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역설의 삶 (고후12:1-10)
본문
기독교 역사상에 나타난 위인들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위인은 뭐니뭐니 해도 사도 바울입니다. 이 바울은 참 신삐로운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인물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신비에 싸인 삶의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삶을 보면 몇 가지 역석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역설적이라는 말은 “반대로 뒤집혀진 이론”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가나 공통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통념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의 그 통념이나 상식을 뒤집는 이론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에게서 그런 역설의 모습이 몇 가지 나오고 있습니다.
1. 가장 할 말이 많은 사람이 말이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말이 많은 존재입니다. 조금 자랑할 거리가 있으면 말하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외국여행이라도 하고 오면 할말이 많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모처럼 외국여행을 하고 오셔서 설교 때마다 “내가 외국에 갔을 때”라는 말씀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문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랑하고 싶고 나타내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할말이 너무나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너무나 깊은 영적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불러서 사도를 삼으신 사람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이라는 지역을 지나고 있을 때 예수님이 환상중에 나타나셨습니다. 바울은 그때 신비에 싸인 환상 속의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3층천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세계도 보았습니다. 3층천은 천국을 말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천국의 모습을 상세하게 목격했습니다. 얼마나 신비했겠습니까 할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고도 바울은 그 일에 대해서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모습들을 목격했기 때문에 열어서 말을 해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할까 봐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 일들을 혼자만의 비밀로 가슴에 깊숙이 묻어 두고 14년 동안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14년 만에 본문을 보니까 살짝 입을 엽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자꾸 의문을 제기하니까 할 수 없이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비밀스런 3층천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립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자랑거리가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일을 혼자만의 기쁨으로 간직하고 말없이 살아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겸양의 극치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멋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어떤 부분에 깊어지면 비로소 겸양을 갖추게 됩니다. 학문도 깊어지면 교만하거나 아는 체를 하지 않습니다. 운동도 어느 경지에 들어가면 절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부자도 진짜 부자는 허세를 부리지 않습니다. 인생도 어떤 깊은 경험을 한 사람들은 오히려 말이 적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모습이 진지합니다. 아주 헌신적인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환자들을 마치 자기 어머니를 돌보듯이 극진한 애정으로 정성을 다해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 그 간호사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고 그 정성스런 모습에 모두들 감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간호사는 소녀 시절에 10달 동안 이 병원에 입원해서 사경을 헤맨 적이 있습니다.” 그 간호사가 그렇게 환자들을 돌보고 사랑의 마음으로 말없이 헌신하게 된 이유는 그런 삶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간호사가 그렇게 진지하게 살아갔던 것입니다. 빌톨 프랭크라는 유태인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600만 명이 죽은 나치의 수용소 가스실에까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그가 살아나온 후 한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중심적인 가치”가 있으며 그 중 가장
첫째되는 가치는 “경험적인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는 “누가 어떤 경험을 하든지 그 경험을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지난날의 뼈저린 아픔의 경험이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진지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어느 부분에 깊숙이 들어가게 되면 겸손해집니다. 문제는 어설픈 사람들입니다. 조금 체험한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졸부들이 문제입니다. 또 어설픈 운동자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아주 깊어지면 문제가 없고 탈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영적으로 충분히 익고 성숙한 참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2.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병고침을 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역설적인 일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부모들이 자식이라면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병들었을 때 고칠 수만 있다면 어느 부모가 고쳐 주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몸에 가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몸에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약점을 칼빈은 “양심의 고통”일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특벽히 부르셨는데 바울 입장에서는 때로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는 데 게으르기도 하고 등한히 하기도 해서 양심적으로 많은 고통을 느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루터는 그 가시가 “반대파의 도전”일 것이라고도 해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반대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해와 위협등을 통해 바울에게 도전했습니다. 