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없어 (막4:35-41)
본문
예수님은 그날 많은 일정을 소화해 내셨습니다. 그래서 몸은 솜 처럼 피곤했습니다. 몰려오는 군중들을 잠시 피해야겠다는 생각 을 했습니다. 갈릴리 호수 건너편(거라사 지방)으로 가서 좀 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 붙었습니다. 설 교를 들은 열성파군중들이 배까지 동원해서 예수님의 일행을 따 랐던 것입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떠하든 예수님은 배가 출발하자마자 이내 곤 한 잠에 떨어 졌습니다. 너무 피곤한 까닭이었습니다. 당시 배 안에는 신분이 높은 분이 탈것을 대비해서 고물에 작은 의자와 베게가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게까지 베고 곤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몸을 기대고 주무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정하고 주무신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바람이 거세지 고, 집채만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배는 뒤집힐 듯 요동을 쳤습니다. 파도가 배안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배 안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난장판입니다. 노련한 배꾼 들인 제자들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 수면은 바다 밑 200미터입니다. 때문에 헬몬산 쪽 의 급한 기류가 호수로 쏟아져 내려오면 무서운 풍랑을 일으킨다 고 합니다. 너무 큰 풍랑이라서 배에 물이 들어와서 곧 침몰할 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물이 배에 가득찼다고 했습니다. 위험 한 상황이 극에 달했습니다. 배에 고기가 가득한게 아니라 물이 가득한 것입니다. 삶의 위기입니다. 침몰직전의 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문제없다는 듯 깊은 잠을 계속 자고 있습니다. 정말 깊이 잠든 것일까요, 아니면 짐짓 문제없음을 가르치 려 일부러 그렇게 계신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폭풍속에서의 고 요를 만끽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쨋든 우리 주님은 폭풍치는 상 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계셨습니다. 잠에 관한 한 저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건국대학교 에서 문익환 목사님이 강연을 한다고 해서 동료들과 함께 간 적 이 있었습니다. 잔디밭에서 노천 강연을 할 때입니다.
그런데 강 연을 시작한 얼마쯤 지나 비가 후두둑 떨어지더니 이내 빗줄기가 굵어졌습니다. 청중들은 하나둘씩 건물 처마로 피신했습니다. 끝 내는, 강연도 장소를 옮겨하기로 하고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를 다 맡으면서 잔디밭에 웅크려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지 요. 그게 바로 접니다. 강연이 시작되자마자 가방을 끼고 앉아 잠에 빠져들었는데, 얼마나 깊이 잠들었던지 그 비를 맞고서도 깨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 피신해간 잔디밭에 혼자 앉아 그때까지 웅크려 앉아 있었던 겁니다. 뒤늦게 발견한 동료에 의 해 구출이 되었습니다만, 이 사건 이후로 저에게는 전천후 폭격 기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맘만 먹으면 잘 수 있다 이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잠에 관한 한 전천후 폭격기입니다. 나이가 자꾸 더해지다 보니, 요즈음은 그것도 좀 성능이 떨어지는 것 같 습니만, 그래도 저에게는 낙천주의의 성격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물론 예민한 구석도 있지만 제자신이 낙천적이 되려고 애를 쓰 고, 또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민한 낙천주의 자입니다. 가급적 자꾸 좋게 생각하고 도전하려고 합니다. 이왕 이면 행복해 지려고 노력을 합니다. 또 너무 안달할게 아니라 우리 주님이 배경이 되어 계시잖느냐 이런 생각이 있어서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저처럼 세상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쨋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웁니다. 원망섞인 항의를 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 이까"(38절) 우리는 어려울 때 사람들을 찾습니다. 가족을 찾고, 이웃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실 어려울 때는 나 혼자 홀로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각자 저만의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지, 이 어려 운 문제에 동참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현대는 그렇게 바쁘고 몰인정하고 비정합니다. 심지어는 주 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도 얼마나 자주 만납니 까 이때마다 우리는 원망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때 계시지 않고 뭘 하시는 거야! 왜 반응이 없으신 거야! 왜 침묵하고 계신 거야! 제자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사실 제자들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세 가지나 되 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죽게된 상황에서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을 활용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맞아 평소 주님은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나 병자를 고치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분이야! 이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있어! 이 믿음을 행사하는 거야!' 이렇게 제자들이 각자 자신에게 있는 믿음을 행사했다면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믿음을 사용하기는커녕 허둥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깨어나신 주님이 꾸지람을 했지요.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막4:40) 같은 사건을 보도한 누가복음에서는 '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8:25)고 합니다. 주님이 꾸짖으십니다. 너희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훈련받았던, 그 믿음은 다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입니다. 죽게된 상황에서 깨우고 소리치고 항의한 것 당연한 것 아닙니 까
그런데 예수님은 대뜸 믿음이 없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사실 소리치고 탄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한 것이 지요. 문제는 믿음 없이 허둥댄 것입니다. 문제가 없다는 말은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위기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해결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조그만 상황에서도 너무 허둥대지 않습니까 작은 문제 에도 너무 무능력해지는 것은 아닙니까 작은 문제에도 너무 비 관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의 사람은 기본적으로 낙관주의 자가 되야 합니다. 철저한 낙관주의자. 엄청난 낙관주의자! 이게 믿음의 사람입니다.
