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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저희 가려던 곳에 가고 말았습니다. (요6:16-21)

본문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주창하는 혁명의 온상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갈릴리 지배자 헤롯 안티바스에게는 이곳이 항상 문제의 관심사요, 고통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갈릴리로 지나가신 이후부터 그곳은 큰 빛을 던져 주는 세계 복음 선교의 고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상에, 아니 예수님 재림하실 동안까지 이 갈릴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성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인류 구원 역사(役事)인 복음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인 제자들로 영예롭게 기용했습니다. 그들을 세계 선교의 기수가 되게 하고, 세계의 영혼을 불지르는 데 선봉장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진정 위대한 인간 혁명의 기수들이 되게 했습니다. 여기 갈릴리 사역에서 우리에게 빛을 던진 축복의 은총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는(마 14:33) 또 하나의 기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마태복음 14장 22-33절과 마가복음 6장 45-52절에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는 디베랴 언덕에서 주리고 목마른 5,000명의 무리들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하여 배불리 먹인 이적을 행하신 이후였습니다. 이때 흥분한 유대 군중들은 예수를 억지로 잡아 임금을 삼고, 유대 독립 운동의 메시아로 삼을 여론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요 6:15). 예수님은 권력에 굶주린 유대 군중들의 소행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태워 벳새다의 가버나움으로 가게 하였습니다(마 14:22, 요 6:17, 막 6:4
5). 그리고 주님은 혼자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였습니다(요 6:15, 막 6:46). 이렇게 예수님은 위험한 군중들 속에서 자신과 제자들을 결별시켰습니다. 지금 우리는 ‘제자들을 태운 배는 저희의 가려는 목적지까지 이르렀다’(요 6:21)는 말씀에 유의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그 배가 목적지까지 잘 도착했는가
I. 주께서 가게 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에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을 먼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던 디베랴에서 바다 건너편에 있는 벳새다 지역의 가버나움으로 건너가게 하신 것입니다. 때는 벌써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길은 제자 자신들이 고안한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고안하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재촉하여 가게 하신 길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군중들의 세상 욕망에서 저들을 떼어놓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따로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노저어가는 해상 길을 보고 계셨습니다(막 6:48). 여기에 중대한 현대적 교훈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고 있는 이 천국의 여로는 하나님 자신께서 창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길을 알게 하였습니다(요 14:6, 행 4:12). 그리고 성령님께서 교회라고 하는 방주(배)를 통하여 우리를 불러 세상에서 떼어 내어 불러모으시고 저 하늘가는 길을 걷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갈릴리 바다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천국 항해를 위하여 주님은 지금 산이 아닌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롬 8:34, 히 7:25). 인류의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은 주께로 말미암았습니다. 여기에 구원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특색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고 하였습니다.
Ⅱ. 주님께서 풍랑의 현장에 오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배가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났을 때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는 돌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마 14:24). 그 돌풍은 갈릴리 바다에 큰 물결(파도)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로 배에 탄 예수님의 제자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요 6:17,18). 때는 깊은 밤이었습니다(요 6:17). 그 물결을 인하여 제자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요 6:18,19).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길은 예수님께서 가게 하신 길이었습니다. 재촉하사 제자들을 배 태워 가게 하신 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서 저들을 보시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풍랑이 일어났던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출애굽 운동에도 죽음에 이르는 광야 교회에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페르시아의 군주 고레스를 통하여 명령하신 유대인 해방령이었고, 유대인 성전 재건 공사였습니다.
그런데 왜 뜻밖의 방해 공작 때문에 16년 세월이나 그 공사가 중단되어 버렸을까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을 예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때가 올 때 그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성취하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불러 교회로 오게 했는데 왜 예수 믿는 우리에게 주일 성수 때문에 시험이 오고, 신앙문제로 죽음에 이르는 폭풍을 만나는가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교훈을 보면, 그 풍랑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 되시고, 인간은 인간이 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중대한 대답은 풍랑 만난 현장에 주님께서 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풍랑 만난 항해 중에 오신 주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1) 밤 사경에 오시는 주님이었습니다(마 14:25). 여기 사경은 유대력에 따른 시간 분류인데 새벽 3-6시 어간의 시간입니다.
(2) 제자들이 괴로이 노젓는 고난(죽음)의 현장에 오신 주님입니다(마 14:24).
