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무엇인가 (눅17:5-19)
본문
사랑하는 야고보회 회원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이 무엇인가를 잘 정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도 역시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믿음이 적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하고 부탁했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믿음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믿음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종의 의무와 열명의 문둥병환자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야고보회 회원 여러분이여!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잘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고, 잘못 알았던 것을고치고, 결단이 없었던 분은 결단하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음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논란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신앙의 모든 문제가 믿음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 전체는 믿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동시에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설명하려는 의도가 본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 자체가 믿음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설명할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과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당초 믿음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마는 설명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많은 욕심가운데 믿음에 대한 욕심을 부려본 것일 뿐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작은 겨자씨의 이야기를 하신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제자들의 생각 처럼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생명적 질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여러부분에서 이같은 것을 봅니다.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친 헌금의 질이 문제입니다. 많은 돈으로 구제를 한다고해서 그가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얼마만큼의 희생을 통하여 그 일을 했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일 믿음이 이같은 양의 문제라면 우리 모두는 가진자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생명적 질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7절이하 10절까지 다같이 봉독 하십시다.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돌아왔다고해서 그대로 앉아서 먹을수는 없다. /자기가 먹기전에 먼저 주인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시중을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인이 그에게 특별히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단순히 내 말에 복종한 것을 가지고 너희 자신이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너희는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하였기 때문이다.'현대어''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충성된 종은 사례를 생각하고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은 그 자체가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된 자이기 때문에 충성하는 것이요, 충성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충성하는 것이 신나고 재미있으니까 충성하는 것입니다. 종은 그냥 종일 뿐입니다. 믿음이란 종의 자세입니다. 종의 기본은 충성입니다. 종에게 충성이 없다면 가축만도 못합니다. 가축은 길들인 대로 충성하고,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지만 충성하지 아니하는 종은 무익합니다. 주인에게 해가 될 뿐입니다. 종은 종으로서 그에게 할 역할이 주어진 것이 바로 보람이요, 의미입니다. 그외의 무엇을 바라고 그가 한다면 그는 삯을 바라는 삯꾼이지 종은 아닙니다. 너무하지 않느냐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한 바에는 우리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믿음이란 종의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은 종나름대로 주인에게 받은 몫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만족을 주어야 그는 종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 입니다. '명한것들을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 하겠느냐' 종에게는 사례가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사례를 의식하지 않는 종이 충성된 종입니다. 종에게는 주인이 그를 신뢰하는 만큼 많은 역할이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헬라어로 πi στi s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충성이란 πi στOs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충성이 나타납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한 것을 다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일을 한 것이므로 그렇게 유능하거나 쓸모있는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령받은 것을 다한 후에도 이같이 말할 수 있어야 믿음을 가진 신실하고 충성된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해도 모든것을 다 드린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은 본래 자신의 것을 되돌려 받으실 뿐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의무를 다한다해도 하나님은 얻으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유익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 보다 덧붙여 드려야 우리가 유익한 자가 되지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주인이신 하나님께 여전히 무익한 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믿음이란 충성된 종의 자세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같은 충성된 종의 자세를 기뻐 하시는 것입니다. 11절 이하의 문둥병환자 이야기를 봉독 하십시다. 열명의 문둥이가 자기들의 질병 때문에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갔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는 도중에 자기들이 몸이 나은것을 알았습니다. '14절' 그들은 자기들의 몸이 나은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사장에게로 직행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제사장에게로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열명 중 열명입니다. 