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롬3:21-22)
본문
지난주에는 믿는 자들 마음속에 사시면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한 번 믿게 하시고 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속에서 사시면서 주님이 사신 삶을 본 받아 살게 하신다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오늘은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에 대하여 많은 말씀들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믿음의 가장 중요한 면을 하나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뿐만이 아니라 온 세계 교회가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제가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부분입니다. 온 세계 교회가 대부분 믿음에 대하여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씀이 되기도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저만이 항상 옳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항상 배우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배우기도 하지만 성경을 상고하는 가운데서 성령님께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깨달은 것을 저도 배우기도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한 것을 저도 깨닫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고 이렇게 배우다가 보면 많이 배우는 자가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경우가 바로 제가 먼저 깨달아서 말하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보다 먼저 서양의 어떤 사람이 깨달아 말했었지만 그의 깨달음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저와 같은 사람에게도 성령님은 동일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만 아마 저의 깨달은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몇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몇 안되는 사람도 대구에 있는 몇몇 목사나 교인들일 뿐 소위 학자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아마 내용이 무엇이냐고 궁금해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 무슨 내용인데 그렇게 장황하게 뜸을 들이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교회에서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말씀을 드렸던 내용이기 때문에 깨닫고 있는 분도 많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황하게 뜸을 들이는 것은 그것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되짚고 또 되짚어 볼 필요가 있으며 또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제 잔소리 그만하고 내용이나 이야기해 보시오'라고 하실 것 같아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내용은 오늘 22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라는 구절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구나'라고 이해해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니 '아하, 그것 참 잘 믿었다, 내가 하나님을 믿어 의로워졌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제법 그것을 믿은 나의 믿음을 대단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믿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는 행위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의 믿는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가져오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행위를 암암리에 대단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믿어 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까지 해 왔었습니다. 이것이 온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믿는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문법적으로 볼 때에 그렇습니다. 21-22절에서 주어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도달한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22절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도달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주어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가 무엇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도달하였다고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들에게 도달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번역하고 보면 어법상으로 주어인 의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대상인 믿는 모든 사람에게 도착된다는 뜻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어법상의 상관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즉 주어의 행위가 방도를 통하여 대상에게 미치게 되는 관계가 분명합니다. 주어인 하나님의 의와 방도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대상인 믿는 모든 자가 각각 다른 주체이기 때문에 어법상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에 식으로 해석을 하면 이 관계가 불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도달한다'고 할 때에 말은 되지만 '믿는 자의 믿음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도달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어법상 좀 어색한 번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어와 방도와 주어의 움직임의 영향을 입는 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므로 그 뜻도 모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문법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믿음'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는 어법상의 관계가 분명한 쪽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해석은 가까운 문맥이 지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라고 한 것은 구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구속이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사역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구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해석한 것과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우리에게 입혀 주셔서 의로워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를 이루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지 믿는 우리의 행위가 의를 창출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도달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맞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이것은 성경의 전체 흐름과도 맞는 해석입니다. 성경이 의라고 하는 것은 메시야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는 메시야가 오셔서 죄사함을 가져오는 것을 의로운 해가 떠오른다고(말4:2)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믿음을 의라고 하지 않고 메시야의 사역이 죄사함을 가져올 것을 가리켜 의로운 해가 떠오른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23:5-6절에도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메시야의 다스리는 시대의 특징을 '여호와는 우리의 의다'고 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의로운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통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방도입니다. 의란 메시야의 통치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객관적인 상황입니다. 즉 의는 메시야가 이루어내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신약 마태복음 3:15절에서는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서 세례를 받는 것을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절하는 세례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회개해야 할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은 그 분이 이루시는 대속사역이 의를 이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속 사역을 예수님은 세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할 것을 예시하는 일입니다. 이로 인해서 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의 믿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서 그것을 인정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도달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우리의 의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는 것을 믿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아무 의도 가져 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아버지를 죽기까지 믿었기 때문에 이룬 의을 인정하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행위란 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면 주님이 이루신 의를 인정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적어도 '그렇구나, 주님이 의를 이루셨구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뜨겁지도 않고 또 믿는 것 같다가도 믿지 않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는 중에서도 '주님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셔서 우리의 의가 되셨구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가 없구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만이 우리의 의요 생명을 가져다 주신 분이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자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이러한 마음을 주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믿는다는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믿음을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이 흔들리고 약해질 때도 주님은 흔들리지 않고 약해지지 않으며 여러분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죽기까지 신뢰하신 주님의 믿음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십시오. 