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좀 달라 (요4:1-9)
본문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은 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 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행로 에 곤하셨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곤하셨기 때문에 물을 달라고 하셨다는 이것이 그 이유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뒷부분에 가서 보면 나중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잡수실 음식을 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30-32절을 보십시다. "저희가 동리에서 나와 예수께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이렇게 대 답을 하십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곤해서 우물가에 앉으셨고 제자들은 음식을 구해가지고 와서 막상 잡수시라고 하였을 때에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 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는 그 요구가 필요하신 것을 요구하신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론' 우선 본문 말씀 중에 5절을 보시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는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참고로 창33:18절을 보시겠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난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부분은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 오면서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고 환도뼈가 위골되어서 다리를 절 었다는 기록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 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부터 출발하여 벧엘로 돌아가다가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고 숙곳에 이르렀다가 가나안 땅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치고 자기가 장막을 친 그 밭을 돈을 주고 샀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지방의 팔레스틴 지경은 광야가 많고 평야가 적은 곳이라서 목축업 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물이란 아주 요긴한 것이며 터를 잡는데 가장 근본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야곱이 장막을 쳤던 곳에 분명히 우물 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 거기에 야곱 의 우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또한, 창48:21-22절에 보면 오늘 본문 5절 하반절의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이 가 깝다'라는 기록을 증거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아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 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 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사마리아 수가라는 땅은 과거에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으로서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라고 그럽니다. 조금 전의 창38:18절 에서는 돈을 주고 샀다고 했는데, 창48:21-22절에서는 칼과 활로 빼앗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과 사마리 아 여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이해해야 됩니다. 수가라는 동네의 이름은 '돈을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값을 주고 샀다는 표현은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이것이 우리 성도들 을 향하여 성경이 붙인 칭호입니다. 주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주께서 희생의 대가를 치루시고 빼앗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바로 신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 가라는 성의 이름 자체가 그와같은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 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동네-즉, 돈 주고 산 동네에 와서 야곱의 우물물에 이르렀는데 그 우물은 야 곱이 돈을 주고 샀고 그 후손들은 그저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돈을 주고 샀을 뿐아니라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아모리의 손에서 칼과 활로 빼앗은 것이 라는 것은, 야곱이 산적이나 강도같이 땅을 빼앗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땅을 정당 하게 샀으면서도 그것을 원수들의 손에서 어떻게 지켰는가 하는 표현이 숨어있는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이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수가 여인 사건은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어떻 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죄값을 치루시고 자기의 자녀로 삼으시는가 하는 상징적인 표편으로서 등장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날 기대나 목마름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값을 주고 사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값을 치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친히 값을 치르십니다.
요4: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 를 네게 주었으리라"는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게서는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 시고는 우리를 사러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 자리에 나 오겠다고 애를 쓴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 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값을 주고 사신 데에 촛점을 두려는 것이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와서 물을 달라는 것으로 대화의 시작을 여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행로에서 피곤하여 물을 달라고 하는 것뿐 아니라 사 마리아 여인에게 무언가 짚고 넘어갈 것이 있고 가르칠 것이 있고 그 영안을 열게 하실 이유가 있어서 물을 달라고 하는 것으로 말문을 여신 것입니다. 무었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여 돌아 와 잡수시기를 권하였을 때에 32절에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셨고, 34절에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것이 니라"고 대답하셨기 때문입니다. '물을 달라!'