그러나 해결을 받은 다음 다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냥 가버린 것은 더 이상 예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차이는 , 그냥 가버린 자들은 자기중심적인 믿음이요, 이기적인 믿음이었고, 돌아온 한명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역시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인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믿음도 믿음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믿음 은 아닙니다. 믿음은 결과로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이 친히 부르신 제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죄사함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깨끗하여 졌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것은 우리가 주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과 하나되는 생활 이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힘쓰는데 믿음의 진보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절' 그들 모두가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과 함께하는 믿음, 종으로서의 믿음, 충성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이같은 믿음을 우리 주님은 찾으십니다. 그런 믿음에 대하여 말씀 하십니다. '가라 너의 그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그 사람의 그 믿음 (h πi στi s)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돌아와 사례하며 영광을 돌리는 충성(o πi στo s) 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에게 말씀 하신 겨자씨 만한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양의 믿음이 아니라,주님이 요구하시는 질의 믿음입니다. 하나님나라와 믿음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그 한사람의 문둥병자에게 처럼 자기에게 임하면 그것이 곧 속에서 하나님나라화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 하였으나 ,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음 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이기적이고,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열심이지마는, 교회밖에 나가면 그리스도 없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열심과 자기 신념으로 자기의 믿음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흔히 열심있는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열심은 믿음이 아닙니다. 열심은 그냥 열심일 뿐입니다. 다만 자녀교육에 열심인 것처럼, 사업에 열심인 것처럼, 그냥 신앙적 열심일 뿐입니다. 그 열심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와 동행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 없는 열심 을 가지고, 자기 만족에 빠져서 그것을 믿음인양 생각합니다. 그 열심이 식어지면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며, 종의 자세이지 인간적 열심은 아닙니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하나님 없는 인간적 열심에 있습니다. 열심은 좋으나 그 열심 가운데 그리스도가 없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 업적을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잘못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교회안에서는 열심으로 나타나지마는, 교회 밖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였는데 교회가 있다고해서 세상이 밝아지는 것도 없고, 나아지는 것도 없습니다. 극단적인 이야기 같으나 우리가 이점에서 반성해야 합니다.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적 믿음(피스티스)과 외적 충성(피스토스)가 병행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충성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야고보회원 여러분!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주님을 찾을것이아니라, 개인적인 필요의 충족으로 주님을 떠날것이 아니라, 감사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언제나 주님께 의지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 하십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오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현세적,이기적,기복적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래서 충성하는자,돌아와 감사하는 자를 주님은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예수님께 바치는 헌신은 일회적인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계속되어야 할 생의 과제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열심도 하나님 앞에 무익할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질을 요구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충성을 요구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려해야 할 점들을 상고해 봅시다. 우리가 과연 어떤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는 중요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선택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의의 길이나 불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항상 위험을 수반합니다. 위험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믿음은 사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앞길을 볼 수 있다면 보이는 길을 따라 행할 것입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모든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시면 다른 방도가 없을 때에만 우리의 믿음을 구사합니다. 앞길이 확실치 않을 때에만 믿음을 구사합니다. 육체적인 모험을 할 때는 사자 처럼 용감한 사람도, 믿음의 걸음을 걸어야 할 때는 겁장이가 됩니다. 믿음은 항상 반대에 부딪힙니다. 아브라함은 또한 시험 또한 시험을 거쳤으며, 점점 더 어려운 시험을 치루었고 그의 앞에 나타나는 시험은 언제나 이전 것 보다 어려워져 갔습니다. 우리는 당면해야 하는 어려움에 불평하는 대신에 믿음을 구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기뻐해야 합니다. 시험으로 부터 면제되는 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시련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의 언어 속에 '그리 아니하실찌라도'라는 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청지기의 삶을 요구 하십니다. 청지기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라고 하는데, 신약에 약10회 사용된 말입니다. 많은 재산과 수입을 갖고있는 사람이 재산의 감독.출납.구입. 소비등을 관리하기 위하여 고용한 관리인을 청지기라고 합니다. 주인은 하나님 이십니다. 청지기는 맡은 자입니다. 주인의 대리자입니다. 