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눈물의 권면 (2) (행20:28-38)
본문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아시아를 떠나면서 밀레도라는 곳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서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배웠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몇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특별히 에베소에 3년을 있으면서 모든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성도들을 섬긴 것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꺼리낌 없이 주의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했던 그런 일들을 회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회개와 믿음에 대한 진리를 가르쳤던 것을 회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내가 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지금 나는 급하게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이것은 ‘내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지금 예루살렘으로 간다. 여기에 강력한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 성령님에게 이런 것을 배우게 됩니다. ‘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나누고난 사도 바울은 모든 마게도냐 지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유감없이 전했다는 말을 ‘나는 이 지역의 사람들의 피값에 대해 깨끗하다’ 이런 말을 함으로써 정말 그가 양심에 꺼리낌없이 유럽과 아시아에 복음을 전한 것을 간증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아시아를 떠나면서 장로님과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맡기는 그런 말씀을 오늘 우리가 듣게 됩니다. 28, 어떻게 성도들을 섬겨야 하는가 어떻게 양떼들을 섬겨야 하는가 첫 번째 사도 바울의 권면은 너희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양떼들을 잘 섬기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목표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도들을 잘 돌보는 일이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10:11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세상을 향해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양떼를 행해서는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는 양떼들의 음성을 듣는다. 목자는 양을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 나는 양의 문이다. 모든 양떼는 문인 나를 통하여 들어와서 먹고 마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0:10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양떼들로 하여금 풍성한 차고 넘치는 삶을 살게하기 위하여 내가 세상에 왔노라.”
교회를 잘 설명해 주는 시편이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양떼들이 모인 공동체인 것입니다. 여러분, 양떼라고 하는 것은 목자가 없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양떼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양떼를 잘 돌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제자들이나 장로님들이 바울이 떠난 후에 어떻게 양떼들을 섬길 것입니까 28절, 삼가라.
첫째는 자기성찰입니다. 지도자의 자기성찰. 여러분, 목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영적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양떼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너와 네 양떼들을 위해서 잘 절제하고 자신을 관리하고 자신을 훈련을 시키고 자신을 삼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교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나 목사들의 잘못이 굉장히 많습니다. 양떼를 잘 돌보는 첫 번째 비결이 무엇인가 목자들이 자기를 잘 절제하는 것입니다.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절대적으로 자기를 삼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어찌 남에게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체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성령님의 능력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지도자의 자질, 영적인 위치,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2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목자 하나가 넘어지면 양떼들 다 넘어집니다. 구역장이 넘어지면 구역식구들이 다 흔들립니다. 구역장이 기도도 하지 않고 관리도 하지 않는다면 그 구역은 흔들립니다.
에베소서 4:27에 보면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마귀는 틈만 보이면 그 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영적 지도자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서 우리가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가지 28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감독자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양떼를 잘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감독자라는 질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도록 두신 것이 아니라 양떼가 따라갈 수 있는 교회의 영적 지도체계를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영적 지도체계를 따라가고 존경하고 권위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감독은 누가 세웠습니까 성령님이 세웠습니다. 사람이 투표하고 뽑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임명합니다. 구역장을 세우고 교사를 세우고 성가대장을 세우는 것도 사람이 임명한 것 같지만 사람이 임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임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임명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감독자로 세운 것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관리하기 위해서, 돌보기 위해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목자로 부르신 이유요, 감독자로 부르신 이유요 장로나 목사나 집사님이나 권사님으로 특별히 여러분을 세워주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8절에 보면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양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이 피를 흘리셨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피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곧 하나님이 흘린 피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피를 흘려주셔서 만들어진 바로 이 교회,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 교회가 바로 양떼들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그 성도들은 어떤 성도입니까 주님께서 피를 흘려서 값주고 사신 대가를 치루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이 교회를 네가 돌봐달라는 것입니다. 이제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앞으로 교회가 당면해야 될 일들을 이야기해 줍니다.
