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死生觀 (빌1:22-26)
본문
오늘은 빌립보서 1:22절 부터 상고하겠습니다. 22절부터 26절까지 함께 봉독 지난 시간에 배웠던 18절 말씀부터 26절까지는 바로 바울의 사생관(死生觀)에 대해서 피력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 운명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찬양을 받으실 주님만 생각했고 개인의 일신상의 명예와 세상에서 받을 여러가지 영광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21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그는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바울은 계속해서 편지를 써 내려간다. (22절)'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 바울은 21절에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으나 그가 살아있는 것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 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므로 사는 것도 주 안에서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 다 유익하지만 어느 한쪽을 택할는지 자기로서는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주를 위해 죽어도 할렐루야, 주를 위해 살아도 할렐루야,-개똥밭에 뒹굴어도 세상이 좋으니 어떻하든 살고보자는 세상 사람들의 생사관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한 정신이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어떻게 해서든지 오래살아볼려고 몸에 좋다는 것은 가리지 않고 먹는 것. (지렁이, 땅강아지,바퀴벌래가 위장에 좋다하면 이세상 바퀴벌래는 모두 사라지고 말것이다.)-이와같이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런 공포를 씻기위해서 가식적인 위안에 의지하고 그 가면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숨기려고 한다. 즉 터무니 없는 가능성에 매달려 위안을 얻으며 살고있는 것. 그러던 어느날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그러한 가식적인 위안은 우리를 얼마나 낭패케 하겠는가-사도바울은 죽음을 왕으로 표현했다. 롬5:12이하에서 '죄를 범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망이 왕노릇 하고 있다' 고 말씀하고 있다. = 왕-절대 권력자,두려움의 대상, 그렇기 때문에 히2:12에서는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이라'고 했다. = 인간은 어쩔 수없이 죽는것.(안개와 같은인생) = 바울의 운명-독수리 발톱에 채인 작은 새 한마리와 같은 신세였지만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는 그것이 바울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조금의 두려움없이 평온할 수 있었다.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 때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23절)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 = 바울은 삼층 하늘까지 다녀온 사람이다. 그는 천국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천국을 보고 왔는데 이 땅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웠겠는가-" 빨리 이 더러운 땅을 (죄로 가득한)떠나고 싶다"-옛날 가난한 시절,= 보리밥(그것도 감지덕지)만 먹고 살 때, 어쩌다가 쌀밥 한번 먹어 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부드럽고 살살녹는지 =그러다가 다시 버리밥을 먹어보면 그때는 꼭 모래알을 씹는것 같아 영 먹기가 싫어진다. = 단순히 먹는 것도
그런데 사는 환경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무엇이든지 풍족한 도회지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외딴 섬에 들어가 살게 됐다고 하면 아마 이 사람은 "자나깨나 육지생각", "앉으나 서나 도시 생각" 밖에 없을 것이다. = 바울은 바로 그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천국. 바로 그곳을 보고 온 후로는 이 세상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추하고 더럽게 보였겠는가-온 몸에 보석을 두르고, 가장 값진 옷을 걸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몸짓으로 설래설래 걸으며 온갖뽐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마도 바울은 세상에 대하여 구토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 누군가가 양손 가득히 누룽지를 들고 나왔다. 그것을 본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나눔의 혜택을 입기위해 그 주위로 몰려든다. 그러면 이 아이는 그 새까만 손으로 조금씩 조금씩 떼어주면서 어깨를 으쓱 으쓱, 조금 얻어먹은 아이들은 사르르 녹는 누룽지 맛에 그만 주눅이 들어가지고 비굴한 미소를 지으면서 또 손을 벌리다가 ' 너는 아까 먹었잖아 ! ' (큰소리로)-그런 수모를 당해도 좋다, 한 입만 더 먹을 수 있다면,-나중에는 누런 누룽지가 손때가 묻어서 누르거므티티해져도 한입 더 주면 황송해서 어쩔줄을 모르고.,
그런데 여러분 지금 그 손때묻은 누룽지 먹으라고 하면 먹을 수 있겠는가 = 바울은 시절을 좇아 맺는 그 맛을 표현할 수 없는 과실을 보았고, 은빛 찬란한 아름다운 옷과 정금으로 다듬어진 길들,진주문, 휘왕찬란한 희귀한 보석들, 도저히 자기 상상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모든 것을 본 바울에게 과연 세상이 어떻게 보였겠는가 하는 것은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얼마나 가고 싶었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24절에'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 바울은 자신의 욕심으로라면 얼른 천국에 가고 싶지만 그러나 성도들을 생각할 때 자신만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심정을 '그 두 사이에 끼였다' 라고 표현한 것이다. 결국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잠시 잠간의 자신의 고통스러운 세상에서의 삶은 유익하다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 우리 예수님의 몸소 행하신 가르침을 바울은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요15:13-14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우리 예수님은 아름다운 낙원을 버리시고 추하고 더러운 이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내려오셨다. 죽음을 동반한 고통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였기에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신 분이시다. = 우리가 그분의 제자라면 우리도 또한 남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바울은 이 편지문 뒤에서 빌립보교인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는데, 사실 자신도 예수님의 그러한 가르치심 때문에 행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삶이 온 인류의 삶에 유익했다면, 그 제자가 된 우리들의 삶이야 말로 남에게 유익을 끼쳐야 되지 않겠는가하는 바울의 확신을 말하고 있는데 25절을 보면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다시 수정하면 ' 내가 이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또 아는 것은 내가 살고 또 너희 무리와 함께 살 것은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려 함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은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 바울이 사는 목적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요,
