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꿈치를 잡은 야곱 (창25:19-26)
본문
본과 경계 오늘은 먼저 여러분들에게 퀴즈를 하나 내도록 하겠습니다. 문제를 잘 들으시고 답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 다음 소개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잘 듣고 이들이 속한 그룹의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십시오. A; 다윗, 모세, 호세아, 엘리야, 바울 B; 아벨, 사울, 여로보암, 데마, 가롯유다 자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예, A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사람들이지만 B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경계로 삼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본받아야 할 사람과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이처럼 두 부류의 사람들을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들이 이런 사람들의 면면을 잘 살펴서 그들로부터 교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본받아야 할 사람들과 경계해야 할 사람들을 잘 살펴서 본 받아야 할 사람들의 삶은 취하고 경계해야 할 사람들의 삶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우리들이 살피려고 하는 야곱 그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일까요. 본받아야 하는 사람에 속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경계해야 할 사람에 속할까요 사실 이 둘 중에 어느 한 쪽을 택한다는 것이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본받아야 할 것도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경계로 삼아야 할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대략적인 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그의 삶을 살펴 볼 때 과연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경계해야 할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의 인생을 살피다 보면 따르지 말아야 할 본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이 야곱에 대해서 많은 부분이 잘 못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잘 못된 설명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대게 잘못된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야곱,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던 애를 썼던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일만큼 적극적이었던 사람” 또 이렇게 야곱을 소개하고는 “자 이런 야곱을 본받으십시다.”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이 가르침에 동의 하십니까 얼핏 보면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면면을 성경적인 관점으로 살피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사기꾼, 거짓말 장이, 모략꾼으로 말해야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야곱에 대해서 잘 못 가르쳤기 때문에 가치관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을 받아 보겠다고 치고 받고 싸웁니다. 거짓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왜요 복만 받으면 좋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이미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었고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참고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이 죽은 후에도 스스로 왕이 되지 않고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아마 야곱의 관점이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기름을 부음을 받는 그 순간 사울을 쳐죽이고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여러분 누구의 생각이 더 옳다고 보십니까 누가 더 성경 적인 관점을 가졌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다윗의 삶이며 다윗의 관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 그는 경계해야 할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경계해야 할 사람 치고 그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너무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다룬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에게 할애된 지면을 보십시다. 야곱의 생애는 창 25장에서부터 36장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기록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야곱이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야곱에게 할애된 지면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경계로 삼아야 할 사람을 12장이나 할애를 해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야곱이 행한 일이 흉직하기 때문에 야곱을 본받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을까요 그러나 그럴 만큼 야곱이 흉악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이 야곱의 생애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그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사실 야곱이라는 인물을 중심 인물로 놓고 풀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이렇게 스포트 라이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 까요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 이 문제를 풀어 가기 위해서는 이런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사기꾼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모사꾼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한 번 약속한 것은 변치 않고 끝까지 지켜 가시는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은 야곱의 생애에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의 생애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런 야곱도 내가 이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므로 죄 많은 너도 내가 사랑하노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성경은 이처럼 야곱의 생애를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야곱의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런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면서 야곱 같은 우리들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함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야곱의 출생 배경 자
그렇다면 이런 야곱의 인생은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런 야곱의 인생에 배경이 되는 몇 가지 사실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 자 이 구절에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의 가문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야곱의 할아버지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삭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들이 어떤 인물들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두 사람이 연출한 멋진 사건이 있었죠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었죠 그렇습니다. 이삭을 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드리려 했던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이 때 누구의 신앙이 빛났습니까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신앙이 다 빛났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을 입증한 두 사람이었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신앙도 위대했고 그 아버지에 묵묵히 순종하면서 자신의 목을 내 밀었던 이삭 역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십자가 사건을 제외하고 이렇게 멋진 사건은 아마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합심해서 이렇게 멋진 사건을 연출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자녀들과 이렇게 멋진 신앙의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여러분 혼자라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둘이라면 어렵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녀들과 함께 연출해야 하는 것이라면 더욱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을 해낸 분들을 자신의 삶의 배경으로 둔 것입니다. 이렇게 멋진 아브라함과 이삭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삼고 태어날 수 있는 행운을 야곱은 얻은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행운입니까 그 사람의 가문이 어떠한가가 종종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야곱은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으로 태어난 아들 또 21절을 보십시다. “”자 여기서 알 수 있는 야곱의 출생 배경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구절은 보면서 쉽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로 얻은 아들이라고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좀 어패가 있어 보입니다. 21절만 보면 단순히 이삭이 기도해서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삭의 나이가 나옵니다. 몇 살이죠 그렇습니다. 40세 입니다. 40세에 이삭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리브가와 결혼을 합니다. 자 또 보십시다. 이삭의 나이를 몇 세로 기록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60세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60세라는 말이 기록된 것이 어떤 사건 이후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들을 얻고난 후 기록한 것이죠.
