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에 내린 심판 (창11:1-9)
본문
얼마 전에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고, 그리고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한 영화가 있습니다. 이 한편의 영화는 하도 유명해서 아마 이 가운데 계신 여러분들도 대부분이 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제목은 '타이타닉'입니다. 이 '타이타닉'이라는 그 영어의 뜻도 强力無雙, '가장 강하다'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요, 역사적 사실을 극화한 것이올시다. 여러분, 생각을 좀 돌려서 1912년으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 일겁니다. 1912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때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British' 그들이 해양제국의 명예를 걸고 영국의 영광을 만방에 자랑하기 위해서 만든 배입니다. 그들의 능력, 그들의 지혜, 그들의 왕권을 다 동원해서 최고로, 최고를 자랑하는 그러한 배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호화스러운 배, 가장 큰배, 가장 튼튼한 배, 그런 배를 만들었습니다. 좌우간 그 옛날인데도요, 지금도 이건 큰 겁니다. 46,328톤 되는 배요, 길이가 259미터, 깊이가 20미터, 폭이 28미터. 굉장한 배입니다. 이런 새로운 배를 만들어 놓고 자랑했습니다. 이제자랑하는 말을 들어보십시다. '절대로 침몰할 수 없는 배, 입바른 사람은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 이렇게 자랑을 해요. 처음 출항할 때에 온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그리고 이 배가 출항하면서 또 하나 기록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속도입니다.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빨리 가서 이 큰배가 크고 강할 뿐만 아니라 화려할 뿐만 아니라 속도에서도 최고다 이거예요. 이 배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에 '이 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다.' 이렇게 신문에 나기를 바랬던 겁니다. 그래서 빨리 가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선주는 그 선장을 다그쳤습니다. 그냥 빨리 가라고 최고 속도로 가라고… 마침내 이 배는 파선이 됩니다. 산산조각이 납니다. 2208명 중에 1513명이 이 배와 함께 수장되었습니다. 해양 사고 중에 최고의 큰 사고였습니다.
자, 이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배가 왜 침몰된 것 같습니까 여기에 메시지가 있는 겁니다. 특별히 현대인을 향한 과학을 숭상하는 현대인, 자기 머리를 자랑하는 교만한 현대인을 향하여 메시지가 전해지기에 이 영화는 유명해진 것이올시다. 인간의 교만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와 메시지가 거기에 있습니다. 본문은 노아 홍수의 이야기입니다. 노아 홍수의 큰 심판을 기억하고 있는 홍수 이후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직접 홍수를 본 사람은 없지만은 홍수에 대한 이야기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의 악몽처럼 시달리고 있었던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방으로 동방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평지를 만났을 때 이만하면 우리 거처가 되겠다고 해서 거기에다가 거주지를 삼고 이제 성을 쌓게 됩니다. 성을 쌓게 될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잠재의식이 작용을 합니다. '다시 홍수가 나면 어떡할까' 이제 생각했습니다. '홍수가 나더라도 끄떡없는 그러한 성을 쌓자.' 여기에 탑이라고 되어있지만은 고고학자들의 발굴한 바를 보아도 그건 탑은 아닙니다. 탑보다는 오히려 성입니다.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성입니다. 그대로 둥글게, 둥글게 쌓아서 계속 올라가는 겁니다. 이래서 본문에 보는 대로 하늘 끝까지. 오늘의 상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구름 위의 까지, 비는 구름에서부터 오니까. 구름 위의 까지, 하늘 끝까지 쌓아서 설사 다시 홍수가 나더라도 끄떡없이 안정을 유지하며 평안하게 살아가자 이런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홍수 자체는 참으로 비참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고고학자들의 연구하는 대로도 그렇고 많은 학자들이 이 홍수라고 하는 것은 이 지구 역사에 가장 큰 과학적 사건으로 그렇게들 말하고 있습니다. 천지가 개벽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같은 홍수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저들이 이해했느냐는 것이지요. 홍수라고 하는 재난, 이것만 생각하고 그 원인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이 문제입니다. 홍수로 진멸하시는 하나님이라면 홍수가 아니면 불로라도 진멸하지, 원인이 문제지요. 죄 때문에 홍수가 있었다면 죄만 없으면 되는 게 아닙니까! 죄에서 떠나는 것이 재난을 면하는 길이지 이제 탑을 쌓는다고 되는 겁니까, 산을 만든다고 되는 겁니까, 배를 만든다고 되는 겁니까 노아 홍수의 원인, 도대체 그 원인으로 돌아가서 해결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재난만 면해 보려고 하는 이 얄팍한 생각이 이 같은 큰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되었고요. 또 하나는 이 일을 주장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길이지, 이제 저들이 탑을 쌓고 그 위에 올라가 앉았다고 해결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문제지요. 