둘째는 죽게된 상황에서 예수님이 해결하실거야 라는 믿음만 있 었어도 문제는 훨신 간단해 질 것입니다. 최소한 '예수님은 어 떻게든 하실거야'라는 믿음만 있었어도 그렇게 허둥대지는 않았 을 것입니다. "주님이 하실거야! 문제없어!(no problem)" 이렇게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입으로 선포하면 마음이 따라 가고 마음이 따라가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기적이 창출됩니다. 그래서 입의 선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문제라고 이야기하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문제 아이는 문제 부모에게 있다는 말 있잖습니까 자꾸 문제 야, 문제야, 그래 보세요. 진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약간의 문제는 다 있습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실수를 잘 하고, 남에게 상처를 잘 주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 활용하면 추진력있고 적극적이고 화끈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온순한 사람있지요 좀 성질 급한 사람들이 보면 속 터집니다. 코구멍이 두 개니까 숨을 쉬지 영 답답합니다. 위선자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온순한 사람은 상대방을 배려 합니다.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평화를 도모합니다. 대단한 장점 입니다. 다 문제 있는 쪽으로 보면 온갖 것이 다 문제입니다. 문제가 없다는 쪽으로 보면 하나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문제를 확대 재생산 하는 내 사고구조가 문제입니다. 문제는 자꾸 문제라고 증거하는 내 혀가 문제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문제가 바로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가 바로 대성할 제목이 되는 겁니다. 문제가 성공의 재료가 됩니다. 보세요. 성경에도 문제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 까 아브라함도 문제를 통과했습니다. 한때는 비겁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문제 투성이었습니다. 평생 욕심으로 똘똘 뭉친 자였습니다.
모세도 문제의 사람이었습니다. 화가 나 면 물불을 못 가리는 혈기에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또 어 뗐고요. 그러니 이왕 투자를 하려면 긍정적인 쪽으로 하세요. 잘 되는 쪽으로 투자를 하세요. 더구나 우리는 '기왕이면 다홍치마' 이런 식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능력의 주님을 의지해서 그런 것입니다. 문제해결의 열쇠인 주님이 계시잖아요 마지막으로는 죽게된 상황에서 죽어도 예수님과 함께 죽는 다는 배짱만 있었어도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주 막가파식 믿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런 담 대함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각오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 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 잖아요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은 없습니다. 가정, 자녀, 집, 직장, 장래계획, 건강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사용하고 임대하고 관리할 뿐입니다. 망하면 주님의 것이 망하는 겁니다. 잘못 되도 주님의 것이 잘 못되는 겁니다. 손해를 봐도 주님의 것이 손해를 보는 겁니다. 이런 주님의 주권의식이 최악의 상황에서 참된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때문에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망해도 예수님과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파선을 당해도 주님과 함께 파선을 당하는 겁니다. 이런 주님과 동행의식이 없으니까 배나 더 불안해 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디를 가도 주님과 함께 갑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주님과 함께입니다. 주님도 이 상황을 나와 함께 똑 같이 당하고 계십니다. 이런 믿음이 중 요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 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 느니라"(수1:9) 이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 해야 합니다. 문제를 덮을 수 있는 더 큰 은총을 주십시오. 문제 를 뚫고 나갈 믿음의 눈을 주십시오. 깨어나신 예수님이 명령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39절) 모 두 현재 명령형입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 바람이 그치고 아 주 잔잔하여 지더라"(39절)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잠잠하게 하시지 않습니까 실제로 바람이 그쳤습니다. 실제상황으로 잔잔 해졌습니다. 이것 여러 번 경험하는 사실 아닙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주님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한배를 타고 계시다는 것이 우리의 낙관의 근거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폭풍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운명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 없어 (No problem)"의 근거가 됩니다. 문제의 폭풍 앞에서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이 런 믿음의 경험을 매순간하고 사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 붙었습니다. 설 교를 들은 열성파군중들이 배까지 동원해서 예수님의 일행을 따 랐던 것입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떠하든 예수님은 배가 출발하자마자 이내 곤 한 잠에 떨어 졌습니다. 너무 피곤한 까닭이었습니다. 당시 배 안에는 신분이 높은 분이 탈것을 대비해서 고물에 작은 의자와 베게가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게까지 베고 곤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몸을 기대고 주무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정하고 주무신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바람이 거세지 고, 집채만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배는 뒤집힐 듯 요동을 쳤습니다. 