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는 과연 성도의 것인가 (고전3:21-23)
본문
본문의 말씀뿐이 아니고 3장 1절부터 계속해서 보면 이 말씀의 내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는 과연 성도들의 것인가 하는 내용인데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놀라운 약속이나 황홀한 말씀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도 바울 자신이, 아볼로 자신이, 게바 자신이 성도의 것이라 하는 것은 참 귀한 말씀입니다. 성경대로는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는 다 교회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해서 또 교회라 불리운다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것이라 (고린도전서 3:23) 하는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것이 된 교회들, 그리스도의 것이 된 신자들에 한한 말씀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가 다 너희 것이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 하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본문의 내용을 앞에서 말씀드린 ‘개체, 지체’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다 개체입니다. 개체 자신이 접붙임을 받은 후에는 개체라는 명칭을 떼어 버리고 지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됩니다. 고염나무로 있을 때에는 늙어도 고염나무요, 젊어도 고염나무요, 무엇을 어떻게 해도 고염나무를 면치 못합니다. 그러나 접붙인 후에는 다시는 고염나무라 이름하지 않고 감나무라 이름해 줍니다. 또 감나무의 실지가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개체가 지체되어 산다 해도 어디까지나 개체지, 지체는 아니라는 말씀도 했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아는 것, 이해하는 것, 또 자기의 신앙으로 삼는 것은 참 귀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서 너희들도 산 돌같이,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될찌니라 (베드로전서 2:5) 하는 말씀입니다. ‘나아오라’ 하는 말씀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단,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사람 또 흰 돌이신 주님에게 나아가는 사람에 한한 말씀입니다. ‘접붙임을 받은 나무’ 라는 말과 ‘주께 나아가는 사람’ 이라는 말이 동일합니다. 예수께 나아가기 전에는 각각 다릅니다. 바울은 바울대로 아볼로는 아볼로대로 게바는 게바대로 나는 나대로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 개체가 몸이신 주님에게 나아가면 산 돌같이 하나님의 신령한 집으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장으로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앞에서도 말씀했듯이 그 집의 재료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흙같은 사람, 돌같은 사람, 철같은 사람. 등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한 집으로 묶어지기 전에는 완성되기 전에는 각각 차이가 많습니다. 평하려고 하면 나무는 나무대로 철은 철대로 돌은 돌대로 가치를 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이 완성되어 그 집의 값이 일억이라고 하면 돌도 철도 나무도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다 일억에 해당합니다. 그 각각의 가치를 따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주 밖에 있을 때는 각각을 평할 수 있지만 주님께로 나아가면 동일한 신부요, 동일한 지체요, 동일한 제사장들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참 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린도전서 3:1) 주 안에서도 신령한 자가 있고 육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가 있고 장성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면 장성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개체가 몸에 대해서 지체로서 운명을 같이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신앙은 성숙하다고 봐야 됩니다. 그가 주님에게 나아와서 제사장과 하나님의 집이 되면 바울의 제사장이 따로 있고 아볼로의 제사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하면 그는 성숙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장성한 신앙입니다. 그 전에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책망을 받아야 됩니다. 어린아이라고 하는 칭호를 받아야 됩니다. 바울 자신도 신앙의 성숙한 사람들이나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이 충만한 사람들이나 오순절 후의 사람들을 보고서 어린아이라, 육에 속한 사람이라 그렇게 호칭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늘 말씀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는 연조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신앙으로 어린아이입니다. 교회에 나온 지가 오래 되었고 교회의 모든 제도에 익숙하고 모든 일을 넉넉히 감당하는 그런 교인을 묵은 교인이라고 합니다. 묵은 교인이라도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조로 어린아이가 아니고 신앙으로 어린아이입니다. 남이 나를 평하지 않을지라도 내 생각이나 신앙이나 생활이나 의지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숙한 사람인가 아니면 여전히 어린아이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만일 내가 아직도 지체와 개체를 확실히 분간하지 못하고 지체와 개체 사이에 분쟁이 있거나 시비가 있다고 하면 나 자신이 장성한 사람이라, 신령한 사람이라고 하지 못합니다. 바울도 게바도 어떤 누구도 주께로 나가면 곧 동일한 제사장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똑같은 제사장의 자격을 내 자신이 가지게 되는데 이것을 모른 채 다른 문제로 왈가왈부하고 시비하는 것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 나는 게바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전서 3:4-4)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그런 자리에서 떠났다고 하면 본문의 말씀이 권면이나 책망의 말씀이 아닙니다.
