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풍 선생과 바담풍 제자 (고전4:6-13)
본문
‘모범이 되는 것은 가르치는 아주 좋은 한 가지 방법이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훈장이 바담풍 하면 학동들도 바담풍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이 바담풍 해도 학생들이 알아서 바람풍 해야 된다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런데 선생이 아무리 바람풍이라고 해도 학생들이 바담풍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르치거나 지도하는 사람이 자주 하는 실수나 빠지기 쉬운 유혹 가운데 하나는 솔선수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쉽고 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해라. 서로를 존중하고 섬겨라. 이렇게 얼마든지 말로 가르치고 지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번은 탱크부대와 함께 훈련을 했습니다. 저는 하사였는데, 고참이 되면 소대장하고 많이 싸워요.
그런데 우리 옆 소대장이 자기 소대원들에게 탱크 밑으로 포복해서 기어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분대장인 하사가 못하겠다고 버텼습니다. 둘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소위가 시키는데 하사가 못하겠다고 하니까 이거 군대의 명령체계가 뭐가 됩니까? 둘이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데, 소위는 왜 못하겠다는 거냐? 하사는 왜 그런 걸 우리한테 시키는 거냐? 소대장은 시키면 해야지 말이 많아. 그러니까 분대장이 하는 말, 소대장이 먼저 해라. 그러면 우리도 따라서 하겠다. 그러니까 소대장이 철모를 벗어서 땅에 홱 내동댕이치면서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소대장 체면에 부하들 앞에서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 군대는 명령에 의해 유지되는 체제이기 때문에 굳이 모범을 보일 필요가 별로 없어요. 그냥 지시하면 돼요. 그러나 규율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소대장처럼 망신만 당하기가 딱 알맞아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모범이 된다는 것은 희생과 포기를 의미합니다. 자기 손발로 힘들게 움직여야 하고, 권위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사람을 가르칠 수 있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만약 소대장이 솔선수범해서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갔는데 병사들이 못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이 일에 본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 일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말한 것이지요. 바울은 심는 사람이었고 아볼로는 물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킨 주인공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중요하지 심고 물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거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또 바울과 아볼로는 서로 경쟁하고 다투지 않았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면서 각자의 재능과 역할에 따라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처럼,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말로만 떠들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으로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침을 받은 고린도교회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훌륭한 스승 아래서 훌륭한 제자가 나고 유능한 지휘관의 군대가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법칙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러는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겸손했던 스승 아래서 교만에 극치를 달리는 교인들이 나왔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스승들을 보면서 제자들은 서로 나뉘어 싸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바울의 진단에 의하면 고린도교회가 서로 나뉘어 싸우게 된 것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하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고린도교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늘 던져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누가 너를 특별한 사람으로 또는 남보다 더 똑똑하고 잘난 사람으로 구별해 주었느냐는 말입니다. 지금도 어떤 나라에는 계급제도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의 기반이 되고 있는 월드와이드웹(www)의 개발자 팀 버너스리가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작위를 받은 사람들이 꽤 되지요?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숀 코네리와 로저 무어도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도 기사 작위를 받았지요.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만인평등사상이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작위를 받았다는 것이 사뭇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만, 과거의 계급사회에서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신분이 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평민들보다 우월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누가 너희를 그렇게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라도 받았느냐는 식으로 묻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길 권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바울이 누가 너희를 구별하였느냐고 할 때, 이 누구는 하나님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교회에서 누군가를 특별하게 높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를 존경해야 합니까?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된 후의 삶의 방식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는 세상의 가치관과 법칙에 따라 삽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치와 방법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미묘한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 외딴섬이나 산속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교회라는 두 사회에서 동시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 법칙 사이에서 묘기를 부리듯 삽니다. 일요일에는 충실하게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철저하게 세상의 법칙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거 썩 좋은 방법이 아니지요? 어떤 사람들은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나님의 가치를 따라 살려고 애씁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가치와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들이 바로 진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류가 더 있겠지요? 바로 세상의 법칙과 기준을 교회 안으로까지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바로 고린도교인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바울이 바람풍이라고 외쳐도 여전히 바담풍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에요? 세상의 법칙이 약한 자를 밟고 출세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법칙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 법칙이었습니다. 설령 세상에서는 교만하고 서로 싸우더라도 교회에서는 겸손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교만해버렸습니다. 교회 안에서 당을 짓고 싸워버렸어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법칙과 세상의 법칙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습니까? 사실 공존이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치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는 서로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 속에서 세상의 법칙이 하나님의 법칙에 정복되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에도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법칙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의 법칙이 설 자리가 없습니까?