파도가 배안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배 안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난장판입니다. 노련한 배꾼 들인 제자들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 수면은 바다 밑 200미터입니다. 때문에 헬몬산 쪽 의 급한 기류가 호수로 쏟아져 내려오면 무서운 풍랑을 일으킨다 고 합니다. 너무 큰 풍랑이라서 배에 물이 들어와서 곧 침몰할 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물이 배에 가득찼다고 했습니다. 위험 한 상황이 극에 달했습니다. 배에 고기가 가득한게 아니라 물이 가득한 것입니다. 삶의 위기입니다. 침몰직전의 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문제없다는 듯 깊은 잠을 계속 자고 있습니다. 정말 깊이 잠든 것일까요, 아니면 짐짓 문제없음을 가르치 려 일부러 그렇게 계신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폭풍속에서의 고 요를 만끽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쨋든 우리 주님은 폭풍치는 상 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계셨습니다. 잠에 관한 한 저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건국대학교 에서 문익환 목사님이 강연을 한다고 해서 동료들과 함께 간 적 이 있었습니다. 잔디밭에서 노천 강연을 할 때입니다.
그런데 강 연을 시작한 얼마쯤 지나 비가 후두둑 떨어지더니 이내 빗줄기가 굵어졌습니다. 청중들은 하나둘씩 건물 처마로 피신했습니다. 끝 내는, 강연도 장소를 옮겨하기로 하고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를 다 맡으면서 잔디밭에 웅크려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지 요. 그게 바로 접니다. 강연이 시작되자마자 가방을 끼고 앉아 잠에 빠져들었는데, 얼마나 깊이 잠들었던지 그 비를 맞고서도 깨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 피신해간 잔디밭에 혼자 앉아 그때까지 웅크려 앉아 있었던 겁니다. 뒤늦게 발견한 동료에 의 해 구출이 되었습니다만, 이 사건 이후로 저에게는 전천후 폭격 기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맘만 먹으면 잘 수 있다 이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잠에 관한 한 전천후 폭격기입니다. 나이가 자꾸 더해지다 보니, 요즈음은 그것도 좀 성능이 떨어지는 것 같 습니만, 그래도 저에게는 낙천주의의 성격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물론 예민한 구석도 있지만 제자신이 낙천적이 되려고 애를 쓰 고, 또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민한 낙천주의 자입니다. 가급적 자꾸 좋게 생각하고 도전하려고 합니다. 이왕 이면 행복해 지려고 노력을 합니다. 또 너무 안달할게 아니라 우리 주님이 배경이 되어 계시잖느냐 이런 생각이 있어서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저처럼 세상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쨋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웁니다. 원망섞인 항의를 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 이까"(38절) 우리는 어려울 때 사람들을 찾습니다. 가족을 찾고, 이웃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실 어려울 때는 나 혼자 홀로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각자 저만의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지, 이 어려 운 문제에 동참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현대는 그렇게 바쁘고 몰인정하고 비정합니다. 심지어는 주 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도 얼마나 자주 만납니 까 이때마다 우리는 원망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때 계시지 않고 뭘 하시는 거야! 왜 반응이 없으신 거야! 왜 침묵하고 계신 거야! 제자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사실 제자들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세 가지나 되 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죽게된 상황에서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을 활용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맞아 평소 주님은 얼마나 많은 기적을 행하셨나 병자를 고치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분이야! 이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있어! 이 믿음을 행사하는 거야!' 이렇게 제자들이 각자 자신에게 있는 믿음을 행사했다면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믿음을 사용하기는커녕 허둥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깨어나신 주님이 꾸지람을 했지요.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막4:40) 같은 사건을 보도한 누가복음에서는 '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8:25)고 합니다. 주님이 꾸짖으십니다. 너희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훈련받았던, 그 믿음은 다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입니다. 죽게된 상황에서 깨우고 소리치고 항의한 것 당연한 것 아닙니 까
그런데 예수님은 대뜸 믿음이 없는 것을 꾸짖으십니다. 사실 소리치고 탄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한 것이 지요. 문제는 믿음 없이 허둥댄 것입니다. 문제가 없다는 말은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위기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해결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조그만 상황에서도 너무 허둥대지 않습니까 작은 문제 에도 너무 무능력해지는 것은 아닙니까 작은 문제에도 너무 비 관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의 사람은 기본적으로 낙관주의 자가 되야 합니다. 철저한 낙관주의자. 엄청난 낙관주의자! 이게 믿음의 사람입니다.