는 이 말은 아주 단순한 말입니다만 여기에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의도 하심과 배려가 숨어 있는가를 우리는 주의하여 찾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였을 때, 사마리아 여인의 대답이 어떠 했습니까 9절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좀 달 라 하나이까"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는 의도는 바로 이 같은 대답을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다시말해,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님에 게 물을 줄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 가 하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조금 요구하셨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지금 무슨 물을 요 구하고 있습니까 거기에는 돈이 있고, 시간이 있으며, 몸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주님께서는 조금의 돈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정당하게 응하 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한 달에 만 원씩 번다면 천 원씩 십일조를 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천 만원을 벌 때 백만원을 내는 것은 조금 힙이 듭니다. 그러나, 일억 쯤 버는 사람이 천만원을 내는 것은 별로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이 없는 사람들이 더 잘 냅니다 돈을 잘 못 번다고 자포자기가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마는 돈을 많이 가진 자보다 적게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잘 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낼 때마다 이런 갈등 속에 빠집니다. 꼭 십분의 일을 내야만 되는가 하나님께서 돈을 보시는가, 정성과 진심을 보시겠지!. 왜 이런 생각을 합니까 결국 돈이 아깝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잘 내야 하나님의 일이 잘되고, 안 내면 주의 사업이 제대로 안 된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 요구를 정당하게 지키고 실천하려고 할 때에 사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좀 달라!'는 요구를 통하여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있는 한심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들을 스스로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의 참 모습을 드러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중심 깊이 뒤엉켜있는 문제가 해 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물 좀 달라는 요구를 통해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점을 돌이켜 볼 수 있었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끊 임없이 동일한 요구를 해 오시는 것입니다. 돈 문제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무었에다 가장 많은 돈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한달의 용돈 중에서 우리가 제일 많이 사용하는 항목은 거의 모두가 자기와 자신 의 향락을 위해서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로만 구제하고, 말로만 봉사를 했다는 사실이 돈을 어디다 많이 사용하느냐를 보면 확실해 지는 것입니다. 돈을 가장 많이 쓴 곳이 가장 관심이 있는 곳이고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자기를 한 번 정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앞에 봉사 하기를 원한다고 말로는 하기 쉽습니다만 정작 돈을 어디에 제일 많이 쓰는가를 적 어 보시면 우리는 아직도 옷을 사고 놀러 다니고 생색을 내는 데에 훨씬 관심이 쏠 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살아가는 자나 다름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물을 좀 달라'는 요구를 통하 여 '네가 누구냐'하는 질문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연 너는 하나님께 대한 관 심과 믿음과 사랑이 있었더냐 너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때에 과연 너는 어떠한 존재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거기서 부터 출발하여 결국 이 여인은 이런 지적을 받습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여자가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지적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묻어두고 넘어가서는 참된 구원과 기쁨의 만 남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교회란 아무런 말썽도 없고 무슨 일이든지 잘 하고 부끄러움이 없고 자 랑할 것이 많은 곳이 교회일 것이라고 상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 앞에서 속속들이 지적을 받은 여인처럼, 교회는 주님 앞에서 지적받고 아프게 깨달아 해 결 받는 곳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해결 받아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곳이 지상 의 교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교회는 순군수군하고, 빈정거리고, 삐죽거리고, 경쟁을 하고,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이만하면 꽤 괜찮게 살아가는 것이다.'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하다보면 곧 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발견되어지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동료 집사님이 은혜를 받았다며 거금의 돈을 내 놓고 봉사를 하지만 결국 그 집사님은 생색내는 일을 훨씬 더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나 스스로도 안 그런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 알고보니 교회에서 제일 말썽을 많이 부리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 놀라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멋있게 이루어 드리는 곳이라기 보다, 착각과 환상 속에 사로잡힌 신자들이 모여 '바로 내가 사마리아 여 인이구나!, 바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구나!, 나야말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이 구나!'하는 자탄과 절망 속에 가슴아파하는 회개의 기도가 유도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여러가지 문제들을 일으키시고 일 거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이상으 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 가운데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잘 알게된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39-4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 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이렇게 사마리아 여자가 새로운 안목을 갖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변화된 것은 자 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사실을 지적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하였다"(39절),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님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18절). 