하나님과의 저들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거기에 관점을 두었어야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없는 불 신앙적인 안정을 꾀하려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노아 홍수가 끝날 때에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주면서 이것을 표적으로 해서 다시는 이 땅에 물로 심판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비가 올 때마다 그들도 무지개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려야지 이제 탑을 쌓고 올라가겠다는 이 미련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그 축복을 그들이 받아들이고 믿고 생각했더라면 이런 부질없는 일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걸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도 우리 인간에게 바벨탑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 세대에 바로 이 문제를 그 역사적인 그 옛날에 있었던 바벨탑에서 다시 한번 조명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바벨탑의 의미가 뭐냐, 먼저는 이렇습니다. 공업화와 산업화 안에 있는 인간의 교만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저들은 탑을 쌓았습니다. 이 쌓는다는 것이 즉, 산을 만든다는 것이고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이 보통 기술이 아닙니다. 저는 생각에 돌이 건축 자재 중에 제일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돌집 하면은 '아, 좋은 집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이것은 만리장성을 몇 번 가서 거기에 배운 겁니다. 만리장성을 보니까 옆에 쌓아 놓은 것은 돌이고요, 그 위에 풍화를 제일 많이 맞는, 위에 깔아 놓은 것은 벽돌입니다. 흙을 빚어서 구워 만든 겁니다. 이 돌은 좋아 보이지만 풍화작용에 약합니다. 그 결이 있기 때문에 물을 빨아들이면서 이게 부서집니다. 그러나 벽돌은 이렇게 구워 만든 이 벽돌은 영구한 겁니다. 정말로 오래가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평지에서 흙을 빚어서 구워서 벽돌을 만들고 보니깐 기가 막힌 거예요. 이것이 최고의 건축 자재요. 이걸 가지고 저들이 이렇게 바벨탑을 쌓게 됐다. 공업화의 대표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쌓아 올라가는데 인간의 기술, 능력, 협동, 그리고 그 모든 능력을 다 해 가지고 쌓아서 본문에 보는 대로 하늘에 닿도록,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지요. 아 그 집 좀 지었다고 어떻겠습니까! 탑을 쌓았다고 문제 될 것이 없는데 하늘에 닿도록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장차 홍수가 오더라도 문제없이 거기서 살자 뭐 그런 것 같아요. 이것은 한계를 초월하는 얘깁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본이나, 능력이나, 지식이나, 지혜나 뭐 시간, 건강할 것 없이 그 무엇도 우리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훌륭한 학자, 하도 천재라고 하는 학자가 치매에 걸려 가지고 멍청해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고장이 났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바보가 될 수가 없어요. 하루아침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 과학적 지식의 한계, 기술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한계를 모르고 날뛰다가 지금 지구는 만신창이 났습니다. 이 지구는 이대로 이젠 더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쑤셔 놔서요 다 못 쓰게 됐어요. 우리는 그럭저럭 살다 가겠습니다만은 다음 세대 사람들 한심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려는지… 인간의 교만이 인간의 산업적 교만, 기술적 교만이 우리 우주의 또한 이 지구의 운명을 재촉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 또 하나 봅시다. 가끔 보니깐 신문에 나는데 사람들이 등산하고 등산가들이 높이 올라갑니다. 탐험가들이 올라가서 에베레스트 산 같은 산에 올라가서 잠깐 깃발 하나 꽂고 좀 내려다보고선 내려오면서 하는 얘기가 "산을 정복했다." 산이 비웃을 겁니다. 잠깐 왔다 내려가면서 뭘 정복은 쓸데없는 소리. 인간이 하는 일이 다 이런 겁니다. 또 달나라에 잠깐 발 붙였다 돌아오고서는 "달을 정복했다." 말조심하세요. 이거 다 하나님 앞에 불경한 얘깁니다. 어디다 대고 정복이라는 말을 합니까! 예 뭘 어쩌자는 얘기에요. 이게 다 교만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교만에 대한 심판, 그게 바벨탑의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이름을 내자 그랬어요. 사람들 자기 이름 내기를 좋아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더 그런 것 같아요. 이 산업의 경우에도요 가만히 보니깐 뻔히 다 망한 사업인데 진작 정리했으면 좋을 걸. '내가 누군데 망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잖아.' 그리고 버티다가 더 망한 답니다. 벌써 망한 지가 언젠데, 정리해고 할 것도 없어요. 정리된 지가 오래 돼서요. 그거 벌써 남의 것이요, 자기 것이 아니에요. 이걸 인정하지 않고 거드름만 피우고 명예만 가지고 무슨 재벌이니 가문이니 명예니, 이게 망조라고요. 한국의 기업은 봉건주의적 기업입니다. 자본주의적 기업이 아닙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 교만, 이거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이름을 내자는 것.