그렇다면 이삭은 결혼한지 몇 년만에 얻은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20년 동안 아들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아들을 주리라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 직접적으로는 없습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이미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누구에게죠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바다의 모래알과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삭도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말씀을 이삭을 몰랐을 까요 그렇습니다.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 일에 대해서 들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신에게 말씀을 하셨는가를 아브라함은 생생하게 이삭에게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이삭아 너도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어 갈 자란다.”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혼인을 하고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들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약속한 그 일이 자신에게는 언제나 이루어지는가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림의 세월을 보낸 것이 약 20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21절에서 이삭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했겠습니까 그저 무작정 “하나님 떡두꺼비같은 아들 하나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 아버지가 가나안 땅에서 왔을 때 바다에 모래를 보여주시면서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바로 그와 같이 아버지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그 약속을 이루소서” 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가 응답이 된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야곱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어쩌다 우연히 태어나게 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정황들만을 놓고 야곱을 그려보면 그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모신 야곱, 하나님의 약속대로 태어난 아들, 이것만을 놓고 한 번 야곱을 그려보십시다. 우리들은 오늘 이 사건 이후에 기록된 야곱의 생애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야곱에 대한 그림이 이미 있지만 이런 것들을 모른 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그냥 단순히 훌륭한 믿음의 가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기도로 얻은 아들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을 여러분들은 연상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법 괜찮은 사람을 연상할 것입니다. 보다 경건한 사람으로 보다 의로운 사람으로 연상하지 않겠습니까 태중에서 싸우는 아이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이 야곱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자 야곱이 어떤 인물인지 오늘 본문에 소개된 몇 가지 사실을 보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 무엇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태중에서 아이들이 싸웠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느 정도로 싸웠습니까 아들의 어머니 리브가가 걱정을 할 정도로 싸웠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리브가가 “내가 어찌할꼬” 하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이 말을 리브가가 죽고 싶어했다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들은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산모가 쌍둥이가 싸우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리브가가 상당히 심각하게 태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들은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일 것입니다. 동생인 야곱이 이기려고 하니까 싸움이 일어난 것이지 형이 일으킨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기어이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기를 싫어하는 사람, 이겨야만 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이 야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야곱의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가리켜 경쟁 사회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경쟁을 해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지는 사람들에게는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려 합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겨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살아보려 합니다. 누가 나를 이기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나보다 앞서는 꼴을 못 보는 것이죠. 운전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왜 가속을 하는가 하면 지기 싫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나보다 앞서 가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지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조금만 양보를 하면 괜찮을 터인데 이 양보를 하지 못합니다. 왜 비판하는 말이 생깁니까 왜 비방을 합니까 왜 손가락질을 합니까 왜 미운 사람이 생깁니까 왜 남을 헐뜯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비판을 합니다. 손가락질을 합니다. 헐뜯습니다. 그래서라도 이겨 보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신앙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바로 이런 범주에 드는 분들은 아닙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이런 마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이 몰라서 그렇지 사실 우리 속에 이런 마음이 얼마나 꿈틀거리고 있습니까 마치 물이 끓듯이 그렇게 우리들의 가슴에서 끓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저의 이 이야기에 대해서 아니라고 나는 절대로 이기려는 마음이 없다고 항변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시대의 야곱입니다. 꼭 이겨야만 하는 야곱 그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발뒤꿈치를 자 이런 야곱의 모습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린 구절이 있습니다. 예, 26절입니다. 함께 26절을 읽겠습니다. “” 어떤 말이죠 그렇습니다.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호세아서를 강해 하면서 이 말이 어떤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속이다” “등 뒤에서 공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른 말로 어떤 뜻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등쳐먹다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죠. 바로 이 말에서 야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발 뒤꿈치를 히브리어로 아케브라 말합니다. 여기서 야아코브라는 말이 파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늘 속이는 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 사람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늘 속이는 자로 불렸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그의 이름이 야곱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이기기 위해서 속임수에 능한 그런 모사꾼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의 출생 배경과 합당한 모습입니까 그렇습니다. 전혀 합당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표현을 써서요. 별종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는 별종처럼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런 야곱이 별종이라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렇죠. 사실은 우리들도 별종입니다. 돌연변이입니다. 야곱을 선택하심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야곱을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자 23절 말씀을 보십시다. “” 자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좀 더 부연해서 설명해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롬 9:10-12'입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오늘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야곱은 선택을 하시고 에서는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야곱이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입니까 아니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에서는 어떻습니까 버림을 받을 만합니까 그렇습니다. 