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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기도 (엡3:14-21)

본문

에베소서에는 바울의 기도가 세 번에 걸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예배소 교인들을 향한 그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기도한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본문은 바울의 두 번째 기도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기도를 통하여 성경적인 기도의 모범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다분히 물질적이고,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현세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기도들입니다. 한마디로 정욕적인 기도에 머무르기 쉽습니다(약 4:4). 그래서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바른 자세, 기도의 바른 대상, 그리고 기도의 바른 내용과 중요한 요소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기도의 동기(14절). 기도의 동기는 ‘이러하므로’에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런 이유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1,2장까지의 내용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계획과 사랑이 기도의 동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1:4,5)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행되었고(1:7), 오늘도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되고(1:13,14)있는 사건입니다. 사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입니다(엡 2:1). 진노의 자녀였습니다(2:3).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2:16). 이방인인 우리가 유대인과 하나 되게 된 것입니다(2:18).
그러므로 이제는 외인도, 손도 아닌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된 것입니다(2:19).
그러므로 현대어 번역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지혜롭고 엄청난 것인가를 생각할 때 나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의역을 했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와 축복으로 바울은 더 큰 축복을 간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깨닫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 기도의 대상(15절) ‘아버지 앞에’입니다. 여기 ‘앞에’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스’라는 전치사입니다. 이 말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보다 더 친밀하고 가까운 표현이 있을까, 사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로 인하여 원수된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자 관계로 회복된(요20:17)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오늘도 ‘아바 아버지’(롬 8:15)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가운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기도의 대상인 아버지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14절에 보면,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모든 민족, 모든 족속의 근원이 되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하나는 19절에 나옵니다.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하실 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바라거나 구하거나 소원하거나 심지어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서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 주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약 1:5)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약 1:17)이십니다. 그런가 하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시는 하나님’(눅 6:38)이십니다. 한마디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마 7:11)이십니다. 이와 같은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더욱 기도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을 달리 설명한다면, 진정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로 알지 못하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도 알 수 없다는 뜻도 됩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바로 알 것입니다.
3. 기도의 자세(15절) ‘무릎을 꿇고 비노니’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의 기도는 서서 하는 기도입니다(막 11:25, 눅 18:11).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보면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서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또는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무릎을 꿇고 빈다’는 것은 기도의 겸손함과 간절함이 담긴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기가막힌 상황 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스 9:5). 솔로몬(왕상 8:54, 대하 6:13)도, 다니엘(단 6:10)도, 스데반(행 7:60)도, 바울(행 20:36, 21:5)도 기도할 때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도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눅 22:41).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던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될(눅 22:44)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기자는 우릴르 겸손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나의 기도에는 이와 같은 간절함이 있습니까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것입니다.
4. 기도의 내용(16-19절)
1)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소서(16절). 여기 ‘속사람’이란 ‘겉사람’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바울의 1차 관심은 눈에 보이는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었습니다. 속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중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겉이 아닌 속입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하셨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건강은 또 하나의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매스컴이나 텔레비젼에서 인기 있는 강좌는 역시 건강 강좌입니다. 얼마 전에는 이상구 박사의 강연이 인기를 끌더니 요즘은 황수관 박사의 ‘신바람 건강법’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현대인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고, 못 먹는 것이 없습니다. 건강 문제에서는 윤리나 도덕이 실종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법으로 금지된 것이라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부자들에게만 있는 특이한 병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보약 중독증’이라는 병입니다.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나 다 먹어서 부작용이 난 경우입니다. 겉사람의 건강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고 애를 쓰는데, 과연 속사람의 건강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역시 대답은 부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건강하면 정신이 겅강하고, 정신이 건강하면 육신이 건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요삼 1:2). 예수님도 병든 자를 향하여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막 2:5, 요 5:14) 하시며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육신의 건강 문제는 하나님과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겉사람의 건강이 아닌 속사람의 건강을 하나님 앞에 구하고 있습니다. 여기 ‘속사람’이란 무엇을 두고 한 말입니까 속사람이란 내적 존재인 영혼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면 ‘속사람의 강건’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본문에서는 ‘그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성령님을 시켜 여러분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주시고’라고 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성령님을 통하여’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입니다. 중생케 하는 영이요, 성화케 하는 영이요, 영화롭게 하는 영입니다. 이 영이 우리와 함께하실 때에 그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가 있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17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삶,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시는 삶,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삶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온 인격을 지배하시기를 위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16절 하반절을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2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행위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과정, 즉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모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인격적인 주님은 인격적인 방법을 통하여 모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는 삶이 되면 두려울 것이 없고, 못할 일이 없습니다. 리빙스턴은 밀림 지대에서 원시인들과 더불어 선교사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성공 비결을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성경의 두 군데를 가지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28:20)의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와 요한복음(14:18)의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3) 알게하옵소서(18절). 세 번째로 기도하는 내용은 ‘알게 하옵소서’입니다. 무엇을 알게 해 다라고 간구하고 있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지식이 넘치는’이라는 말을 공동번역에서는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모든 합리적인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이시다. 이것을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마 5:39-44)고 하셨습니다. 소위 공평을 초월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바울은 간구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를 알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온 세상을 감싸고도 남습니다. 그 사랑의 길이는 영원부터 영원까지를 잇고도 남습니다. 그 사랑의 높이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하나님이 계신 보좌로까지 올리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로마서 5장에서는 세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언제사랑하셨는가 그 시기는 ‘우리가 연약할 때(롬 5:6)였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그때에 ’아직 죄인 되었을 때(롬 5:8)였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원수 되었을 때(롬 5:10)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가히 측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17절 하반절에 보면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방편으로 바울은 두 가지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무 비유요, 다른 하나는 건축 비유입니다. 즉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사랑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8). 또한 그리스도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3:1).
4) 충만하게 하옵소서(19절). 19절에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으로 충만하기를 구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입니다. 이것이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풍성하신 은혜’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전자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우리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내용이 됩니다. 후자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모든 풍성하신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간구하는 내용이 됩니다. 충만한 사람이 남을 충만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이웃을 충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그들 가운데 넘쳐 나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5) 기도의 요소(20-21절). 20, 21절은 송영 부분입니다. 3장까지의 교리 부분을 마감하면서 드린 송영이기도 하나 바울의 기도 가운데 마지막으로 드린 찬양 부분이기도 합니다. 보통 기도에는 네 가지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찬양과 고백과 감사와 간구입니다 이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찬양과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이나 그의 성호를 높여 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시고, 이미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현대인의 기도 가운데는 중요한 요소가 간과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저 눈을 감기만 하면 무조건 달라는 내용뿐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하여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협박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기도의 내용 가운데 경건을 잃어버렸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자 하는 자세가 없어 유감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성도들의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오라고 세계 각국으로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로 보낸 천사들은 기뻐 찬송하면서 기도의 바구니를 가지고 왔는데, 유독 한국에 보낸 천사만은 울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찬양과 감사의 내용은 하나도 없고 그저 달라는 간구의 내용뿐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오직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빌립보서 4:6, 7은 말씀합니다. 그리할 때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의 송영 부분을 통하여 다시 한번 잘못된 우리의 기도 자세를 교정했으면 합니다. 믿는 자들에게서 기도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도 그의 사역 가운데 시간시간 하나님께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는데 우리 같은 인간들이 기도 없이 성공적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여러 해 동안 기도한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도를 할 때도 많았습니다. 일종의 자기 한풀이나 스트레스 해소의 일종으로 기도할 때도 많았습니다. 과시형 기도나 열람식 기도를 할 때도 많았습니다. 이제는 올바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행 10:4). 그리하여 능력 있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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