이같은 지적을 받을 때에, 다시말해 인간이 누구 냐 하는 사실을 바로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뭔가 하나님을 위하여 그럴듯한 일을 하거나, 하나님께서 못하시는 일을 옆에서 도와 드려서 그 일을 완성시키는 보조원이 아닙니다. 신자란 다만 인간이 얼마나 희망이 없는 존재이며,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처참한 자리에 있으며, 우리 가 얼마나 냄새나는 죄인인가를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깊이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며, 자랑하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깨닫고 그 깊이와 아픔을 남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또한, 이와같은 일들을 지적받아야 하고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같은 사역을 위하여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고 우리들 심령 앞 에 서시어 "내게 물 좀 달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부딪침이 있 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점점 관중만 늘어가고 있는 데에 대하여 우려를 금할 수가 없 습니다. 교회에 오기는 오되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헌금이나 하고 도망이나 가듯이 빨리 교회를 빠져 나가버리는 것으로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만연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신자가 이렇게 많았던 적이 없었고, 오늘날처럼 많은 목사가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여기 저기에 교회가 서고 한 건물 안에도 몇 개의 교회가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대형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 자꾸만 대형화로 변합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 참여하는 것은 싫고 뒤에 앉아 서 몰래 구경꾼이 되고 싶은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 중에는 교회가 점점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압니다. 목사에 대 한 실망, 교회에 대한 실망, 직분자들에 대한 실망 이런 것들이 우리 모두를 교회 에 적극 참여하는 신자가 아니라 구경하는 신자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가능한 한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된다.' 여러분, 과연 그럴까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축구를 볼 때에 세계적인 마라도나나 펠레가 하는 축구를 TV 위성 중계 덕 택에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하는 축구를 보다가 한국 축구를 보게되면 왜 저렇게 밖에 할 수 없나 하고 답답해 합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 운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직접 나가서 공을 차보십시오. 공 이 발에 제대로 맞은 적이 있습니까 눈으로 보고 하는 것같이 자기를 속일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만큼 또한 쉬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훈련도 필요없고 멍도 들지 않고 근육의 통증도 없이 그저 베게 하나를 베고 누워서 리모콘으로 여 기를 눌렀다 저기를 눌렀다 하면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런 식의 구경꾼이 되어 가지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참여해 보아서 멍도 들어보고, 실패도 해보고, 울어봐야 합니다. 잘 할줄 알 았더니 알고보니 내가 이런 정도 밖에 안되구나! 하며 아파해야 성장이 있습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케 하는 훈련이 없이는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뼈 아픈 훈련과 참여가 없는 신자는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그렇게 멍들고 터지고 실패하는 경험의 과정들을 지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유로 값주고 사신 바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칼과 활로써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영광의 자리에 까지 성장하라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주고, 좋은 옷 좋은 책을 사주고, 좋은 독 방을 만들어 주는 이유가 무었입니까 마음껏 먹고 쉬고 놀고 즐기기만 하라는 것 입니까 아들답게 딸답게 크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보호하고 잘 해 주는 것이 아닙 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귀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영광스러운 자녀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 답게 크라고 그러 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건강의 축복을 주시고, 물질의 여유를 주시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축복을 주신 것이 자신만의 시간을 늘이고 놀고 쉬라는 뜻 인줄 아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도살장으로 가기위해 사육되는 돼지라면 몰 라도 신자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무었을 해야 할까요 가만히 구경만 하고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시며 너는 돈을 내라, 너는 시간을 내라, 너는 목사를 해라, 너는 집사를 해라, 너는 장로를 해라, 너는 여 전도회 회장을 해라, 이렇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고 힘이 없으셔서 부르십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었을 위해서 부르시는지 아십니까 우리 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그래서 고치고, 훈련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 의 목적지까지 오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축복이 있고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경만 하고 도망가는 그런 미련한 사람은 되지 말아 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교회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는 할 일이 많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없으면 안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니라 도 하나님께서는 저 돌들로 명하사 이 교회의 일들을 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에게 이 교회의 일이 필요하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이 교회의 일은 우리의 훈련을 위해서 주셨으며, 우리가 더 하나님의 자녀다와 지는 일을 위 한 공부거리요, 숙제거리로 주신 것입니다. 숙제란 할 수 있는 문제를 주기보다 어려운 문제를 주는 것이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어려운 문제를 주어서 그 다음 단계를 준비 시키는 것입니다. 국민학생 에게 주는 숙제가 다르고, 중학생에게 주는 숙제가 다르고, 고등학생에게 주는 숙 제가 다른 법입니다. 각자는 자기의 숙제를 찾으시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물을 좀 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포 함된 우리를 향한 엄청난 도전입니다. 