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감사 (골3:16-17)
본문
얼마 전만 해도 들녘은 황금 벌판을 이루었습니다. 밭에는 곡식들이 잘 여물어 가고 있고, 과수원에는 풍성한 열매들로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추수의 계절에 우리들이 느끼는 감사요 축복입니다. 도시 생활의 비극은 우리들이 땅을 밟지 못하고 살고, 깨끗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지 못하고 살고, 추수의 기쁨을 누리고 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날마다 잠을 깨면 시멘트 바닥을 걷고, 매연에 시달리고, 오염된 물을 마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그 좋은 자연을 상실한 생활입니다. 옛날의 그 가난했을 때와 오늘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지금 좋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영농 과학 덕분으로 전에 비하여 수확량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습니다. 열매도 커지고, 맛도 개량되었고, 농촌의 분위기도 많이 발전되었습니다. 옛날은 참으로 기억조차 하기 싫을 만큼 어려웠던 시대였습니다. 과연 우리 민족은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30여 년 전의 TV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감개 무량합니다. 달라져도 참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때 배는 또 왜 그렇게 고팠는지 한 끼 절약을 하기 위해서 늦게 일어나고 일찍 잠을 자야 했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를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사에서 굶주림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빵의 문제,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전쟁보다도 무서운 문제입니다. 여러분, 노동판에 가보십시오. 사람이 먹고 산다는 문제가 얼마나 강렬한 문제인지 모릅니다. 멋과 유행, 그리고 여행과 즐김은 먹고난 후에 필요한 것이니다. 좋은 옷이나 다이아몬드, 이것은 배부른 사람들에게나 값이 있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먼저가 배부름입니다. 그래서 이 배고픔의 문제는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배가 고파서 죽는 인구가 일만 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고픔이 원인이 되어 병들어 죽는 인구가 하루에 10만 명도 넘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뜻을 알고 마땅히 감사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는 우리 민족도 먹는 문제만큼은 해결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몇 가지 되새기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1.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자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골3:15)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가슴 속에 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다운 삶은 가슴 속에 감사한 마음을 채우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살고, 먹고, 살아갈 때 행복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감사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땅은 사람들이 노력한 만큼 정확하게 땀의 대가를 줍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심은 만큼만 줍니다. 땅은 부정이나 뇌물이나 요령이 통하지 않습니다. 정직합니다. 노력의 대가는 누구에게나 정확하게 보상해 줍니다. 그것을 농부들은 잘 압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최선을 다해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요령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하늘을 존중하고, 하늘에 감사를 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사람들은 영농 과학이다, 전천후 영농이다 해서 말들을 하지만 농부들은 그것을 과신하지 않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영농 시설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홍수시에 나타나는 하늘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그들은 실감하기 때문에 경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늘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촌 감삼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분명 저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주 좋은 환경에 살고 있으면서도 조금의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인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같이 풍성히 먹고, 살아가면서도 추호도 감사한 마음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나 저주스러운 마음입니까 그래서 감사하는 생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이 열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축복의 마음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아주 조그만 씨 하나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뿌린 씨에 비하면 몇 천 배도 더 되는 아주 큰 호박이 열립니다. 이것을 보고도 어찌 감사치 않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 넘길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분명 씨는 하나를 뿌렸는데 몇 백 개의 열매를 맺어 줍니다. 옥수수는 하나의 씨를 뿌렸는데 수백 개의 열매를 맺어 줍니다. 과일 나무는 오래 전에 한 번 심어 놓은 것이 매해 맛있는 열매를 맺어 줍니다. 이것을 보고도 감사한 마음이 없다고 하면 내촌 감삼의 말대로 그것은 저주받은 마음입니다. 짐승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행, 불행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만족과 불만족이 결정됩니다. 또 감사와 불평이 생깁니다. 사람이 많은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평생 감사한 마음이나 기쁨의 생활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2. 중심 있는 감사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본문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먹을 것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사람이 먹고 입고 편히 살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최고는 아닙니다. 그 다음의 생활은 감사하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를 하되 그 감사는 중심이 있는 감사이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중심을 이룬 감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 감사는 얼마 가지 못하고, 사람이 배가 부르게 되면 그만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탄으로부터 첫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입니다. 40일 동안 금식을 해서 지금 배가 고픈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일주일만 금식을 해보십시오. 별 생각이 다 들어옵니다. 사람은 그만큼 먹는 문제에 대해서 집착력이 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마치자마자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한 마디로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마4:4)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말씀은 40일 금식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먹는 문제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참 멋있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대답은 말씀으로 중심을 삼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배가 고파도 실수를 하지 않고 배가 불러도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심 있는 감사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빵이 먼저가 아니고 말씀이 먼저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사탄이 하라는 대로 할 수는 없은 일입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만을 위해서 분별 없이 아무 것이나 먹을 수는 더 더욱 없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평생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보람을 느꼈고, 또 그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길을 가다가 어느 움막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습니다. 