29-30, 사도 바울은 목회에 있어서 양육에 있어서, 양떼를 돌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흉악한 이리떼라는 것입니다. 이 흉악한 이리떼가 내가 떠나면 바로 찾아올 것이다. 바울이 양육하고 있는 동안에는 흉악한 이리떼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떠나면 이 이리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우는 사자처럼 노리고 있다가 들어오게 될 것이다. 베드로전서 5:8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말을 했습니다. 흉악한 이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양의 가죽을 썼다는 것입니다. 흉악한 이리는 절대로 자기의 본질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자기본질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비슷하게, 말씀을 가지고 능력을 가지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천사의 모습을 가장해서.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속는 것입니다. 이 흉악한 이리떼들이 들어오면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번 29절을 보십시오. 흉악한 일떼들이 들어와서 첫째 뭐하죠 양떼를 돌보지 않습니다. 양떼를 맡아놓고 양뗴를 안돌보는 것입니다. 차라리 안맡았으면 괜찮죠. 맡아놓고 굶기는 것입니다. 맡아놓고 목욕을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병들어도 치료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악한 이리떼요 삯꾼목자입니다. 이 양떼들이 들어오면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 양뗴들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의 하나님이 창조한 백성으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의 이익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물질로 취급합니다. 필요하면 사용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려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익집단입니다. 여러분, 양떼를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영양실조 걸리죠. 쉽게 병들죠. 이 사람은 손때가 묻어야합니다. 그냥 말로 약육이 되지 않습니다. 닦아주고, 어루만져주고, 돌보아 주고, 보고 있어야 사람은 자랍니다. 그것을 않돌보면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될까요 이 험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야 되니까 독해지죠. 자기혼자 존재해야 하니까 독해집니다. 흉악한 이리떼는 양떼를 돌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양떼를 맡았으면 양떼를 돌보십시오. 전화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그리고 같이 눈물을 흘려야합니다. 이것이 돌보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흉악한 이리떼는 사람을 자꾸 분열시키는 일을 하니다. 그 조직을 하나로 만들기 보다는 자꾸 이간질을 시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합니다. 여기 성경에 보니까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그 조직에서 이탈시키기 위하여 어그러진 말로, 공교한 말로, 아주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현혹을 시켜서 그 조직에서 이탈을 시켜서 자기를 좇아오게 한다. 이것이 흉악한 이리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누구하고 대화를 하고 이야기를 할 때에 그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 사람이 남을 욕하고 있으면 일단 다시 생각하세요. 비록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계속해서 그 사람을 욕을 하고 비판을 하고 그 사람을 아주 나쁘게 말하는 것,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워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비판기능이 꼭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비판기능은 잘못하면 여러분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은 파멸로, 성격 이상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흉악한 이리들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31절,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무엇을 기억하라 훈계를 기억하라. 내가 가르친 내용들을 기억하라. 몇 년동안 가르쳤습니까 3년, 무엇으로 가르쳤습니까 눈물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이 아닙니다. 삶으로, 눈물로 가르켰던, 내가 3년동안 눈물로 너희들에게 가르쳤던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기억하라. 또한 가지가 있습니다. 32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가르쳤던 교훈이요 또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게 위탁하는 그것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어렵고 사탄의 계괴와 유혹이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있다면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사람, 하나님이 그 인생의 주인이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두가지를 주십니다. 다시 32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능히 든든하게 세워주신다.” 여러분, 믿음은 든든해야 합니다. 왔다갔다하면 안됩니다. 나무는 꽉 심어야 합니다. 나무 심어놓고 뺏다 심었다, 뺏다 심었다 하고 있어요. 절대 그 나무 안자라 납니다. 믿음은 든든해야 합니다. 말씀에 기초해서 뿌리가 내리고 말씀에 뿌리가 내려서 든든히 설때에 어떤 환난도 어떤 비바람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든든한 나무가 뿌리를 잘 내렸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사람에게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 앞에 있으면 믿음이 든든히 서 진다는 것입니다.
시 18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여러분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신다” 이런 흔든리지 않는 믿음이 시18편 기자에게는 있었습니다. 이런 든든한 믿음이 있으면 흉악한 이리가 와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또한 가지있습니다. 32절 하반절에 보면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기업이 있게 하신다’ 기업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유업, 유산, 사업, 기업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나갈 때도 세상 기업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기업이 있습니다. 영적인 기업, 땅에 기업이 아니라 하늘에 기업. 베드로전서 1장에도 보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주시겠는데 이 기업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것이다. 여러분, 은혜의 말씀 앞에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원한 기업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것은 물질적 가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금이나 은이나 의복 같은 것이 아닙니다.