우리 모두는 힘들고 어려워도 이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편안함 속에 세월 만 보내려 하였던 게으름과 나태함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향 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앞에 허락된 숙제와 훈련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훈련을 통하여 성장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는 그 요구가 필요하신 것을 요구하신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론' 우선 본문 말씀 중에 5절을 보시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는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참고로 창33:18절을 보시겠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난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부분은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 오면서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고 환도뼈가 위골되어서 다리를 절 었다는 기록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 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부터 출발하여 벧엘로 돌아가다가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고 숙곳에 이르렀다가 가나안 땅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치고 자기가 장막을 친 그 밭을 돈을 주고 샀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지방의 팔레스틴 지경은 광야가 많고 평야가 적은 곳이라서 목축업 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물이란 아주 요긴한 것이며 터를 잡는데 가장 근본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야곱이 장막을 쳤던 곳에 분명히 우물 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 거기에 야곱 의 우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또한, 창48:21-22절에 보면 오늘 본문 5절 하반절의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이 가 깝다'라는 기록을 증거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아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 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 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사마리아 수가라는 땅은 과거에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으로서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라고 그럽니다. 조금 전의 창38:18절 에서는 돈을 주고 샀다고 했는데, 창48:21-22절에서는 칼과 활로 빼앗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과 사마리 아 여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이해해야 됩니다. 수가라는 동네의 이름은 '돈을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값을 주고 샀다는 표현은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이것이 우리 성도들 을 향하여 성경이 붙인 칭호입니다. 주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주께서 희생의 대가를 치루시고 빼앗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바로 신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 가라는 성의 이름 자체가 그와같은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 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동네-즉, 돈 주고 산 동네에 와서 야곱의 우물물에 이르렀는데 그 우물은 야 곱이 돈을 주고 샀고 그 후손들은 그저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돈을 주고 샀을 뿐아니라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아모리의 손에서 칼과 활로 빼앗은 것이 라는 것은, 야곱이 산적이나 강도같이 땅을 빼앗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땅을 정당 하게 샀으면서도 그것을 원수들의 손에서 어떻게 지켰는가 하는 표현이 숨어있는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이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수가 여인 사건은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어떻 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죄값을 치루시고 자기의 자녀로 삼으시는가 하는 상징적인 표편으로서 등장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날 기대나 목마름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값을 주고 사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값을 치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친히 값을 치르십니다.
요4: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 를 네게 주었으리라"는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게서는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 시고는 우리를 사러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 자리에 나 오겠다고 애를 쓴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 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여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값을 주고 사신 데에 촛점을 두려는 것이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와서 물을 달라는 것으로 대화의 시작을 여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행로에서 피곤하여 물을 달라고 하는 것뿐 아니라 사 마리아 여인에게 무언가 짚고 넘어갈 것이 있고 가르칠 것이 있고 그 영안을 열게 하실 이유가 있어서 물을 달라고 하는 것으로 말문을 여신 것입니다. 무었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여 돌아 와 잡수시기를 권하였을 때에 32절에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셨고, 34절에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것이 니라"고 대답하셨기 때문입니다. '물을 달라!'는 이 말은 아주 단순한 말입니다만 여기에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의도 하심과 배려가 숨어 있는가를 우리는 주의하여 찾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였을 때, 사마리아 여인의 대답이 어떠 했습니까 9절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좀 달 라 하나이까"라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는 의도는 바로 이 같은 대답을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다시말해,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님에 게 물을 줄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 가 하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조금 요구하셨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지금 무슨 물을 요 구하고 있습니까 거기에는 돈이 있고, 시간이 있으며, 몸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주님께서는 조금의 돈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정당하게 응하 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한 달에 만 원씩 번다면 천 원씩 십일조를 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천 만원을 벌 때 백만원을 내는 것은 조금 힙이 듭니다. 