그것이 견디기 어려운 가시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주석가들은 그 가시가 간질병이라고도 했고 안질이라고도 했습니다. “(갈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는 구절을 보면 그 가시는 안질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시가 안질이었든 간질병이었든 양심의 고통이었든 반대파들의 도전이었든 상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가장 큰 고통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8절).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리고 반드시 세 번만 기도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세 번, 일곱 번, 아홉 번의 수를 완전 수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은 여러 번 기도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 데 방해가 되니 이 가시를 없애 달라고 여러 번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시고는 안 고쳐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그 고통을 몸에 지닌 채 전도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바울이 누구입니까 평생을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고난받고 수난당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해서 죽었습니다. 그런 그가 몸에 병이 있으니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데도 하나님은 고쳐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주치의인 누가를 붙여 줍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래서 이것을 역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먼저 한 가지 이해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통만 축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병을 고침받고 건강해지고 부해지고 잘사는 것만 축복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병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내가 약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이런 면도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반드시 형통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반드시 병을 고침받는 것만이 축복이 아닙니다. 바울은 평생 몸에 가시를 지닌 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통념을 뛰어넘는 상식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할 일을 못했습니까 그는 몸에 가시를 박고서도 할 일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는 약한 데서 강하여진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더 강하게 일했습니다. 이것도 또한 신비입니다. 리처드슨이 쓴 대하소설 파미라라는 소설에 나오는 하녀 파미라는 가축들을 돌보고 기르는 가냘픈 소녀입니다. 이 소녀가 어느 날 발정난 말에게 쫓겨 도망을 갑니다. 도망을 가다가 마침내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때 도망가던 이 가냘픈 소녀는 돌아서서 쫓아오는 말을 향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덤벼들 자세를 취합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점이 있습니다. 인간은 아주 약해질 때 가장 강해지는 신비가 있습니다. 입시 때마다 나타나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입시에서 수석한 학생이 영광스런 얼굴이라고 해서 신문에 소개되는데 한결같이 그 학생들이 아주 보잘것없는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이라는 점입니다 청소부의 아들이나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딸이 수석을 했다고 신문에 납니다.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아주 약하고 가난하고 학원 한번 가 보지 못하고 공부한 아이들이 어느 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아이들로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몸에 가시를 지니고서도 누구보다도 강한 모습으로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전도여행에는 숱한 방해도 있었고 수난도 있었고 배고픔도 있었지만 몸에 병까지 지니고서 전도를 했습니다. 병을 고쳐 주시면 좋을텐데 평생 고통스럽게 살라고 그냥 놓아두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때로 “너무나 가혹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감히 그 깊은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원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훈련이 가혹한 법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적당히 넘어가지 않습니다. 미국의 록펠러가 얼마나 큰 부자입니까 돈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손자 데이비드 록펠러가 후에 맨해튼 은행 총재가 되었는데 그가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훈련이 얼마나 완고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 록펠러는 손자들에게 한 주에 25센트씩 용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400원씩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돈을 용돈으로 주고는 그 중 10%는 적금하고 10%는 자선을 위해서 반드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토요일 저녁마다 돈을 어떻게 썼는지 그 내역을 일일이 계산했다고 합니다. 계산해 봐서 잘 썼으면 5센트를 더 주고 잘못 사용했으면 5센트를 줄였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손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누구보다도 더 강하고 더 무섭게 훈련했던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가혹할 수 있고 더 인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셨기에 그를 3층천으로 이끌고 가셔서 그 나라의 모습을 모두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교만해질까 봐서 그 몸에 가시를 막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게을러질 때마다, 교만해지려 할 때마다 하나님은 사정없이 그몸 속의 가시를 움직여서 고통스럽게 하심으로 교만의 싹을 미리 잘라냈고 게으름의 근본을 잘라냈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막 살아가는 것이 육신적으로는 훨씬 더 편할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 간섭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3. 가장 완벽해야 할 사람이 가장 불완전했다는 점입니다. 이것도 역설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완벽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가장 불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몸에 병을 지닌 채 고통스럽게 전도자의 생활을 수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 무엇인가 한 가지씩은 하자가 있습니다. 모두 가시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사람을 보아도 가정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뿐이 아니고 나라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다 문제점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미국은 부자 나라지만 거기도 거지가 있습니다. LA에서만 하룻밤 노숙하는 거지가 8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해안 도시 산타모니카는 인구가 9만 명인데 노숙 거지는