또 미안합니다만 우리가 어느 세계의 도시를 가던지 교회가 있는 곳마다 두 교회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가 제일교회, 두 번째가 중앙교회, Central church 이건 꼭 있습니다. 없는 데가 없어요. 몇 백년 후에 교회를 지으면서도 제일교회라고, 우리가 제일이다 이거예요. 왜 중앙이다, 이게 다 교만입니다. 그거 다 옳은 얘기가 아닙니다. 명예를 좋아하는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얘깁니다. 북한에 내왕하면서 그들과 얘기해 보니깐 참으로 이 어려운 것을 돕는 것은 기독교, 교회계통 아니고는 식량이고, 의약품이고 뭐 돕는 일이 없다고 해요. 그래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합디다. 그러나 한가지 얘기하는 게 있어요. "왜 그렇게 기독교인들이 명예를 좋아합니까"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요 쌀을 얼마를 가지고 가서 그 국경지역 도시인 단동에다 갔다 놓고 이걸 쌀을 포대에다가 조그만 종이 포대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다가 일일이 넣는데 거기에다가 아무교회, 아무개, 이름까지 써서 여기다가 담아 와서 이 봉투에다가 담는데 사흘 걸렸대요. 이걸 압록강을 건너가지고 신의주에 갖다 놓고 또 다 뜯어버리는 게 사흘 걸렸대요. "왜들 이럽니까" 그러더라고. 이게 기독교인들이요, 심지어는 성경을 외워요. 오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이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모른다고 그래요. 여러분, 꼭 그래야만 되겠습니까 가끔 우리가 이렇게 북한의 어려움을 도웁시다 그래 보면은 정면으로 제게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아주 투명성 있게 내가 가서 그 어려운 사람들을 어루만지면서 악수하면서 내가 쌀 봉투를 주여야 그래야 주지 누가 먹는지도 모르는 거 안 준다는 거예요. 참 야박하더만요. 무슨 대단한 이름이라고 꼭 이래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명예욕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입니다. 동물적 욕구를 넘어서는 것이 인간의 명예욕입니다. 자 이것을 극복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참으로 문제가 됩니다. 이름, 다 물 갔어요.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겸손하게 살아가십시다. 이 사람들 보니까 스스로 자기를 높이면서 '온 천하에 이름을 내자' 위대해 지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치 않았습니다.
또한가지는 '흩어짐을 면하자'그랬습니다. 이것은 집단화요 Urbanization을 말하고요 또 하나는요 대도시화를 말합니다. 공업화, 기계화를 말하는 것이올시다. 이래서 집단 이기주의요.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절대로 흩어지지 말자, 그래서 강해지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해지자고 강해집니까 하나 되자고 해서 하나가 되는 겁니까! 그 유명한 영화 '대부'라는 영화가 있지요. 이것은 마피아 족들의 그 생태를 주제로 한 것입니다. 거기 보면 마피아 족들이 늘 싸우거든요, 싸울 때마다 그만 양쪽이 다 피해를 입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이래선 안되겠다 우리 싸우지 말자. 이거 마피아 족들끼리 싸워서 되겠냐!' 그래서 일곱 단체 대표가 모여서 이제 연합운동을 합니다. '우리는 절대 싸우지 말자. 형제 관계로 지내자.' 그리고 연합하는 의식을 취하는데 대단합니다. 그것은 역사상 그런 것은 다시없을 겁니다. 대표자들이 쭉 많은 사람들 보는 자리에서 손가락을 입으로 깨물어서 피를 내 가지고 컵에다가 피를 쭉 따라요. 일급 사람이 이렇게 하니까 이 컵이 다 찼어요 피로. 이걸 손가락으로 저어 가지고 돌아가면서 마십니다. '우리는 혈맹이다. 피를 마셨다. 한 형제다. 절대 싸우지 말자.' 맹세했어요. 