주인의 뜻을 따라 일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야고보회원들이 이 산에 올라와 기도회를 갖는데, 이러한 모임이 단순히 교회행사의 일환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40대 초반의 가장 왕성한 나이에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여야 할 우리 야고보 회원들이 바른 신앙자세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선도 세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어떻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기를 원하시느냐 하면 매주의 하루를 하나님께 떼어 드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불합리한 요구가 아님에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이 요구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또 수입의 십분의 일을 요구 하십니다. 이것은 보통 채택되는 방법이며, 좋은 시작이지만,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일조는 율법에 불과하며,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은혜 아래 있다고하여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반대자들은 십일조가 율법이 주어지기 400년 전에 명백하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시행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이그를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아브람이 그 얻은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8-20'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경험은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의 반감과는 달리 그의 마음속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몫을 열심과 사랑의 근실한 심정으로 떼어 놓을 때, 드리는 것은 기쁨이 됩니다. 그는 그것을 자기의 돈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진 돈을 아쉽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사실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 사탄이 이 선교목적을 방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의 풍성한 헌금의 원천을 마르게하기 위해 많은 전략을 스고 있는 것은 놀랄일이 아닙니다. 사타은 좀더 좋은 시기가 올 때 까지 풍성한 헌금을 연기하라고 제안 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 수입의 어느 정도를 하나님게 드릴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알아보도록 합시다. 사기꾼 야곱은 십분의 일을 드렸고,경멸당하는 세리장이 삭개오는 1/2을 드렸으며, 무명의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열심있는 유대인은 적어도 수입의 6분의 1을 드렸습니다. 모든 헌금에는 참된 희생의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10분의 1을 드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10분의 9를 드리는 것 보다 더 큰 자기부인을 수반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말라기 선지자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수 있다고 대답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3:8' 사랑하는 야고보회 회원 여러분이여! 오늘 헌금설교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방향을 제시하자는 것입니다. 윌리엄 콜게이트를 아십니까 그는 16세의 나이로 입신출세의 길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꾸러미 하나가 전재산이었는데, 터벅 터벅 걷다가 한 늙은 화물선 선장을 만났습니다. 그가 콜게이트에게 모든 것을 바르게 시작하라고 일러준, 인생을 바꾼 사람입니다. 윌리엄 콜게이트는 그에게 자기가 아는 일은 비누만드는 일 밖에는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화물선 선장이 말했습니다. ' 내가 너와 함께 한번 기도하고 한마디 충고한 후 너를 보내 주겠다' 그들은 뱃길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누군가가 뉴욕에서 탁월한 비누제조자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그렇게 될 수도 있는거지. 나는 네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좋은 사람이 되거라. 네가 번 돈 중에서 주님께 속한 것은 모두 주님께 드려라. 정직하게 비누를 만들어라.무게를 정확히 채워라.그러면 너는 부유하고 번창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그는 일을 얻게 되자 선장에게 한 약속을 기억했고 그가 번 첫 달러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매 달러 마다 10센트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얼마가 지나자 그는 일하는 사업체에서 동업자가 되었고, 몇년 지나자 동업자가 죽어 윌리엄은 단독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장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 했습니다. 정직하게 비누를 만들었고, 무게를 정확히 채웠으며, 그의 부기계원에게 회계를 보게하여 수입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의 사업은 번창해 갔고, 이전 보다 번영했습니다. 그래서 10분의 3을 드렸고, 그리고는 10분의 4, 10분의 5를 드렸습니다. 그는 그의 가족을 교육 시켰고, 인생에 대한 그의 계획을 이루었고 그리고 그 후 모든 수입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젊은이가 윌리엄 콜게이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거니와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 하시는데, 우리 모두 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지켜 행할 것인가 왜 지켜 행해야 하는가는 늘 듣습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몇가지만 더 구체적인 신앙지침을 듣고자 합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그 나이, 그 경륜의 사람들과 생각하는 바가 같고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은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믿음은 언제나 선택에 직면한다고 했는데,이 선택을 바로하지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분명히 교회출석을 하는데 그의 사고와 행동은 언제나 믿지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생활으리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리스도가 취한 생활양식을 선택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역전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의 사고는 세속적이며,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찼 고,생활에는 감사와 기쁨이 없고, 교역자를 대하는 태도는 고용인 정도로 생각한다면 성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야고보 회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제목을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의무는 망각하고, 여전히 달라고만 하고, 하나님을 나의 이기적인 소망을 돕는 조력자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우선적으로 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그러한 자를 기쁘게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것을 바쳐도 여전히 무익한 종일 뿐이며, 성숙한 삶으로 우리 삶의 전폭을 바친다해도 사실 하나님은 아무 이득도 없습니다. 다만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받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야고보회원 여러분이여! 