1,500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또한 정신적으로 겪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마약 문제가 가장 시급한 고민거리입니다. 모든 범죄가 이 마약 때문에 발생됩니다. 지금 미국의 고민은 젊은이들이 이 마약으로 자꾸만 폐인이 되어간다는 데 있습니다. 도시의 다운타운마다 밤이면 마약에 중독되어 거리에 쓰러져 있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미국의 장래를 보는 것 같아서 불길하다”고 했습니다. 그럼녀서 “장차 미국은 이 마약으로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문제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집마다 다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나 혼자만 이렇게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당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길거리에 걸어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 보십시오. 모두 하나씩은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곡이라는 책을 보면 눈먼 여인이 어느 목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을 받아서 눈을 뜨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이 수술을 받고 생전 처음으로 눈을 뜹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밝은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이 얼마나 밝고 아름답고 광채가 나는지 모릅니다. 그 맑은 하늘, 밝은 햇살, 아름다운 자연, 꽃들, 이 여인은 감탄하고 또 감탄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길거리를 지나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깜짝 놀랍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밝은 세상에 살면서, 저 맑은 하늘을 보면서, 저 밝은 햇살 아래 살면서 저렇게 수심이 가득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어쩌면 저렇게 사람들이 근심이 가득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하고 놀란 것입니다. 이 여인은 “나는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저렇게 근심이 가득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1급 충신으로 일하고 살면서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그냥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불완전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깊이 있는 모습은 모두 역설적인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한숨 소리가 있고 고통 소리가 있고 눈물이 있고 탄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풀 길 없는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고쳐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도 응답이 없어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어쩌면 더 큰 은혜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위인은 뭐니뭐니 해도 사도 바울입니다. 이 바울은 참 신삐로운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그런 인물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신비에 싸인 삶의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삶을 보면 몇 가지 역석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역설적이라는 말은 “반대로 뒤집혀진 이론”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가나 공통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통념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의 그 통념이나 상식을 뒤집는 이론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에게서 그런 역설의 모습이 몇 가지 나오고 있습니다.
1. 가장 할 말이 많은 사람이 말이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말이 많은 존재입니다. 조금 자랑할 거리가 있으면 말하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외국여행이라도 하고 오면 할말이 많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모처럼 외국여행을 하고 오셔서 설교 때마다 “내가 외국에 갔을 때”라는 말씀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문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랑하고 싶고 나타내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할말이 너무나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너무나 깊은 영적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불러서 사도를 삼으신 사람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이라는 지역을 지나고 있을 때 예수님이 환상중에 나타나셨습니다. 바울은 그때 신비에 싸인 환상 속의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3층천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세계도 보았습니다. 3층천은 천국을 말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천국의 모습을 상세하게 목격했습니다. 얼마나 신비했겠습니까 할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고도 바울은 그 일에 대해서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모습들을 목격했기 때문에 열어서 말을 해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할까 봐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 일들을 혼자만의 비밀로 가슴에 깊숙이 묻어 두고 14년 동안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14년 만에 본문을 보니까 살짝 입을 엽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자꾸 의문을 제기하니까 할 수 없이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비밀스런 3층천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립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자랑거리가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일을 혼자만의 기쁨으로 간직하고 말없이 살아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겸양의 극치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멋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어떤 부분에 깊어지면 비로소 겸양을 갖추게 됩니다. 학문도 깊어지면 교만하거나 아는 체를 하지 않습니다. 운동도 어느 경지에 들어가면 절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부자도 진짜 부자는 허세를 부리지 않습니다. 