방안에는 어느 30대의 젊은이가 폐결핵으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약을 사다 먹이고 음식을 사다 주고 정성껏 간호해서 이 남자가 회복되었습니다. 얼마나 보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목사님은 몹시도 기뻤습니다. 일년이 지난 후 어느 날 그 남자의 부인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당신이 내 남편을 죽였습니다.”하고 항의하더랍니다. “내가 당신의 남편을 죽이다니, 내가 죽어 가는 당신의 남편을 지성으로 피료하고 간호해서 살려 놓으니까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 목사님은 정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인이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내 남편은 병들었을 때는 착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건강해지니까 다시 술 먹고, 방탕하고, 바람 피우고 외도하더니 엊저녁에 길거리에서 얼어 죽었소. 그러니 당신이 내 남편을 죽인 것 아닙니까” 이 목사님은 그때 할 말을 잊었다고 합니다. 20년 동안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목회를 했는데 그 꿈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20여 년 목회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실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빵이 먼저가 아니고 말씀이 먼저입니다. 그 사람에게 빵을 먼저 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먼저 주었어야 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굶었으니 먹여 놓고 보자.” 이것은 극히 순리인 것 같지만 그것은 인도주의자들의 생각이지 신앙 안에서는 그것이 바른 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교회가 구제를 해서 사람을 만든 예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한 후에도 자신 있게 하신 말씀은 “아직도 빵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시골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시골 노인들을 앉혀 놓고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가 있습니까”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랬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럼 사람은 빵으로는 살 수가 없지,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해” 하시더랍니다. 이것은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들은 모두 한결같이 추상적인 것들입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구원이라든가, 영생, 믿음, 성결, 은혜, 소망, 사랑 등 한결같이 추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또한결같이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입니다. 정말 이것들이 없으면 사람들은 하루도 살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외면하고,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을 우선합니다. 사람들이 결혼할 때를 보십시오. 청년들이 결혼을 할 때 보면 거의가 화려한 것들을 동경합니다. 그래서 학벌을 중시하고, 돈을 따지고, 인물을 보고, 건강을 우선하고, 외모를 중시합니다.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속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후회하며 마음 아프게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앙케이트 조사한 것을 보니까 결혼 생활 10년을 주부들에게 결혼을 해서 함께 살아 보니까 남편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되더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은 사람됨이 문제더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년을 살아온 주부들에게 물었습니다. 20년을 함께 살아 본 결과 무엇이 문제였는가라는 물음에 대다수가 “그것은 성품이 문제더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들도 소중하지만 함께 살아가다 보니 그것들은 다음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보다 먼저는 뜻이 맞아야 살겠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로소 철이 난 후 생각을 해보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자세가 문제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학벌 가지고 삽니까 그리고 사람이 머리만 가지고 살아지는 것입니까 그래서 결혼의 제일 조건은 소유가 아니고, 정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속에 말씀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이 정신은 나가도 말씀은 남아 있어야 혼돈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사람이 부해져도 타락하지 않고 가난해져도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삭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노인이 되어서 분별력이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도 알아 보지를 못합니다. 나중에는 가족들조차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제자드이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말에 이 선생님은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두 가지는 알지,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것만은 알고 있네.” 정신을 나갔어도, 판단은 흐려졌어도 그것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래야 비로소 이 세상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래야 양이 적어도 감사하고, 양이 많아도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감사는 일반인들이 하는 감사와는 다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이 초월된 감사입니다. 성공을 해도 감사지만 실패를 해도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건강해도 감사를 하지만 다리가 부러져도 감사하는 그런 감사입니다. 이것이 범사의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삶에는 무엇보다도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감사함은 절대로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져도 깨달음의 지혜가 없으면 그 곳에 낙이 없습니다. 뜻이 없습니다.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드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이 찬송(495장)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그런 찬송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 이 찬송을 부르게 되면 그 뜻이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궁궐에서 살아도 그 곳이 결코 천국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이 주어져도 감사함이 우러나오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초막이 천국일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뜻을 알고 살아가는 인생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풀한 포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깨달을 수만 있으면 그것은 훌륭한 신앙인 것입니다. 초가 삼간에서도 평안을 간직하고 기쁨을 누리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돈 몇 푼 소유로도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라 마음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모든 일을 하나님의 힘을 입어 감사하라.”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여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주일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를 하되, 받았으니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과 환경을 초월한, 많고 적음을 초월한 범사의 감사를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추수 감사 주일에 우리들이 하여야 할 감사인 것입니다.
