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마지막 부탁 (2) (행20,32-38)
본문
사도 바울의 간절한 마지막의 부탁을 께속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순서를 바꾸어서 뒤로부터 생각을 하고자 합니다.
1,눈물의 이별 " 세상엔 이별이 필수적인 과목같이 여겨집니다. 유행가의 제목 같습니다만 사람은 만나면 헤여져야하는 그런 운명의 길을 가고 있는게 틀림 없습니다. 그걸 사람들이 이별이라고들 합니다. 이별에는 종류도 많았고 눈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많이들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이별의 종류들…) 오늘 본문에 혈육인 부자 지간도 아니고, 남편 아내지간도 아닌데 그 이상으로 헤여지기가 힘이든 안타까움의 눈물의 이별이 있습니다. 눈물로 떠나고 눈물로 보내고 있는 석별의 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36-38절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여기 사도 바울의 이별의 장면이 보이십니까 모든 부탁을 하고난 후 저희 모두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십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크게 울고 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그리고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 보이십니까 또 눈물로 배에 오르고 있는 바울과 전송하는 사람들이 보이십니까 이제 가면 땅위에선 다시 볼 수 없는 길이기에 이토록 서러운 이별입니다. 지금 바울이 배를 타고 가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마지막으로 오순절을 짙키고 싶어서 길을 재촉했던 것입니다 . 오순절이 무었입니까 전번에 오순절은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맥추 감사절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감사를 예루살렘에서 드리고 싶었습니다. 보리를 드리고 밀을 드리려는게 아닙니다. 못난 사울을 불러서 이렇게 바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목숨으로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서 마껴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앴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이 삶이 예루살렘에서 증명이 될 것입니다. 이 바울의 달려간 길이야 말로 우리 주님께서 달려 간 길과도 흡사한 길입니다. 요15;13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하시면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주님은 그 큰 사랑을 십자가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친구가 되심을 죽음으로서 증명을 하시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서분들의 달려 가고 있는 길은 어느쪽입니까 세상입니까 예루살렘이 있는 쪽입니까 이제 조금 후 바울이 예루살렘에 당도하면 바울은 죄인 아닌 죄인으로 체포 될 것이고 체포된 바울은 로마의 형장으로 이송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교수대의 칼날에 처참하게 죽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밀레도 항구는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울고 있습니다. 장로들이 울고 있습니다. 함께한 일행이 울었습니다. 교역자와 성도들간에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는 평소에 눈물로 다져진 아름다움의 결실이라 여겨집니다.
2,범사에 자기의 모본으로 부탁 "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또는 사람 사는 사회에서 행함은 적고 말이 많으면 그 사람의 말을 우리들은 "잔소리"라고 합니다. 목사나 교사의 직분이 바로 그 "잔소리"로 끝나기 쉬운 직분입니다. 말은 많은데 행함이 따라 주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35절입니다.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 사도 바울은 삼년 반을 에베소 교회에 머물면서 목회하면서 눈물로, 주야로, 그리고 모든 삶으로 모본을 보인 행함의 사역자였습니다. 모본을 보인
첫째가 1),33절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바울은 물질에 결백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쉬운일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사람들은 탐심 속에 살아 왔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권력을 쥐면 먼저 본전을 뽑으려는 생각부터 하곤 했던 탐관 오리들이 오늘 날까지 계속해서 이어 오고 있음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부정패의 뒤안 길엔 전부가 물질적인 것입니다. 선지자 발람이 재물에 눈이 어두어 선지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게하시가 재물에 눈이 멀어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그 많은 재물 때문에 망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입니다. 은금이 여러분 모두에게 다 필요한 것처럼 목회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누 누구에게도 이 물질에 대하여 결백한 삶을 살았음을 장로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었습니다. 물질로 인하여 복음에 편견을 두지 아니했음을 말함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이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렇습니다. 바울에겐 은과 금은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엇기에 물질에 초연한 사람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들의 마음엔 누가 주인입니까 물질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2),35절 하반절입니다. ".약한 자들을 돕고."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물질에 초월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을 ,그것도 약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았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돈 있는 사람들에게 약한 편입니다.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약한 편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에겐 약한 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한 사람의 편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있는 사람들의 편이 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약자의 편에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삶으로 생활로 모본을 보인대로 장로들이 그렇게 살기를 무탁하고 하고 있습니다.
