 제단을 세 번이나 쌓으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모압을 저주하여 하라는대로 아니하고 하나님 시키시는대로 생명 내놓고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이스라엘은 죄만 지으면 망하니까 우상제물 먹고 행음하면 하나님이 당장 절단낸다는 것을 발락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미디안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칼로 발람을 죽여버렸습니다. 발람은 껍데기로는 하나님을 상대하여 섬기고, 생명 내놓기까지 열심이었으나 그 속에 중심은 돈과 예물, 명예와 존대 받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다 발람을 더 끄는 더 센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유다서에는 “불의의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셋째로 기뻐하시고 중하게 귀하여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 주권주의요, 미워하시고 노여워하시고 진노의 칼을 가시는 것은 발람의 교훈 세상지애주의 발락 주권주의(인본주의)입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지시를 경히 여기고, 세상 것 위하여 하나님 백성을 해하려는 자와 손을 잡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불신하면서, 이해간 순종할 각오도 없이 자기 뜻 먼저 정하고난 뒤, 하나님께 문의하는 거짓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로는 이스라엘 축복하고, 행동은 발락에게 협조하는 이중적 행동으로 이스라엘을 우상의 제물과 행음케하여 이스라엘이 염병으로 이만 삼천명이 죽고, 자신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피살을 당하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우상의 제물’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 위치에 두고 자기의 최고의 지도자로 거기에 최고로 추종할 자로, 최고로 권위를 가진 자로, 어쨌든지 최종은 자기가 그것이 끄는대로 갈 수 있는 그것이 우상이요, 그 생활하게 하는 것이 우상제물 먹는 것입니다. 우상은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새긴 우상과 형상우상입니다. 새긴 우상은 조각뿐만 아니라, 각종 지식, 사상, 기술 등을 판에 칼로 새기듯 새겼다는 말이요, 형상우상은 쇠, 나무, 돌, 금, 철로 형상을 만들거나, 만들지 않아도 그 자체 그대로가 사람의 흥망성쇠, 생사화복, 성공실패가 좌우된다고 생각하여 필요와 유익하다고 인정하여 소원하는 것이 만든 것입니다. 우상이 만들어지는 순서는
첫째 단계는 자기에게 유익하고 필요해서 가지려는 유혹이요,
둘째 단계는 자기의 생사화복, 흥망성쇠, 성공실패에 절대 필요하고 이것 없으면 안된다 할 때 우상된 때요,
셋째 단계는 하나님과 진리는 버려도 당장 화나 낭패가 안되지만 이것은 버리면 당장 현실적으로 손해 낭패를 당하기 때문에 안 당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진리를 내놓고 그것 가지려 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됩니다. ‘우상숭배’란 우상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절한다’ 말은 그것이 시키는대로 복종하는 종되는 것이요 ‘섬긴다’ 말은 그것이 좋게 해야 유익이 있겠다하여 그것을 소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상 섬기는 자의 죄값은 사망과 멸망 뿐인데, 당대 뿐 아니라 자손 3-4대까지 미칩니다. ‘행음’은 세상하고 짝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간부라고 하고, 하나님을 본 남편이라고 호세아서에서 말했고, 약4:4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며, 그것이 음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님이 시기하기까지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접하는 것이지, 세상이 좋아서 아름다워서 따라가려고 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발람과 니골라 같이 껍데기 대외 명분은 하나님만 이용해 먹고, 속은 우상제물 먹게하고, 행음하게 하여, 이만사천명이 죽었는데, 하나님이 분해 하시니까 비느하스가 현장에 간음하는 남녀를 창으로 찔러 죽이니 하나님의 분이 풀려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분히 여기는 것을 제자식이라고 제게 속한 것이라고 슬슬 둘러 맞추면서 그거는 이렇고 저렇고 변명하고 옹호하면, 하나님의 노를 더 격발시켜 망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노를 풀어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노여움과 같은 심정으로 책망하고 야단치면 하나님이 노를 푸시고 야! 너무 그러지 마라 인간이 연약한거 아니가 그만 참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권면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버가모 교회에 이런 중대한 죄가 있으니 주님은 용서의 길을 열어 주시고, 회개를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특권을 받았으나 회개의 시기를 놓치면 도리어 하나님의 노가 축적되고, 진노에 대한 보응도 맹렬하십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침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4-5)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니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하셨습니다. 