인생도 어떤 깊은 경험을 한 사람들은 오히려 말이 적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모습이 진지합니다. 아주 헌신적인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환자들을 마치 자기 어머니를 돌보듯이 극진한 애정으로 정성을 다해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 그 간호사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고 그 정성스런 모습에 모두들 감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간호사는 소녀 시절에 10달 동안 이 병원에 입원해서 사경을 헤맨 적이 있습니다.” 그 간호사가 그렇게 환자들을 돌보고 사랑의 마음으로 말없이 헌신하게 된 이유는 그런 삶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간호사가 그렇게 진지하게 살아갔던 것입니다. 빌톨 프랭크라는 유태인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600만 명이 죽은 나치의 수용소 가스실에까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그가 살아나온 후 한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중심적인 가치”가 있으며 그 중 가장
첫째되는 가치는 “경험적인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는 “누가 어떤 경험을 하든지 그 경험을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지난날의 뼈저린 아픔의 경험이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진지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어느 부분에 깊숙이 들어가게 되면 겸손해집니다. 문제는 어설픈 사람들입니다. 조금 체험한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졸부들이 문제입니다. 또 어설픈 운동자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아주 깊어지면 문제가 없고 탈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영적으로 충분히 익고 성숙한 참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2.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병고침을 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참 역설적인 일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부모들이 자식이라면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병들었을 때 고칠 수만 있다면 어느 부모가 고쳐 주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몸에 가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몸에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약점을 칼빈은 “양심의 고통”일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특벽히 부르셨는데 바울 입장에서는 때로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는 데 게으르기도 하고 등한히 하기도 해서 양심적으로 많은 고통을 느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루터는 그 가시가 “반대파의 도전”일 것이라고도 해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반대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해와 위협등을 통해 바울에게 도전했습니다. 그것이 견디기 어려운 가시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주석가들은 그 가시가 간질병이라고도 했고 안질이라고도 했습니다. “(갈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는 구절을 보면 그 가시는 안질이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시가 안질이었든 간질병이었든 양심의 고통이었든 반대파들의 도전이었든 상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은 가장 큰 고통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세 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8절).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리고 반드시 세 번만 기도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세 번, 일곱 번, 아홉 번의 수를 완전 수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은 여러 번 기도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 데 방해가 되니 이 가시를 없애 달라고 여러 번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고후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시고는 안 고쳐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생 그 고통을 몸에 지닌 채 전도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바울이 누구입니까 평생을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고난받고 수난당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해서 죽었습니다. 그런 그가 몸에 병이 있으니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데도 하나님은 고쳐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주치의인 누가를 붙여 줍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래서 이것을 역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먼저 한 가지 이해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통만 축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병을 고침받고 건강해지고 부해지고 잘사는 것만 축복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병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실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내가 약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이런 면도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반드시 형통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반드시 병을 고침받는 것만이 축복이 아닙니다. 바울은 평생 몸에 가시를 지닌 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통념을 뛰어넘는 상식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할 일을 못했습니까 그는 몸에 가시를 박고서도 할 일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는 약한 데서 강하여진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더 강하게 일했습니다. 이것도 또한 신비입니다. 리처드슨이 쓴 대하소설 파미라라는 소설에 나오는 하녀 파미라는 가축들을 돌보고 기르는 가냘픈 소녀입니다. 이 소녀가 어느 날 발정난 말에게 쫓겨 도망을 갑니다. 도망을 가다가 마침내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때 도망가던 이 가냘픈 소녀는 돌아서서 쫓아오는 말을 향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덤벼들 자세를 취합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점이 있습니다. 인간은 아주 약해질 때 가장 강해지는 신비가 있습니다. 입시 때마다 나타나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입시에서 수석한 학생이 영광스런 얼굴이라고 해서 신문에 소개되는데 한결같이 그 학생들이 아주 보잘것없는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이라는 점입니다 청소부의 아들이나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딸이 수석을 했다고 신문에 납니다.