또 그 사람들에게 권면하거나 책망할 리가 없습니다.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하면서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파 아닌 교파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얼 전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전해 주는 사람은 그렇게 귀중하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중매자가 신랑을 소개할 때에 신랑이 누구냐, 어떤 사람이냐, 어떤 성질이냐, 어떤 인격이냐 하는 것이 문제지 중매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도 중매하는 사람이요, 아볼로도 중매하는 사람이요, 게바도 중매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1:2) 이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아직까지 중매하는 사람을 더 귀히 여기고 자기들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신랑되신 주님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어리석은 사람, 어리석은 신부, 어린아이 같은 신부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되. (고린도전서 3:6)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는데 바울이 무엇을 심었는가, 아볼로가 주는 물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바울은 죽어서 그의 육체는 끝났지만 바울의 신앙과 외침은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바울로 인해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 심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심은 것은 교파나 교리나 제도가 아닙니다. 율법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고 그를 믿음으로써 영화롭게 되는 이 사실을,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의 심령 속에 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바울이 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은 바울의 신앙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아볼로나 게바가 주는 물이 내 신앙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엇으로 내 생활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되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 (고린도전서 3:6) 이 말씀은 대담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바가 자라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만일 바울의 심은 것이 내 심령 속에 심어졌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 심어진 것을 반드시 자라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모습, 내용을 여러분 스스로 어느 정도 알 것입니다. 내가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의 상황과 오늘 나의 심령의 상황이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은 무엇이며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 안에서 자라나게 하고 있는가, 결실하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물 주는 자와 심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 (고린도전서 3:7) 참 귀한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의 말입니다. ‘심는 자도, 물을 주는 자도 아무 것도 아니라.’ 다시 말하면 너희 마음 속에 심겨진 사실이 자라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가치를 논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언제까지 땅 위에서 교회를 섬기면서 살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실을 알고 여러분의 심령과 생활에 옮겨야 됩니다.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린도전서 3:8) 심는 사람은 심는 대로 물 주는 사람은 물을 주는 대로 상을 받습니다. 남이 한 일로 여러분이 상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남이 한 일로 여러분이 벌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내 마음 안에서 문제가 안 떠납니까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상 그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는 자나 물 주는 자가 다 일반입니다. 내가 심지 않으면 내가 물 주지 않으면 않으면 어떻게 자라날까 하고 고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일반이요, 똑같다는 것입니다. 또 각각 자기의 한 일에 대해서 주시는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혼자 살면 상관 없지만 연합해서 사는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참 귀합니다. 개체와 지체입니다. 또 지체라 해도 그것이 곧 주님이 아니라는 점, 각각 다르다고 하는 점, 우리 생활 가운데 물 먹듯이 풍족해야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주께로 나아가면 주께 속했으면 주와 같은 제사장입니다. 바울의 직무가 따로 있고 내 직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연합 생활에 참 귀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10-11) 두 터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또 그 터 위에 건축하는 사람도 조심성 있게 건축해야 됩니다.
