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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없는 세대여! (마17,1-20)

본문

'믿음'이란 말은 우리 기독교인이 가장 많이 쓰고있는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그만큼 믿음은 성도들의 생활에서 기본이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믿는 마음'이란 뜻으로 영어로 belife입니다. be + life의 합성어입니다. 생명, 생존, 생애, 목숨인 life의 단어 에 현재형인 be를 붙여 믿음, 신념이라는 명사가 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전인격적이고, 생활의 활력을 넣어주는 생명의 원천인 것입니다. 사람이나 어떤 사물을 믿을 수 없다면 우리는 한시라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대상일 경우는 생활의 내용과 질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믿 느냐 그것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믿는 내용에 따라 가치와 인격이 나타나며 생활방식이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지표에서 희망과 꿈을 찾을 수 있는 구체적인 신앙대상을 간직하고 있 어야 합니다. 여러 종교가 있지만 우리 기독교는 예수를 정점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 체이기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에 대하여 바로 알고 있어야 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확고하지 못한 믿음은 오히려 삶을 병들게 하고 황폐하게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거룩한 것을 향하여 끊임없이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있는 사람은 결코 자기가 위대하거나, 완벽하다는 자기만족, 교만, 아집, 허영에 사로 잡히지 않습니다. 믿음은 벌써 자기라는 한계를 알고 자기자신과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무한하신 지혜,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와 높이, 넓이와 길이 에 좀더 가깝게 접촉해 보려고 늘상 모험하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서 믿음은 우리 삶에 있어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 통하는 우리들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렇게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 라가셨습니다. 갑자기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 엘리야가 등장해 예수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적인 장면을 보고 이렇게 지내는 것이 좋으니 초막을 짓고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이때 하늘로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 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제자들과 예수의 토론 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는 엘리야처럼 고난을 받을 것을 미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에서 내 려와 마을로 들어갔을 때 어느 사람이 예수께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데리고 와서 무 릎을 꿇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아들을 제자들에게 먼저 고쳐달라고 했지만 제자들이 고 치질 못하기 때문에 예수에게로 데려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현실에 안주하려는 생활 자세를 탄식하고 어린 아이의 병 을 고쳐주었습니다. 영적으로 닫혀있는 제자들을 보며 실망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충분히 자신들이 고칠 줄 알았지만 고치지 못하는 이유를 예수님에게 조용히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숱한 병을 고치고 기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능히 제자들도 믿음으로 병을 고칠 줄 알았습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읽는다는데 제자들은 아 무 일도 하질 못했습니다. 그건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계시질 않는 데 우리가 고칠 수 있을까하는 의심과 어쩌면 예수가 없을 때 기적을 행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헛된 생각이 그들의 믿음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눈에 보일까 말까 하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저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산에 오르셨을까요 우리가 성서를 보는 깊은 눈이 있다면 이 의미를 쉽게 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생 애의 절정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러한 사역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자 신을 둘러볼 여유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2절에서 그 운명을 예고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해가 어두워지고 땅이 갈라지고 예루살렘의 성전의 휘장 이 찢어지는 이 놀라운 일들은 스스로의 예지와 결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음으로 산에 올라 자신의 길을 준비하고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분주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도시 문명과 경쟁 사회에서 찌들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 피서기간에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오히려 다른 일로 스트레스와 염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 혼탁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지킬 수 있는 계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고요히 하나님 앞에서 교회와 나라를 위 해 기도하는 성도들의 무릎 밑에서 생명샘이 솟아납니다. 이 고요함에서 받는 하늘로부터의 영력만이 현대사회의 갖가지 질병과 자기 자신을 지키는 신앙의 신비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산 위에서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우리는 이 산이 꼭 땅의 높은 것을 가리키는 지역적인 공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집이나 사무실, 교회, 등 모든 곳이 예수님이 오르셨던 곳입니다. 부엌에 서 세계를 본다는 책이 있던데 주부는 주방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하며, 사무 실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땀흘리는 삶의 전선에서 나와 함께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있고, 인공적인 사물이 있으면 아무래도 이러한 기회를 찾기가 어려워 일 부러 기도원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도처인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실 때 얼굴과 옷은 광채로 빛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거룩한 인격의 아름다움이 들어난 것 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자신의 내면세계를 변하게 하고 인격과 영혼을 아름답게 함으로 우리의 품 성은 청초해 지고 고결해 짐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는 큰그릇이 될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교만해 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계시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순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을 짓밟고 있습니다. 