그 다음에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충돌되기 시작해서 서로 싸우고 다 죽고 두 사람 남아요. 뭘 말하는 겁니까 '불의한 일에는 하나됨이 없다.' 죄를 짓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되지 못하고 불의한 사람의 세계는 하나됨이 없다는 거, 그걸 말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도 보면 대동단결, 뭐 하나되어야 산다, 뭉쳐야 산다. 그거 전부 독재자들이 하는 소리요. 하나되자고 해서 하나 됩니까! 죄가 있고, 불의가 있고, 부정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가 되냐고요. 하나님이 심판 아니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그런 말을 했지요. 'Win-Lose'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다.' 요새 와서는 'Win-Win'이라고 합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이 지구촌은 아주 하나가 돼 버렸어요. 과거처럼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고, 사는 자가 있고 죽는 자가 있고,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Win-Win'이요. 다같이 살고 다같이 죽는 겁니다. 특별히 기술세대에서는 'Win-Lose'이렇게 했지만은 이제 창의력의 시대에는 오로지 'Win-Win' 다같이 이기는 그것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누가 더 살고 못 살고 그런 얘기는 없습니다. 누가 살고 누가 죽고, 누가 웃고 누가 뺏기고 그런 세대가 아닙니다. 21세기는 다같이 살던지 다같이 죽던지. 여러분 이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만 흩어짐을 면하자. 이런 이야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교만한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심판의 방법이 아주 고차적입니다. 보통으로는 성경에 보면 유황불로 멸하시든지 지진으로 내리시든지 재난을 내리던지 전쟁, 혹은 기근, 혹은 질병, 이렇게 심판을 내립니다만은 오늘 본문에는 문화적 심판입니다. 언어를 혼잡게 했습니다. 혼미하게 했어요. 생각을 혼미하게 해서 스스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언어의 혼잡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멀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은 무슨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가슴으로 하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 아무 말도 없이도 말이 됩니다. 서로 교만하고 자기 생각에 집착하면은 아무리 좋은 지식을 가지고도 대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부부 싸움할 때 보니까 다 목소리가 크대요. 그리고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아요. 내 말만 하지. 조금 말하면 '가만히 있으라고 나좀 하자구.' 자꾸 말하는 사람뿐이지 듣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것이 대화가 끊어진 거예요. 가슴이 막혔는데 그 까짓 말해서 뭐 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참 놀라운 일이에요. 저는 외국사람하고 사는 한국여자를 만나 보았어요. 그 사람은 고등학교밖에 못 나왔어요. 미국사람 아주 지식이 많은 사람하고 살아요. 그 어떻게 살까 본인한테 물어 봤어요. "너 영어 잘 못하지헬로우, 오-케이 밖에 못해요.그럼 어떻게 무슨 재미로 사냐목사님, 사랑을 말로 하는 겁니까!" 내가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뭐 눈높이, 뭐 학력 높이 웃기는 말하지 마세요. 눈 높이 맞췄다가 끝나고 말아요. 소용 없어요. 마음이요, 마음.