33절, 금이나 은이나 의복같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런 세속적인 대가나 성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돈을 벌었습니다. 헌금 받아 썼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자기와 자기 동료들에게 자기가 번 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34-35절,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참 감동받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분이 그렇게 사도로 전도하며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를 꼭 기억했느냐 하면,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힘없는 자들, 이분들을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도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가 참 힘듭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자기 주변의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한 말씀을 꼭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이 말씀을 가슴에 꼭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받는 사람보다는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유익을 끼치고 은혜를 베푸는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을 가리켜 뭐라고 합니까 거지라고 합니다. 먹을게 없는 것만이 거지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거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평생 부모한테 얻어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성인이 되어서 스스로 돈 벌수 있는 데도 부모 돈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 남의 돈 뜯어먹고 사는 사람. 다 거지죠. 여러분, 받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 보았어요. 얻어먹고 사는 사람은 항상 자기도와줄 사람만 찾아 다닙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받는 사람은 감사가 없어요. 주고 주고 또 주고. 사도 바울에게는 이런 인생의 태도가 있었습니다.“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이런 철학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그냥 놔둘까요 아니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철학들이다. 너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네가 있는 곳에서 사람보고 일하지 말고 하나님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왜 그사람을 안높여주겠어요. 모든 사람이 왜 그를 존경 안하겠어요. 그 사람 데려갈려고 노력을 할겁니다. 왜 남에게 자기를 줄려고 하니까. 이 말을 다 끝나고 나서 사도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36-37절,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이 말을 다 끝내고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울기를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울수가 없었습니다. 목놓고 울었습니다. 큰 소리로 울었다. 그리고 바울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엉엉 울었습니다. 감동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감동과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비판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아왔습니다. 한이 맺혀 있습니다. 한이 있는 동안에는 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한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바늘로 찔러도 피눈물 안난다고 하는 그런 말이 있어요. 그 말은 불행한 말입니다. 사람은 울 때 울어야 합니다. 울 수 있는 인간이어야 너무 주책없이 우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울면 눈물의 가치가 없지요. 그러나 성령님이 울게 하실 때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메마르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울어줄 눈물도 없고, 울어어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38절,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다시는 아시아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슬픈 것입니다. 그래서 울음이 더 나오는 거에요. 여러분 인생이란 이렇게 떠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시 만날 수 있는 헤어짐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영원한 이별인 헤어짐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떠나 보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에게는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에 떠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있다면 떠나고 만나고 하는 것이 그렇게 의미가 없습니다. 떠나면 떠나는 거고, 만나면 만나는 겁니다. 다시 천국에서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미련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계십니까
그렇다면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현실을 받아 들이십시오. 주님이 있다면 그렇게 고통스럽게 할 현실도 없습니다. 그렇게 아프게 할 현실도 없습니다. 주님이 있다면.
교회를 잘 설명해 주는 시편이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양떼들이 모인 공동체인 것입니다. 여러분, 양떼라고 하는 것은 목자가 없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양떼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양떼를 잘 돌보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제자들이나 장로님들이 바울이 떠난 후에 어떻게 양떼들을 섬길 것입니까 28절, 삼가라.
첫째는 자기성찰입니다. 지도자의 자기성찰. 여러분, 목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영적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양떼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너와 네 양떼들을 위해서 잘 절제하고 자신을 관리하고 자신을 훈련을 시키고 자신을 삼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교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나 목사들의 잘못이 굉장히 많습니다. 양떼를 잘 돌보는 첫 번째 비결이 무엇인가 목자들이 자기를 잘 절제하는 것입니다.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절대적으로 자기를 삼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어찌 남에게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체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에게 성령님의 능력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지도자의 자질, 영적인 위치,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2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목자 하나가 넘어지면 양떼들 다 넘어집니다. 구역장이 넘어지면 구역식구들이 다 흔들립니다. 구역장이 기도도 하지 않고 관리도 하지 않는다면 그 구역은 흔들립니다.