버림을 받을 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돌연변이와 같은 야곱을, 별종과 같은 야곱을 선택하셨을까요 롬 9:11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우리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죠. 즉,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은 우리들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죠. 바로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별종인 야곱을 택하셔서 그 멋지고 위대한 가문의 일원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오늘의 야곱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죠 그렇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선택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뭐 잘나고 보잘 것이 있어서 그렇게 멋진 가문에 약속의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우리들의 하나님 앞에서 뭔가 자랑할 만 하고 대단해서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만한 것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해 주십니다. 어느 정도죠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창세기는 볼품없는 야곱의 인생을 그렇게 장황하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너도 그렇게 선택하였다. 너도 그렇게 사랑한단다” 하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 야곱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 품위가 있고 덕망이 있으며 부유하고 명성이 있는 사람을 택하셨다면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함량 미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 야곱에 대해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 41:14 “지렁이 같은 야곱아” 보십시오. 야곱을 무엇이라 말하죠 그렇습니다. 지렁이 같다는 것입니다. 지렁이에 대한 이미지는 그렇게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기분 나쁘고 불쾌합니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입니다. 바로 이런 지렁이에 야곱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야곱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지렁이 같은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려지기를 마다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종종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속이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사기꾼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으로 불려 지기를 마다하시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 이렇게 말하면 그래도 좀 괜찮습니다. 모세의 하나님 그것도 괞찬아 보입니다. 바울의 하나님 이 말도 제법 괞찬아 보입니다.
그런데 사기꾼의 하나님 이 말은 왠지 어색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마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야곱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렁이 같을지라도 사기꾼 같을지라도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출세를 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국제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래서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다가오서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이 여러분들의 친구임을 밝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소개하면서 함께 그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 척 하고 그냥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공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누구누구의 하나님이라고요. 이런 분이 바로 우리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으로 불려 지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불려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들의 인생의 길목에 서서 사랑하는 아무개야 나는 바로 너의 하나님이란다 말씀하시면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야곱처럼 늘 남의 발꿈치를 잡고 속이고 거짓말하고 살았던 사람이지만 아니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쓸모 없다 말씀하시지 않고 사랑하는 아무개야 나는 네 하나님이란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온전히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본받아야 할 사람들과 경계해야 할 사람들을 잘 살펴서 본 받아야 할 사람들의 삶은 취하고 경계해야 할 사람들의 삶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우리들이 살피려고 하는 야곱 그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일까요. 본받아야 하는 사람에 속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경계해야 할 사람에 속할까요 사실 이 둘 중에 어느 한 쪽을 택한다는 것이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본받아야 할 것도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경계로 삼아야 할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대략적인 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그의 삶을 살펴 볼 때 과연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경계해야 할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의 인생을 살피다 보면 따르지 말아야 할 본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이 야곱에 대해서 많은 부분이 잘 못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잘 못된 설명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대게 잘못된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야곱,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던 애를 썼던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일만큼 적극적이었던 사람” 또 이렇게 야곱을 소개하고는 “자 이런 야곱을 본받으십시다.”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이 가르침에 동의 하십니까 얼핏 보면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면면을 성경적인 관점으로 살피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사기꾼, 거짓말 장이, 모략꾼으로 말해야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야곱에 대해서 잘 못 가르쳤기 때문에 가치관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을 받아 보겠다고 치고 받고 싸웁니다. 거짓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왜요 복만 받으면 좋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이미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었고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참고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이 죽은 후에도 스스로 왕이 되지 않고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아마 야곱의 관점이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기름을 부음을 받는 그 순간 사울을 쳐죽이고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죠 여러분 누구의 생각이 더 옳다고 보십니까 누가 더 성경 적인 관점을 가졌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다윗의 삶이며 다윗의 관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 그는 경계해야 할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경계해야 할 사람 치고 그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너무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다룬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에게 할애된 지면을 보십시다. 야곱의 생애는 창 25장에서부터 36장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기록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야곱이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야곱에게 할애된 지면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처럼 경계로 삼아야 할 사람을 12장이나 할애를 해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야곱이 행한 일이 흉직하기 때문에 야곱을 본받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을까요 그러나 그럴 만큼 야곱이 흉악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이 야곱의 생애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그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사실 야곱이라는 인물을 중심 인물로 놓고 풀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이렇게 스포트 라이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할 까요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 이 문제를 풀어 가기 위해서는 이런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사기꾼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모사꾼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한 번 약속한 것은 변치 않고 끝까지 지켜 가시는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은 야곱의 생애에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의 생애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런 야곱도 내가 이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므로 죄 많은 너도 내가 사랑하노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성경은 이처럼 야곱의 생애를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야곱의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런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면서 야곱 같은 우리들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함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야곱의 출생 배경 자
