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은 대로 될지어다 (눅7:1-10)
본문
기독교인들은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있을지 설교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교인 상호간에 교제를 하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본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면서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로, 백부장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은 휘하에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백부장은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를 섬겼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당당한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로마인과 달리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속국인 유대 민족을 사랑했습니다(5절). 이것은 그가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님을 나타내 줍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며 멀리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방인인 그에게 유대인 친구가 여럿 있었고 장로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대 민족을 사랑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했음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이러다 보니 가버나움의 유대인 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판은 대단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신분이 다르지만 데리고 있는 종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깊이 사랑했습니다(2절). 종이 병들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낫게 하기 위해서 많이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말 시대를 앞서가던 선구자였고 박애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는 이런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난한 유대인 랍비 앞에 서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6-7절)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위치와 한계를 인식하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과시하는 교만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상 로마시민이자 백부장으로서의 그의 권세가 당면 문제인 병든 종을 쾌유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영향력과 평판 그리고 많은 재산 중 그 어느 것도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굳게 신뢰했습니다. 그가 맹목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그가 살고 있는 가버나움 동네에서 헤롯 안디바의 신하의 아들을 낫게 하셨습니다(요4:46-53). 틀림없이 백부장은 그 신하로부터 사건의 이모저모를 들었을 것입니다. 네 사람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침상채 들려온 중풍병자가 죄사함과 고침을 받은 장소도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세리였던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은 이 동네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여러모로 검증된 신뢰할 만한 대상을 믿는 것입니다. 그 대상의 권세나 능력이 충분히 검증되지도 않았는데도 덜컥 믿다가는 사이비 종교에 희생됩니다. 얼마 전에 일본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움 진리교(아사하라 교주)와 우리나라의 영생교(교주 조희성)는 잘못된 믿음이 어떠한 위험과 폐단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셋째로,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장로들의 부탁을 받고 그의 집에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그 예수님이 자기 집에서 죽음 직전에 있는 그의 사랑하는 종을 고치시는 이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시고 있는 예수님을 멈추시게 하고 계신 그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종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백부장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열왕기하서 5:11에는 문둥병자였던 나아만 장군이 선지자가 자신을 직접 만나서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고 종을 통해 말한다고 화를 내는 것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나아만 장군의 말은 보통 사람들의 기대가 무엇인지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믿으려고 합니다. 보기 전에는 쉽사리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차 예수님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 라”(요20:29) 백부장은 눈으로 보지는 못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권세가 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라라는 굳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것을 주님께서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믿음대로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8:13). 종은 그 말씀이 주어진 즉시로 나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2:1)
첫째로, 백부장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은 휘하에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백부장은 갈릴리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를 섬겼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당당한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로마인과 달리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속국인 유대 민족을 사랑했습니다(5절). 이것은 그가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님을 나타내 줍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며 멀리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방인인 그에게 유대인 친구가 여럿 있었고 장로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대 민족을 사랑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로 개종했음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이러다 보니 가버나움의 유대인 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판은 대단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신분이 다르지만 데리고 있는 종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깊이 사랑했습니다(2절). 종이 병들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낫게 하기 위해서 많이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말 시대를 앞서가던 선구자였고 박애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는 이런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난한 유대인 랍비 앞에 서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6-7절)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위치와 한계를 인식하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과시하는 교만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상 로마시민이자 백부장으로서의 그의 권세가 당면 문제인 병든 종을 쾌유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영향력과 평판 그리고 많은 재산 중 그 어느 것도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굳게 신뢰했습니다. 그가 맹목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그가 살고 있는 가버나움 동네에서 헤롯 안디바의 신하의 아들을 낫게 하셨습니다(요4:46-53). 틀림없이 백부장은 그 신하로부터 사건의 이모저모를 들었을 것입니다. 네 사람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침상채 들려온 중풍병자가 죄사함과 고침을 받은 장소도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세리였던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은 이 동네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여러모로 검증된 신뢰할 만한 대상을 믿는 것입니다. 그 대상의 권세나 능력이 충분히 검증되지도 않았는데도 덜컥 믿다가는 사이비 종교에 희생됩니다. 얼마 전에 일본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움 진리교(아사하라 교주)와 우리나라의 영생교(교주 조희성)는 잘못된 믿음이 어떠한 위험과 폐단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셋째로,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장로들의 부탁을 받고 그의 집에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그 예수님이 자기 집에서 죽음 직전에 있는 그의 사랑하는 종을 고치시는 이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시고 있는 예수님을 멈추시게 하고 계신 그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종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백부장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열왕기하서 5:11에는 문둥병자였던 나아만 장군이 선지자가 자신을 직접 만나서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고 종을 통해 말한다고 화를 내는 것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나아만 장군의 말은 보통 사람들의 기대가 무엇인지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믿으려고 합니다. 보기 전에는 쉽사리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차 예수님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 라”(요20:29) 백부장은 눈으로 보지는 못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권세가 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라라는 굳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것을 주님께서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의 믿음대로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8:13). 종은 그 말씀이 주어진 즉시로 나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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