그런데 하나님께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니까 그만 끝나고 말아 버려요.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황새하고 여우가 어느 때 좋은 사이로 지내면서 자기 집에 초대했다면서 여우가 접시에다가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먹으라고 내 놓으니까 황새가 어떻게 먹겠어요. 그냥 그대로 돌아갔고요, 황새가 대신 또 여우를 초대했는데 거기서는 아예 호리병에다가 음식을 갖다 놓았대요. 자기는 주둥이가 기니까 그걸 먹지만 여우가 어떻게 먹겠어요. 각각 자기 입장을 고집하면 아무 것도 안돼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얘기가 또 있습니다. 악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 거냐. 여러분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간단하지요. 물 속에서 싸우면 악어가 이기고 육지에서 싸우면 사자가 이기고. 뭘 복잡하게 생각해요. 이와 같이 우리가 사람들이 조금만 입장을 바꾸면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 끝내 다투고 물어 찢는 거지요. 기독교 역사에 보면은 교회분열의 가장 큰 시초적인 분열이 로마교회의 분열입니다. 그것은 하나는 헬라 문화요, 하나는 라틴문화입니다. 자기 문화에 집착하고 상대방을 자기 문화로 밀고 나갔습니다. 이 문화적 차이, 즉 다시 말하면 언어적 차이가 교회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분열은 심판입니다. 이기주의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기 모멸감에 대한 심판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과 겸손을 요구합니다. 오로지 십자가 안에 하나가 있습니다. 교만하고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욕망과 불 신앙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보세요. 열 다섯 나라에서 온, 각 나라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으나 성령님이 임할 때에 언어가 하나로 통일됐습니다. 이게 방언이라는 거요. 성령님이 감동할 때에 가슴이 뜨거워질 때에 저들의 언어는 그대로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됨은 목적이 아닙니다. 이건 결과입니다. 겸손과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하나됨이올시다. 여러분 이 세대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겸손을 배워야겠습니다. 마음을 열어야겠습니다. 이제 누구도 정죄하지 맙시다. 누가 죽고 누가 산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우린 다 한 배에 탔습니다. 배는 지금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 것도 꾸짖지 말고 서로 얼싸 안아야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수용하고 서로 용서하고 그리하여 마음이 하나가 되고 겸손해질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귀한 축복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자, 이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배가 왜 침몰된 것 같습니까 여기에 메시지가 있는 겁니다. 특별히 현대인을 향한 과학을 숭상하는 현대인, 자기 머리를 자랑하는 교만한 현대인을 향하여 메시지가 전해지기에 이 영화는 유명해진 것이올시다. 인간의 교만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와 메시지가 거기에 있습니다. 본문은 노아 홍수의 이야기입니다. 노아 홍수의 큰 심판을 기억하고 있는 홍수 이후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직접 홍수를 본 사람은 없지만은 홍수에 대한 이야기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의 악몽처럼 시달리고 있었던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방으로 동방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평지를 만났을 때 이만하면 우리 거처가 되겠다고 해서 거기에다가 거주지를 삼고 이제 성을 쌓게 됩니다. 성을 쌓게 될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잠재의식이 작용을 합니다. '다시 홍수가 나면 어떡할까' 이제 생각했습니다. '홍수가 나더라도 끄떡없는 그러한 성을 쌓자.' 여기에 탑이라고 되어있지만은 고고학자들의 발굴한 바를 보아도 그건 탑은 아닙니다. 탑보다는 오히려 성입니다.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성입니다. 그대로 둥글게, 둥글게 쌓아서 계속 올라가는 겁니다. 이래서 본문에 보는 대로 하늘 끝까지. 오늘의 상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구름 위의 까지, 비는 구름에서부터 오니까. 구름 위의 까지, 하늘 끝까지 쌓아서 설사 다시 홍수가 나더라도 끄떡없이 안정을 유지하며 평안하게 살아가자 이런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홍수 자체는 참으로 비참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고고학자들의 연구하는 대로도 그렇고 많은 학자들이 이 홍수라고 하는 것은 이 지구 역사에 가장 큰 과학적 사건으로 그렇게들 말하고 있습니다. 천지가 개벽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같은 홍수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저들이 이해했느냐는 것이지요. 홍수라고 하는 재난, 이것만 생각하고 그 원인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이 문제입니다. 홍수로 진멸하시는 하나님이라면 홍수가 아니면 불로라도 진멸하지, 원인이 문제지요. 죄 때문에 홍수가 있었다면 죄만 없으면 되는 게 아닙니까! 죄에서 떠나는 것이 재난을 면하는 길이지 이제 탑을 쌓는다고 되는 겁니까, 산을 만든다고 되는 겁니까, 배를 만든다고 되는 겁니까 노아 홍수의 원인, 도대체 그 원인으로 돌아가서 해결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재난만 면해 보려고 하는 이 얄팍한 생각이 이 같은 큰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되었고요. 