이 믿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십니다. 히브리서 5:8절 이하에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믿음이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이 믿음에 소망을 두십시오. 예수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을 분명하게 구분하십시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깨달은 것을 저도 배우기도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한 것을 저도 깨닫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고 이렇게 배우다가 보면 많이 배우는 자가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 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경우가 바로 제가 먼저 깨달아서 말하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보다 먼저 서양의 어떤 사람이 깨달아 말했었지만 그의 깨달음을 아무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저와 같은 사람에게도 성령님은 동일한 깨달음을 주셨습니다만 아마 저의 깨달은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몇 안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몇 안되는 사람도 대구에 있는 몇몇 목사나 교인들일 뿐 소위 학자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아마 내용이 무엇이냐고 궁금해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 무슨 내용인데 그렇게 장황하게 뜸을 들이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교회에서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말씀을 드렸던 내용이기 때문에 깨닫고 있는 분도 많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황하게 뜸을 들이는 것은 그것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되짚고 또 되짚어 볼 필요가 있으며 또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제 잔소리 그만하고 내용이나 이야기해 보시오'라고 하실 것 같아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내용은 오늘 22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라는 구절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라고 이해해 왔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구나'라고 이해해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보니 '아하, 그것 참 잘 믿었다, 내가 하나님을 믿어 의로워졌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제법 그것을 믿은 나의 믿음을 대단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의 믿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는 행위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의 믿는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가져오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행위를 암암리에 대단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믿어 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까지 해 왔었습니다. 이것이 온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믿는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문법적으로 볼 때에 그렇습니다. 21-22절에서 주어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도달한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22절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도달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주어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가 무엇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도달하였다고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들에게 도달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번역하고 보면 어법상으로 주어인 의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대상인 믿는 모든 사람에게 도착된다는 뜻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어법상의 상관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즉 주어의 행위가 방도를 통하여 대상에게 미치게 되는 관계가 분명합니다. 주어인 하나님의 의와 방도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대상인 믿는 모든 자가 각각 다른 주체이기 때문에 어법상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에 식으로 해석을 하면 이 관계가 불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도달한다'고 할 때에 말은 되지만 '믿는 자의 믿음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도달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어법상 좀 어색한 번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어와 방도와 주어의 움직임의 영향을 입는 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므로 그 뜻도 모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문법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믿음'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는 어법상의 관계가 분명한 쪽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해석은 가까운 문맥이 지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이라고 한 것은 구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구속이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사역을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구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해석한 것과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우리에게 입혀 주셔서 의로워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를 이루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지 믿는 우리의 행위가 의를 창출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도달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맞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이것은 성경의 전체 흐름과도 맞는 해석입니다. 성경이 의라고 하는 것은 메시야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는 메시야가 오셔서 죄사함을 가져오는 것을 의로운 해가 떠오른다고(말4:2)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믿음을 의라고 하지 않고 메시야의 사역이 죄사함을 가져올 것을 가리켜 의로운 해가 떠오른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23:5-6절에도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메시야의 다스리는 시대의 특징을 '여호와는 우리의 의다'고 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의로운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통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방도입니다. 의란 메시야의 통치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객관적인 상황입니다. 즉 의는 메시야가 이루어내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신약 마태복음 3:15절에서는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서 세례를 받는 것을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절하는 세례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회개해야 할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은 그 분이 이루시는 대속사역이 의를 이루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속 사역을 예수님은 세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할 것을 예시하는 일입니다. 이로 인해서 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의 믿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서 그것을 인정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도달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우리의 의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는 것을 믿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아무 의도 가져 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아버지를 죽기까지 믿었기 때문에 이룬 의을 인정하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행위란 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면 주님이 이루신 의를 인정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적어도 '그렇구나, 주님이 의를 이루셨구나'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뜨겁지도 않고 또 믿는 것 같다가도 믿지 않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는 중에서도 '주님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셔서 우리의 의가 되셨구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가 없구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만이 우리의 의요 생명을 가져다 주신 분이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자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이러한 마음을 주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믿는다는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믿음을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이 흔들리고 약해질 때도 주님은 흔들리지 않고 약해지지 않으며 여러분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죽기까지 신뢰하신 주님의 믿음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십시오. 이 믿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십니다. 히브리서 5:8절 이하에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믿음이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이 믿음에 소망을 두십시오. 예수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을 분명하게 구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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