1.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자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골3:15)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가슴 속에 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다운 삶은 가슴 속에 감사한 마음을 채우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살고, 먹고, 살아갈 때 행복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감사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땅은 사람들이 노력한 만큼 정확하게 땀의 대가를 줍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심은 만큼만 줍니다. 땅은 부정이나 뇌물이나 요령이 통하지 않습니다. 정직합니다. 노력의 대가는 누구에게나 정확하게 보상해 줍니다. 그것을 농부들은 잘 압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최선을 다해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요령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하늘을 존중하고, 하늘에 감사를 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사람들은 영농 과학이다, 전천후 영농이다 해서 말들을 하지만 농부들은 그것을 과신하지 않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영농 시설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홍수시에 나타나는 하늘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그들은 실감하기 때문에 경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늘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촌 감삼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분명 저주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주 좋은 환경에 살고 있으면서도 조금의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인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같이 풍성히 먹고, 살아가면서도 추호도 감사한 마음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나 저주스러운 마음입니까 그래서 감사하는 생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이 열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축복의 마음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들이 아주 조그만 씨 하나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뿌린 씨에 비하면 몇 천 배도 더 되는 아주 큰 호박이 열립니다. 이것을 보고도 어찌 감사치 않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 넘길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분명 씨는 하나를 뿌렸는데 몇 백 개의 열매를 맺어 줍니다. 옥수수는 하나의 씨를 뿌렸는데 수백 개의 열매를 맺어 줍니다. 과일 나무는 오래 전에 한 번 심어 놓은 것이 매해 맛있는 열매를 맺어 줍니다. 이것을 보고도 감사한 마음이 없다고 하면 내촌 감삼의 말대로 그것은 저주받은 마음입니다. 짐승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행, 불행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만족과 불만족이 결정됩니다. 또 감사와 불평이 생깁니다. 사람이 많은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평생 감사한 마음이나 기쁨의 생활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2. 중심 있는 감사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본문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먹을 것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사람이 먹고 입고 편히 살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최고는 아닙니다. 그 다음의 생활은 감사하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를 하되 그 감사는 중심이 있는 감사이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중심을 이룬 감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 감사는 얼마 가지 못하고, 사람이 배가 부르게 되면 그만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탄으로부터 첫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입니다. 40일 동안 금식을 해서 지금 배가 고픈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일주일만 금식을 해보십시오. 별 생각이 다 들어옵니다. 사람은 그만큼 먹는 문제에 대해서 집착력이 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40일 금식 기도를 마치자마자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한 마디로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마4:4)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 말씀은 40일 금식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먹는 문제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참 멋있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대답은 말씀으로 중심을 삼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배가 고파도 실수를 하지 않고 배가 불러도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심 있는 감사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빵이 먼저가 아니고 말씀이 먼저입니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사탄이 하라는 대로 할 수는 없은 일입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만을 위해서 분별 없이 아무 것이나 먹을 수는 더 더욱 없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평생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보람을 느꼈고, 또 그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길을 가다가 어느 움막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갔습니다. 방안에는 어느 30대의 젊은이가 폐결핵으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약을 사다 먹이고 음식을 사다 주고 정성껏 간호해서 이 남자가 회복되었습니다. 얼마나 보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목사님은 몹시도 기뻤습니다. 일년이 지난 후 어느 날 그 남자의 부인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당신이 내 남편을 죽였습니다.”하고 항의하더랍니다. “내가 당신의 남편을 죽이다니, 내가 죽어 가는 당신의 남편을 지성으로 피료하고 간호해서 살려 놓으니까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 목사님은 정색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인이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내 남편은 병들었을 때는 착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건강해지니까 다시 술 먹고, 방탕하고, 바람 피우고 외도하더니 엊저녁에 길거리에서 얼어 죽었소. 