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아주 약하고 가난하고 학원 한번 가 보지 못하고 공부한 아이들이 어느 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아이들로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몸에 가시를 지니고서도 누구보다도 강한 모습으로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전도여행에는 숱한 방해도 있었고 수난도 있었고 배고픔도 있었지만 몸에 병까지 지니고서 전도를 했습니다. 병을 고쳐 주시면 좋을텐데 평생 고통스럽게 살라고 그냥 놓아두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때로 “너무나 가혹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감히 그 깊은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원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훈련이 가혹한 법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적당히 넘어가지 않습니다. 미국의 록펠러가 얼마나 큰 부자입니까 돈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손자 데이비드 록펠러가 후에 맨해튼 은행 총재가 되었는데 그가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훈련이 얼마나 완고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 록펠러는 손자들에게 한 주에 25센트씩 용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400원씩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돈을 용돈으로 주고는 그 중 10%는 적금하고 10%는 자선을 위해서 반드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토요일 저녁마다 돈을 어떻게 썼는지 그 내역을 일일이 계산했다고 합니다. 계산해 봐서 잘 썼으면 5센트를 더 주고 잘못 사용했으면 5센트를 줄였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손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누구보다도 더 강하고 더 무섭게 훈련했던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가혹할 수 있고 더 인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셨기에 그를 3층천으로 이끌고 가셔서 그 나라의 모습을 모두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교만해질까 봐서 그 몸에 가시를 막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게을러질 때마다, 교만해지려 할 때마다 하나님은 사정없이 그몸 속의 가시를 움직여서 고통스럽게 하심으로 교만의 싹을 미리 잘라냈고 게으름의 근본을 잘라냈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막 살아가는 것이 육신적으로는 훨씬 더 편할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 간섭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3. 가장 완벽해야 할 사람이 가장 불완전했다는 점입니다. 이것도 역설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완벽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가장 불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몸에 병을 지닌 채 고통스럽게 전도자의 생활을 수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 무엇인가 한 가지씩은 하자가 있습니다. 모두 가시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사람을 보아도 가정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뿐이 아니고 나라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다 문제점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미국은 부자 나라지만 거기도 거지가 있습니다. LA에서만 하룻밤 노숙하는 거지가 8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해안 도시 산타모니카는 인구가 9만 명인데 노숙 거지는
1,500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또한 정신적으로 겪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마약 문제가 가장 시급한 고민거리입니다. 모든 범죄가 이 마약 때문에 발생됩니다. 지금 미국의 고민은 젊은이들이 이 마약으로 자꾸만 폐인이 되어간다는 데 있습니다. 도시의 다운타운마다 밤이면 마약에 중독되어 거리에 쓰러져 있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미국의 장래를 보는 것 같아서 불길하다”고 했습니다. 그럼녀서 “장차 미국은 이 마약으로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미국의 문제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집마다 다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나 혼자만 이렇게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당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쉬운데 길거리에 걸어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 보십시오. 모두 하나씩은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곡이라는 책을 보면 눈먼 여인이 어느 목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을 받아서 눈을 뜨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이 수술을 받고 생전 처음으로 눈을 뜹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밝은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이 얼마나 밝고 아름답고 광채가 나는지 모릅니다. 그 맑은 하늘, 밝은 햇살, 아름다운 자연, 꽃들, 이 여인은 감탄하고 또 감탄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길거리를 지나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깜짝 놀랍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밝은 세상에 살면서, 저 맑은 하늘을 보면서, 저 밝은 햇살 아래 살면서 저렇게 수심이 가득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어쩌면 저렇게 사람들이 근심이 가득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하고 놀란 것입니다. 이 여인은 “나는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저렇게 근심이 가득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1급 충신으로 일하고 살면서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그냥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역시 불완전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깊이 있는 모습은 모두 역설적인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한숨 소리가 있고 고통 소리가 있고 눈물이 있고 탄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풀 길 없는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고쳐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도 응답이 없어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어쩌면 더 큰 은혜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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