그러나, 일억 쯤 버는 사람이 천만원을 내는 것은 별로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돈이 없는 사람들이 더 잘 냅니다 돈을 잘 못 번다고 자포자기가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마는 돈을 많이 가진 자보다 적게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잘 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낼 때마다 이런 갈등 속에 빠집니다. 꼭 십분의 일을 내야만 되는가 하나님께서 돈을 보시는가, 정성과 진심을 보시겠지!. 왜 이런 생각을 합니까 결국 돈이 아깝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잘 내야 하나님의 일이 잘되고, 안 내면 주의 사업이 제대로 안 된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 요구를 정당하게 지키고 실천하려고 할 때에 사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좀 달라!'는 요구를 통하여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있는 한심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들을 스스로 볼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의 참 모습을 드러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중심 깊이 뒤엉켜있는 문제가 해 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물 좀 달라는 요구를 통해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점을 돌이켜 볼 수 있었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끊 임없이 동일한 요구를 해 오시는 것입니다. 돈 문제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었인지를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무었에다 가장 많은 돈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한달의 용돈 중에서 우리가 제일 많이 사용하는 항목은 거의 모두가 자기와 자신 의 향락을 위해서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로만 구제하고, 말로만 봉사를 했다는 사실이 돈을 어디다 많이 사용하느냐를 보면 확실해 지는 것입니다. 돈을 가장 많이 쓴 곳이 가장 관심이 있는 곳이고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자기를 한 번 정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앞에 봉사 하기를 원한다고 말로는 하기 쉽습니다만 정작 돈을 어디에 제일 많이 쓰는가를 적 어 보시면 우리는 아직도 옷을 사고 놀러 다니고 생색을 내는 데에 훨씬 관심이 쏠 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살아가는 자나 다름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물을 좀 달라'는 요구를 통하 여 '네가 누구냐'하는 질문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연 너는 하나님께 대한 관 심과 믿음과 사랑이 있었더냐 너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때에 과연 너는 어떠한 존재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거기서 부터 출발하여 결국 이 여인은 이런 지적을 받습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여자가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지적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묻어두고 넘어가서는 참된 구원과 기쁨의 만 남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교회란 아무런 말썽도 없고 무슨 일이든지 잘 하고 부끄러움이 없고 자 랑할 것이 많은 곳이 교회일 것이라고 상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 앞에서 속속들이 지적을 받은 여인처럼, 교회는 주님 앞에서 지적받고 아프게 깨달아 해 결 받는 곳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해결 받아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곳이 지상 의 교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교회는 순군수군하고, 빈정거리고, 삐죽거리고, 경쟁을 하고,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이만하면 꽤 괜찮게 살아가는 것이다.'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하다보면 곧 잘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발견되어지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동료 집사님이 은혜를 받았다며 거금의 돈을 내 놓고 봉사를 하지만 결국 그 집사님은 생색내는 일을 훨씬 더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나 스스로도 안 그런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 알고보니 교회에서 제일 말썽을 많이 부리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 놀라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멋있게 이루어 드리는 곳이라기 보다, 착각과 환상 속에 사로잡힌 신자들이 모여 '바로 내가 사마리아 여 인이구나!, 바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구나!, 나야말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이 구나!'하는 자탄과 절망 속에 가슴아파하는 회개의 기도가 유도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여러가지 문제들을 일으키시고 일 거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이상으 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 가운데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잘 알게된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39-4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 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이렇게 사마리아 여자가 새로운 안목을 갖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변화된 것은 자 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사실을 지적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하였다"(39절),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님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18절). 이같은 지적을 받을 때에, 다시말해 인간이 누구 냐 하는 사실을 바로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뭔가 하나님을 위하여 그럴듯한 일을 하거나, 하나님께서 못하시는 일을 옆에서 도와 드려서 그 일을 완성시키는 보조원이 아닙니다. 