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통하여 오는 행복 (행16:25-34)
본문
행복이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살고 있는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사는데 충분히 만족하고 생활의 기쁨을 주는 요인은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들라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돈이 없는 것,지식이 없는 것, 명예가 없는 것, 권세가 없는 것 , 그러나 이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부부의 관계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결혼만 했다고 해서 저절로 행복이 굴러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있어야 행복한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어도 잃어도 그것으로 기뻐합니다. 신앙은 주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에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요1서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너무 큰 사랑입니다.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주님의 사랑을 감동 있게 그려 낸 작품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동네에 큰 나무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나무가 서 있는 집에 한 소년이 태어납니다. 이 소년이 자라면서 나무와 친해졋습니다. 소년은 나무 그늘에서 놀기도 하고 나무에 올라와서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나무는 마냥 즐거웠습니다. 소년이 너무나 좋은데 자기가 소년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데에서 행복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밤과 낮이 바뀌고 나무와 소년은 더 깊은 사랑을 키워 갔습니다. 소년은 나이가 들어 어느 날인가 객지로 훌쩍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무는 너무너무 적적했습니다. 이제 나무는 엄청 큰 거목으로 자랐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어느 날 큰 트럭 한대가 왔습니다. 나무가 보니 이젠 어른이 된 그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나무야 미안하다. 내가 사업을 좀 하는데 자본이 딸려서 네 가지를 좀 베어가야 되겠구나." 소년은 나무가지 일부를 잘라서 차에 싣고 떠났습니다. 나무는 모양새가 볼품이 없어졌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소년에게 줄 수 있었다는데 크게 행복했습니다. 소년은 몇 년만에 또 와서는 또 가지를 베어갔습니다. 줄 것이 있다는데 대해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또 십여 년이 지난 뒤 소년은 초췌해진 모습으로 나무를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사업에 실패한 모양이었습니다. 나무는 안타까웠습니다. 중년이 지난 소년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업에 실패를 했다. 정말로 안됐다만 너를 베어가야 되겠다".하고서는 소년은 나무를 베어갔습니다. 나무는 슬펐습니다. 이제는 소년을 위해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나무는 한 노인 거지가 비틀거리며 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인은 밑동만 남은 나무에 걸터 앉아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무가 보니 분명 자기가 사랑했던 소년의 모습이었습니다. 소년은 나무에게 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소년에게 앉을 수 있는 자리라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이 글을 쓴 것입니다. 주님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십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그리하여서 아낌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하여서 이 사랑의 손길을 펴고 계십니다. 적어도 성도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케 함으로 여러분을 사랑 받고 살아가는 성도로 여러분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기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무장하고, 봉사를 통하여서 보람을 얻게 해주며, 헌금을 통하여서 물질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저는 여러분이 그런 삶을 살도록 돌보는 목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자로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당장에 원하는 것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로 허덕이는 성도에게 내가 돈이 있다면 빚을 갚아주고 사업자금이라도 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병 때문에 고생하는 성도를 보면서 당장에 병을 고쳐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직장이 마땅치 않는 성도에게 좋은 직장을 마련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고민을 당장에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소망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 졌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교목으로 있으면서 교사들을 보면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실업자로 몇 년을 지내면 직장만 있으면 더 무엇을 바랄 것인 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사가 되기 위해 사립학교에서는 천 만원이 넘는 기부금을 내고서 교사가 됩니다. 그렇게도 간절히 소원했던 직장 그 감격은 며칠 또는 몇 주 몇 달에 불과합니다. 모여서 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불평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삶의 자세가 바로 되어 있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것이 주어져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어야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 행복은 여러분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줌으로는 절대로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행복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 큰 사랑을 체험하고 여러분의 전부를 주님을 위해 헌신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영적인 목자로서의 저의 사명입니다. 여러분의 전부를 그리스도를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따르는 민중에게 밥을 먹이고, 병을 고쳐주고, 마음이 상한 자에게 위로를 주고 돌봐 주셨지만 행복을 고백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 자만이 행복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산상보훈의 팔 복은 사람이 누려야하는 진정한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마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삶의 고통이 풀리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우리 주님에 대한 진정한 고백으로 그것은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먼저 믿는 자의 행복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이라고 하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본래 예수 믿는 사람을 싫어하여 잡아 죽이고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부유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었고 배우기도 많이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철저한 사람이었는데 종교적인 생활도 그의 심령을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시 채를 발길질하기가 네게 고통이다. 가시 채를 미웁다고 발길질을 하게 되면 자기 발만 아픈 것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돌아서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녹아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의 모든 삶의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핍박자가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사는 행복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은 늘 그와 함게 계셨고 우리가 보기에는 한없이 안되 보이는 가운데서도 그는 그의 행복을 노래했습니다. 그가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귀신들려 점을 쳐주고서 주인에게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불쌍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종이 바울의 사역을 방해함으로 종의 귀신을 쫓아내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종의 주인의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매를 맞고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한없이 가련하고 안된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가장 절망을 느끼게 되는 깊은 밤 중에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예수께서 사시는 복된 성도였습니다. 거친 환경이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평화를 아무도 빼앗아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는 행복 가운데 하나님의 각별하신 돌보심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적을 통하여 위로해 주신 것입니다. 한 밤중에 옥터가 움직이고 착고가 풀리고 감옥 문이 열린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한일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아가게 되면 때로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나감으로 행복을 맛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을 봅니다. 삶의 위기가 닥친 사람입니다. 그는 간수였습니다. 그는 칼을 빼서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문제를 만나고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저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6월 호에서 로멜이라고 하는 사람의 최후를 보았습니다.