마태복음에는 터가 건물을 보존하고 고린도전서 3장에는 건물이 건물을 보존하는 것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터입니다. 조심있게 건축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목회자도 그렇고 신자도 그렇습니다. 세상 집은 목수가 지어 줍니다. 돈만 내면 지어 줍니다. 그러나 신령한 집은 남의 손을 빌어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기도와 예배와 자기의 봉사와 자기의 신앙이 자기 집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돈만 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지을 때 금은 보석으로 짓거나, 아주 값지고 귀한 것으로 짓거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거나 간에 짓는 동안에는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자기가 지은 집이 남아 있으면 칭찬을 받을 것이지만 불타면.! 이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알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 (고린도전서 3:9) 나와 여러분들은 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밭입니다. 주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것이라 하는 주님의 소유된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 집이 내 집이 되었든지 하나님의 집이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것을 집으로 삼아서 일하십니다. 우리 신앙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밭입니다. 저 밭은, 저 집은 항의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정의가 없습니다. 이 밭은 이 집은 지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집은 주인의 마음대로 지어야 됩니다. 집의 마음대로 집이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집이나 나쁜 집이나 그 집에 살 주인의 뜻대로 계획대로 지어야 됩니다. 집의 계획대로나 집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밭도 밭의 뜻이나 계획대로 농작물을 심고 가꾸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뜻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농부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고 하면 이러니 저러니 하는 성경 말씀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이런 일이 없다고 하면 성경 말씀이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밭이 주인을 향해서 ‘주인이여, 올해는 이 밭에다가 수박을 심지 마십시오, 절대 안됩니다. 외를 심으십시오.’ 라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이 항의하는 심령이 없어야 주가 그 마음 속에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걸 막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대로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이걸 고집하고 있습니다. 안된다고 항의하고 고집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 용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안된다고 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밭에 아름다운 소산이 떨어져서 열매 맺는 것을 못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이러한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내 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주님은 이 사실을 몇번이나 시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완강히 거절하기 때문에 고집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심을 때에 그대로 순종하고 받아 들였다면 그 씨가 죽은 씨가 아닌 이상 반드시 대지를 뚫고 새 순이 나옵니다. 바울이 뿌린 씨는 죽은 씨가 아닙니다. 못된 씨가 아닙니다. 아볼로가 주는 물은 작물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써 이 밭에 대해서 일꾼으로 일합니다. 만일 바울의 말씀을 바로 들었다고 하면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런 현상은 아닐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의 설교가 수없는 곳에서 수없는 시간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밭이 없습니다. 내가 바울을 앙망하면 바울이 가진 신앙을 앙망해야 됩니다. 바울이 어떻게 사는가 그 삶을 내게로 옮기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도 아니고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말씀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내 신앙이 자라나거나 성숙하는 것을 모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다 너희 것이라. (고린도전서 3:21-22) 이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밭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성령님이 하는 일이 하나의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예레미야 10:2)
오늘 우리가 바울의 말씀이나 바울의 생각이나 바울의 신앙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열방의 길을 배우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열방의 길은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어떤 교회나 어떤 강단이나 어떤 사람에게 진실한 참으로 신자들이 흠모할 만한 싹이 나고 결실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바울의 소산이거나 성경이 그 근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지체와 개체를 여러분들이 확실히 아시고 여러분들의 생활로 옮기십시오. 그래야 분쟁과 시비가 끝납니다. 남이 내 일을 해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남에게 수고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산 돌이신 주님께로 나가면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십니다. 산 돌에게 나아간 사람들은 개체가 아니고 지체입니다. 바울이 따로 있고 게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와 여러분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제사장입니다. 동일한 집입니다. 이제 여기 고린도 교회같이 주 안에서 어린 사람의 일을 벗어 버리고 육의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나는 바울이 좋다, 나는 게바가 좋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라는 말은 어서어서 끝나고 너희는 주의 것이라, 주의 소유라 하는 이 사실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개체가 지체되어 산다 해도 어디까지나 개체지, 지체는 아니라는 말씀도 했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아는 것, 이해하는 것, 또 자기의 신앙으로 삼는 것은 참 귀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은,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서 너희들도 산 돌같이,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될찌니라 (베드로전서 2:5) 하는 말씀입니다. ‘나아오라’ 하는 말씀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단,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사람 또 흰 돌이신 주님에게 나아가는 사람에 한한 말씀입니다. ‘접붙임을 받은 나무’ 라는 말과 ‘주께 나아가는 사람’ 이라는 말이 동일합니다. 예수께 나아가기 전에는 각각 다릅니다. 바울은 바울대로 아볼로는 아볼로대로 게바는 게바대로 나는 나대로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 개체가 몸이신 주님에게 나아가면 산 돌같이 하나님의 신령한 집으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장으로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앞에서도 말씀했듯이 그 집의 재료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흙같은 사람, 돌같은 사람, 철같은 사람. 등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한 집으로 묶어지기 전에는 완성되기 전에는 각각 차이가 많습니다. 평하려고 하면 나무는 나무대로 철은 철대로 돌은 돌대로 가치를 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이 완성되어 그 집의 값이 일억이라고 하면 돌도 철도 나무도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다 일억에 해당합니다. 