신자란 다만 인간이 얼마나 희망이 없는 존재이며,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처참한 자리에 있으며, 우리 가 얼마나 냄새나는 죄인인가를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깊이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며, 자랑하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깨닫고 그 깊이와 아픔을 남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또한, 이와같은 일들을 지적받아야 하고 그것을 깨우쳐야 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같은 사역을 위하여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고 우리들 심령 앞 에 서시어 "내게 물 좀 달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부딪침이 있 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점점 관중만 늘어가고 있는 데에 대하여 우려를 금할 수가 없 습니다. 교회에 오기는 오되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고 헌금이나 하고 도망이나 가듯이 빨리 교회를 빠져 나가버리는 것으로 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만연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신자가 이렇게 많았던 적이 없었고, 오늘날처럼 많은 목사가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여기 저기에 교회가 서고 한 건물 안에도 몇 개의 교회가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대형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 자꾸만 대형화로 변합니까 그것은 교회 안에 참여하는 것은 싫고 뒤에 앉아 서 몰래 구경꾼이 되고 싶은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 중에는 교회가 점점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압니다. 목사에 대 한 실망, 교회에 대한 실망, 직분자들에 대한 실망 이런 것들이 우리 모두를 교회 에 적극 참여하는 신자가 아니라 구경하는 신자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는 가능한 한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된다.' 여러분, 과연 그럴까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축구를 볼 때에 세계적인 마라도나나 펠레가 하는 축구를 TV 위성 중계 덕 택에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하는 축구를 보다가 한국 축구를 보게되면 왜 저렇게 밖에 할 수 없나 하고 답답해 합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쉬 운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직접 나가서 공을 차보십시오. 공 이 발에 제대로 맞은 적이 있습니까 눈으로 보고 하는 것같이 자기를 속일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만큼 또한 쉬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훈련도 필요없고 멍도 들지 않고 근육의 통증도 없이 그저 베게 하나를 베고 누워서 리모콘으로 여 기를 눌렀다 저기를 눌렀다 하면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런 식의 구경꾼이 되어 가지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참여해 보아서 멍도 들어보고, 실패도 해보고, 울어봐야 합니다. 잘 할줄 알 았더니 알고보니 내가 이런 정도 밖에 안되구나! 하며 아파해야 성장이 있습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케 하는 훈련이 없이는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뼈 아픈 훈련과 참여가 없는 신자는 각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그렇게 멍들고 터지고 실패하는 경험의 과정들을 지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유로 값주고 사신 바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칼과 활로써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영광의 자리에 까지 성장하라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주고, 좋은 옷 좋은 책을 사주고, 좋은 독 방을 만들어 주는 이유가 무었입니까 마음껏 먹고 쉬고 놀고 즐기기만 하라는 것 입니까 아들답게 딸답게 크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보호하고 잘 해 주는 것이 아닙 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귀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영광스러운 자녀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 답게 크라고 그러 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건강의 축복을 주시고, 물질의 여유를 주시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축복을 주신 것이 자신만의 시간을 늘이고 놀고 쉬라는 뜻 인줄 아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도살장으로 가기위해 사육되는 돼지라면 몰 라도 신자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무었을 해야 할까요 가만히 구경만 하고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거리를 주시며 너는 돈을 내라, 너는 시간을 내라, 너는 목사를 해라, 너는 집사를 해라, 너는 장로를 해라, 너는 여 전도회 회장을 해라, 이렇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고 힘이 없으셔서 부르십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었을 위해서 부르시는지 아십니까 우리 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그래서 고치고, 훈련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 의 목적지까지 오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축복이 있고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경만 하고 도망가는 그런 미련한 사람은 되지 말아 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교회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는 할 일이 많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이 없으면 안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아니라 도 하나님께서는 저 돌들로 명하사 이 교회의 일들을 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에게 이 교회의 일이 필요하다고 해야 정확합니다. 이 교회의 일은 우리의 훈련을 위해서 주셨으며, 우리가 더 하나님의 자녀다와 지는 일을 위 한 공부거리요, 숙제거리로 주신 것입니다. 숙제란 할 수 있는 문제를 주기보다 어려운 문제를 주는 것이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어려운 문제를 주어서 그 다음 단계를 준비 시키는 것입니다. 국민학생 에게 주는 숙제가 다르고, 중학생에게 주는 숙제가 다르고, 고등학생에게 주는 숙 제가 다른 법입니다. 각자는 자기의 숙제를 찾으시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물을 좀 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포 함된 우리를 향한 엄청난 도전입니다. 우리 모두는 힘들고 어려워도 이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편안함 속에 세월 만 보내려 하였던 게으름과 나태함의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향 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앞에 허락된 숙제와 훈련을 달게 받기로 결심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훈련을 통하여 성장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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