로멜은 2차 세계대전 때 탱크 부대를 이끌고 연합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서부전선 B군단의 최고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연합군의 공격이 몇 달 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아내의 생일을 위해 휴가를 얻어 독일로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며칠 뒤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기습적으로 있었고 로멜은 독일에서 가슴을 치면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한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모함을 받게 되었고 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약을 먹고 자살함으로까지 상황은 그를 몰고 갔던 것입니다. 간수는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의나 부주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죄수가 도망을 가면 간수가 그 형을 받게 되어있는 당시의 법에 의해 책임을 묻게 될 것이 두려워 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 때 간수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하자 바울사도가 만류했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에 있다." 이에 간수가 무서워 떨며 감옥으로 뛰어 들어가가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나와서 무릎을 꿇고서 묻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아까" 그는 자기의 형편을 보고서 간절한 구원을 요청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삶의 위기는 절망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구원을 사모하는 신앙의 길로 인도하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만하여 복음에 목을 굳게 하다가 병에 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키엘.케골의 글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운동장에다 우리를 세워 놓고서 앞에 있는 사람을 하나씩 죽이는 자리에 우리가 있다면 삶의 흥미가 살아질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바로 그런 형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대열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가련한 신세들인 것입니다. 지옥이 있으니 너무나도 위험한 자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때 들려오는 사도 바울의 복음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인간의 뜻과 생각대로 사는 삶을 포기하고 나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도 주님 사랑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간수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구구절절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니 그 마음에 기쁨이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행복한사람이 된 것입니다. "34절에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나라" 모든 문제의 근원에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불신에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 여러분 예수를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을 주님께 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고치시고 새롭게 변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요1서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너무 큰 사랑입니다.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주님의 사랑을 감동 있게 그려 낸 작품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동네에 큰 나무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나무가 서 있는 집에 한 소년이 태어납니다. 이 소년이 자라면서 나무와 친해졋습니다. 소년은 나무 그늘에서 놀기도 하고 나무에 올라와서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나무는 마냥 즐거웠습니다. 소년이 너무나 좋은데 자기가 소년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데에서 행복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밤과 낮이 바뀌고 나무와 소년은 더 깊은 사랑을 키워 갔습니다. 소년은 나이가 들어 어느 날인가 객지로 훌쩍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무는 너무너무 적적했습니다. 이제 나무는 엄청 큰 거목으로 자랐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어느 날 큰 트럭 한대가 왔습니다. 나무가 보니 이젠 어른이 된 그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나무야 미안하다. 내가 사업을 좀 하는데 자본이 딸려서 네 가지를 좀 베어가야 되겠구나." 소년은 나무가지 일부를 잘라서 차에 싣고 떠났습니다. 나무는 모양새가 볼품이 없어졌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소년에게 줄 수 있었다는데 크게 행복했습니다. 소년은 몇 년만에 또 와서는 또 가지를 베어갔습니다. 줄 것이 있다는데 대해서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또 십여 년이 지난 뒤 소년은 초췌해진 모습으로 나무를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사업에 실패한 모양이었습니다. 나무는 안타까웠습니다. 중년이 지난 소년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업에 실패를 했다. 정말로 안됐다만 너를 베어가야 되겠다".하고서는 소년은 나무를 베어갔습니다. 나무는 슬펐습니다. 이제는 소년을 위해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나무는 한 노인 거지가 비틀거리며 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인은 밑동만 남은 나무에 걸터 앉아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무가 보니 분명 자기가 사랑했던 소년의 모습이었습니다. 소년은 나무에게 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소년에게 앉을 수 있는 자리라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이 글을 쓴 것입니다. 주님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십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그리하여서 아낌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하여서 이 사랑의 손길을 펴고 계십니다. 적어도 성도는 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케 함으로 여러분을 사랑 받고 살아가는 성도로 여러분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기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무장하고, 봉사를 통하여서 보람을 얻게 해주며, 헌금을 통하여서 물질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인 저는 여러분이 그런 삶을 살도록 돌보는 목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자로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당장에 원하는 것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로 허덕이는 성도에게 내가 돈이 있다면 빚을 갚아주고 사업자금이라도 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병 때문에 고생하는 성도를 보면서 당장에 병을 고쳐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직장이 마땅치 않는 성도에게 좋은 직장을 마련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고민을 당장에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소망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 졌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교목으로 있으면서 교사들을 보면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실업자로 몇 년을 지내면 직장만 있으면 더 무엇을 바랄 것인 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사가 되기 위해 사립학교에서는 천 만원이 넘는 기부금을 내고서 교사가 됩니다. 그렇게도 간절히 소원했던 직장 그 감격은 며칠 또는 몇 주 몇 달에 불과합니다. 