에베소서 4:27에 보면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마귀는 틈만 보이면 그 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영적 지도자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서 우리가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가지 28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감독자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양떼를 잘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감독자라는 질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도록 두신 것이 아니라 양떼가 따라갈 수 있는 교회의 영적 지도체계를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영적 지도체계를 따라가고 존경하고 권위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감독은 누가 세웠습니까 성령님이 세웠습니다. 사람이 투표하고 뽑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임명합니다. 구역장을 세우고 교사를 세우고 성가대장을 세우는 것도 사람이 임명한 것 같지만 사람이 임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임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임명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감독자로 세운 것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관리하기 위해서, 돌보기 위해서 세워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목자로 부르신 이유요, 감독자로 부르신 이유요 장로나 목사나 집사님이나 권사님으로 특별히 여러분을 세워주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8절에 보면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양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이 피를 흘리셨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피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곧 하나님이 흘린 피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피를 흘려주셔서 만들어진 바로 이 교회,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 교회가 바로 양떼들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그 성도들은 어떤 성도입니까 주님께서 피를 흘려서 값주고 사신 대가를 치루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이 교회를 네가 돌봐달라는 것입니다. 이제사도 바울은 구체적으로 앞으로 교회가 당면해야 될 일들을 이야기해 줍니다.
29-30, 사도 바울은 목회에 있어서 양육에 있어서, 양떼를 돌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흉악한 이리떼라는 것입니다. 이 흉악한 이리떼가 내가 떠나면 바로 찾아올 것이다. 바울이 양육하고 있는 동안에는 흉악한 이리떼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떠나면 이 이리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우는 사자처럼 노리고 있다가 들어오게 될 것이다. 베드로전서 5:8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말을 했습니다. 흉악한 이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양의 가죽을 썼다는 것입니다. 흉악한 이리는 절대로 자기의 본질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자기본질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비슷하게, 말씀을 가지고 능력을 가지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천사의 모습을 가장해서.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속는 것입니다. 이 흉악한 이리떼들이 들어오면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번 29절을 보십시오. 흉악한 일떼들이 들어와서 첫째 뭐하죠 양떼를 돌보지 않습니다. 양떼를 맡아놓고 양뗴를 안돌보는 것입니다. 차라리 안맡았으면 괜찮죠. 맡아놓고 굶기는 것입니다. 맡아놓고 목욕을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병들어도 치료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흉악한 이리떼요 삯꾼목자입니다. 이 양떼들이 들어오면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 양뗴들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의 하나님이 창조한 백성으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의 이익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물질로 취급합니다. 필요하면 사용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려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익집단입니다. 여러분, 양떼를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영양실조 걸리죠. 쉽게 병들죠. 이 사람은 손때가 묻어야합니다. 그냥 말로 약육이 되지 않습니다. 닦아주고, 어루만져주고, 돌보아 주고, 보고 있어야 사람은 자랍니다. 그것을 않돌보면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될까요 이 험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야 되니까 독해지죠. 자기혼자 존재해야 하니까 독해집니다. 흉악한 이리떼는 양떼를 돌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양떼를 맡았으면 양떼를 돌보십시오. 전화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그리고 같이 눈물을 흘려야합니다. 이것이 돌보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흉악한 이리떼는 사람을 자꾸 분열시키는 일을 하니다. 그 조직을 하나로 만들기 보다는 자꾸 이간질을 시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합니다. 여기 성경에 보니까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그 조직에서 이탈시키기 위하여 어그러진 말로, 공교한 말로, 아주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현혹을 시켜서 그 조직에서 이탈을 시켜서 자기를 좇아오게 한다. 이것이 흉악한 이리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누구하고 대화를 하고 이야기를 할 때에 그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 사람이 남을 욕하고 있으면 일단 다시 생각하세요. 비록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계속해서 그 사람을 욕을 하고 비판을 하고 그 사람을 아주 나쁘게 말하는 것,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워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비판기능이 꼭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비판기능은 잘못하면 여러분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은 파멸로, 성격 이상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흉악한 이리들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31절,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무엇을 기억하라 훈계를 기억하라. 내가 가르친 내용들을 기억하라. 몇 년동안 가르쳤습니까 3년, 무엇으로 가르쳤습니까 눈물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이 아닙니다. 삶으로, 눈물로 가르켰던, 내가 3년동안 눈물로 너희들에게 가르쳤던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기억하라. 또한 가지가 있습니다. 32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가르쳤던 교훈이요 또하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게 위탁하는 그것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어렵고 사탄의 계괴와 유혹이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있다면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사람, 하나님이 그 인생의 주인이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두가지를 주십니다. 다시 32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능히 든든하게 세워주신다.” 여러분, 믿음은 든든해야 합니다. 왔다갔다하면 안됩니다. 나무는 꽉 심어야 합니다. 나무 심어놓고 뺏다 심었다, 뺏다 심었다 하고 있어요. 절대 그 나무 안자라 납니다. 믿음은 든든해야 합니다. 말씀에 기초해서 뿌리가 내리고 말씀에 뿌리가 내려서 든든히 설때에 어떤 환난도 어떤 비바람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든든한 나무가 뿌리를 잘 내렸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사람에게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 앞에 있으면 믿음이 든든히 서 진다는 것입니다.