그렇다면 이런 야곱의 인생은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런 야곱의 인생에 배경이 되는 몇 가지 사실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 자 이 구절에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의 가문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야곱의 할아버지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삭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들이 어떤 인물들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두 사람이 연출한 멋진 사건이 있었죠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었죠 그렇습니다. 이삭을 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드리려 했던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이 때 누구의 신앙이 빛났습니까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신앙이 다 빛났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을 입증한 두 사람이었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신앙도 위대했고 그 아버지에 묵묵히 순종하면서 자신의 목을 내 밀었던 이삭 역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십자가 사건을 제외하고 이렇게 멋진 사건은 아마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합심해서 이렇게 멋진 사건을 연출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자녀들과 이렇게 멋진 신앙의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여러분 혼자라면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둘이라면 어렵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녀들과 함께 연출해야 하는 것이라면 더욱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을 해낸 분들을 자신의 삶의 배경으로 둔 것입니다. 이렇게 멋진 아브라함과 이삭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삼고 태어날 수 있는 행운을 야곱은 얻은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행운입니까 그 사람의 가문이 어떠한가가 종종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야곱은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으로 태어난 아들 또 21절을 보십시다. “”자 여기서 알 수 있는 야곱의 출생 배경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구절은 보면서 쉽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로 얻은 아들이라고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좀 어패가 있어 보입니다. 21절만 보면 단순히 이삭이 기도해서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삭의 나이가 나옵니다. 몇 살이죠 그렇습니다. 40세 입니다. 40세에 이삭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리브가와 결혼을 합니다. 자 또 보십시다. 이삭의 나이를 몇 세로 기록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60세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60세라는 말이 기록된 것이 어떤 사건 이후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들을 얻고난 후 기록한 것이죠.
그렇다면 이삭은 결혼한지 몇 년만에 얻은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20년 동안 아들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아들을 주리라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 직접적으로는 없습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이미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누구에게죠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바다의 모래알과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삭도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말씀을 이삭을 몰랐을 까요 그렇습니다.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 일에 대해서 들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신에게 말씀을 하셨는가를 아브라함은 생생하게 이삭에게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이삭아 너도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어 갈 자란다.”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혼인을 하고 무엇을 기다렸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들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약속한 그 일이 자신에게는 언제나 이루어지는가 기다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림의 세월을 보낸 것이 약 20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21절에서 이삭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했겠습니까 그저 무작정 “하나님 떡두꺼비같은 아들 하나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 아버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 아버지가 가나안 땅에서 왔을 때 바다에 모래를 보여주시면서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바로 그와 같이 아버지의 후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 그 약속을 이루소서” 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가 응답이 된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야곱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약속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어쩌다 우연히 태어나게 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정황들만을 놓고 야곱을 그려보면 그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모신 야곱, 하나님의 약속대로 태어난 아들, 이것만을 놓고 한 번 야곱을 그려보십시다. 우리들은 오늘 이 사건 이후에 기록된 야곱의 생애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야곱에 대한 그림이 이미 있지만 이런 것들을 모른 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그냥 단순히 훌륭한 믿음의 가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기도로 얻은 아들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을 여러분들은 연상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제법 괜찮은 사람을 연상할 것입니다. 보다 경건한 사람으로 보다 의로운 사람으로 연상하지 않겠습니까 태중에서 싸우는 아이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이 야곱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자 야곱이 어떤 인물인지 오늘 본문에 소개된 몇 가지 사실을 보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 무엇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태중에서 아이들이 싸웠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느 정도로 싸웠습니까 아들의 어머니 리브가가 걱정을 할 정도로 싸웠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리브가가 “내가 어찌할꼬” 하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이 말을 리브가가 죽고 싶어했다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들은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산모가 쌍둥이가 싸우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리브가가 상당히 심각하게 태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들은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일 것입니다. 