또 하나는 이 일을 주장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길이지, 이제 저들이 탑을 쌓고 그 위에 올라가 앉았다고 해결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문제지요. 하나님과의 저들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거기에 관점을 두었어야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없는 불 신앙적인 안정을 꾀하려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노아 홍수가 끝날 때에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주면서 이것을 표적으로 해서 다시는 이 땅에 물로 심판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비가 올 때마다 그들도 무지개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려야지 이제 탑을 쌓고 올라가겠다는 이 미련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그 축복을 그들이 받아들이고 믿고 생각했더라면 이런 부질없는 일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걸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도 우리 인간에게 바벨탑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 세대에 바로 이 문제를 그 역사적인 그 옛날에 있었던 바벨탑에서 다시 한번 조명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바벨탑의 의미가 뭐냐, 먼저는 이렇습니다. 공업화와 산업화 안에 있는 인간의 교만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저들은 탑을 쌓았습니다. 이 쌓는다는 것이 즉, 산을 만든다는 것이고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이 보통 기술이 아닙니다. 저는 생각에 돌이 건축 자재 중에 제일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돌집 하면은 '아, 좋은 집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이것은 만리장성을 몇 번 가서 거기에 배운 겁니다. 만리장성을 보니까 옆에 쌓아 놓은 것은 돌이고요, 그 위에 풍화를 제일 많이 맞는, 위에 깔아 놓은 것은 벽돌입니다. 흙을 빚어서 구워 만든 겁니다. 이 돌은 좋아 보이지만 풍화작용에 약합니다. 그 결이 있기 때문에 물을 빨아들이면서 이게 부서집니다. 그러나 벽돌은 이렇게 구워 만든 이 벽돌은 영구한 겁니다. 정말로 오래가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평지에서 흙을 빚어서 구워서 벽돌을 만들고 보니깐 기가 막힌 거예요. 이것이 최고의 건축 자재요. 이걸 가지고 저들이 이렇게 바벨탑을 쌓게 됐다. 공업화의 대표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쌓아 올라가는데 인간의 기술, 능력, 협동, 그리고 그 모든 능력을 다 해 가지고 쌓아서 본문에 보는 대로 하늘에 닿도록,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지요. 아 그 집 좀 지었다고 어떻겠습니까! 탑을 쌓았다고 문제 될 것이 없는데 하늘에 닿도록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장차 홍수가 오더라도 문제없이 거기서 살자 뭐 그런 것 같아요. 이것은 한계를 초월하는 얘깁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본이나, 능력이나, 지식이나, 지혜나 뭐 시간, 건강할 것 없이 그 무엇도 우리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훌륭한 학자, 하도 천재라고 하는 학자가 치매에 걸려 가지고 멍청해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고장이 났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바보가 될 수가 없어요. 하루아침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 과학적 지식의 한계, 기술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한계를 모르고 날뛰다가 지금 지구는 만신창이 났습니다. 이 지구는 이대로 이젠 더 존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쑤셔 놔서요 다 못 쓰게 됐어요. 우리는 그럭저럭 살다 가겠습니다만은 다음 세대 사람들 한심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려는지… 인간의 교만이 인간의 산업적 교만, 기술적 교만이 우리 우주의 또한 이 지구의 운명을 재촉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 또 하나 봅시다. 가끔 보니깐 신문에 나는데 사람들이 등산하고 등산가들이 높이 올라갑니다. 탐험가들이 올라가서 에베레스트 산 같은 산에 올라가서 잠깐 깃발 하나 꽂고 좀 내려다보고선 내려오면서 하는 얘기가 "산을 정복했다." 산이 비웃을 겁니다. 잠깐 왔다 내려가면서 뭘 정복은 쓸데없는 소리. 인간이 하는 일이 다 이런 겁니다. 또 달나라에 잠깐 발 붙였다 돌아오고서는 "달을 정복했다." 말조심하세요. 이거 다 하나님 앞에 불경한 얘깁니다. 어디다 대고 정복이라는 말을 합니까! 예 뭘 어쩌자는 얘기에요. 이게 다 교만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교만에 대한 심판, 그게 바벨탑의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이름을 내자 그랬어요. 사람들 자기 이름 내기를 좋아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더 그런 것 같아요. 이 산업의 경우에도요 가만히 보니깐 뻔히 다 망한 사업인데 진작 정리했으면 좋을 걸. '내가 누군데 망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잖아.' 그리고 버티다가 더 망한 답니다. 벌써 망한 지가 언젠데, 정리해고 할 것도 없어요. 정리된 지가 오래 돼서요. 그거 벌써 남의 것이요, 자기 것이 아니에요. 이걸 인정하지 않고 거드름만 피우고 명예만 가지고 무슨 재벌이니 가문이니 명예니, 이게 망조라고요. 한국의 기업은 봉건주의적 기업입니다. 자본주의적 기업이 아닙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 교만, 이거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이름을 내자는 것.
