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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믿는 것 (롬4:1-8)

본문

지난주에는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도달한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고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가까운 문맥을 좀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롬 3:23-24절을 봅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한 사건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속 사건은 죄인인 인간에게서 나온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구속 사건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죄인 된 인간을 구속하는 일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 된 자신을 구원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속 사건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라고 했습니다. 구속이 예수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가 인간 구속의 근거입니다. 이것은 물론 예수가 하신 일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가 죄인 된 인간을 대신해서 죽어 주셨기 때문에 죄인의 구속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예수의 사역 때문에 아무 공로도 쌓지 않았고 또 쌓을 수도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23-24절의 말씀은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쳤다는 해석과 너무나 잘 부합합니다.
그러므로 23-24절은 22절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고 해석하도록 지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5절을 봅시다. 믿음과 관계 있는 전반절만을 보겠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화목 제물로 세웠습니다. 어떻게 무엇을 통하여 세웠습니까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그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헬라어의 어법상 이렇게도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번역을 하고 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는 것은 구속사적인 유일무이한 사건인데 그것을 위해서 우리 인간의 믿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인간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번역은 맞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이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운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위하여 세웠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화목제물 되신 주님의 세워짐은 한 번이지만 그것은 항상 믿는 자의 믿음을 통하여 화목제물 노릇을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 피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피 안에서'라는 말은 피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화목 제물로 세우는 데는 그의 피 외에는 다른 어떤 방도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피는 예수가 화목제물 되는 데 유일한 방도요 절대적인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라는 말은 누구의 믿음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원문 성경에는 '그 믿음을 통하여'라고 하여 지시하는 뜻을 가진 관사를 더하여 놓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앞에서 말한 '예수의 믿음'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문맥을 보아서도 우리 인간의 신앙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신앙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구절의 믿음을 예수의 믿음으로 보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의 피 안에서 그 믿음을 통하여' 예수를 화목 제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 옳겠기 때문입니다. 화목 제물 삼는 것은 인간의 것을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 것이 아닌 예수의 것을 가지고 화목 제물로 삼는다면 믿음도 예수의 믿음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자기를 제물로 드린 것과 같은 완전한 믿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관점은 구약과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화목 제물의 자격은 제물 자체에 있지 인간의 바치는 행위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사 제도에서 인간은 그 제물에 참여하여 화목을 누리는 자이지 화목의 근거가 되는 위치에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26절에서도 하반절의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구절을 '예수의 믿음을 근거로 해서 (믿는 자) 그를 의롭다 하려하심이니라'라고 번역하고 보면 지금의 번역이 무엇이 문제가 있는 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3:22절 이후의 문맥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해석을 지지해 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와같이 구절들을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갈2:16, 20, 3:22; 엡3:12; 빌3:9; 약2:1; 계14:12). 물론 이러한 구절들에 대하여 기존의 해석을 고수하려는 견해도 있고 제가 해석하려는 것과 같이 해석하려는 견해간에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는 것에 대하여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22절에 '모든 믿는 자에게'라고 한 것은 우리 인간의 믿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26절 하반절을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든 또는 '예수의 믿음을 근거로 해서 (믿는 자) 그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든 인간의 믿음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27-31절도 인간의 믿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인간이 믿는 행위를 초점으로 하여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4: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이루실 것을 믿은 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하늘에 별과 같이 많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믿는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믿는 행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이 믿는 행위란 하나님이 하신 것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인정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하신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믿음은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하나님이 하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운 일입니다. 인간이 될 수 없는 화목 제물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화목제물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세워서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이 우리의 대속자요 화목제물이라는 사실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말하는 우리 믿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또 사죄의 새로운 세계를 여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치료하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치유함을 받는 사람들이 고백하는 내용도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신분 즉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또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실 일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렇게 인정하는 것을 또한 받아들인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영접한다' 또는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영접과 믿음을 같은 말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이런 여러 가지 말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믿음의 다양한 성격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정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정은 그렇다고 인정하고 끝낼 수도 있습니다. '이것 떡이지'라고 하면 '그래 떡이야'라고 하고는 먹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인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인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화목제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영접한다는 이 말에 대하여 한 가지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접한다' 또는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 된 것 같고 내가 더 큰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접하는 것이 너무 위대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접한다는 것은 항복이요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 굴복하고 그 하신 일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거절할래야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대속자라는 것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그 분 앞에서 꺾어 버리고 굴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믿음을 순종이라고도 합니다. 순종이란 따르고 좇는 것을 의미합니다. 굴복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따르고 좇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따랐듯이 아들을 믿는 자는 아들을 따르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자가 믿는 자입니다. 믿음이 따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 힘이 없는 믿음이요 보잘 것 없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라면 믿는 사람에게 억지로 따르도록 하는 폭군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믿음은 믿는 사람을 굴복하게 하는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추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이렇습니다. 이상에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과 이것을 인정하고 굴복하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믿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인 지, 아니면 바울은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는데 제가 지나치게 구분하는 것인 지는 좀 더 두고 생각해 볼 일입니다만 어쨌든 이 점을 구분하는 일은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과 우리 인간의 사역, 예수님의 믿음과 우리 인간이 예수님께 굴복하게 되는 것이 혼돈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혼돈을 일으키고 나니 나타나는 현상은 인간이 항상 예수님보다 앞서가면서 자기가 주가 되어서 예수님을 향해서 '이래라, 저래라'하면서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일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정신은 하나님 주권을 믿는 마음에서 왔다기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정신 때문에 인간이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도 이룬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교회 현상은 이러한 사고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사역을 강조하고 나니 믿는 자에게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없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과 그의 사역에 굴복하여 주님의 마음 즉 주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스스로 더욱 주님을 따르려고 하게 됩니다. 더욱 말씀을 알려고 하고 더욱 기도하려고 하고 더욱 예배하려고 하고 더욱 사랑하고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고 따르기에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실행하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설령 이렇게 하기가 싫은 때가 있을 때라도 그러한 마음을 쳐서 죽이고 새로이 살려고 하는 것이 믿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하지 않고 자기 편하게 사는 것이 능사인 것 같이 생각합니다. 육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데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게으르고 나태합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주님을 경외함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없는 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입니다. 경외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데 경외가 없다는 것은 주님을 참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근본적으로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하고 참으로 예수를 믿는 자가 되도록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인간이 감히 개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심지어 믿음에 있어서도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예를 들면 갈라디아 2:20절을 들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 번역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내가 산다'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내가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이, 내가 한 일과는 상관없이 예수의 믿음 안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범할 수 없는 예수의 영역입니다. 이 영역이 절대적이며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족하고 넘어질 때가 있고 연약하며 죽을 때까지 범죄하지만 또한 새로 알게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믿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바울을 본받으십시오. 바울의 이런 자세가 주님을 아는 자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본받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하지만 이것이 천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명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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