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자기 인식 (고전15:9-10)
본문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의 형태 구분할 때 4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있고, 외부 지향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부 지향적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때때로 이 네 가지가 다 필요하고 또 각기 다른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에 더 치중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다를 것입니다. 특히 외부 지향적인 사람은 자기 밖의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이나 그들의 모습을 모방해서 하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내부 지향적인 사람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고 자기 안에서 개발하는 창의적임과 동시에 자기 반성, 자기 생활에 힘쓰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요, 신학자요, 참다운 신앙인이요, 복음 전도자로서 온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복음에 대한 빚진자의 의식을 가지고 충성스러이 헌신 한 분 이었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때대로 자신을 살피고, 자기 생활과 자기 완성에 힘쓰는 노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러한 바울 선생의 신앙정신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살필때에 무엇을 발견 했습니까
1. 바울은 자신을 부족하고 가장 적은 자로 인식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5:8절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 여러 제자들에게 보이신 반면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란 곧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칠삭둥이나 팔삭둥이 곧 칠부나 팔부처럼 부족한 자기 자신임을 고백한 말입니다.
첫째, 이것은 바울 자신의 평가를 낮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엡 3:8에 평가를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바울 자신임을 고백했습니다. 사실 오늘의 위기는 사람마다 자기가 크고 잘나고 완전하고, 옳고, 선하고, 의로워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를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고 낮추지 않으려는데 있습니다.
둘째, 바울의 겸손한 자세를 보여줍니다. 어거스틴의 제자들이 한 번은 선생에게 물었습니다. “기독교의 미덕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대답하기를 “그것은 겸손이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또 “두 번째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것도 겸손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세 번째 미덕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역시 어거스틴은 대답하기를 “그것도 겸손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미덕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다 “겸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갖추시길 바랍니다.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셧습니다.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시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셋째, 이러한 겸손은 자기 부족을 인식하는 데서 나옵니다. 오늘의 많은 문제점들이 자기 자신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자기 과신, 완전주의, 독선주의, 자기가 크고, 옳고, 모자람이 없다고 할 때 교만해지고 오만해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고, 존경받으려고 하고 높은 자리만을 탐하기 쉽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 남들에게는 겸손과 자기 부정을 요구하고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하는 것을 회피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고보 선지자를 통해서도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이면서도 철저하게 자기 부정, 자기 부족과 스스로 적은 자임을 인식 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부족, 자기의 미완성을 인식하는 자라야 계속적인 성장이 있고, 발전이 있고, 지속적인 진보가 있는 것 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를 의롭다’고 자칭하는 의인들이 많은데,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깊은 죄 의식을 가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했습니다. 딤전 1:15에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괴수는 헬라어로 ‘프로토스’로서
첫째라는 의미요, 죄는 ‘하밀티아’로 ‘표적을 맞추지 못함’이라는 뜻 입니다. “프로토스 하말티아” 즉 “죄인의 괴수”란 말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울의 이 죄의식은 체험적인 것입니다. 여기 바울의 죄의식은 막연한 종교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다메섹도상과 결부시켜 그 이전의 박해자로서의 망동을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체험적 죄의식은 소극적으로 할 것을 하지 않았다던가 회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서는 안될 것을 곧, 망동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다메섹 이전에 핍박자요, 폭행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무서운 박해자였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죄인식에서 바울 신학도 그의 헌신도 형성되었습니다. 바울의 심오한 복음적 신앙은 바로 이것 입니다. 인간은 철저한 타락된 모습이고, 누구나 이 죄에 대한 인식을 해야하는 것이고, 바로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로운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바울 뿐 만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루터나 칼뱅, 존 웨슬레 등을 위시한 위대한 교회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깊은 죄 의식을 인식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여러분 현대인들의 위기와 현대그리스도인들의 위기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그것은 이 죄 의식의 결핍에 있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결핍될 때 회개가 없고, 자기 완전에 빠져 스스로 의인시 해서 독선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정죄를 일삼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격화해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말하기를 “세상에는 자기를 의인시 하는 죄인이 있고, 자기를 죄인시하는 의인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로 자부하면서 스스로 의인시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무섭게 질책하시고 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화 있을 진저”로 나타나는데 마태복음 23장에서는 7번이나 등장합니다. (전체 성경에서는 54회)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6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자칫 범하기 쉬운 죄가 바로 자기 죄에 대한 의식에 대한 결핍일 것입니다. 자신은 완전하고, 의롭고, 다된 줄로 여기고, 영광만을 추구하려는경향이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바로 볼 줄 아는 눈을 열어야 할 것 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철저한 죄에 대한 인식이 있고서야 우리의 헌신도 올바로 될 것입니다.
3.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자신을 인식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10절). 바울은 자신의 실존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바울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사울이었던 그가 오늘날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에서 ‘나의 나된것’은 ‘ 에이미 호 에이미’로서 오늘날의 나(I am what
I am)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사울이 아닌 전적으로 새로워진 오늘의 바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과거에 교회를 핍박 하였으며 하나님 보다는 자기의 열심, 자기의 지식과 명예와 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교만에서 겸손으로, 율법에서 복음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자기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 모두의 실존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아가서 바울이 사도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딤전 1:14, 엡 3:7). 하나님의 은혜로 일꾼이 되었노라고 대하여 감격해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기에 사도라 칭함으로 감당치 못할 자로 알았습니다(고전 15:9). 그러나 10절에 와서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서 사도로서의 실존 역시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 했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한 것을 자부하면서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주와 주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고난받는 일을 고후 11:23 이하에 자신이 피력했습니다. “이 모든 수고가 자신의 지식, 능력, 어떤 재능에서가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에서 ‘내게 주신’은 ‘에이스 에메’로써 ‘나를 향한’이란 뜻으로 바울에게 특별한 목적으로 끊임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결국 주를 향한 바울의 이 수고와 봉사도 끝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수고하고 더 많이 봉사의 일을 했어도 겸손히 감사할 것뿐입니다. 여버분 우리 모두도 우리의 일상의 생활 속에서 그 어떤 것이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고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길 축원 합니다.
