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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으로 (단1:1)

본문

다니엘서의 첫 장은 마지막 장처럼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본장은 처음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한 가지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단순하고 직설적인 이야기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1장은 다음 네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예루살렘 침공 첫 두 절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사건에 관하 기사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언급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우화가 아닌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의 왕인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그는 같은 해 초기에 왕위에 오른 자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의 수비벽을 붕괴시키고 쳐들어가서 가지고 싶은 물건과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다 왕 여호야김을 잡아가지 않고 8년가 그의 꼭두각시로 남겨두었습니다. 여호야김은 나중에 바벨론 통치로부터 벗어나려고 꾀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한편 느부갓네살 왕은 상당히 많은 포로들과 성전 보물들을 바벨론으로 옮겨갔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은 파괴하지 않았지만 성전은 약탈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이 섬긴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이 아닌, 성전 건물 그 자체를 신뢰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은 이 점을 누차 경고하였지만, 그들은 성전 건물이 존속되는 한 어떠한 외세의 침략도 견딜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성전이 있는 동안은 절대로 안전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성전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성전이 만약 위협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우리를 구해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우상 숭배, 부도덕, 불의 등이 나라를 좀먹고 있는데도 별다른 손을 쓰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서로 속이고 도둑질을 하였지만 구태여 누가 나서서 막거나, 국가가 앞장서 사회를 정화하는 대책을 세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살든지 성전만 있으면 언제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은 이방 나라의 왕이 예루살렘을 약탈하여 이교의 신전에 채우고 성전을 비워버림으로써 허물어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묵과하시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내셨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마음을 여호아께로 돌렸더라면 주님의 진노는 거두어졌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믿는 것으로 회개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성전 건물이 있든지 말든지 언제나 주권자로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은 지상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의 신분으로 계속 머물러 계십니다. 진실로 지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인 신이시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聖殿)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2절). 하나님은 역사를 장중에 쥐고 마음대로 움직이십니다. 정복당한 도성, 약탈된 성전, 전리품으로 이송된 보물, 흐느기는 포로들,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며 그분의 목적들을 이루는 수단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패배와 파멸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대도 그들의 하나님은 패배되지 않은 하나님으로서 그 모든 사건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위와 같은 배경을 안고 본서의 중심 인물들이 3절에서 7절까지 소개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노련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히브리 백성들을 억압했던 바로의 실책을 되풀이하기에는 너무도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고 온갖 학대를 일삼았습니다. 속박의 굴레를 쓰고 천시를 당하는 백성들은 반란의 기회를 찾기 마련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피정복민들이 억압을 당하다 봉기를 꾀하지 않도록 일종의 융화 정책을 썼습니다. 당시의 바벨론은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피정복민의 수효가 정복민의 수효를 크게 능가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바벨론이 군사적으로 전세계에 대해 억압 정책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곳곳에서 터질 수 있는 폭동이나 반란을 진압할 군사들을 넉넉히 동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정복민이 바벨론 제국에 충성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방안이 나와야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정책은 정복한 나라들이 인재들을 데려다가 바벨론의 행정부에 등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선발된 포로민들로 하여금 원래 자기들의 나라인 피정복지를 통치하도록 함으로써 반란의 가능성을 크게 베제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의 3절에서 지적되었듯이 느부갓네살 왕은 유대인들에게 피정복민 등용 정책을 적용하였습니다. 그는 환관장(혹은 내시) 아스부나스를 시켜 유다의 우수한 청소년들을 선발하여 왕궁 교육을 받게한 후 정책을 맡기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자연히 아스부나스는 유다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의 가문에서 후보자들을 물색해야 했습니다. 4절을 보면 정선된 자들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외모도 좋아야 했고 모든 학문에 능통하여 왕의 측근으로서 섬길 수 있는 자질이 구비된 자들이어야 햤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오직 최선의 것만 원하는 왕이었습니다. 일단 발탁이 된 젊은이들은 바벨론의 언어와 문학에 강조점을 둔 철저하면서도 전반적인 재교육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교육을 방해하거나 저해하는 요소들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언어와 문학 과정 이외에도 3년 간 수학, 과학, 항해, 정치, 역사 및 지리를 익혀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론 학문의 전 분야가 정선된 젊은이들의 머리 속으로 철저하게 주입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먹는 음식과 음료수는 왕족의 식단에 준하였습니다(5절). 아마 성경을 읽거나 공부할 때에 여러번 책을 덮고 일어섰거나, 전화를 받거나, 갑자기 누구를 만나야 할 일이 생겼거나, 혹은 시장을 보아야 하거나, 아니면 집안일, 또는 일터에 나가야 할 일이 허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앨 아사랴는 그런 일이 전혀 없이 오직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것까지 잊고 바벨론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도 잊고 지상의 왕만을 섬겨야 했습니다.