3,하나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 32절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기 너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너희의 원문은 어떤 사본에는 "형제"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지금 형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과 장로들 , 장로들과 바울이 삼년 반을 교회를 세우면서 기쁠 때나 어려울 때를 함께 형제 같이 살아 왔음을 말함입니다. 목사와 성도 , 성도와 목사가 형제가 되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형제 관계는 육신의 피로 맺어진 혈연의 관계와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자 곁에 계신 분의 손을 잡으시길 바랍니다. 다 잡으셨습니까 그럼 저를 따라합니다. "우리들은 다 나의 형제이다"
1),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 -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어떻게 살아 왔나를 상세히 회고하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이 무었입니까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만약에 성도들 중에 혹시라도 주님과 은혜의 말씀은 등지고 바울의 삶만을 따르려고 한다면 이는 전적으로 바울의 잘못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잘 못된 간증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바울이 지금까지 자기의 경건한 삶을 말해 온 것은 주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밀하면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음은 주님 때문이라는 것이며 지금 이렇게 간절한 부탁을 하고 있음도 은혜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의 삶이 아니라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라는 단어 입니다. 이 은혜는 단순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단순한 하나님의 호의도 아닙니다. 신약 성경을 읽으시다가 "은혜"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의 앞과 뒤를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있을 때마다 그 은혜가 어떻게 쓰였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고난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이 된 사람은 그럼 어떤 축복이 있을까요
첫째; 능히 든든히 서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그리고 여러분들의 산업을 그리고 여러분들의 믿음을 든든히 세워가는 힘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거룩하게 하심을 입게합니다. 여러분들이 거룩하게 되는 길은 오직 그 은혜의 말씀 뿐입니다. 여러분을 올바르게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세째; 모든 자 가운데 유업이 있게합니다. 유업 또는 기업이란 단어는 원래 " 제비를 뽑는다"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구약의 각 지파가 땅을 나눌때에 제비를 뽑은 것에 유래된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 단어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의 상징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장 하시는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모든 축복이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을 따라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물질에 초월한 지도자였습니다. 약한자의 편에 서서 약한 자를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인간적인 아름다운 간증거리가 많은 사람이지만 사람의 간증에 치우치지 말고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굳게 서서 하나님께서 능력있게 쓰시는 사람이 되고 또 거룩한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마음것 축복을 부어 주실 수 있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한 마지막 부탁의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성도 은혜의 말씀에 굳게 서 있는 성도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생활을 본으로 말하면서 사실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눈물의 이별 " 세상엔 이별이 필수적인 과목같이 여겨집니다. 유행가의 제목 같습니다만 사람은 만나면 헤여져야하는 그런 운명의 길을 가고 있는게 틀림 없습니다. 그걸 사람들이 이별이라고들 합니다. 이별에는 종류도 많았고 눈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많이들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이별의 종류들…) 오늘 본문에 혈육인 부자 지간도 아니고, 남편 아내지간도 아닌데 그 이상으로 헤여지기가 힘이든 안타까움의 눈물의 이별이 있습니다. 눈물로 떠나고 눈물로 보내고 있는 석별의 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36-38절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여기 사도 바울의 이별의 장면이 보이십니까 모든 부탁을 하고난 후 저희 모두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 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십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크게 울고 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그리고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 보이십니까 또 눈물로 배에 오르고 있는 바울과 전송하는 사람들이 보이십니까 이제 가면 땅위에선 다시 볼 수 없는 길이기에 이토록 서러운 이별입니다. 지금 바울이 배를 타고 가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마지막으로 오순절을 짙키고 싶어서 길을 재촉했던 것입니다 . 오순절이 무었입니까 전번에 오순절은 우리들이 지키고 있는 맥추 감사절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감사를 예루살렘에서 드리고 싶었습니다. 보리를 드리고 밀을 드리려는게 아닙니다. 못난 사울을 불러서 이렇게 바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목숨으로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서 마껴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앴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이 삶이 예루살렘에서 증명이 될 것입니다. 이 바울의 달려간 길이야 말로 우리 주님께서 달려 간 길과도 흡사한 길입니다. 요15;13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하시면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주님은 그 큰 사랑을 십자가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친구가 되심을 죽음으로서 증명을 하시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서분들의 달려 가고 있는 길은 어느쪽입니까 세상입니까 예루살렘이 있는 쪽입니까 이제 조금 후 바울이 예루살렘에 당도하면 바울은 죄인 아닌 죄인으로 체포 될 것이고 체포된 바울은 로마의 형장으로 이송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교수대의 칼날에 처참하게 죽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밀레도 항구는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울고 있습니다. 장로들이 울고 있습니다. 함께한 일행이 울었습니다. 교역자와 성도들간에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는 평소에 눈물로 다져진 아름다움의 결실이라 여겨집니다.
