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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들에 대한 심판 (겔31:1-14)

본문

이 나무들의 비유는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하였던 민족들에 대한 일련의 심판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 비유가 하나님의 심판을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적들 및 경쟁자들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것은 히브리 예언의 특징적인 면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보다도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라들에 대하여는 항상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예언적 심판이 행해졌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인간들의 모든 성취와 업적이 지니고 있는 인간의 공통적인 약점을 숨기려고 하며, 그들 능력의 신적인 원칙을 부인하고 열국들 가운데서의 그들의 지위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업적으로 인한 것이 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비유에서 앗수리아는 물가에서 자라는 나무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물들이 그들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그러나 그 나라는 그 나라를 “장대하게 하고 그 가지를 길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물가에 있는 모든 나무로 키가 높다고 교만치 못하게 하며‥‥‥ 능한 자도 스스로 높아 서지 못하게 함이니.”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열국에 내린 예언적 심판이 함축하고 있는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유일한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 저항하기 때문에 열국들에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한한 인간이 강하게 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들 자신을 더 강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유한한 인간이 지혜로울 수 있는 것보다 자신들이 더 지혜롭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적인 특권들과 대립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 주제 중 하나입니다. 창세기의 타락의 신화 속에는 인간의 죄의 근거에 거짓된 교만이 놓여 있다고 제시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동산에 있는 나무들 중에서 오직 그것만이 금지 되어 있었던 “선악을 아는 나무”의 궁극적인 신비를 파헤치려 했습니다. 그것이 타락의 원인이었습니다. 바벨탑의 심오한 비유에서도 우리는 인간들이 “성 과 대를 쌓아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노력에 대해 질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게 하여 창 11:4-8에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신약에서도 역시 인간과 하나님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이와 동일한 해석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3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형상”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서적 사상 전체에는 인간들과 국가들에게 “그들이 마땅이 생각해 야 할 것 이상을 생각지 말라”는 경고가 영원한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경고들은 깊은 믿음을 가지고 견디면, 능력의 거짓된 과시를 통해 그의 연약함을 감추거나, 그의 진정한 능력이라 하지만 항상 제한된 것입니다. 이것은 제약들을 망각하려는 인간 경향에 대한 인간 영혼의 불안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불안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인식에 의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심판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 교만한 나라들에 심판이 내려진 이유는 항상 “심판의 날에 그들이 그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현대인들과 현대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위대성과 그 능력을 행사 하는 인간들의 약함과 가사성간에 있는 모순은 일반적으로 자연과학의 완 전과 사회과학의 불완전간의 모순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또는 그것은 인간의 과학적 성취와 도덕적 성취간의 대조로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조들은 문화자체 이상의 어떤 것에 기인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패러독스에서, 즉 인간의 위대성과 연약함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계속해서 증대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본질적인 연약함은 항상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러한 패러독스는 더욱더 위험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멸절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그 능력과 더불어 그 나라로 하여금 그 능력의 안전한 관리자가 되게 해 줄 탁월한 지혜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일단의 국가들이 이러한 힘을 소유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직접적인 전망을 가져다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그러한 힘의 소유자들에게 도전할 마음을 갖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국가나 일단의 국가들이 이러한 힘을 소유하는 것으로 궁극적인 평화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국가들이 이러한 힘의 독점적인 소유에 대해 분개할 것이 며, 옳든 그르든 간에 그러한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정치의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그들도 그와 동일한 힘이나 그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또 다른 은밀한 힘을 소유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의 파괴력의 증가는 세계 공동체의 조직을 위해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파괴력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국가들을 상호 멸절시킬 위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러한 멸절에 대한 공포로 인해 그들의 교만을 절제할 것이며 불균형 한 힘의 소유로 인한 일시적인 이익에 집착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입니다. 인간들이 그들이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현대 전쟁의 잔인성을 맛보기 전에 이런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지혜가 고안해 볼 수 있는 가장 공정한 통치 기구의 지배하에 이 큰 힘을 맡기려고 하기 전에 그들이 파멸의 위험에 직면해야만 하는지의 여부는 그들이 모든 인간적인 허세에 대해 내릴 심판을 얼마나 절실하게 지각하고, 또한 예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심판에 대한 예견을 선언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겸손히 회개 하면서 심판을 예견케 함으로써 심판을 면하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다가올 진노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은 항상 있습니다. 우리의 세대는 이런 세대들이 직면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진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하 지만 우리에게도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새로운 힘의 소유에 대처하기 위해 각 나라들이 지녀야 할 겸손은 부분적으로는 특정한 정책이 다른 나라들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지를 측정 할 수 있는 예리한 정치적 지혜에 의해 성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예리한 정치적 관찰자는 한 국가나 일단의 국가들에 의한 힘의 과시가 다른 나라들의 복종을 항구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 이러한 겸손은 신앙에 의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취라기보다는 오히려 은혜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인생의 총체적인 차원에서 인생을 식별하고 모든 인간의 판단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하는 신앙의 부산물입니다. 인간들과 국가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하나님의 자비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심판을 예견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심판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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