둘째는,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였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하기 위해서 내가 심혈을 기울일 수 있다면 참으로 복되고 복된 삶이 될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모른다. 허물어져가는 이 육신의 장막이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 내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존재가 되자.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하늘의 영광의 빛을 비춰주시고, 확신을 주시고, 은혜를 충만하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이런 귀한 역사가 여러분가운데 날마다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많은 고난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고,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를 가져온 사실을 기뻐하며 그의 설래는 마음을 26절에서 표현하고 있다. (26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이 말 속에는 참으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담겨있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릎꿇고 기도하고,복음을 위해서 희생을 아끼지 아니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뜨거운 그리운 감정이 들어있다.-사랑하는 감정때문에 다시 만나기를 갈망하고 그것이 소원이 되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사랑과 확신에 찬 말이다.-사랑하면 보고싶은 것은 당연하다. 내일 다시 만날것이 확실한데도 저녁에 헤어질 땐 먼 이별을 하는 양 슬픈 표정으로 헤어진다. = 예수그리스도의 짝사랑.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떠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했다.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했다.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이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바울은 못박았다. '나를 인하여' 즉 나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 그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신 하나님, 또한 믿음이 어려서 걱정했던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을 고난을 통해 성숙하게 성장토록해 주신 하나님, 바울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을 통하여 그와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케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자랑함이 풍성해 질 것을 바울은 믿었다. 이것이 바울에게,또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최대의 자랑거리였다면 오늘 날 우리의 자랑은 무엇인가-바로 하나님만 자랑하자.-나를 위해 죽으신 우리 주님만 자랑하자.
그러므로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되므로 사는 것도 주 안에서 유익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 다 유익하지만 어느 한쪽을 택할는지 자기로서는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주를 위해 죽어도 할렐루야, 주를 위해 살아도 할렐루야,-개똥밭에 뒹굴어도 세상이 좋으니 어떻하든 살고보자는 세상 사람들의 생사관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한 정신이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어떻게 해서든지 오래살아볼려고 몸에 좋다는 것은 가리지 않고 먹는 것. (지렁이, 땅강아지,바퀴벌래가 위장에 좋다하면 이세상 바퀴벌래는 모두 사라지고 말것이다.)-이와같이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런 공포를 씻기위해서 가식적인 위안에 의지하고 그 가면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숨기려고 한다. 즉 터무니 없는 가능성에 매달려 위안을 얻으며 살고있는 것. 그러던 어느날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그러한 가식적인 위안은 우리를 얼마나 낭패케 하겠는가-사도바울은 죽음을 왕으로 표현했다. 롬5:12이하에서 '죄를 범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망이 왕노릇 하고 있다' 고 말씀하고 있다. = 왕-절대 권력자,두려움의 대상, 그렇기 때문에 히2:12에서는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이라'고 했다. = 인간은 어쩔 수없이 죽는것.(안개와 같은인생) = 바울의 운명-독수리 발톱에 채인 작은 새 한마리와 같은 신세였지만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는 그것이 바울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조금의 두려움없이 평온할 수 있었다.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 때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23절)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 = 바울은 삼층 하늘까지 다녀온 사람이다. 그는 천국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천국을 보고 왔는데 이 땅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웠겠는가-" 빨리 이 더러운 땅을 (죄로 가득한)떠나고 싶다"-옛날 가난한 시절,= 보리밥(그것도 감지덕지)만 먹고 살 때, 어쩌다가 쌀밥 한번 먹어 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부드럽고 살살녹는지 =그러다가 다시 버리밥을 먹어보면 그때는 꼭 모래알을 씹는것 같아 영 먹기가 싫어진다. = 단순히 먹는 것도
