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하는 벌레 (사41:14-)
본문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받은 고난과 비애의 난을 묘사하면서 자신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라는 독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왜 자신을 벌레라고 탄식했는가 하는 고백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인생이라는 벌레 벌레의 꽃처럼 아름답지 못함을 탄식한다거나, 새처럼 훨훨 창공에 날지 못함을 슬퍼한다거나, 또는 황소처럼 큰 힘을 쓰지 못함을 불평한다고 하념 그것은 자기의 분수를 넘는 잠꼬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지 못한 취급을 받는다거나, 벌레만도 못하다면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벌레를 싫어하는 이유의 하나는 추하고 징그러운 미물이며, 전염병 매개체라는 불결한 생각에서 일 것입니다. 정말 벌레는 그 모양이나 동작이 꿈틀거리며 그 몸에서 풍기는 고약한 악취는 사람에게 불결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오늘의 인생은 시편 기자의 독백처럼 몸에서 악취가 발생되고, 흉하고, 추한 존재가 틀림없는 인생이란 벌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느날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와서 언젠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일 때문에 유대 전통의 유전을 범한 것이라고 하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 때 예수의 대답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말하자면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 이런 것들인데 이런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결부시켜 대체 우리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꿈이나 아름다운 것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보다 못지 않게 증오, 허위, 훼방, 증상, 이런 것들이 있어서 우리를 더럽히고 다른 사람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늘의 영광을 가리울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는 벌레요” 하는 탄식이 있다고 봅니다. 벌레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벌레는 약한 생물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실로 스스로 그 강함을 자랑하고 그들이 가진 능력이 만능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인생은 실로 그 약함에 있어서 “벌레같은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은 “약자의 고백”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아는대로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강자였다고 부를만한 사람들이 이러한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벌레에게 정복 당하는 탄식을 한 사람은 성경에 있습니다.욥은 당시 동방의 제일가는 부자였습니다. 거기에다 경건하고 덕방높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조에 불행을 당하였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었고, 그 육체에 부스럼이 나서 옷을 입지 못하고 잿더미에서 구르며 기와장으로 긁었습니다. 욥 17:14에 “아! 이제 내 육체는 벌레로써 옷 입혔구나 나의 희망이 어디 있을소냐” 라고 탄식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바울 선생도 자기의 양심에 순종해서 살기에는 오히려 약한 인생됨을 자신 속에서 발견하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악에 강하고 선에 약한 인생, 불의에 강하고 의에 약한 인생, 증오에 강하고 사랑에 약한 인생임을 발견할 때 “오호라 나는 괴로운 인생이로다”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인생은 질병으로 약할 때도 그다지 애석하게 생각할 것은 못되었습니다. 또한 정신적 에너지나 역량이 빈약을 느낄 때 부끄러운 사실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처럼 크리스챤으로서 살고자 했으나 바로 살지 못하고, 진실하고자 했으나 부진실했고,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였으나 주님에게 욕을 돌렸고, 형제를 사랑하여야 했으나 시기하였고, 중상하였고, 원한을 품고 생활한 생활을 돌아볼 때 “아! 나는 벌레요”라는 시편 기자의 탄식을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크리스챤이라는 벌레 시편 22편의 작가가 “나는 벌레요 인생이 아니라”는 탄식의 내용은 벌레의 추하고 약한 “인생이란 벌레”라는 독백과는 그 의미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의 “벌레”의 탄식은 저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벌레같이 여김을 받는데서 오는 탄식이었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는 이를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저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나 두고 보자 저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산다고 하니 어디 하나님께서 도우시나 두고 보자” 하는 말로 이 고난의 사람인 크리스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고난받는 하나님이 사람의 신앙생활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벌레처럼 조롱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탄식은 미워하고 중상하는데서 오는 슬픔을 표시하는 호소입니다. 