물론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살거나 또는 완전히 세상의 법칙대로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일반은총에 의해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살거든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하나님의 법칙대로만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좌표와 방향성은 설정될 수 있겠지요. 얼마만큼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려고 하는지, 또 어느 쪽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얘기할 수는 있을 것 아닙니까?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세상에서 똑똑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많은 노예들을 부리는 부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분이 높은 귀족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자기를 남보다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런 권리를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살아가는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낮게 여겼단 말이지요.
이어지는 질문들도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일종의 소유권 분쟁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소유권 분쟁이에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과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고 말합니다. 성경의 맨 처음 구절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선언입니다. 칼빈주의 5대강령 첫 번째 항목은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구원을 위한 자가발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어느 정도의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완전한 항복에 의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육신, 가족과 재산, 자연환경,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가족도 있고 재산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들이 다 어디서 난 것들입니까?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벌었으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왔던가요? 아무것도 없이 왔잖아요? 손에 쥔 것은 없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 지금 내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아니, 우리 목숨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이웃에게 인자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의 세 번째 질문이 그것입니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대체로 인간의 교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비례합니다. 자신의 재산이나 권력이나 학문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교만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공헌이 크다고 생각될 때 교만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가져가실 수도 있습니다. 욥을 보세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잖아요? 그렇지만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하나님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실까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인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비천하게 살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신세타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천한 처지에 처하게 될 만큼 스스로 겸손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 스승으로서 이렇게 겸손하려고 하는데 왜 너희는 그렇게 교만하느냐는 책망입니다.
사도는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되고 온갖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반면에 고린도교회는 부유하고 풍족한 가운데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나뉘어 싸우고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누구를 더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가치관과 믿음 아니겠어요? 우리가 진심으로 자신을 돌아본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겸손한 것이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거든요. 교만이 자신을 망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축복이 이 자리에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선생이 아무리 바람풍이라고 해도 학생들이 바담풍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르치거나 지도하는 사람이 자주 하는 실수나 빠지기 쉬운 유혹 가운데 하나는 솔선수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쉽고 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해라. 서로를 존중하고 섬겨라. 이렇게 얼마든지 말로 가르치고 지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번은 탱크부대와 함께 훈련을 했습니다. 저는 하사였는데, 고참이 되면 소대장하고 많이 싸워요.
그런데 우리 옆 소대장이 자기 소대원들에게 탱크 밑으로 포복해서 기어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분대장인 하사가 못하겠다고 버텼습니다. 둘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소위가 시키는데 하사가 못하겠다고 하니까 이거 군대의 명령체계가 뭐가 됩니까? 둘이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데, 소위는 왜 못하겠다는 거냐? 하사는 왜 그런 걸 우리한테 시키는 거냐? 소대장은 시키면 해야지 말이 많아. 그러니까 분대장이 하는 말, 소대장이 먼저 해라. 그러면 우리도 따라서 하겠다. 그러니까 소대장이 철모를 벗어서 땅에 홱 내동댕이치면서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소대장 체면에 부하들 앞에서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 군대는 명령에 의해 유지되는 체제이기 때문에 굳이 모범을 보일 필요가 별로 없어요. 그냥 지시하면 돼요. 그러나 규율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소대장처럼 망신만 당하기가 딱 알맞아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모범이 된다는 것은 희생과 포기를 의미합니다. 자기 손발로 힘들게 움직여야 하고, 권위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사람을 가르칠 수 있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만약 소대장이 솔선수범해서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갔는데 병사들이 못 들어가겠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이 일에 본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 일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말한 것이지요. 바울은 심는 사람이었고 아볼로는 물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킨 주인공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중요하지 심고 물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거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또 바울과 아볼로는 서로 경쟁하고 다투지 않았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면서 각자의 재능과 역할에 따라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처럼, 그들은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말로만 떠들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으로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침을 받은 고린도교회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훌륭한 스승 아래서 훌륭한 제자가 나고 유능한 지휘관의 군대가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법칙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러는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겸손했던 스승 아래서 교만에 극치를 달리는 교인들이 나왔습니다.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스승들을 보면서 제자들은 서로 나뉘어 싸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바울의 진단에 의하면 고린도교회가 서로 나뉘어 싸우게 된 것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하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고린도교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늘 던져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누가 너를 특별한 사람으로 또는 남보다 더 똑똑하고 잘난 사람으로 구별해 주었느냐는 말입니다. 