그 각각의 가치를 따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서가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주 밖에 있을 때는 각각을 평할 수 있지만 주님께로 나아가면 동일한 신부요, 동일한 지체요, 동일한 제사장들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참 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린도전서 3:1) 주 안에서도 신령한 자가 있고 육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가 있고 장성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면 장성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개체가 몸에 대해서 지체로서 운명을 같이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신앙은 성숙하다고 봐야 됩니다. 그가 주님에게 나아와서 제사장과 하나님의 집이 되면 바울의 제사장이 따로 있고 아볼로의 제사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하면 그는 성숙된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장성한 신앙입니다. 그 전에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책망을 받아야 됩니다. 어린아이라고 하는 칭호를 받아야 됩니다. 바울 자신도 신앙의 성숙한 사람들이나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이 충만한 사람들이나 오순절 후의 사람들을 보고서 어린아이라, 육에 속한 사람이라 그렇게 호칭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늘 말씀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는 연조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신앙으로 어린아이입니다. 교회에 나온 지가 오래 되었고 교회의 모든 제도에 익숙하고 모든 일을 넉넉히 감당하는 그런 교인을 묵은 교인이라고 합니다. 묵은 교인이라도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조로 어린아이가 아니고 신앙으로 어린아이입니다. 남이 나를 평하지 않을지라도 내 생각이나 신앙이나 생활이나 의지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숙한 사람인가 아니면 여전히 어린아이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만일 내가 아직도 지체와 개체를 확실히 분간하지 못하고 지체와 개체 사이에 분쟁이 있거나 시비가 있다고 하면 나 자신이 장성한 사람이라, 신령한 사람이라고 하지 못합니다. 바울도 게바도 어떤 누구도 주께로 나가면 곧 동일한 제사장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똑같은 제사장의 자격을 내 자신이 가지게 되는데 이것을 모른 채 다른 문제로 왈가왈부하고 시비하는 것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 나는 게바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전서 3:4-4)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그런 자리에서 떠났다고 하면 본문의 말씀이 권면이나 책망의 말씀이 아닙니다.
또 그 사람들에게 권면하거나 책망할 리가 없습니다.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하면서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파 아닌 교파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얼 전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전해 주는 사람은 그렇게 귀중하지 않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중매자가 신랑을 소개할 때에 신랑이 누구냐, 어떤 사람이냐, 어떤 성질이냐, 어떤 인격이냐 하는 것이 문제지 중매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도 중매하는 사람이요, 아볼로도 중매하는 사람이요, 게바도 중매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1:2) 이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아직까지 중매하는 사람을 더 귀히 여기고 자기들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신랑되신 주님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어리석은 사람, 어리석은 신부, 어린아이 같은 신부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되. (고린도전서 3:6)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는데 바울이 무엇을 심었는가, 아볼로가 주는 물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바울은 죽어서 그의 육체는 끝났지만 바울의 신앙과 외침은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바울로 인해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 심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심은 것은 교파나 교리나 제도가 아닙니다. 율법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고 그를 믿음으로써 영화롭게 되는 이 사실을,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의 심령 속에 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바울이 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은 바울의 신앙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아볼로나 게바가 주는 물이 내 신앙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엇으로 내 생활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되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 (고린도전서 3:6) 이 말씀은 대담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바가 자라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만일 바울의 심은 것이 내 심령 속에 심어졌다고 하면 하나님은 그 심어진 것을 반드시 자라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모습, 내용을 여러분 스스로 어느 정도 알 것입니다. 내가 처음 교회에 나왔을 때의 상황과 오늘 나의 심령의 상황이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은 무엇이며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 안에서 자라나게 하고 있는가, 결실하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물 주는 자와 심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 (고린도전서 3:7) 참 귀한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의 말입니다. ‘심는 자도, 물을 주는 자도 아무 것도 아니라.’ 다시 말하면 너희 마음 속에 심겨진 사실이 자라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가치를 논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언제까지 땅 위에서 교회를 섬기면서 살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실을 알고 여러분의 심령과 생활에 옮겨야 됩니다.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린도전서 3:8) 심는 사람은 심는 대로 물 주는 사람은 물을 주는 대로 상을 받습니다. 남이 한 일로 여러분이 상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남이 한 일로 여러분이 벌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내 마음 안에서 문제가 안 떠납니까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상 그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는 자나 물 주는 자가 다 일반입니다. 내가 심지 않으면 내가 물 주지 않으면 않으면 어떻게 자라날까 하고 고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심는 자와 물 주는 자가 일반이요, 똑같다는 것입니다. 또 각각 자기의 한 일에 대해서 주시는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혼자 살면 상관 없지만 연합해서 사는 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참 귀합니다. 개체와 지체입니다. 또 지체라 해도 그것이 곧 주님이 아니라는 점, 각각 다르다고 하는 점, 우리 생활 가운데 물 먹듯이 풍족해야 될 것입니다. 내 자신이 주께로 나아가면 주께 속했으면 주와 같은 제사장입니다. 바울의 직무가 따로 있고 내 직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연합 생활에 참 귀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10-11) 두 터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또 그 터 위에 건축하는 사람도 조심성 있게 건축해야 됩니다.