이 시인의 경험은 바로 오늘 이 시대의 크리스챤들이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자취를 따라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업수히 여김을 받고도 조롱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크리스챤은 이중적인 벌레의 탄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추한 벌레, 해치는 벌레, 약한 벌레라는 고백을 가지는 동시에, 우리는 신앙생활 때문에 조롱과 훼방을 받는 자들로 이스라엘의 시인의 탄식을 다시 탄식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예언자 이사야는 예언시의 한 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 41:14에 “너 지렁이같은 야곱아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를 도우리라 나는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지렁이는 벌레라고 번역할 수 있고,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가르킵니다. 이 말을 다시 말한다면 “너 벌레같은 크리스챤들아 너희가 벌레처럼 추하고 해치는 존재, 약한 존재, 거기에다가 신앙생활 때문에 사람들에게 업수히 받는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들은 너희를 벌레로 볼지라도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도우시며 구원하실 것이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렁이같은 야곱도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시고, 나약한 벌레를 강하게 하실 때 하나님의 신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변화시킬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3. 반항하는 벌레 우리는 하나의 벌레라고 할 수 있는데, 반항하는 벌레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꿈틀거린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해도 무관합니다. 업시여겨도, 멸시해도, 조롱해도 무관심합니다. 약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를 짓밝는 자에게는 본능적으로든지 의식적으로든지 반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이란 벌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위에 있는 커다란 세계, 즉 세속주의적인 세력에 항쟁하는 벌레입니다. 이 벌레에게는 딱딱한 이가 주워져 있습니다. 사 41:15에 “지렁이같은 이스라엘아 두려워 말라”,“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보라 내가 네 이로 날카로운 타작기계를 삼으리니 네게 산이라도 깨물어 부서지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렇듯이 크리스챤이란 벌레에게는 불손에 반항하기 위해 주어진 이 입니다. 벌레의 이가 이 세상에서 무슨 힘이 있겠느냐 하는 것처럼 소수의 크리스챤의 반항이 문제가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크리스챤은 세속주의의 죄에 대한 항거만으로도 기독교는 살아있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꿈틀거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왜냐하면 살아서 움직이는 나약한 벌레라도 나비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계시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1. 인생이라는 벌레 벌레의 꽃처럼 아름답지 못함을 탄식한다거나, 새처럼 훨훨 창공에 날지 못함을 슬퍼한다거나, 또는 황소처럼 큰 힘을 쓰지 못함을 불평한다고 하념 그것은 자기의 분수를 넘는 잠꼬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답지 못한 취급을 받는다거나, 벌레만도 못하다면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벌레를 싫어하는 이유의 하나는 추하고 징그러운 미물이며, 전염병 매개체라는 불결한 생각에서 일 것입니다. 정말 벌레는 그 모양이나 동작이 꿈틀거리며 그 몸에서 풍기는 고약한 악취는 사람에게 불결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오늘의 인생은 시편 기자의 독백처럼 몸에서 악취가 발생되고, 흉하고, 추한 존재가 틀림없는 인생이란 벌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느날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와서 언젠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일 때문에 유대 전통의 유전을 범한 것이라고 하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 때 예수의 대답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말하자면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 이런 것들인데 이런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결부시켜 대체 우리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꿈이나 아름다운 것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보다 못지 않게 증오, 허위, 훼방, 증상, 이런 것들이 있어서 우리를 더럽히고 다른 사람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늘의 영광을 가리울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는 벌레요” 하는 탄식이 있다고 봅니다. 벌레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벌레는 약한 생물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실로 스스로 그 강함을 자랑하고 그들이 가진 능력이 만능임을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인생은 실로 그 약함에 있어서 “벌레같은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것은 “약자의 고백”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아는대로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강자였다고 부를만한 사람들이 이러한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벌레에게 정복 당하는 탄식을 한 사람은 성경에 있습니다.욥은 당시 동방의 제일가는 부자였습니다. 