지금도 어떤 나라에는 계급제도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의 기반이 되고 있는 월드와이드웹(www)의 개발자 팀 버너스리가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작위를 받은 사람들이 꽤 되지요?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숀 코네리와 로저 무어도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도 기사 작위를 받았지요.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만인평등사상이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작위를 받았다는 것이 사뭇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만, 과거의 계급사회에서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신분이 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평민들보다 우월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누가 너희를 그렇게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준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라도 받았느냐는 식으로 묻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길 권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바울이 누가 너희를 구별하였느냐고 할 때, 이 누구는 하나님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교회에서 누군가를 특별하게 높일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서로를 존경해야 합니까?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된 후의 삶의 방식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는 세상의 가치관과 법칙에 따라 삽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치와 방법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미묘한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 외딴섬이나 산속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교회라는 두 사회에서 동시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 법칙 사이에서 묘기를 부리듯 삽니다. 일요일에는 충실하게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철저하게 세상의 법칙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거 썩 좋은 방법이 아니지요? 어떤 사람들은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나님의 가치를 따라 살려고 애씁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가치와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들이 바로 진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류가 더 있겠지요? 바로 세상의 법칙과 기준을 교회 안으로까지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바로 고린도교인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바울이 바람풍이라고 외쳐도 여전히 바담풍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에요? 세상의 법칙이 약한 자를 밟고 출세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법칙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이 법칙이었습니다. 설령 세상에서는 교만하고 서로 싸우더라도 교회에서는 겸손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교회 안에서 교만해버렸습니다. 교회 안에서 당을 짓고 싸워버렸어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법칙과 세상의 법칙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습니까? 사실 공존이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치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는 서로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 속에서 세상의 법칙이 하나님의 법칙에 정복되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에도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법칙이 너무 강해서 하나님의 법칙이 설 자리가 없습니까?
물론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살거나 또는 완전히 세상의 법칙대로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일반은총에 의해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살거든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하나님의 법칙대로만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좌표와 방향성은 설정될 수 있겠지요. 얼마만큼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려고 하는지, 또 어느 쪽을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얘기할 수는 있을 것 아닙니까?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세상에서 똑똑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많은 노예들을 부리는 부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분이 높은 귀족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자기를 남보다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런 권리를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살아가는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낮게 여겼단 말이지요.
이어지는 질문들도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일종의 소유권 분쟁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소유권 분쟁이에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과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고 말합니다. 성경의 맨 처음 구절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선언입니다. 칼빈주의 5대강령 첫 번째 항목은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구원을 위한 자가발전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어느 정도의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완전한 항복에 의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육신, 가족과 재산, 자연환경,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가족도 있고 재산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들이 다 어디서 난 것들입니까?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벌었으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왔던가요? 아무것도 없이 왔잖아요? 손에 쥔 것은 없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 지금 내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아니, 우리 목숨은 누가 주신 것입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이웃에게 인자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의 세 번째 질문이 그것입니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대체로 인간의 교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비례합니다. 자신의 재산이나 권력이나 학문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교만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공헌이 크다고 생각될 때 교만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가져가실 수도 있습니다. 욥을 보세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잖아요? 그렇지만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하나님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실까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인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비천하게 살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신세타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천한 처지에 처하게 될 만큼 스스로 겸손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 스승으로서 이렇게 겸손하려고 하는데 왜 너희는 그렇게 교만하느냐는 책망입니다.
사도는 만물의 찌꺼기처럼 취급되고 온갖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반면에 고린도교회는 부유하고 풍족한 가운데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나뉘어 싸우고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누구를 더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가치관과 믿음 아니겠어요? 우리가 진심으로 자신을 돌아본다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겸손한 것이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거든요. 교만이 자신을 망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시는 축복이 이 자리에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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