그러니 당신이 내 남편을 죽인 것 아닙니까” 이 목사님은 그때 할 말을 잊었다고 합니다. 20년 동안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목회를 했는데 그 꿈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20여 년 목회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실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빵이 먼저가 아니고 말씀이 먼저입니다. 그 사람에게 빵을 먼저 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먼저 주었어야 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굶었으니 먹여 놓고 보자.” 이것은 극히 순리인 것 같지만 그것은 인도주의자들의 생각이지 신앙 안에서는 그것이 바른 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교회가 구제를 해서 사람을 만든 예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을 한 후에도 자신 있게 하신 말씀은 “아직도 빵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시골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시골 노인들을 앉혀 놓고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가 있습니까”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랬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럼 사람은 빵으로는 살 수가 없지,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해” 하시더랍니다. 이것은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들은 모두 한결같이 추상적인 것들입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구원이라든가, 영생, 믿음, 성결, 은혜, 소망, 사랑 등 한결같이 추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또한결같이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입니다. 정말 이것들이 없으면 사람들은 하루도 살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외면하고,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을 우선합니다. 사람들이 결혼할 때를 보십시오. 청년들이 결혼을 할 때 보면 거의가 화려한 것들을 동경합니다. 그래서 학벌을 중시하고, 돈을 따지고, 인물을 보고, 건강을 우선하고, 외모를 중시합니다.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속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후회하며 마음 아프게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앙케이트 조사한 것을 보니까 결혼 생활 10년을 주부들에게 결혼을 해서 함께 살아 보니까 남편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되더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은 사람됨이 문제더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년을 살아온 주부들에게 물었습니다. 20년을 함께 살아 본 결과 무엇이 문제였는가라는 물음에 대다수가 “그것은 성품이 문제더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들도 소중하지만 함께 살아가다 보니 그것들은 다음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보다 먼저는 뜻이 맞아야 살겠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로소 철이 난 후 생각을 해보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자세가 문제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학벌 가지고 삽니까 그리고 사람이 머리만 가지고 살아지는 것입니까 그래서 결혼의 제일 조건은 소유가 아니고, 정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 속에 말씀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이 정신은 나가도 말씀은 남아 있어야 혼돈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사람이 부해져도 타락하지 않고 가난해져도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삭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노인이 되어서 분별력이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도 알아 보지를 못합니다. 나중에는 가족들조차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제자드이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말에 이 선생님은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두 가지는 알지,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것만은 알고 있네.” 정신을 나갔어도, 판단은 흐려졌어도 그것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래야 비로소 이 세상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다 이겁니다. 그래야 양이 적어도 감사하고, 양이 많아도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감사는 일반인들이 하는 감사와는 다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이 초월된 감사입니다. 성공을 해도 감사지만 실패를 해도 감사하는 감사입니다. 건강해도 감사를 하지만 다리가 부러져도 감사하는 그런 감사입니다. 이것이 범사의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삶에는 무엇보다도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감사함은 절대로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져도 깨달음의 지혜가 없으면 그 곳에 낙이 없습니다. 뜻이 없습니다.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드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이 찬송(495장)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그런 찬송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 이 찬송을 부르게 되면 그 뜻이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궁궐에서 살아도 그 곳이 결코 천국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이 주어져도 감사함이 우러나오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초막이 천국일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뜻을 알고 살아가는 인생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풀한 포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깨달을 수만 있으면 그것은 훌륭한 신앙인 것입니다. 초가 삼간에서도 평안을 간직하고 기쁨을 누리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돈 몇 푼 소유로도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라 마음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모든 일을 하나님의 힘을 입어 감사하라.”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여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주일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를 하되, 받았으니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과 환경을 초월한, 많고 적음을 초월한 범사의 감사를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이 추수 감사 주일에 우리들이 하여야 할 감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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