7절이 이 점을 설명해 줍니다. 재교육과 특수 훈련을 받기 위해 선별된 자들은 이름을 바꾸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니엘(‘하나님이 심판하셨다’는 뜻)은 벨드사살(‘벨이 감춰 둔 보물을 지키는 자’)로 개명되었고, 하나냐(‘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사드락으로 고쳐졌습니다. 사드락의 의미는 분명치 않으나 이교의 신인 마르둑(Marduk)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사엘(‘하나님같은 이가 누구인가’)은 메삭으로 개명되었는데 이 세 이름에는 비너스 여신의 고어체로 된 명칭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사랴(‘여호와께서 도우셨다’)는 아벳느고(‘느고의 종’)로 개명되었습니다. 이 네 명의 원명들을 보면 두 명의 이름은 ‘엘’로 끝나고, 다른 둘은 ‘냐’또는 ‘랴’로 끝납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존함 가운데 하나이고 후자는 ‘여호와’의 약칭입니다. 이 명칭들은 이교의 신들인 벨, 마르둑, 비너스, 느고를 가리키는 이름들로 바뀌었습니다. 이 네 명의 청소년들은 개명 당시에 14세 정도 였습니다. 이들은 3년 동안 소정의 과정을 철두철미하게 다 배워야 했습니다. 네 명의 유다 소년들은 가족의 품을 떠나 그들의 하나님을 잊어야 했고 이교의 문화 속에서 철저한 교육을 강요받아야 했습니다. 이 청소년들이 과연 어떻게 처신해 나갔을까요 그들이 옳다고 믿는 바에 따라 신실하게 하나님께 계속 충성하였을까요 아니면 이방 제국의 세뇌 교육에 항복해 버렸을까요 이들은 다른 측면에서 압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잡혀갈 때에 동족 유대인들이 빈정거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저 놈들에게는 포로 생활이 지낼 만하겠군, 그래, 바벨론 왕이 저들을 잘 봐 줄테니까, 저 놈들은 출세 길에 오른 것임에 틀림없어!” 물론 그 소년들은 중요한 자리에 앉게 될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신분을 잃는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 압력을 이들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형태의 사회적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한 세속적 사상과 유혹들이 날마다 성도들의 마음을 흔들어댑니다. 현대 사회에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과연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불굴의 자태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은 8절에서 16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이해하려면 애초에 유대인들이 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는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 나라는 영적으로 매우 하락된 상태였고 따라서 도덕적으로도 형편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두드러진 죄는 우상숭배였습니다. 바벨론 포로는 바로 이 전국적인 우상숭배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어린아이들마져 포로로 잡혀가게 했습니다.유다 백성들은 이 못된 죄악이 근절될 따까지 바벨론에서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로기 이후에도 여러 가지 죄를 지었지만 적어도 우상숭배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포로 생활이 그 치유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포로 당시에는 우상숭배가 전국민의 뚜렸한 하나의 생활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남은자들은 우상숭배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것은 일체 배격하였습니다. 그럼 이제 재교육을 받게 된 4명의 청소년들이 어떠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상상해 보십시다. 그들은 자기 음식을 스스로 준비하지 않고 왕궁의 주방에서 마련한 식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왕궁 음식을 사양한 까닭은 유대인의 음식 규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식사 규정은 포도주를 금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음식은 몰라도 포도주만은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까지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즉, 바벨론의 왕궁 음식은 언제나 이교의 의식으로 장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의식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식기도를 올리는 일보다 휠씬 더 성실하게 집행되었습니다. 바벨론의 궁중에서는 이교의 신들에게 먼저 헌상되지 않은 음식을 먹거나 마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음식을 먹는 자들은 이교의 의식에 참여한 자들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4명의 청소년이 궁중 음식을 거절한 까닭은 바로 이러한 우상숭배의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본문의 내용을 접하면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극단주의자들이라고 밀어붙일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다니엘 당신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이 뭐 그리 심각하다고 말썽을 일으키는 겁니까 왕이 특별히 마련해 준 음식인데 감히 저절했다가 목이라도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너무 까다롭게 따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잠자코 넘어가면 바벨론의 공직에 앉게 되고 나중에 총리가 될는지 또 누가 알겠소 우리 유대인이 그런 직위를 누릴 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까짓 음식 문제로 그 귀한 특권을 내던지고 더구나 왕명을 어겨 감옥까지 간다면 그 얼마나 무익한 일이겠습니까 당신이 왕의 지시를 어기고서야 어찌 출세를 한단 말이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대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나는 먹지 않겠습니다. 나는 모든 악의 모습에서 떠나야 합니다. 내가 비록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히고 내 목이 떨어지더라도 나는 우상숭배와 조금도 상관치 않으렵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죄를 짓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이것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가졌던 청직(淸直)한 정신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은 다니엘이 왕궁 음식을 무례하게 거절했다는 인상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8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수석 환관에게 가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궁중 요리를 먹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예의 바르게 요청하였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품격은 벌써 환관장의 호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9절). 