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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잡으려는 사람들 (잠1:12-18)

본문

전도서 12장 12-18절은 솔로몬 왕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자기 나름대로 내린 결론을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인생 후배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었음은 물론이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더 없는 노정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솔로몬은 자신을 전도자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전도자라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전도자란 말은 그런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전도자란 말은 히브리어 원문의 '코헬레트'란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코헬레트란 백성들을 모아놓고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NIV에서는 교사 또는 스승이란 뜻의 The Teacher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교사요 지혜자인 솔로몬은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폈다고 했습니다. 교사요 지혜자인 솔로몬은 최선을 다해서 세상 만사를 연구하고 살펴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동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궁구하며"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다라쉬'란 말이 사용됐습니다. 다라쉬란 어떤 문제의 본질을 깊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자가 세상 돌아가는 일을 깊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연구했다는 말입니다. 지혜자가 세상 되어지는 일을 보고 많이 생각해서 그 의미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모습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너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며칠 전 TV 뉴스를 보면서 실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기자가 대학 신입생 환영회 장면을 몰래 카메라로 소개했습니다. 이름하여 '사발식'입니다. 선배들이 바가지에 술을 담아서 강제로 신입생들에게 먹이고 있었습니다. 남학생, 여학생 가리지 않고 바가지가 돌아갔습니다. 토하고, 스러지고, 업혀나가고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 자정이 넘도록 2차, 3차 이런 어처구니없는 작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끝내 금년에도 이 사발식에서 선배가 강제로 먹인 술 때문에 신입생 하나가 죽었습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기자가 왜 이렇게 하느냐고 선배에게 물었을 때 그 선배라는 학생의 대답이었습니다.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 토해 내라고 술을 먹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생각, 옛날 사고방식 다 버리고 대학에 와서 새롭게 생각하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뜻에서 사발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술을 먹여 토하게 하면 옛날 생각이 다 사라지는지, 대학의 새로운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고작 이런 추태밖에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인지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우리가 일컬어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요, 대학생을 지성인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지성은 단순한 지식과는 다른 말입니다. 지성은 생각이 배어있는 지식, 의미가 담겨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성인이라 함은 많이 아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많이 공부를 통해서 깊이 생각할 줄 알고, 그 의미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성인들은 옳은 것을 옳다고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할 줄 알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이 사회를 계도해 갈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대학이 단순한 지식의 전당으로 전락해 버리고 있고, 대학인들이 깊이 생각할 줄 모르고 가볍게 행동하는 천박한 지식인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는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주님은 늘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흐트러짐 없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다가왔을 때 주님은 크게 번민하셨습니다.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깊이 생각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주님께서 얼마나 깊이 생각하셨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선 피하실 생각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생각 끝에 지금 당신이 처한 이 고난의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를 당신에게 지도록 하셨는지 하나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난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많이 고민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기의 원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원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각 없이 먼저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하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살핀즉"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타르"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타르는 포괄적으로 폭넓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 보면 지혜자가 세상 만사를 넓게 바라보고 폭넓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됐습니다. 북한을 다녀오신 선배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북한 교회의 진상, 북한 사회의 실상을 본대로 느낀 대로 소상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목사님 말씀이 북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량이 부족한데 있는 것도 아니고, 공산 정치체제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는 안목의 부재에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김일성 대학에 갔을 때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김일성 대학이라 함은 북한의 최고 엘리트들이 모인 곳인데, 이 대학 정문에 북한이 지상 낙원이라고, 김정일이 최고의 지도자라고 붉은 현수막이 붙어있더랍니다. 앞으로 북한 사회를 이끌고 갈 미래의 지도자들이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그저 좁은 안목을 강요당하고 있더랍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북한의 문제요, 앞으로 남북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세상은 넓습니다. 그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좁게 생각하고 폭 좁게 행동한다면, 그런 생각 그런 행동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말에 '우물 안 개구리'란 말이 있습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우물 속이 전부입니다.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행동하는 것은 우물 밖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시대착오적 발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물 안에서 네 편, 내 편 편가르기나 하고,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서로 머리 터지게 싸우기나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세계를 호흡해야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아야 합니다. 그저 좁은 안목에 갇혀 있어서는 않됩니다. 