여러분을 성숙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을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산상기도로 모인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점검해야 할 수많은 과제가 있지마는 오늘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을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의지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밤이 새롭게 믿음의 여정을 출발하는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왜냐하면 기독교신앙의 모든 문제가 믿음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7장 전체는 믿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동시에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설명하려는 의도가 본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들 자체가 믿음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설명할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과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당초 믿음을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마는 설명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많은 욕심가운데 믿음에 대한 욕심을 부려본 것일 뿐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작은 겨자씨의 이야기를 하신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제자들의 생각 처럼 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생명적 질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여러부분에서 이같은 것을 봅니다.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친 헌금의 질이 문제입니다. 많은 돈으로 구제를 한다고해서 그가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얼마만큼의 희생을 통하여 그 일을 했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일 믿음이 이같은 양의 문제라면 우리 모두는 가진자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생명적 질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7절이하 10절까지 다같이 봉독 하십시다.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치고 돌아왔다고해서 그대로 앉아서 먹을수는 없다. /자기가 먹기전에 먼저 주인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시중을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인이 그에게 특별히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단순히 내 말에 복종한 것을 가지고 너희 자신이 칭찬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너희는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하였기 때문이다.'현대어''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충성된 종은 사례를 생각하고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은 그 자체가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된 자이기 때문에 충성하는 것이요, 충성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충성하는 것이 신나고 재미있으니까 충성하는 것입니다. 종은 그냥 종일 뿐입니다. 믿음이란 종의 자세입니다. 종의 기본은 충성입니다. 종에게 충성이 없다면 가축만도 못합니다. 가축은 길들인 대로 충성하고,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지만 충성하지 아니하는 종은 무익합니다. 주인에게 해가 될 뿐입니다. 종은 종으로서 그에게 할 역할이 주어진 것이 바로 보람이요, 의미입니다. 그외의 무엇을 바라고 그가 한다면 그는 삯을 바라는 삯꾼이지 종은 아닙니다. 너무하지 않느냐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한 바에는 우리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믿음이란 종의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은 종나름대로 주인에게 받은 몫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만족을 주어야 그는 종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 입니다. '명한것들을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 하겠느냐' 종에게는 사례가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사례를 의식하지 않는 종이 충성된 종입니다. 종에게는 주인이 그를 신뢰하는 만큼 많은 역할이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헬라어로 πi στi s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충성이란 πi στOs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충성이 나타납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한 것을 다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일을 한 것이므로 그렇게 유능하거나 쓸모있는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령받은 것을 다한 후에도 이같이 말할 수 있어야 믿음을 가진 신실하고 충성된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해도 모든것을 다 드린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은 본래 자신의 것을 되돌려 받으실 뿐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의무를 다한다해도 하나님은 얻으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유익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 보다 덧붙여 드려야 우리가 유익한 자가 되지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주인이신 하나님께 여전히 무익한 종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믿음이란 충성된 종의 자세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같은 충성된 종의 자세를 기뻐 하시는 것입니다. 11절 이하의 문둥병환자 이야기를 봉독 하십시다. 열명의 문둥이가 자기들의 질병 때문에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갔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는 도중에 자기들이 몸이 나은것을 알았습니다. '14절' 그들은 자기들의 몸이 나은것을 입증하기 위해 제사장에게로 직행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제사장에게로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열명 중 열명입니다. 그러나 해결을 받은 다음 다 돌아오는 법은 없습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냥 가버린 것은 더 이상 예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차이는 , 그냥 가버린 자들은 자기중심적인 믿음이요, 이기적인 믿음이었고, 돌아온 한명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역시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인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런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믿음도 믿음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믿음 은 아닙니다. 믿음은 결과로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신이 친히 부르신 제자들에게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죄사함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깨끗하여 졌습니다.