그러나 환관장은 자신의 신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동무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로 보시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까닭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되리라”(10절). 다니엘은 환관장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11-14절의 말씀읆 보면 다니엘은 차석 환관에게 가서 궁중 요리 대신에 채식을 다랄고 부탁하였습니다. “우리를 10일 동안 시험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채소와 물만 주십시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비록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우상숭배와 관련된 음식은 사절하였습니다. “우리를 10일 동안 시험해 주십시오. 포도주 대신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다니엘은 우리들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는 지혜롭고 민완(민첩하고 수완)하며 예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원칙을 고수하였습니다. 15,16절은 채식의 식단이 가져온 효과를 지적해 줍니다. 시험대에 올랐던 소년들은 기름진 궁중 요리를 먹지 않았어도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혈색이 좋고 왕의 지정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건강하였습니다. 이 사건의 교훈은 타협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패하거나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관들의 염려는 완전히 사라지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계속 그들이 선택한 채식을 먹을 수 있도록 허럭받았습니다. 아무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작은 일에 신실하였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큰 일에 대해서도 신실하게 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만일 다니엘이 처음에 꿋꿋이 서 있지 못했더라면 나중에 사자굴의 위협을 받았을 때는 어떻게 설 수 있었을까요 만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처음에 타협했더라면 나중에 용광로 속으로 던져질 때는 어떻게 처신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작은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기 때문에 큰 일이 생겼을 때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작은 일을 그냥 지나쳐버리기 때문에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결과 17-21절에는 네 소년들의 담대한 영적 결단과 실천의 결과가 적혀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높여주시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은사들을 계발시켜 주셨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자주 일어납니다. “어떤 권사님은 글을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고난후 나도 남들처럼 전도도 하려면 성경을 읽어야 할텐데 읽지 못하니 어떻게 전도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다른 글은 모릅니다. 성경만 보면 또박또박 읽게 되었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발견하지 못한 달란트가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 안에서 발견하고 성신의 능력을 힘입어 계발한다면 그에게 아무도 기대도 걸지 않더라도 그가 하나님 우선주의를 택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작정했을 때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첫째로 삼고 학업에 전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에 총명으로 갚아주셨습니다. 다니엘에게는 다른 은사도 있었습니다. 본문의 17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드디어 3년 간의 수련 기간이 끝나고 마지막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수련생들은 왕 앞에서 구두 시험을 보아야 했습니다. 왕은 직접 각 수험생들을 테스트하였는데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에 대한 평가가 19,20절에 실려 있습니다.
이 네 명의 수련생들은 다른 모든 수련생들보다 월등하였고 이미 졸업을 하여 바벨론 제국의 요직에 앉아 있는 다른 선배들까지 앞질렀습니다. 그들보다 10배나 더 우수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을 위해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높은 직위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무릅쓰고 작은 일에서부터 주께 신실하였기 때문에 큰 일을 맡기셨습니다. 다니엘은 70년 동안 고관대작의 지위를 누렸습니다(21절)! 많은 성도들이 영적인 영향력을 좀더 행사할 수 있는 보다 높은 직책을 원합니다. 평직원는 과장을 꿈꾸고 과장은 부장을 원하고 부장은 또 사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들은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앉는다면 주님을 위해 큰 영향력을 줄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또 100만원을 가진자는 1000만원을 가졌으면 또 1000만원을 가진자는 1억을 가졌으면 합니다. ‘내게 10억만 있으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 1만원 있을 때 주을 위해 일하지 못하면 10억을 가져도 주님을 위해 일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처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지 않으면 더 나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작은 일들에서 하나님을 앞세우지 않는데 어찌 큰 일에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것부터 신실치 못한데 어떻게 큰 일에서 신실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비교적 작은 유혹들에 저항할 수 없다면 더 큰 유혹들이 올 때에는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다니엘서 1장의 중심 교훈은 다음 한 구절의 성경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삼상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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