시 18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여러분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신다” 이런 흔든리지 않는 믿음이 시18편 기자에게는 있었습니다. 이런 든든한 믿음이 있으면 흉악한 이리가 와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또한 가지있습니다. 32절 하반절에 보면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기업이 있게 하신다’ 기업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유업, 유산, 사업, 기업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나갈 때도 세상 기업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기업이 있습니다. 영적인 기업, 땅에 기업이 아니라 하늘에 기업. 베드로전서 1장에도 보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주시겠는데 이 기업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것이다. 여러분, 은혜의 말씀 앞에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원한 기업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것은 물질적 가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금이나 은이나 의복 같은 것이 아닙니다.
33절, 금이나 은이나 의복같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런 세속적인 대가나 성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돈을 벌었습니다. 헌금 받아 썼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자기와 자기 동료들에게 자기가 번 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34-35절,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참 감동받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분이 그렇게 사도로 전도하며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를 꼭 기억했느냐 하면,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힘없는 자들, 이분들을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도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가 참 힘듭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자기 주변의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굉장히 중요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한 말씀을 꼭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이 말씀을 가슴에 꼭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받는 사람보다는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유익을 끼치고 은혜를 베푸는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을 가리켜 뭐라고 합니까 거지라고 합니다. 먹을게 없는 것만이 거지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거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평생 부모한테 얻어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성인이 되어서 스스로 돈 벌수 있는 데도 부모 돈을 의지해서 사는 사람. 남의 돈 뜯어먹고 사는 사람. 다 거지죠. 여러분, 받는 사람이 감사하는 것 보았어요. 얻어먹고 사는 사람은 항상 자기도와줄 사람만 찾아 다닙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받는 사람은 감사가 없어요. 주고 주고 또 주고. 사도 바울에게는 이런 인생의 태도가 있었습니다.“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이런 철학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그냥 놔둘까요 아니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철학들이다. 너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네가 있는 곳에서 사람보고 일하지 말고 하나님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왜 그사람을 안높여주겠어요. 모든 사람이 왜 그를 존경 안하겠어요. 그 사람 데려갈려고 노력을 할겁니다. 왜 남에게 자기를 줄려고 하니까. 이 말을 다 끝나고 나서 사도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36-37절,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이 말을 다 끝내고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울기를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울수가 없었습니다. 목놓고 울었습니다. 큰 소리로 울었다. 그리고 바울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엉엉 울었습니다. 감동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감동과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비판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아왔습니다. 한이 맺혀 있습니다. 한이 있는 동안에는 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한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바늘로 찔러도 피눈물 안난다고 하는 그런 말이 있어요. 그 말은 불행한 말입니다. 사람은 울 때 울어야 합니다. 울 수 있는 인간이어야 너무 주책없이 우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울면 눈물의 가치가 없지요. 그러나 성령님이 울게 하실 때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메마르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울어줄 눈물도 없고, 울어어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38절,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다시는 아시아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슬픈 것입니다. 그래서 울음이 더 나오는 거에요. 여러분 인생이란 이렇게 떠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시 만날 수 있는 헤어짐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영원한 이별인 헤어짐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떠나 보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에게는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에 떠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있다면 떠나고 만나고 하는 것이 그렇게 의미가 없습니다. 떠나면 떠나는 거고, 만나면 만나는 겁니다. 다시 천국에서 만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미련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계십니까
그렇다면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현실을 받아 들이십시오. 주님이 있다면 그렇게 고통스럽게 할 현실도 없습니다. 그렇게 아프게 할 현실도 없습니다. 주님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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