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것은 우리가 주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과 하나되는 생활 이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힘쓰는데 믿음의 진보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절' 그들 모두가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과 함께하는 믿음, 종으로서의 믿음, 충성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이같은 믿음을 우리 주님은 찾으십니다. 그런 믿음에 대하여 말씀 하십니다. '가라 너의 그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그 사람의 그 믿음 (h πi στi s)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돌아와 사례하며 영광을 돌리는 충성(o πi στo s) 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에게 말씀 하신 겨자씨 만한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양의 믿음이 아니라,주님이 요구하시는 질의 믿음입니다. 하나님나라와 믿음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그 한사람의 문둥병자에게 처럼 자기에게 임하면 그것이 곧 속에서 하나님나라화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 하였으나 ,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음 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이기적이고,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열심이지마는, 교회밖에 나가면 그리스도 없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열심과 자기 신념으로 자기의 믿음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흔히 열심있는 사람을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열심은 믿음이 아닙니다. 열심은 그냥 열심일 뿐입니다. 다만 자녀교육에 열심인 것처럼, 사업에 열심인 것처럼, 그냥 신앙적 열심일 뿐입니다. 그 열심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와 동행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 없는 열심 을 가지고, 자기 만족에 빠져서 그것을 믿음인양 생각합니다. 그 열심이 식어지면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며, 종의 자세이지 인간적 열심은 아닙니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하나님 없는 인간적 열심에 있습니다. 열심은 좋으나 그 열심 가운데 그리스도가 없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 업적을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잘못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교회안에서는 열심으로 나타나지마는, 교회 밖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였는데 교회가 있다고해서 세상이 밝아지는 것도 없고, 나아지는 것도 없습니다. 극단적인 이야기 같으나 우리가 이점에서 반성해야 합니다.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적 믿음(피스티스)과 외적 충성(피스토스)가 병행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충성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야고보회원 여러분!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주님을 찾을것이아니라, 개인적인 필요의 충족으로 주님을 떠날것이 아니라, 감사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언제나 주님께 의지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 하십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오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현세적,이기적,기복적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래서 충성하는자,돌아와 감사하는 자를 주님은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우리가 예수님께 바치는 헌신은 일회적인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계속되어야 할 생의 과제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열심도 하나님 앞에 무익할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질을 요구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충성을 요구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려해야 할 점들을 상고해 봅시다. 우리가 과연 어떤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는 중요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선택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의의 길이나 불의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항상 위험을 수반합니다. 위험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믿음은 사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앞길을 볼 수 있다면 보이는 길을 따라 행할 것입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모든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시면 다른 방도가 없을 때에만 우리의 믿음을 구사합니다. 앞길이 확실치 않을 때에만 믿음을 구사합니다. 육체적인 모험을 할 때는 사자 처럼 용감한 사람도, 믿음의 걸음을 걸어야 할 때는 겁장이가 됩니다. 믿음은 항상 반대에 부딪힙니다. 아브라함은 또한 시험 또한 시험을 거쳤으며, 점점 더 어려운 시험을 치루었고 그의 앞에 나타나는 시험은 언제나 이전 것 보다 어려워져 갔습니다. 우리는 당면해야 하는 어려움에 불평하는 대신에 믿음을 구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기뻐해야 합니다. 시험으로 부터 면제되는 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시련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의 언어 속에 '그리 아니하실찌라도'라는 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청지기의 삶을 요구 하십니다. 청지기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라고 하는데, 신약에 약10회 사용된 말입니다. 많은 재산과 수입을 갖고있는 사람이 재산의 감독.출납.구입. 소비등을 관리하기 위하여 고용한 관리인을 청지기라고 합니다. 주인은 하나님 이십니다. 청지기는 맡은 자입니다. 주인의 대리자입니다. 주인의 뜻을 따라 일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야고보회원들이 이 산에 올라와 기도회를 갖는데, 이러한 모임이 단순히 교회행사의 일환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40대 초반의 가장 왕성한 나이에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여야 할 우리 야고보 회원들이 바른 신앙자세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선도 세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어떻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기를 원하시느냐 하면 매주의 하루를 하나님께 떼어 드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불합리한 요구가 아님에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이 요구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또 수입의 십분의 일을 요구 하십니다. 