모여서 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불평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삶의 자세가 바로 되어 있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것이 주어져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어야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 행복은 여러분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줌으로는 절대로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행복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 큰 사랑을 체험하고 여러분의 전부를 주님을 위해 헌신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영적인 목자로서의 저의 사명입니다. 여러분의 전부를 그리스도를 위해 투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따르는 민중에게 밥을 먹이고, 병을 고쳐주고, 마음이 상한 자에게 위로를 주고 돌봐 주셨지만 행복을 고백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 자만이 행복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산상보훈의 팔 복은 사람이 누려야하는 진정한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마 5:3-1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삶의 고통이 풀리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우리 주님에 대한 진정한 고백으로 그것은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먼저 믿는 자의 행복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이라고 하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본래 예수 믿는 사람을 싫어하여 잡아 죽이고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부유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었고 배우기도 많이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철저한 사람이었는데 종교적인 생활도 그의 심령을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시 채를 발길질하기가 네게 고통이다. 가시 채를 미웁다고 발길질을 하게 되면 자기 발만 아픈 것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돌아서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녹아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의 모든 삶의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핍박자가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사는 행복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은 늘 그와 함게 계셨고 우리가 보기에는 한없이 안되 보이는 가운데서도 그는 그의 행복을 노래했습니다. 그가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귀신들려 점을 쳐주고서 주인에게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불쌍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종이 바울의 사역을 방해함으로 종의 귀신을 쫓아내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종의 주인의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매를 맞고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한없이 가련하고 안된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가장 절망을 느끼게 되는 깊은 밤 중에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예수께서 사시는 복된 성도였습니다. 거친 환경이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평화를 아무도 빼앗아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는 행복 가운데 하나님의 각별하신 돌보심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적을 통하여 위로해 주신 것입니다. 한 밤중에 옥터가 움직이고 착고가 풀리고 감옥 문이 열린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한일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아가게 되면 때로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나감으로 행복을 맛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을 봅니다. 삶의 위기가 닥친 사람입니다. 그는 간수였습니다. 그는 칼을 빼서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문제를 만나고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지막 단계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저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6월 호에서 로멜이라고 하는 사람의 최후를 보았습니다.
로멜은 2차 세계대전 때 탱크 부대를 이끌고 연합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서부전선 B군단의 최고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는 연합군의 공격이 몇 달 뒤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아내의 생일을 위해 휴가를 얻어 독일로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며칠 뒤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기습적으로 있었고 로멜은 독일에서 가슴을 치면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한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모함을 받게 되었고 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약을 먹고 자살함으로까지 상황은 그를 몰고 갔던 것입니다. 간수는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의나 부주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죄수가 도망을 가면 간수가 그 형을 받게 되어있는 당시의 법에 의해 책임을 묻게 될 것이 두려워 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 때 간수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하자 바울사도가 만류했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에 있다." 이에 간수가 무서워 떨며 감옥으로 뛰어 들어가가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나와서 무릎을 꿇고서 묻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아까" 그는 자기의 형편을 보고서 간절한 구원을 요청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삶의 위기는 절망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구원을 사모하는 신앙의 길로 인도하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만하여 복음에 목을 굳게 하다가 병에 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키엘.케골의 글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운동장에다 우리를 세워 놓고서 앞에 있는 사람을 하나씩 죽이는 자리에 우리가 있다면 삶의 흥미가 살아질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바로 그런 형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대열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가련한 신세들인 것입니다. 지옥이 있으니 너무나도 위험한 자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때 들려오는 사도 바울의 복음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인간의 뜻과 생각대로 사는 삶을 포기하고 나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도 주님 사랑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간수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구구절절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니 그 마음에 기쁨이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행복한사람이 된 것입니다. "34절에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나라" 모든 문제의 근원에 불신이 깔려 있습니다. 불신에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 여러분 예수를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을 주님께 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고치시고 새롭게 변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