또 미안합니다만 우리가 어느 세계의 도시를 가던지 교회가 있는 곳마다 두 교회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가 제일교회, 두 번째가 중앙교회, Central church 이건 꼭 있습니다. 없는 데가 없어요. 몇 백년 후에 교회를 지으면서도 제일교회라고, 우리가 제일이다 이거예요. 왜 중앙이다, 이게 다 교만입니다. 그거 다 옳은 얘기가 아닙니다. 명예를 좋아하는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얘깁니다. 북한에 내왕하면서 그들과 얘기해 보니깐 참으로 이 어려운 것을 돕는 것은 기독교, 교회계통 아니고는 식량이고, 의약품이고 뭐 돕는 일이 없다고 해요. 그래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합디다. 그러나 한가지 얘기하는 게 있어요. "왜 그렇게 기독교인들이 명예를 좋아합니까"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요 쌀을 얼마를 가지고 가서 그 국경지역 도시인 단동에다 갔다 놓고 이걸 쌀을 포대에다가 조그만 종이 포대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에다가 일일이 넣는데 거기에다가 아무교회, 아무개, 이름까지 써서 여기다가 담아 와서 이 봉투에다가 담는데 사흘 걸렸대요. 이걸 압록강을 건너가지고 신의주에 갖다 놓고 또 다 뜯어버리는 게 사흘 걸렸대요. "왜들 이럽니까" 그러더라고. 이게 기독교인들이요, 심지어는 성경을 외워요. 오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이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모른다고 그래요. 여러분, 꼭 그래야만 되겠습니까 가끔 우리가 이렇게 북한의 어려움을 도웁시다 그래 보면은 정면으로 제게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아주 투명성 있게 내가 가서 그 어려운 사람들을 어루만지면서 악수하면서 내가 쌀 봉투를 주여야 그래야 주지 누가 먹는지도 모르는 거 안 준다는 거예요. 참 야박하더만요. 무슨 대단한 이름이라고 꼭 이래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명예욕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입니다. 동물적 욕구를 넘어서는 것이 인간의 명예욕입니다. 자 이것을 극복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참으로 문제가 됩니다. 이름, 다 물 갔어요.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겸손하게 살아가십시다. 이 사람들 보니까 스스로 자기를 높이면서 '온 천하에 이름을 내자' 위대해 지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치 않았습니다.
또한가지는 '흩어짐을 면하자'그랬습니다. 이것은 집단화요 Urbanization을 말하고요 또 하나는요 대도시화를 말합니다. 공업화, 기계화를 말하는 것이올시다. 이래서 집단 이기주의요.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절대로 흩어지지 말자, 그래서 강해지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해지자고 강해집니까 하나 되자고 해서 하나가 되는 겁니까! 그 유명한 영화 '대부'라는 영화가 있지요. 이것은 마피아 족들의 그 생태를 주제로 한 것입니다. 거기 보면 마피아 족들이 늘 싸우거든요, 싸울 때마다 그만 양쪽이 다 피해를 입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이래선 안되겠다 우리 싸우지 말자. 이거 마피아 족들끼리 싸워서 되겠냐!' 그래서 일곱 단체 대표가 모여서 이제 연합운동을 합니다. '우리는 절대 싸우지 말자. 형제 관계로 지내자.' 그리고 연합하는 의식을 취하는데 대단합니다. 그것은 역사상 그런 것은 다시없을 겁니다. 대표자들이 쭉 많은 사람들 보는 자리에서 손가락을 입으로 깨물어서 피를 내 가지고 컵에다가 피를 쭉 따라요. 일급 사람이 이렇게 하니까 이 컵이 다 찼어요 피로. 이걸 손가락으로 저어 가지고 돌아가면서 마십니다. '우리는 혈맹이다. 피를 마셨다. 한 형제다. 절대 싸우지 말자.' 맹세했어요. 그 다음에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충돌되기 시작해서 서로 싸우고 다 죽고 두 사람 남아요. 뭘 말하는 겁니까 '불의한 일에는 하나됨이 없다.' 죄를 짓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되지 못하고 불의한 사람의 세계는 하나됨이 없다는 거, 그걸 말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도 보면 대동단결, 뭐 하나되어야 산다, 뭉쳐야 산다. 그거 전부 독재자들이 하는 소리요. 하나되자고 해서 하나 됩니까! 죄가 있고, 불의가 있고, 부정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가 되냐고요. 하나님이 심판 아니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그런 말을 했지요. 'Win-Lose'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다.' 요새 와서는 'Win-Win'이라고 합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이 지구촌은 아주 하나가 돼 버렸어요. 과거처럼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고, 사는 자가 있고 죽는 자가 있고,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Win-Win'이요. 다같이 살고 다같이 죽는 겁니다. 특별히 기술세대에서는 'Win-Lose'이렇게 했지만은 이제 창의력의 시대에는 오로지 'Win-Win' 다같이 이기는 그것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누가 더 살고 못 살고 그런 얘기는 없습니다. 누가 살고 누가 죽고, 누가 웃고 누가 뺏기고 그런 세대가 아닙니다. 21세기는 다같이 살던지 다같이 죽던지. 