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신분 (벧전2:6-10)
본문
앞에서 예수님이 모통이돌이고 우리는 그를 중심으로 해서 지어져 가는 성전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귀한 줄 알고 위로를 받는 자가 신자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이런 사실에서 위로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를 받아라고 말하지 않아도 신자는 위로를 받습니다. 믿음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에 성전에 참여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때 위로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퉁이 돌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하고 지나갈 것이 있습니다. 모퉁이 돌 또는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할 때에 주님이 성전의 기초요 기준이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을 기준하여 주님께 연하여 나머지 돌들이 놓여지며 하나의 건물로서 지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 의하면 이 돌은 시험을 통과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돌이라고 했습니다(사28:16). 시험을 받아 귀하고 견고하게 되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그 귀중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는 말 속에는 버려진 것과 머리가 된 것에 대한 대비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버린 돌인데 그것이 건축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므로 그 귀중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나 본문에서나 이것보다 더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돌이라고 하니 어쩐지 딱딱한 표현같이 들리고 인격도 없고 생명도 없는 것 같이 생각되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돌은 돌인데 그것은 신앙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인격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돌입니다. 생명을 주는 돌이요 영생하게 하는 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돌이 성전 전체에 생명을 공급하여 성전 전체가 산 성전이 되게 합니다. 돌의 생명으로 온 성전을 살립니다. 이 생명력은 곧 성전의 질서요 다스림입니다. 이런 면에서 돌은 바울이 말했던 '머리' 개념과 같습니다.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바울은 사람에 비교하니까 머리라고 했고 베드로는 성전에 비유하고 말하니까 머릿돌이라고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둘은 서로 같은 개념임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베드로는 주님이 교회에 자신의 생명인 성령님으로 생명을 공급하며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원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지금도 주님이 생명력을 공급하면서 살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도 살겠고 라고 하신 그 말씀은 마지막에 이루어질 말씀이지만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세상이라고 해서 곤해지지만 말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문득문득 이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다음으로 이 머릿돌은 심판의 돌로 기능합니다(8).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됩니다. 왜 부딪히고 걸려서 넘어지게 합니까 이 돌은 믿지 않은 자와 반대이기 때문에 부딪힙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돌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소망을 둔 자가 부딪히고 넘어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넘어지는 자는 넘어짐을 위하여 세워진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는 그 죄악 때문에 넘어지게 되는 자들입니다. 멸망할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런 자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 말들은 신자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인가를 말해줍니다. 이 용어들은 출애굽 사건에서 나오게 됩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보면 비슷한 용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출19:5절부터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출애굽 시대의 시내산에서 하셨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너희' 곧 세상에서 흩어져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나그네인 너희가 곧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더구나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았듯이 이제 세상에서 흩어져 사는 너희가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그네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광야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요 또 신자들이 흩어져서 사는 이 세상이 바로 광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아야 했듯이 신약의 신자들은 광야 세상에서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에게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신자들을 어떻게 이끌고 계시는 지를 신자들을 보고 알도록 하기 위하여 광야 나그네 세상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즉시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우리의 밀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도록 합시다.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셨던 사랑을 되새깁시다. 그 분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도 죽고 부활하는 세상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을 확인하고 또 하면서 죽는 자리까지 가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세상 나그네 과정을 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기면서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옛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었듯이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이것이 너무 추상적인 것 같아서 실감이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신자들을 이끌고 계시며 우리 중에 임재하여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광야 같은 이 세상을 보지 말고 십자가의 주님을 뵈오면서 이 세상을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이 특별한 용어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용어들은 출애굽기 19장을 그대로 인용해 온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단순히 그대로 인용해 온 것만이 아닙니다. 변화가 있고 의미가 강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과하여 주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더욱 부요해진 의미들이 부가되어 있습니다. '택하신 족속'이라는 말은 출애굽기 19장의 '열국 중에서 내 소유'라는 말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국 중에서 내 소유'란 세상 모든 나라들 중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배와 같은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보배와 같은 백성이 신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자들은 새로이 선택된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혈통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보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예수님이 신자들을 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선택된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혈통을 따라 이어져 왔던 옛 선택은 없어졌고 주님에 의해서 성령님을 따라 선택되는 선택이 새로운 선택입니다 이렇게 선택된 사람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뜻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제사장의 나라'라는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제사장 나라라는 말은 제사장들의 지배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미상은 이스라엘 모두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온통 제사장들이 사는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제사장들은 대제사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대 제사장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아직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은 다윗 시대에 와서야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왕 같은 제사장 직분에 모든 신자를 올려놓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왕으로 오셔서 제사자의 직분을 함께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제사장은 왕과 통일이 됩니다. 