마태복음에는 터가 건물을 보존하고 고린도전서 3장에는 건물이 건물을 보존하는 것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터입니다. 조심있게 건축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목회자도 그렇고 신자도 그렇습니다. 세상 집은 목수가 지어 줍니다. 돈만 내면 지어 줍니다. 그러나 신령한 집은 남의 손을 빌어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기도와 예배와 자기의 봉사와 자기의 신앙이 자기 집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돈만 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지을 때 금은 보석으로 짓거나, 아주 값지고 귀한 것으로 짓거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거나 간에 짓는 동안에는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자기가 지은 집이 남아 있으면 칭찬을 받을 것이지만 불타면.! 이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알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 (고린도전서 3:9) 나와 여러분들은 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밭입니다. 주 밖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것이라 하는 주님의 소유된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 집이 내 집이 되었든지 하나님의 집이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것을 집으로 삼아서 일하십니다. 우리 신앙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밭입니다. 저 밭은, 저 집은 항의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정의가 없습니다. 이 밭은 이 집은 지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집은 주인의 마음대로 지어야 됩니다. 집의 마음대로 집이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집이나 나쁜 집이나 그 집에 살 주인의 뜻대로 계획대로 지어야 됩니다. 집의 계획대로나 집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밭도 밭의 뜻이나 계획대로 농작물을 심고 가꾸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뜻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농부처럼 내 안에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만일 이것이 없다고 하면 이러니 저러니 하는 성경 말씀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이런 일이 없다고 하면 성경 말씀이 여러분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밭이 주인을 향해서 ‘주인이여, 올해는 이 밭에다가 수박을 심지 마십시오, 절대 안됩니다. 외를 심으십시오.’ 라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이 항의하는 심령이 없어야 주가 그 마음 속에 아름다운 열매로 결실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걸 막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대로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이걸 고집하고 있습니다. 안된다고 항의하고 고집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 용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안된다고 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밭에 아름다운 소산이 떨어져서 열매 맺는 것을 못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이러한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내 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주님은 이 사실을 몇번이나 시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완강히 거절하기 때문에 고집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심을 때에 그대로 순종하고 받아 들였다면 그 씨가 죽은 씨가 아닌 이상 반드시 대지를 뚫고 새 순이 나옵니다. 바울이 뿌린 씨는 죽은 씨가 아닙니다. 못된 씨가 아닙니다. 아볼로가 주는 물은 작물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써 이 밭에 대해서 일꾼으로 일합니다. 만일 바울의 말씀을 바로 들었다고 하면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런 현상은 아닐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의 설교가 수없는 곳에서 수없는 시간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밭이 없습니다. 내가 바울을 앙망하면 바울이 가진 신앙을 앙망해야 됩니다. 바울이 어떻게 사는가 그 삶을 내게로 옮기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도 아니고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말씀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내 신앙이 자라나거나 성숙하는 것을 모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다 너희 것이라. (고린도전서 3:21-22) 이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밭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성령님이 하는 일이 하나의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예레미야 10:2)
오늘 우리가 바울의 말씀이나 바울의 생각이나 바울의 신앙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열방의 길을 배우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열방의 길은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어떤 교회나 어떤 강단이나 어떤 사람에게 진실한 참으로 신자들이 흠모할 만한 싹이 나고 결실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바울의 소산이거나 성경이 그 근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지체와 개체를 여러분들이 확실히 아시고 여러분들의 생활로 옮기십시오. 그래야 분쟁과 시비가 끝납니다. 남이 내 일을 해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남에게 수고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산 돌이신 주님께로 나가면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십니다. 산 돌에게 나아간 사람들은 개체가 아니고 지체입니다. 바울이 따로 있고 게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와 여러분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제사장입니다. 동일한 집입니다. 이제 여기 고린도 교회같이 주 안에서 어린 사람의 일을 벗어 버리고 육의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나는 바울이 좋다, 나는 게바가 좋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라는 말은 어서어서 끝나고 너희는 주의 것이라, 주의 소유라 하는 이 사실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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