범죄에 대한 낙망은 불신에 속하고, 사죄만 믿고 죄와 투쟁에 진력하지 않는 사람은 언약의 보혈을 불결한 것으로 여기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히10:29)에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회’는 잘못된 죄를 깊이 원통하게 뉘우치고 후회하는 것이요. ‘개’는 잘못된 데서 방향을 돌이켜 전환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모범자, 베드로는 “닭 울기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이 원통해서 첫 닭이 울면 깜짝 놀랐고 밖에 나가서 울면서 회개 하였다고 전해지고, 비자 앞에서 부인했던 예수님을 공회 앞에서 증거하여 비겁자가 용감한 자로 나타나 회개했고, 주님 뵈올 면목이 없다고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범죄에 대하여 생각하면 견딜수 없고 뼈가 꺽어지는 것과 같고 심장이 터지는 듯 아픈 것이 회개자의 심령입니다. 회개자의 태도는 다윗이 범죄하였을 때, 나단이 책망할 때 즉시 회개하고 자기 앞에 다가올 하나님의 징벌을 면해달라고 자기의 수치나 죄를 숨기거나 변호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끊어질까 두려워하여 간구했습니다.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회개의 열매는 땅의 아름다운 소산(생명, 평안, 부요)을 먹고(사1:18), 거역하면 칼(환난, 고통, 죽음)에 삼킨다고 했습니다. 16절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분이시므로 얼른 회개하면 좋을텐데, 인자와 용납과 길이 참으셔도 하나님의 애만 태우고 회개치 아니하면 회개를 권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진노와 심판의 주님으로 임하여 노와 분으로 진노를 쏟게 됩니다.(진노의 날, 노아홍수, 소돔고모라, 아말렉) “복빎을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되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에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속히 임한다’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지 아니하고, 주관적으로는 심령이 완패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이야 오지 아니하리라 하는 그때에 임하심으로 멸망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내 입의 검으로’:회개의 기회를 놓친 자에게 말씀의 검으로 싸워서 끊을 것을 끊고, 제할 것을 제하여 완전 판결을 보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어떻게하든지 긍휼히 여겨주시고, 참고 기다려 주시지만, 회개 안하면 속히 임하여 입의 검으로 싸워서 소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노를 푸는 방법은 “회개” 뿐입니다. ‘그들과 싸우리라’:‘그들’이라 함은 선민을 대적하는 자들은 물론이려니와 택자라도 회개치 아니할 때에는 주님과 싸우는 적이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을 거져두지 아니하시니,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주님의 약속 1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기는 그에게는’:믿음 저버리지 아니하고 발람의 교훈 지키는 죄를 회개하여 자기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으로 전부를 삼고, 하나님을 최고로 삼고, 하나님을 제일 두려워하고, 자기에게 하나님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을 말씀합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란 ‘만나’는 영의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하고, 힘을 주고, 복음에 약속된 전부를 실제로 다 소유하게 하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성령님은 하나님 말씀의 정확무오를 믿게하고 애착하고 알게하는 것이요, 성경의 가치성, 권위성을 알게하여 실행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감추인 만나는 성령님의 감화감동을 말씀합니다. 성경은 아무나 읽어도 읽을 수 있지만, 그 속에 감추인 것, 영감이 있는데 이것은 아무나 성경을 읽어도 그 속의 감추인 것, 영감은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자기 모든 언행심사를 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먹는 것이요, 인격의 양식입니다. “또 흰돌을 줄터인데”:‘흰 것’은 성결, ‘돌’은 주님을 상징한 것으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2:4-5) 하셨으니, 성결하신 주님을 올바로 발견하여 올바로 믿고, 하나님 형상대로의 자기로 변화시켜 주시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십니다.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령님의 은사를 자기가 받고, 성령님의 은사를 받고 보니, 예수님 같이 성결하게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돌 위에 긁어 각을 하여 새 이름을 기록한 것 같이, 그 돌은 흰 돌인데, 성결한 생활과 하나님 형상대로의 닮은 변화된 그 사람에게 새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주님의 사활의 대속의 은혜를 실지로 느끼고, 깨달아,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않고, 입고 사는 그런 행위를 하는 새 운동, 새 역사, 새 대속의 제물이 되어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가지고, 예수님과 꼭 같은 자가 되어서, 대형으로 사죄시키고, 대행으로 칭의시키고, 대 화목으로 화친시키고, 대생으로 영생시키는 예수님의 증인 노릇 한다는 말입니다.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자가 없느니라 배움이나 연구나 들음으로는 도무지 가질 수 없고 실제 이대로 살아서 체험한 사람이 알지 그 전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라고 하신 것은 복음이면 어떤 형편, 환경, 사정, 입장에서도 해결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 체험, 믿어보고, 살아본 신앙의 간증임을 ‘내가’로 표현한 것입니다. 복음은 내가 직접 행하여 체험해 보아야만 그 역사를 알 수 있지, 그 전에는 모르는 비밀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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