스가랴서에서 순이라는 사람이 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요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을 얻어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왕의 직분과 제사장의 직분이 한 자리 한 직분으로 통일이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통일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왕과 제사장의 사역을 함께 감당하셨기 때문에 두 직분에 예수 안에서 통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아론에게 옷을 입히며 보여주셨던 대제사장의 실체가 되신 것입니다. 아론은 그림자요 예수님을 실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제사장의 신분을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덧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예수님이 완성하신 사역을 덧입고 있는 영광스러운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고난 속에 있지만 이러한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나라'라고 하는 말은 '거룩한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라라고 하면 통치를 중시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민족이란 말은 혈통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신자들은 예수의 피로 한 민족이 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로 한 민족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피만 믿는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피로 한 민족이 되었다고 하면 예수님을 어머니에 비유하고 하나님은 아버지 노릇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육체적인 것에 비유하여 상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예수의 피만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했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육체적인 연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피만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세상과 다른 거룩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6절에 나오는 '거룩한 백성'과 상관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출애굽기도 '거룩한 민족'이라고 번역했으면 더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말은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획득한 백성 즉 얻은 백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출애굽기 전체 문맥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친히 애굽에 가셔서 붙잡혀서 종노릇하는 이스라엘을 빼앗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은 조상들과 한 언약 때문에 빼앗아 오셨다면 신약이 신자들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싸우시므로 세상에서 빼앗아 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싸우셔서 마귀의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빼앗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0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죽기까지 싸워서 빼앗아 내어 하나님의 소유로 삼은 귀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함을 통해서 주님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를 기억하게 하고 또 믿지 아니 할 때 처하여 있던 어두움과 비참함이 어떠했던 가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제 믿고 나서 얻는 밝음이 어떠하며 입은 긍휼이 얼마 큰 가를 되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신자들이 또한 주님의 하신 일을 선전하면서 살도록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주님이 우리에게 위하여 하신 일과 그 목적과 또 자기의 사역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신분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되새기면서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퉁이 돌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하고 지나갈 것이 있습니다. 모퉁이 돌 또는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할 때에 주님이 성전의 기초요 기준이 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을 기준하여 주님께 연하여 나머지 돌들이 놓여지며 하나의 건물로서 지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 의하면 이 돌은 시험을 통과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돌이라고 했습니다(사28:16). 시험을 받아 귀하고 견고하게 되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그 귀중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는 말 속에는 버려진 것과 머리가 된 것에 대한 대비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버린 돌인데 그것이 건축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므로 그 귀중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나 본문에서나 이것보다 더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돌이라고 하니 어쩐지 딱딱한 표현같이 들리고 인격도 없고 생명도 없는 것 같이 생각되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돌은 돌인데 그것은 신앙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인격입니다. 때문에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돌입니다. 생명을 주는 돌이요 영생하게 하는 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돌이 성전 전체에 생명을 공급하여 성전 전체가 산 성전이 되게 합니다. 돌의 생명으로 온 성전을 살립니다. 이 생명력은 곧 성전의 질서요 다스림입니다. 이런 면에서 돌은 바울이 말했던 '머리' 개념과 같습니다.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바울은 사람에 비교하니까 머리라고 했고 베드로는 성전에 비유하고 말하니까 머릿돌이라고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둘은 서로 같은 개념임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베드로는 주님이 교회에 자신의 생명인 성령님으로 생명을 공급하며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원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지금도 주님이 생명력을 공급하면서 살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도 살겠고 라고 하신 그 말씀은 마지막에 이루어질 말씀이지만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세상이라고 해서 곤해지지만 말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력으로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문득문득 이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다음으로 이 머릿돌은 심판의 돌로 기능합니다(8). 믿지 않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됩니다. 왜 부딪히고 걸려서 넘어지게 합니까 이 돌은 믿지 않은 자와 반대이기 때문에 부딪힙니다. 믿지 않는 자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돌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소망을 둔 자가 부딪히고 넘어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넘어지는 자는 넘어짐을 위하여 세워진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는 그 죄악 때문에 넘어지게 되는 자들입니다. 멸망할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런 자와는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 말들은 신자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인가를 말해줍니다. 