동생인 야곱이 이기려고 하니까 싸움이 일어난 것이지 형이 일으킨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기어이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기를 싫어하는 사람, 이겨야만 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이 야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야곱의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가리켜 경쟁 사회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경쟁을 해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지는 사람들에게는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려 합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겨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살아보려 합니다. 누가 나를 이기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나보다 앞서는 꼴을 못 보는 것이죠. 운전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왜 가속을 하는가 하면 지기 싫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나보다 앞서 가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지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조금만 양보를 하면 괜찮을 터인데 이 양보를 하지 못합니다. 왜 비판하는 말이 생깁니까 왜 비방을 합니까 왜 손가락질을 합니까 왜 미운 사람이 생깁니까 왜 남을 헐뜯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비판을 합니다. 손가락질을 합니다. 헐뜯습니다. 그래서라도 이겨 보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신앙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바로 이런 범주에 드는 분들은 아닙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이런 마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이 몰라서 그렇지 사실 우리 속에 이런 마음이 얼마나 꿈틀거리고 있습니까 마치 물이 끓듯이 그렇게 우리들의 가슴에서 끓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저의 이 이야기에 대해서 아니라고 나는 절대로 이기려는 마음이 없다고 항변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시대의 야곱입니다. 꼭 이겨야만 하는 야곱 그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발뒤꿈치를 자 이런 야곱의 모습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린 구절이 있습니다. 예, 26절입니다. 함께 26절을 읽겠습니다. “” 어떤 말이죠 그렇습니다.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호세아서를 강해 하면서 이 말이 어떤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속이다” “등 뒤에서 공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른 말로 어떤 뜻이라고요 그렇습니다. 등쳐먹다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죠. 바로 이 말에서 야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발 뒤꿈치를 히브리어로 아케브라 말합니다. 여기서 야아코브라는 말이 파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늘 속이는 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 사람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늘 속이는 자로 불렸습니다. 왜죠 그렇습니다. 그의 이름이 야곱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이기기 위해서 속임수에 능한 그런 모사꾼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의 출생 배경과 합당한 모습입니까 그렇습니다. 전혀 합당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표현을 써서요. 별종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는 별종처럼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런 야곱이 별종이라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렇죠. 사실은 우리들도 별종입니다. 돌연변이입니다. 야곱을 선택하심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야곱을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자 23절 말씀을 보십시다. “” 자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좀 더 부연해서 설명해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롬 9:10-12'입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오늘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야곱은 선택을 하시고 에서는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야곱이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입니까 아니죠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에서는 어떻습니까 버림을 받을 만합니까 그렇습니다. 버림을 받을 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돌연변이와 같은 야곱을, 별종과 같은 야곱을 선택하셨을까요 롬 9:11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우리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죠. 즉,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은 우리들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죠. 바로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별종인 야곱을 택하셔서 그 멋지고 위대한 가문의 일원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오늘의 야곱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죠 그렇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선택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뭐 잘나고 보잘 것이 있어서 그렇게 멋진 가문에 약속의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우리들의 하나님 앞에서 뭔가 자랑할 만 하고 대단해서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만한 것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해 주십니다. 어느 정도죠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창세기는 볼품없는 야곱의 인생을 그렇게 장황하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너도 그렇게 선택하였다. 너도 그렇게 사랑한단다” 하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 야곱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 품위가 있고 덕망이 있으며 부유하고 명성이 있는 사람을 택하셨다면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함량 미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 야곱에 대해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 41:14 “지렁이 같은 야곱아” 보십시오. 야곱을 무엇이라 말하죠 그렇습니다. 지렁이 같다는 것입니다. 지렁이에 대한 이미지는 그렇게 유쾌한 것이 아닙니다. 기분 나쁘고 불쾌합니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입니다. 바로 이런 지렁이에 야곱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야곱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지렁이 같은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려지기를 마다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종종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속이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사기꾼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으로 불려 지기를 마다하시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 이렇게 말하면 그래도 좀 괜찮습니다. 모세의 하나님 그것도 괞찬아 보입니다. 바울의 하나님 이 말도 제법 괞찬아 보입니다.
그런데 사기꾼의 하나님 이 말은 왠지 어색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마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야곱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렁이 같을지라도 사기꾼 같을지라도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출세를 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국제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그래서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다가오서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이 여러분들의 친구임을 밝힌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소개하면서 함께 그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 척 하고 그냥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공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누구누구의 하나님이라고요. 이런 분이 바로 우리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으로 불려 지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불려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들의 인생의 길목에 서서 사랑하는 아무개야 나는 바로 너의 하나님이란다 말씀하시면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야곱처럼 늘 남의 발꿈치를 잡고 속이고 거짓말하고 살았던 사람이지만 아니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쓸모 없다 말씀하시지 않고 사랑하는 아무개야 나는 네 하나님이란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온전히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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