1. 바울은 자신을 부족하고 가장 적은 자로 인식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5:8절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 여러 제자들에게 보이신 반면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란 곧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칠삭둥이나 팔삭둥이 곧 칠부나 팔부처럼 부족한 자기 자신임을 고백한 말입니다.
첫째, 이것은 바울 자신의 평가를 낮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엡 3:8에 평가를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바울 자신임을 고백했습니다. 사실 오늘의 위기는 사람마다 자기가 크고 잘나고 완전하고, 옳고, 선하고, 의로워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를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고 낮추지 않으려는데 있습니다.
둘째, 바울의 겸손한 자세를 보여줍니다. 어거스틴의 제자들이 한 번은 선생에게 물었습니다. “기독교의 미덕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대답하기를 “그것은 겸손이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또 “두 번째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것도 겸손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세 번째 미덕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역시 어거스틴은 대답하기를 “그것도 겸손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미덕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다 “겸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갖추시길 바랍니다.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셧습니다.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잠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시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셋째, 이러한 겸손은 자기 부족을 인식하는 데서 나옵니다. 오늘의 많은 문제점들이 자기 자신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자기 과신, 완전주의, 독선주의, 자기가 크고, 옳고, 모자람이 없다고 할 때 교만해지고 오만해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고, 존경받으려고 하고 높은 자리만을 탐하기 쉽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서 남들에게는 겸손과 자기 부정을 요구하고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하는 것을 회피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고보 선지자를 통해서도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이면서도 철저하게 자기 부정, 자기 부족과 스스로 적은 자임을 인식 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부족, 자기의 미완성을 인식하는 자라야 계속적인 성장이 있고, 발전이 있고, 지속적인 진보가 있는 것 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를 의롭다’고 자칭하는 의인들이 많은데,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깊은 죄 의식을 가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했습니다. 딤전 1:15에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괴수는 헬라어로 ‘프로토스’로서
첫째라는 의미요, 죄는 ‘하밀티아’로 ‘표적을 맞추지 못함’이라는 뜻 입니다. “프로토스 하말티아” 즉 “죄인의 괴수”란 말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울의 이 죄의식은 체험적인 것입니다. 여기 바울의 죄의식은 막연한 종교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다메섹도상과 결부시켜 그 이전의 박해자로서의 망동을 전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체험적 죄의식은 소극적으로 할 것을 하지 않았다던가 회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해서는 안될 것을 곧, 망동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다메섹 이전에 핍박자요, 폭행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무서운 박해자였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죄인식에서 바울 신학도 그의 헌신도 형성되었습니다. 바울의 심오한 복음적 신앙은 바로 이것 입니다. 인간은 철저한 타락된 모습이고, 누구나 이 죄에 대한 인식을 해야하는 것이고, 바로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로운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바울 뿐 만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루터나 칼뱅, 존 웨슬레 등을 위시한 위대한 교회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깊은 죄 의식을 인식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여러분 현대인들의 위기와 현대그리스도인들의 위기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그것은 이 죄 의식의 결핍에 있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결핍될 때 회개가 없고, 자기 완전에 빠져 스스로 의인시 해서 독선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정죄를 일삼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신격화해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말하기를 “세상에는 자기를 의인시 하는 죄인이 있고, 자기를 죄인시하는 의인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로 자부하면서 스스로 의인시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무섭게 질책하시고 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화 있을 진저”로 나타나는데 마태복음 23장에서는 7번이나 등장합니다. (전체 성경에서는 54회)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6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자칫 범하기 쉬운 죄가 바로 자기 죄에 대한 의식에 대한 결핍일 것입니다. 자신은 완전하고, 의롭고, 다된 줄로 여기고, 영광만을 추구하려는경향이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바로 볼 줄 아는 눈을 열어야 할 것 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철저한 죄에 대한 인식이 있고서야 우리의 헌신도 올바로 될 것입니다.
3.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자신을 인식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10절). 바울은 자신의 실존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바울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사울이었던 그가 오늘날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에서 ‘나의 나된것’은 ‘ 에이미 호 에이미’로서 오늘날의 나(I am what
I am)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사울이 아닌 전적으로 새로워진 오늘의 바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과거에 교회를 핍박 하였으며 하나님 보다는 자기의 열심, 자기의 지식과 명예와 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교만에서 겸손으로, 율법에서 복음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자기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 모두의 실존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아가서 바울이 사도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딤전 1:14, 엡 3:7). 하나님의 은혜로 일꾼이 되었노라고 대하여 감격해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기에 사도라 칭함으로 감당치 못할 자로 알았습니다(고전 15:9). 그러나 10절에 와서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서 사도로서의 실존 역시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 했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한 것을 자부하면서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주와 주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고난받는 일을 고후 11:23 이하에 자신이 피력했습니다. “이 모든 수고가 자신의 지식, 능력, 어떤 재능에서가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에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에서 ‘내게 주신’은 ‘에이스 에메’로써 ‘나를 향한’이란 뜻으로 바울에게 특별한 목적으로 끊임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결국 주를 향한 바울의 이 수고와 봉사도 끝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수고하고 더 많이 봉사의 일을 했어도 겸손히 감사할 것뿐입니다. 여버분 우리 모두도 우리의 일상의 생활 속에서 그 어떤 것이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고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길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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