역시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변화하는 모습과 하 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에게 들으라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은 예수님에게는 십자가의 고난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하는 계기가 되었고, 세상일에 신경을 쓰며 아무 것도 모르며 따라온 제자들에게는 두고두고 예수님을 전하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이 사건을 예수님 생애의 중 요한 교훈으로 다른 제자들에게 말을 하였고, 마태는 직접 참여하질 않았지만 마치 자기가 체험한 것처럼 자세하게 기록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신앙적인 교훈을 주고 있질 않습니까 이러한 환희와 영광, 예수님은 갑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산 아래로 내려와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다같이 산 아래로 내려가자"하시며 산 아래 기다리고 있던 십자가의 고난을 지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참 신자는 죽어서야 살고, 버려서야 얻는 그리스도 구원의 진리 안에 살 때 진정한 크리스찬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나만 잘살고 나만 편하고, 사회와 이웃의 아픔과 불행을 외면한다면 절름발이 신앙으로 전락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두 다리가 튼튼하게 뻗어 서 자기자신과 가정뿐만 아니라 이 사회와 이웃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던져주는 십자가를 지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던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에 광채가 나며, 모세와 엘리야가 출현하였고, 구름속에서 거룩한 음성이 들려올 때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그렇게 신비롭고 환상적인 곳에서 그 대로 머물고 싶어졌습니다. 바로 이 [여기가 좋사오니]의 말 한마디에 인간의 잘못된 본성이 모두 들어있는 것을 알 아야 합니다. 여기가 왜 좋을까요 여기는 바로 구름 위에 솟아있는 산 속입니다. 여기는 실생활의 삶의 현장이 아니라, 그 야말로 속세를 떠난 자기도피처로 베드로는 만들려고 했습니다. 산 위에 오를 때와 내려올 때는 달라져야 합니다. 산에서 보고 느낀 것들은 그저 산 속에서만 간직하고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산의 아름다움이 그저 좋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 겪었으며, 만나고 헤어졌던 땅 위의 백성들을 위하여 한마디 기도하지 않고 자기자신만의 산행을 만끽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도시의 빈민촌, 농촌의 농부들, 어장의 어부들 틈에 끼어 시달리는 것 보다는 지식의 상아탑, 큰 교회의 분위기, 에어콘 속의 사무실, 사회적 명성과 권세 등이 훨씬 더 신성하고 종교적이고 권위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구질구질한 인간들을 떠나서, 병들고 찌든 이 사회를 떠나서 오래오래 이 산에서 오직 하 늘 영광만을 혼자 즐기는 욕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은혜나 감격을 체험했을 때 혼자만 간직하고 있으면 교만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도 그렇고, 학문도 그렇고,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한 모든 것들은 참다운 인간성에 그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된다면 바로 현실 도피요, 세상의 종말이 될 것입니다. 바로 산 위가 좋사오니 여기에 머뭅시다 하는 종교가 됩니다. 이러한 교회가 있다면 하루속히 문을 닫아야 하며 죽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루 속히 죽는 것이 행복일 것입니다. 천당 가는 것이 그렇게도 소원인데 이 세상에서 '살려는 의지' 자체가 자기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국 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인간지사이지만, 천국은 홀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할 일을 다하고 제대로 살아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직장에서 자기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 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명령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영광을 보고 증언을 들었으니 이제 다 그만두 고 산 아래로 내려가자! 산 아래에서는 아홉 명의 제자가 병든 아이를 고치지 못하여 초조 해 하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조롱합니다. 그 동안 예수와 함께 다니면서 그것도 못하느냐, 그 동안 배운 것이 아무 것도 없느냐, 그러 고도 예수의 제자들이냐, 예수는 너희 같은 제자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하며 비아냥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고 간질병 앓는 어린이의 부모는 애타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아이의 숨이 넘어갈지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야할 세상은 단순하게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두질 않습니다. 별의별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은 바로 '그런데로 내려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병든 자가 고쳐지고, 시기와 질투, 불 신과 대립이 사라져 우수와 회한이 기쁨과 감격, 환희로 전환되는 삶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챤들에게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따를 공동의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는 행진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어느 자리, 어느 모퉁이에서 도사리고 앉아 예배를 받 기만하는 분이 아니라 여기에는 몰아내야 할 성전 안의 장사꾼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깨 끗함을 받아야 할 병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위로를 받아야 할 우리들의 이웃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통일의 그날을 이루어야 할 민족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평화와 질서가 교통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산 위에서의 초월적인 신비를 삶의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그것 이 아주 불필요하거나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 강력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은 명령은 '너의 전 존재(소유와 생명)'을 온전히 바치고 생활 의 한복판에서 십자가를 지라는 요청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방관에서 생활로, 예배에서 봉사로, 침묵에서 감사로 날마다 행동으로 결단되어지는 기록을 만들어 가는 삶의 노트가 주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무대에 기쁨으로 일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열 두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따스한 가정을 떠나서, 자 기 직장과 재산을 버리고 오직 머리 둘 곳도 없는 그리스도를 따라 2년을 하루같이 고락을 함께 나눴습니다. 그들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 주이심을 믿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감히 우리가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따르고 믿었습니다. 그만하면 잘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잘 따르고 잘 믿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 믿음 없는 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셨으며 '이는 너희가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그리고 '너희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본다면 그때 그 제자들에게는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렇게도 믿음없는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 리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한마디 말에 마귀가 쫓겼으며 병자가 고쳐졌습니다. 