이 용어들은 출애굽 사건에서 나오게 됩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보면 비슷한 용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출19:5절부터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출애굽 시대의 시내산에서 하셨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너희' 곧 세상에서 흩어져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나그네인 너희가 곧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더구나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았듯이 이제 세상에서 흩어져 사는 너희가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그네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광야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요 또 신자들이 흩어져서 사는 이 세상이 바로 광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아야 했듯이 신약의 신자들은 광야 세상에서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에게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신자들을 어떻게 이끌고 계시는 지를 신자들을 보고 알도록 하기 위하여 광야 나그네 세상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즉시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과 우리의 밀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도록 합시다.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셨던 사랑을 되새깁시다. 그 분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도 죽고 부활하는 세상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을 확인하고 또 하면서 죽는 자리까지 가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세상 나그네 과정을 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기면서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옛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었듯이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이것이 너무 추상적인 것 같아서 실감이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신자들을 이끌고 계시며 우리 중에 임재하여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광야 같은 이 세상을 보지 말고 십자가의 주님을 뵈오면서 이 세상을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이 특별한 용어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용어들은 출애굽기 19장을 그대로 인용해 온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단순히 그대로 인용해 온 것만이 아닙니다. 변화가 있고 의미가 강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과하여 주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더욱 부요해진 의미들이 부가되어 있습니다. '택하신 족속'이라는 말은 출애굽기 19장의 '열국 중에서 내 소유'라는 말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국 중에서 내 소유'란 세상 모든 나라들 중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배와 같은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보배와 같은 백성이 신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자들은 새로이 선택된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혈통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보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예수님이 신자들을 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예수님에 의하여 새롭게 선택된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혈통을 따라 이어져 왔던 옛 선택은 없어졌고 주님에 의해서 성령님을 따라 선택되는 선택이 새로운 선택입니다 이렇게 선택된 사람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은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뜻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제사장의 나라'라는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의 제사장 나라라는 말은 제사장들의 지배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미상은 이스라엘 모두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온통 제사장들이 사는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제사장들은 대제사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대 제사장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아직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은 다윗 시대에 와서야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왕 같은 제사장 직분에 모든 신자를 올려놓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왕으로 오셔서 제사자의 직분을 함께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제사장은 왕과 통일이 됩니다. 스가랴서에서 순이라는 사람이 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것이요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을 얻어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왕의 직분과 제사장의 직분이 한 자리 한 직분으로 통일이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통일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왕과 제사장의 사역을 함께 감당하셨기 때문에 두 직분에 예수 안에서 통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아론에게 옷을 입히며 보여주셨던 대제사장의 실체가 되신 것입니다. 아론은 그림자요 예수님을 실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제사장의 신분을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덧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예수님이 완성하신 사역을 덧입고 있는 영광스러운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고난 속에 있지만 이러한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나라'라고 하는 말은 '거룩한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라라고 하면 통치를 중시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민족이란 말은 혈통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신자들은 예수의 피로 한 민족이 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로 한 민족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피만 믿는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피로 한 민족이 되었다고 하면 예수님을 어머니에 비유하고 하나님은 아버지 노릇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육체적인 것에 비유하여 상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예수의 피만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했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육체적인 연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피만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세상과 다른 거룩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6절에 나오는 '거룩한 백성'과 상관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출애굽기도 '거룩한 민족'이라고 번역했으면 더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말은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획득한 백성 즉 얻은 백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출애굽기 전체 문맥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친히 애굽에 가셔서 붙잡혀서 종노릇하는 이스라엘을 빼앗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은 조상들과 한 언약 때문에 빼앗아 오셨다면 신약이 신자들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싸우시므로 세상에서 빼앗아 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싸우셔서 마귀의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빼앗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0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죽기까지 싸워서 빼앗아 내어 하나님의 소유로 삼은 귀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함을 통해서 주님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를 기억하게 하고 또 믿지 아니 할 때 처하여 있던 어두움과 비참함이 어떠했던 가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제 믿고 나서 얻는 밝음이 어떠하며 입은 긍휼이 얼마 큰 가를 되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신자들이 또한 주님의 하신 일을 선전하면서 살도록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주님이 우리에게 위하여 하신 일과 그 목적과 또 자기의 사역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신분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되새기면서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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