이것은 보통 채택되는 방법이며, 좋은 시작이지만,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일조는 율법에 불과하며,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은혜 아래 있다고하여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반대자들은 십일조가 율법이 주어지기 400년 전에 명백하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시행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이그를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아브람이 그 얻은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14:18-20'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경험은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의 반감과는 달리 그의 마음속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몫을 열심과 사랑의 근실한 심정으로 떼어 놓을 때, 드리는 것은 기쁨이 됩니다. 그는 그것을 자기의 돈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진 돈을 아쉽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사실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 사탄이 이 선교목적을 방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의 풍성한 헌금의 원천을 마르게하기 위해 많은 전략을 스고 있는 것은 놀랄일이 아닙니다. 사타은 좀더 좋은 시기가 올 때 까지 풍성한 헌금을 연기하라고 제안 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 수입의 어느 정도를 하나님게 드릴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알아보도록 합시다. 사기꾼 야곱은 십분의 일을 드렸고,경멸당하는 세리장이 삭개오는 1/2을 드렸으며, 무명의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열심있는 유대인은 적어도 수입의 6분의 1을 드렸습니다. 모든 헌금에는 참된 희생의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10분의 1을 드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10분의 9를 드리는 것 보다 더 큰 자기부인을 수반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말라기 선지자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수 있다고 대답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3:8' 사랑하는 야고보회 회원 여러분이여! 오늘 헌금설교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방향을 제시하자는 것입니다. 윌리엄 콜게이트를 아십니까 그는 16세의 나이로 입신출세의 길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꾸러미 하나가 전재산이었는데, 터벅 터벅 걷다가 한 늙은 화물선 선장을 만났습니다. 그가 콜게이트에게 모든 것을 바르게 시작하라고 일러준, 인생을 바꾼 사람입니다. 윌리엄 콜게이트는 그에게 자기가 아는 일은 비누만드는 일 밖에는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화물선 선장이 말했습니다. ' 내가 너와 함께 한번 기도하고 한마디 충고한 후 너를 보내 주겠다' 그들은 뱃길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누군가가 뉴욕에서 탁월한 비누제조자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그렇게 될 수도 있는거지. 나는 네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좋은 사람이 되거라. 네가 번 돈 중에서 주님께 속한 것은 모두 주님께 드려라. 정직하게 비누를 만들어라.무게를 정확히 채워라.그러면 너는 부유하고 번창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그는 일을 얻게 되자 선장에게 한 약속을 기억했고 그가 번 첫 달러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매 달러 마다 10센트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얼마가 지나자 그는 일하는 사업체에서 동업자가 되었고, 몇년 지나자 동업자가 죽어 윌리엄은 단독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장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 했습니다. 정직하게 비누를 만들었고, 무게를 정확히 채웠으며, 그의 부기계원에게 회계를 보게하여 수입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의 사업은 번창해 갔고, 이전 보다 번영했습니다. 그래서 10분의 3을 드렸고, 그리고는 10분의 4, 10분의 5를 드렸습니다. 그는 그의 가족을 교육 시켰고, 인생에 대한 그의 계획을 이루었고 그리고 그 후 모든 수입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젊은이가 윌리엄 콜게이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거니와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 하시는데, 우리 모두 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지켜 행할 것인가 왜 지켜 행해야 하는가는 늘 듣습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몇가지만 더 구체적인 신앙지침을 듣고자 합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그 나이, 그 경륜의 사람들과 생각하는 바가 같고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은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앞서 믿음은 언제나 선택에 직면한다고 했는데,이 선택을 바로하지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분명히 교회출석을 하는데 그의 사고와 행동은 언제나 믿지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생활으리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그리스도가 취한 생활양식을 선택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역전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의 사고는 세속적이며,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찼 고,생활에는 감사와 기쁨이 없고, 교역자를 대하는 태도는 고용인 정도로 생각한다면 성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야고보 회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제목을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의무는 망각하고, 여전히 달라고만 하고, 하나님을 나의 이기적인 소망을 돕는 조력자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우선적으로 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그러한 자를 기쁘게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것을 바쳐도 여전히 무익한 종일 뿐이며, 성숙한 삶으로 우리 삶의 전폭을 바친다해도 사실 하나님은 아무 이득도 없습니다. 다만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받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야고보회원 여러분이여! 여러분을 성숙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을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산상기도로 모인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점검해야 할 수많은 과제가 있지마는 오늘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을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의지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밤이 새롭게 믿음의 여정을 출발하는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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