여러분 이건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만 흩어짐을 면하자. 이런 이야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 교만한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심판의 방법이 아주 고차적입니다. 보통으로는 성경에 보면 유황불로 멸하시든지 지진으로 내리시든지 재난을 내리던지 전쟁, 혹은 기근, 혹은 질병, 이렇게 심판을 내립니다만은 오늘 본문에는 문화적 심판입니다. 언어를 혼잡게 했습니다. 혼미하게 했어요. 생각을 혼미하게 해서 스스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언어의 혼잡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멀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은 무슨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가슴으로 하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 아무 말도 없이도 말이 됩니다. 서로 교만하고 자기 생각에 집착하면은 아무리 좋은 지식을 가지고도 대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부부 싸움할 때 보니까 다 목소리가 크대요. 그리고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아요. 내 말만 하지. 조금 말하면 '가만히 있으라고 나좀 하자구.' 자꾸 말하는 사람뿐이지 듣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것이 대화가 끊어진 거예요. 가슴이 막혔는데 그 까짓 말해서 뭐 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참 놀라운 일이에요. 저는 외국사람하고 사는 한국여자를 만나 보았어요. 그 사람은 고등학교밖에 못 나왔어요. 미국사람 아주 지식이 많은 사람하고 살아요. 그 어떻게 살까 본인한테 물어 봤어요. "너 영어 잘 못하지헬로우, 오-케이 밖에 못해요.그럼 어떻게 무슨 재미로 사냐목사님, 사랑을 말로 하는 겁니까!" 내가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뭐 눈높이, 뭐 학력 높이 웃기는 말하지 마세요. 눈 높이 맞췄다가 끝나고 말아요. 소용 없어요. 마음이요, 마음.
그런데 하나님께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니까 그만 끝나고 말아 버려요.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황새하고 여우가 어느 때 좋은 사이로 지내면서 자기 집에 초대했다면서 여우가 접시에다가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먹으라고 내 놓으니까 황새가 어떻게 먹겠어요. 그냥 그대로 돌아갔고요, 황새가 대신 또 여우를 초대했는데 거기서는 아예 호리병에다가 음식을 갖다 놓았대요. 자기는 주둥이가 기니까 그걸 먹지만 여우가 어떻게 먹겠어요. 각각 자기 입장을 고집하면 아무 것도 안돼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얘기가 또 있습니다. 악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 거냐. 여러분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간단하지요. 물 속에서 싸우면 악어가 이기고 육지에서 싸우면 사자가 이기고. 뭘 복잡하게 생각해요. 이와 같이 우리가 사람들이 조금만 입장을 바꾸면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 끝내 다투고 물어 찢는 거지요. 기독교 역사에 보면은 교회분열의 가장 큰 시초적인 분열이 로마교회의 분열입니다. 그것은 하나는 헬라 문화요, 하나는 라틴문화입니다. 자기 문화에 집착하고 상대방을 자기 문화로 밀고 나갔습니다. 이 문화적 차이, 즉 다시 말하면 언어적 차이가 교회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분열은 심판입니다. 이기주의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기 모멸감에 대한 심판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과 겸손을 요구합니다. 오로지 십자가 안에 하나가 있습니다. 교만하고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욕망과 불 신앙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보세요. 열 다섯 나라에서 온, 각 나라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으나 성령님이 임할 때에 언어가 하나로 통일됐습니다. 이게 방언이라는 거요. 성령님이 감동할 때에 가슴이 뜨거워질 때에 저들의 언어는 그대로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됨은 목적이 아닙니다. 이건 결과입니다. 겸손과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하나됨이올시다. 여러분 이 세대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겸손을 배워야겠습니다. 마음을 열어야겠습니다. 이제 누구도 정죄하지 맙시다. 누가 죽고 누가 산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우린 다 한 배에 탔습니다. 배는 지금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 것도 꾸짖지 말고 서로 얼싸 안아야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수용하고 서로 용서하고 그리하여 마음이 하나가 되고 겸손해질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귀한 축복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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