2,범사에 자기의 모본으로 부탁 "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또는 사람 사는 사회에서 행함은 적고 말이 많으면 그 사람의 말을 우리들은 "잔소리"라고 합니다. 목사나 교사의 직분이 바로 그 "잔소리"로 끝나기 쉬운 직분입니다. 말은 많은데 행함이 따라 주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35절입니다.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 사도 바울은 삼년 반을 에베소 교회에 머물면서 목회하면서 눈물로, 주야로, 그리고 모든 삶으로 모본을 보인 행함의 사역자였습니다. 모본을 보인
첫째가 1),33절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바울은 물질에 결백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쉬운일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 때부터 사람들은 탐심 속에 살아 왔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권력을 쥐면 먼저 본전을 뽑으려는 생각부터 하곤 했던 탐관 오리들이 오늘 날까지 계속해서 이어 오고 있음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부정패의 뒤안 길엔 전부가 물질적인 것입니다. 선지자 발람이 재물에 눈이 어두어 선지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게하시가 재물에 눈이 멀어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그 많은 재물 때문에 망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입니다. 은금이 여러분 모두에게 다 필요한 것처럼 목회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누 누구에게도 이 물질에 대하여 결백한 삶을 살았음을 장로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었습니다. 물질로 인하여 복음에 편견을 두지 아니했음을 말함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은과 금이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렇습니다. 바울에겐 은과 금은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엇기에 물질에 초연한 사람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들의 마음엔 누가 주인입니까 물질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2),35절 하반절입니다. ".약한 자들을 돕고."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물질에 초월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을 ,그것도 약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았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돈 있는 사람들에게 약한 편입니다.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약한 편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에겐 약한 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한 사람의 편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있는 사람들의 편이 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약자의 편에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삶으로 생활로 모본을 보인대로 장로들이 그렇게 살기를 무탁하고 하고 있습니다.
3,하나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 32절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기 너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너희의 원문은 어떤 사본에는 "형제"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지금 형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과 장로들 , 장로들과 바울이 삼년 반을 교회를 세우면서 기쁠 때나 어려울 때를 함께 형제 같이 살아 왔음을 말함입니다. 목사와 성도 , 성도와 목사가 형제가 되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형제 관계는 육신의 피로 맺어진 혈연의 관계와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자 곁에 계신 분의 손을 잡으시길 바랍니다. 다 잡으셨습니까 그럼 저를 따라합니다. "우리들은 다 나의 형제이다"
1),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 -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어떻게 살아 왔나를 상세히 회고하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이 무었입니까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만약에 성도들 중에 혹시라도 주님과 은혜의 말씀은 등지고 바울의 삶만을 따르려고 한다면 이는 전적으로 바울의 잘못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잘 못된 간증을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바울이 지금까지 자기의 경건한 삶을 말해 온 것은 주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밀하면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음은 주님 때문이라는 것이며 지금 이렇게 간절한 부탁을 하고 있음도 은혜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의 삶이 아니라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라는 단어 입니다. 이 은혜는 단순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단순한 하나님의 호의도 아닙니다. 신약 성경을 읽으시다가 "은혜"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의 앞과 뒤를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있을 때마다 그 은혜가 어떻게 쓰였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고난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이 된 사람은 그럼 어떤 축복이 있을까요
첫째; 능히 든든히 서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그리고 여러분들의 산업을 그리고 여러분들의 믿음을 든든히 세워가는 힘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거룩하게 하심을 입게합니다. 여러분들이 거룩하게 되는 길은 오직 그 은혜의 말씀 뿐입니다. 여러분을 올바르게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세째; 모든 자 가운데 유업이 있게합니다. 유업 또는 기업이란 단어는 원래 " 제비를 뽑는다"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구약의 각 지파가 땅을 나눌때에 제비를 뽑은 것에 유래된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 단어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의 상징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장 하시는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모든 축복이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을 따라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물질에 초월한 지도자였습니다. 약한자의 편에 서서 약한 자를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인간적인 아름다운 간증거리가 많은 사람이지만 사람의 간증에 치우치지 말고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굳게 서서 하나님께서 능력있게 쓰시는 사람이 되고 또 거룩한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마음것 축복을 부어 주실 수 있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한 마지막 부탁의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성도 은혜의 말씀에 굳게 서 있는 성도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생활을 본으로 말하면서 사실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