시야를 넓히고 폭 넓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지혜자가 세상 만사를 두루 살펴보니 온통 괴로움뿐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인간은 이 세상에 울면서 태어납니다. 태어나 숨쉬는 것부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걸어야 하고, 배워야 하고, 일해야 하고, 남들과 경쟁해야 하고, 그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내 뱉는 말이 '아이고 죽겠다'입니다. 최근 경제위기시대를 맞아 자살자 수가 급격히 늘고 있는데 충격적인 것은 초등학생의 자살 비율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도 잘 모를 나이인데도 인생이 괴롭고, 인생이 죽고 싶도록 힘겹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지혜자가 볼 때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모든 인간이 인생에 대해 느끼는 공통된 감정은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자가 왜 인간이 이토록 고생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니 그 결론은 이렇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고생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이 숙명적으로 겪어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창 3장 17절에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인간이 고생하게 된 원인은 바로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지른 인간은 한 평생 인생을 살면서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살도록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은 고진감래라 가르쳐 왔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입니다. 잠시 고생하면 후에 고생하지 않을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고생하는 것은 내일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생해서 대학에 들어가면 정말 고생 끝입니까 고생 끝에 진급해서 부장이 되고 이사가 되면 정말 고생 끝입니까 고생 끝에 내 집 장만하면 고생 끝입니까 물론 고생 끝에 일시적으로 보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일시적인 성취감과 잠깐의 행복은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고생이 찾아옵니다. 또 다시 고생을 해야 합니다. 인생은 평생 고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겪게 되어있는 하나의 숙명입니다. 고생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생하는 것은 바로 살아남기 위해서이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많이 고생하면 많이 먹을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수고하면 많이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전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하나님께 용서받고 용납 받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수고하며 맛볼 수 없던 참 평강을 맛보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은혜를 받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생하면서 경험해 보지 못하던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과 17절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지혜자가 해 아래서 되어지는 모든 일을 보고, 인간의 모든 지적 노력을 보니다 바람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다 헛되고 허망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중 고등학교 시절에 인상깊게 읽었던 책 가운데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산티아고라는 한 노인입니다. 멕시코 만류에 조각배를 띄우고 고기잡이하는 노인입니다. 84일 동안 매일같이 바다에 배를 띄웠지만 한 마리도 낚지 못했습니다. 한 소년이 노인과 함께 배를 타고 나갔다가 40일 동안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노인은 포기하지 않고 85일째도 배를 바다에 띄었습니다. 85일째 되는 날 정오에 노인은 드디어 자기가 찾던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를 배에 묶기까지 홀로 고기와 이틀 반 동안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고기를 배에 묶고 집에 돌아와 보니 배보다 컸던 고기는 상어 떼에게 다 뜯기고 뼈와 꼬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85일 간의 기다림, 이틀 반 동안의 사투 고생 끝에 잡은 고기는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노인의 모든 수고는 바람잡는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생의 본질을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땀흘리고 노력해 보지만 그 모든 것이 다 바람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이 혼자 타고 있는 배 안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 자기 혼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보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다 바람잡는 일일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두가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본문의 지혜자는 인생이 다 바람잡는 것과 같은 이유를 1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이 말씀은 당시 흔히 사용되던 속담입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던 속담입니다. 이 속담의 뜻은 아무리 노력해도 바보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 27장 22절에 "어리석은 자는 절구에다 찧어도 어리석음이 벗겨지지 않는다"고 말씀했는데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리석기 때문에 바람을 잡으려고 땀을 흘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것처럼 아무 쓸모 없는 일을 위해 땀을 흘리고 고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몰라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바른 길이 있고, 살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몰라서, 어리석게도 헛수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의 지혜자는 인생이 바람잡는 것과 같은 이유를 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무엇인가 안다는 사람, 남들보다 많이 배우고, 남들보다 지혜롭다는 사람들은 그 지혜와 그 지식이 오히려 근심을 가중시킬 뿐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인간이 많이 알면 알수록 나는 무지하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사실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고, 지혜를 많이 쌓으면 점점 인간의 절망적인 무지와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이 자신있게 말하고 확실한 답을 말하지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은 대개 "글쎄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확실한 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많은 사람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쓸데없는 일, 바람잡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근심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잡지 않는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여전히 바람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르면 몰라서 바람을 잡고, 알아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을 잡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지혜자의 결론은 완전한 절망으로 끝나는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보면 우리 모두는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왜요! 우리 주님은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막10:27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래서 지혜의 근본,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결코 바람을 잡으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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