그들 이 전하는 복음에 평강과 희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병도 고 치지 못했고, 마음도 든든하지 못했고, 군중들에게 소망도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불안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 로가 '그러지 마옵소서'하면서 예수님께서 준비하던 십자가의 길을 막다가 '사탄아 내 뒤에 물러서라'하는 책앙을 들었고 '너희들이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는 어머어마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혹을 떼려했다가 혹을 붙인 꼴 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후 오히려 믿음의 동요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기대하고 생각했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어진 임금이 될 줄 알았는데 도대체 왜 죽어야 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말슴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는데, 그것을 보상받을 길이 없고, 예수가 힘없이 죽어가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가 하는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자기들과 전혀 다른 것을 느끼면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신앙의 동요와 위기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은 자신들도 함께 죽으라는 명령으로 알고 불안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믿는 것이 불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기대와 생각과 맞질 않는데 어떻게 평안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십자가를 진다. 너희도 십자가를 지고야 나를 따를 수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예수 믿는 것이 불안하질 않습니까 십자가를 지어야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솔직히 두렵고 예수 믿기가 싫어집니다. 마음 편하게 정신 휴양이나 하고, 교인들과 어울리고, 적당히 온정을 베풀면서 이럭저럭 신앙을 가지고 생활하면 좋겠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용납하질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가장 엄숙한 말씀임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제자들이 믿음이 적었다고 책망을 듣게 된 것은 그들은 고독감에 빠져 무기력해졌 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명의 제자들과 산 위로 들어가자 다른 제자들은 마음이 하나가 되질 못했습니다. 각자 자기밖에 몰랐습니다.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은 예수님을 원망했으 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시기하였으며, 남아있는 제자들보다 자기가 높고 잘나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식어갔습니다. 그전에 있었던 환상이 사라졌습니다. 사랑은 모든 일에 가장 큰 힘이 되고 일을 선하고 아름답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이들은 사랑을 잃어버리고 철저하게 혼자된 고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간질병 아이를 제대로 고치지 못하고 스승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간질병 아이를 먼저 고쳐서 예수님이 내려오시면 자기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욕심과 분쟁으로 인해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질 못했습니다. 의술은 인술이 될 때 침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늘 함께 다니던 예수님이 계시지 않자 불안해 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 급하여 지도자인 모세가 시내 산에 들어가 40여일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두려웠고 불안했 으며 결국 우상까지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 아홉 명의 제자에게도 이러한 고독감이 찾아왔 습니다. 또한 오늘의 우리에게도 고독이 무섭게 덮쳐옵니다. 우리의 판단과 의지로 인하여 예수를 잃어버리고 불안해하고 있고, 성도들의 사랑을 무시하고, 오기와 감정으로 그러한 사랑을 스스로가 먼저 상실하여 고독에 잠겨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세 번째로) 결국 고독감은 공포심으로 변했습니다. 불안과 고독은 그들을 공포에 몰아 넣었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이 과연 무슨 이를 하겠습니까 불안과 고독, 그 공포의 사슬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따라 다니는 바리새인들이 갑자기 더 무서워 졌습니다. 생전처음 보는 간질병 아이를 앞에 두고 '귀신아, 이 아이에게서 떠나라' 소리를 쳐도 그들의 말에는 힘과 권위가 없었습니다. 권능이 그들에게서 떠난 것을 느낀 제자들은 마귀 사탄을 이길 수 없다는 무서움에 사로잡혀 실망과 경멸로 쳐다보는 간질병 아이의 아버지의 눈이 그렇게 무 서울 수가 없었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사지가 뒤틀린 아이를 보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 게 된 자신들의 처지가 비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무섭고, 자신들에게 날라 올 사람들의 돌팔매에 자신들이 직면할 죽임이 무서워졌습니다. 예수님마저 함께 계시지 않고 능력을 상실한 제자들은 공포에 사로 잡혔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공포감이 느껴집니다. 현대인은 공포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를 근심케 하는 걱정거리가 바로 공포의 원인입니다. 이 공포를 해소하는 방법은 겨자씨만 한 믿음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근심 걱정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너희 믿음이 만일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시니 어려운 때에 큰 도움이십니다. 다만 한가지 우리가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제자들처럼 공포와 수치와 멸시에 빠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지식이 없어서 기술이 부족해서 문화가 낮아서 힘이 없어서 꿈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이것이 아니겠죠. 이런 모든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넘치도록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 점 불안하고 우리를 초조하게 만듭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중심적인 그 무엇 하나가 없 어진 것입니다. 산아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하여 의혹을 느끼고 신앙에 동 요를 받아 스스로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해 버렸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가볍게 생각하 고 하나님을 우리의 생활과 생각에서 지워버린 결과 스스로가 중심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공포와 불안과 고독과 무의미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무엇보다도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입니다.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현실에 용감한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를 만나 나의 전존재를 모두 맡기고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전적인 결단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믿음 가운데 서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가운데서 형제를 사랑하며 내 모든 것을 사랑의 도구로 쓰는 것이 크리스천의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오심으로 인해 산아래 제자들과 환자와 그의 가족, 다른 사람 들까지 각자가 가지고 있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소망 입니다. 예수를 믿고 불안과 공포, 근심과 염려에서 벗어나 알차고 유익한 생활을 합시다.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듣기 전에 "주여 믿습니다. 내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옵소서'하는 기도의 생활로 주안에서 참된 행복 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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