그런데 사는 환경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무엇이든지 풍족한 도회지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외딴 섬에 들어가 살게 됐다고 하면 아마 이 사람은 "자나깨나 육지생각", "앉으나 서나 도시 생각" 밖에 없을 것이다. = 바울은 바로 그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천국. 바로 그곳을 보고 온 후로는 이 세상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추하고 더럽게 보였겠는가-온 몸에 보석을 두르고, 가장 값진 옷을 걸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몸짓으로 설래설래 걸으며 온갖뽐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마도 바울은 세상에 대하여 구토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 누군가가 양손 가득히 누룽지를 들고 나왔다. 그것을 본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나눔의 혜택을 입기위해 그 주위로 몰려든다. 그러면 이 아이는 그 새까만 손으로 조금씩 조금씩 떼어주면서 어깨를 으쓱 으쓱, 조금 얻어먹은 아이들은 사르르 녹는 누룽지 맛에 그만 주눅이 들어가지고 비굴한 미소를 지으면서 또 손을 벌리다가 ' 너는 아까 먹었잖아 ! ' (큰소리로)-그런 수모를 당해도 좋다, 한 입만 더 먹을 수 있다면,-나중에는 누런 누룽지가 손때가 묻어서 누르거므티티해져도 한입 더 주면 황송해서 어쩔줄을 모르고.,
그런데 여러분 지금 그 손때묻은 누룽지 먹으라고 하면 먹을 수 있겠는가 = 바울은 시절을 좇아 맺는 그 맛을 표현할 수 없는 과실을 보았고, 은빛 찬란한 아름다운 옷과 정금으로 다듬어진 길들,진주문, 휘왕찬란한 희귀한 보석들, 도저히 자기 상상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모든 것을 본 바울에게 과연 세상이 어떻게 보였겠는가 하는 것은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얼마나 가고 싶었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24절에'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 바울은 자신의 욕심으로라면 얼른 천국에 가고 싶지만 그러나 성도들을 생각할 때 자신만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심정을 '그 두 사이에 끼였다' 라고 표현한 것이다. 결국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잠시 잠간의 자신의 고통스러운 세상에서의 삶은 유익하다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 우리 예수님의 몸소 행하신 가르침을 바울은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요15:13-14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우리 예수님은 아름다운 낙원을 버리시고 추하고 더러운 이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내려오셨다. 죽음을 동반한 고통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였기에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신 분이시다. = 우리가 그분의 제자라면 우리도 또한 남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바울은 이 편지문 뒤에서 빌립보교인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는데, 사실 자신도 예수님의 그러한 가르치심 때문에 행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삶이 온 인류의 삶에 유익했다면, 그 제자가 된 우리들의 삶이야 말로 남에게 유익을 끼쳐야 되지 않겠는가하는 바울의 확신을 말하고 있는데 25절을 보면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다시 수정하면 ' 내가 이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또 아는 것은 내가 살고 또 너희 무리와 함께 살 것은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려 함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은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 바울이 사는 목적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요,
둘째는,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였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하기 위해서 내가 심혈을 기울일 수 있다면 참으로 복되고 복된 삶이 될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모른다. 허물어져가는 이 육신의 장막이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 내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존재가 되자.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하늘의 영광의 빛을 비춰주시고, 확신을 주시고, 은혜를 충만하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이런 귀한 역사가 여러분가운데 날마다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많은 고난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었고,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를 가져온 사실을 기뻐하며 그의 설래는 마음을 26절에서 표현하고 있다. (26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이 말 속에는 참으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담겨있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릎꿇고 기도하고,복음을 위해서 희생을 아끼지 아니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뜨거운 그리운 감정이 들어있다.-사랑하는 감정때문에 다시 만나기를 갈망하고 그것이 소원이 되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사랑과 확신에 찬 말이다.-사랑하면 보고싶은 것은 당연하다. 내일 다시 만날것이 확실한데도 저녁에 헤어질 땐 먼 이별을 하는 양 슬픈 표정으로 헤어진다. = 예수그리스도의 짝사랑.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떠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했다.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했다.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이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바울은 못박았다. '나를 인하여' 즉 나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 그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신 하나님, 또한 믿음이 어려서 걱정했던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을 고난을 통해 성숙하게 성장토록해 주신 하나님, 바울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을 통하여 그와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케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자랑함이 풍성해 질 것을 바울은 믿었다. 이것이 바울에게,또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최대의 자랑거리였다면 오늘 날 우리의 자랑은 무엇인가-바로 하나님만 자랑하자.-나를 위해 죽으신 우리 주님만 자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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