(3) 노기 띤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이었습니다(마 14:25). 여기 ‘걷는다’는 말은 ‘거닐다’, ‘산책하다’라는 뜻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다 위로’(π τ θαλσση)라는 이 성경을 ‘해변 뒤에’, ‘바닷가에’라고 곡해하고 있습니다. 괴테(Geothe)는 이 사실을 일종의 전설, 곧 사람이 꾸민 이야깃거리로 보는 관계로 “이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전설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신앙으로 어려운 일에는 승리하지만, 작은 의심으로 실패하게 된다는 교훈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전설적 교훈거리로 여겼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탄적인 말입니다. 이 사건은 주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연을 정복하고 계시는 주(主)이심을 알려 주는 이적입니다(마 14:33). 그때 제자들은 놀라서 ‘유령’이라고 소리 지르고 무서워 하기까지 하였습니다(마 14:26). ‘허상’, ‘악령’, ‘도깨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깨비로 물 위를 걸어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걸어 오셨습니다.
(4) 평안의 주로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무서워 하며 소리를 지르자 예수께서는 즉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14:27). 죽음의 환난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이 말은 1 내가 이 길을 가게 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2 내가 기도하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3 내가 바다를 잔잔케 할 자연계의 주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4 내가 영계의 주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365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일매일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심이 아니신가!
(5) ‘오라’고 하시는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확인한 저들 제자 중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14:28)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서슴지 않고 오라(마 14:29)고 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가는 기적의 은총을 체험하였습니다.
(6) 붙잡아 주시는 주님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은 단기적이요 한계 상황적이었습니다. 물 위로 걸어 예수께로 가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 속으로 빠져 갔습니다. 다급해진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 14:30)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고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교회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합니다.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교회 자체 안에 있는 연약과, 교회 밖으로부터 불어오는 온갖 폭풍 때문에 때로는 존폐의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지상의 교회는 무신론, 유물론, 진화론, 살신론(殺神論), 운명론, 우상숭배주의 등 악한 사상과 국가지상주의, 민족지상주의(民族至上主義) 그리고 여러 유형의 인본주의(人本主義) 등으로 온갖 폭풍을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과 중공 전역에 있는 지하 교회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선한 일에 열심인 교회는 선한 그 일 때문에 고난의 풍랑을 만나고, 불충한 교회는 불충 그 자체 때문에 풍랑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고난 당하고 있는 역사 속의 교회 중에 주님이 친히 오셨습니다. 밤 사경에 노기 띤 물결과 싸우며 괴로이 노젓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여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승리를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전투하는 지상 교회
2,000년의 역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적 교회가 만나는 여러 류의 환난은 오히려 소망입니다. 그것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특수한 취미요 생의 즐거움이 됩니다. 이렇게 예수 제자들을 실은 갈릴리 바다 위의 배가 목적지까지 가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풍랑 만난 고난의 현장까지 오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풍랑 때문에 놀라우신 주님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그 풍랑 때문에 더 빨리 가게 되었습니다.
Ⅲ. 주께서 그 배에 함께 올라 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 32절에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 지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멋지고 또 멋진 장면이 아닙니까 어떤 때는 주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므로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막 4:39)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주님이 친히 풍랑 만난 제자들의 배 위에 함께 오르시므로 바다를 잔잔케 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도 진리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자연을 주장하시는 왕이시라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법칙을 선용함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물 위로 걸으시는 비상법칙을 이용하여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물 위로 걸어서 건너편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배 위에 자신이 올라타시므로 자연법칙인 부력의 법칙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자연 창조법칙도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3 더 큰 의미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항해하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하는 곳에는 그 언제나, 그 어디에서나 궁극적으로 세상에서 만나는 폭풍을 잠잠케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배는 저희 가려는 곳에, 곧 목적지인 벳새다의 가버나움에 잘 도착한 것입니다. 이 일의 결과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입증되고 말았습니다(마 14: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을 태운 배가 목적지까지 잘 도착했다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처음에 계획하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말았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뜻(계획)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그 길은 주께서 가게 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풍랑 만난 항해 길에 친히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 배에 함께 올라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롬 11:36) 이 위대한 진리의 성취가 아닙니까 주께서 가게 하신 그 길은 주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풍랑의 현장에 오신 그 길은 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까 주께서 그 배에 함께 오르심은 주에게로 돌아감이 아닙니까 그 결과로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이 입증되었음은 바로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음이 아닙니까 성 어거스틴은 이 사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예수는 파도를 밟고 오셨다. 그와 같이 예수는 인생에 넘치는 모든 혼란을 그의 발아래 밟아 버렸다. 크리스천이여! 왜 두려워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평강교회의 배는 예수께서 가게 하신 길을 가고 있습니다. 평강호가 만난 수고의 풍랑은 예수께서 친히 오실 확실한 징조입니다. 그리고 평강호에 예수께서 친히 올라 주시므로 당신이 계획하신 목적지까지 이르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평강교회의 성도들의 고백은 확실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음이니이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평강교회가 주에게서 나왔습니다. 평강교회는 주로 말미암고 있사옵니다. 평강교회는 주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영광이 세세에 주에게 있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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