거기에다 경건하고 덕방높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조에 불행을 당하였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었고, 그 육체에 부스럼이 나서 옷을 입지 못하고 잿더미에서 구르며 기와장으로 긁었습니다. 욥 17:14에 “아! 이제 내 육체는 벌레로써 옷 입혔구나 나의 희망이 어디 있을소냐” 라고 탄식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바울 선생도 자기의 양심에 순종해서 살기에는 오히려 약한 인생됨을 자신 속에서 발견하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악에 강하고 선에 약한 인생, 불의에 강하고 의에 약한 인생, 증오에 강하고 사랑에 약한 인생임을 발견할 때 “오호라 나는 괴로운 인생이로다”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인생은 질병으로 약할 때도 그다지 애석하게 생각할 것은 못되었습니다. 또한 정신적 에너지나 역량이 빈약을 느낄 때 부끄러운 사실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처럼 크리스챤으로서 살고자 했으나 바로 살지 못하고, 진실하고자 했으나 부진실했고,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였으나 주님에게 욕을 돌렸고, 형제를 사랑하여야 했으나 시기하였고, 중상하였고, 원한을 품고 생활한 생활을 돌아볼 때 “아! 나는 벌레요”라는 시편 기자의 탄식을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크리스챤이라는 벌레 시편 22편의 작가가 “나는 벌레요 인생이 아니라”는 탄식의 내용은 벌레의 추하고 약한 “인생이란 벌레”라는 독백과는 그 의미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의 “벌레”의 탄식은 저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벌레같이 여김을 받는데서 오는 탄식이었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는 이를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저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나 두고 보자 저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산다고 하니 어디 하나님께서 도우시나 두고 보자” 하는 말로 이 고난의 사람인 크리스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고난받는 하나님이 사람의 신앙생활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벌레처럼 조롱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탄식은 미워하고 중상하는데서 오는 슬픔을 표시하는 호소입니다. 이 시인의 경험은 바로 오늘 이 시대의 크리스챤들이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자취를 따라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업수히 여김을 받고도 조롱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크리스챤은 이중적인 벌레의 탄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추한 벌레, 해치는 벌레, 약한 벌레라는 고백을 가지는 동시에, 우리는 신앙생활 때문에 조롱과 훼방을 받는 자들로 이스라엘의 시인의 탄식을 다시 탄식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예언자 이사야는 예언시의 한 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 41:14에 “너 지렁이같은 야곱아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를 도우리라 나는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지렁이는 벌레라고 번역할 수 있고,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가르킵니다. 이 말을 다시 말한다면 “너 벌레같은 크리스챤들아 너희가 벌레처럼 추하고 해치는 존재, 약한 존재, 거기에다가 신앙생활 때문에 사람들에게 업수히 받는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들은 너희를 벌레로 볼지라도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도우시며 구원하실 것이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렁이같은 야곱도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시고, 나약한 벌레를 강하게 하실 때 하나님의 신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변화시킬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3. 반항하는 벌레 우리는 하나의 벌레라고 할 수 있는데, 반항하는 벌레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꿈틀거린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해도 무관합니다. 업시여겨도, 멸시해도, 조롱해도 무관심합니다. 약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를 짓밝는 자에게는 본능적으로든지 의식적으로든지 반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이란 벌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위에 있는 커다란 세계, 즉 세속주의적인 세력에 항쟁하는 벌레입니다. 이 벌레에게는 딱딱한 이가 주워져 있습니다. 사 41:15에 “지렁이같은 이스라엘아 두려워 말라”,“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보라 내가 네 이로 날카로운 타작기계를 삼으리니 네게 산이라도 깨물어 부서지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렇듯이 크리스챤이란 벌레에게는 불손에 반항하기 위해 주어진 이 입니다. 벌레의 이가 이 세상에서 무슨 힘이 있겠느냐 하는 것처럼 소수의 크리스챤의 반항이 문제가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크리스챤은 세속주의의 죄에 대한 항거만으로도 기독교는 살아있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꿈틀거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왜냐하면 살아서 움직이는 나약한 벌레라도 나비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계시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