둘째는 죽게된 상황에서 예수님이 해결하실거야 라는 믿음만 있 었어도 문제는 훨신 간단해 질 것입니다. 최소한 '예수님은 어 떻게든 하실거야'라는 믿음만 있었어도 그렇게 허둥대지는 않았 을 것입니다. "주님이 하실거야! 문제없어!(no problem)" 이렇게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입으로 선포하면 마음이 따라 가고 마음이 따라가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기적이 창출됩니다. 그래서 입의 선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문제라고 이야기하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문제 아이는 문제 부모에게 있다는 말 있잖습니까 자꾸 문제 야, 문제야, 그래 보세요. 진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약간의 문제는 다 있습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실수를 잘 하고, 남에게 상처를 잘 주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 활용하면 추진력있고 적극적이고 화끈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온순한 사람있지요 좀 성질 급한 사람들이 보면 속 터집니다. 코구멍이 두 개니까 숨을 쉬지 영 답답합니다. 위선자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온순한 사람은 상대방을 배려 합니다.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평화를 도모합니다. 대단한 장점 입니다. 다 문제 있는 쪽으로 보면 온갖 것이 다 문제입니다. 문제가 없다는 쪽으로 보면 하나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문제를 확대 재생산 하는 내 사고구조가 문제입니다. 문제는 자꾸 문제라고 증거하는 내 혀가 문제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문제가 바로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가 바로 대성할 제목이 되는 겁니다. 문제가 성공의 재료가 됩니다. 보세요. 성경에도 문제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 까 아브라함도 문제를 통과했습니다. 한때는 비겁함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문제 투성이었습니다. 평생 욕심으로 똘똘 뭉친 자였습니다.
모세도 문제의 사람이었습니다. 화가 나 면 물불을 못 가리는 혈기에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또 어 뗐고요. 그러니 이왕 투자를 하려면 긍정적인 쪽으로 하세요. 잘 되는 쪽으로 투자를 하세요. 더구나 우리는 '기왕이면 다홍치마' 이런 식이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능력의 주님을 의지해서 그런 것입니다. 문제해결의 열쇠인 주님이 계시잖아요 마지막으로는 죽게된 상황에서 죽어도 예수님과 함께 죽는 다는 배짱만 있었어도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주 막가파식 믿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런 담 대함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각오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 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 잖아요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것은 없습니다. 가정, 자녀, 집, 직장, 장래계획, 건강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사용하고 임대하고 관리할 뿐입니다. 망하면 주님의 것이 망하는 겁니다. 잘못 되도 주님의 것이 잘 못되는 겁니다. 손해를 봐도 주님의 것이 손해를 보는 겁니다. 이런 주님의 주권의식이 최악의 상황에서 참된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때문에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망해도 예수님과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파선을 당해도 주님과 함께 파선을 당하는 겁니다. 이런 주님과 동행의식이 없으니까 배나 더 불안해 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디를 가도 주님과 함께 갑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어도 주님과 함께입니다. 주님도 이 상황을 나와 함께 똑 같이 당하고 계십니다. 이런 믿음이 중 요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 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 느니라"(수1:9) 이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 해야 합니다. 문제를 덮을 수 있는 더 큰 은총을 주십시오. 문제 를 뚫고 나갈 믿음의 눈을 주십시오. 깨어나신 예수님이 명령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39절) 모 두 현재 명령형입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 바람이 그치고 아 주 잔잔하여 지더라"(39절)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잠잠하게 하시지 않습니까 실제로 바람이 그쳤습니다. 실제상황으로 잔잔 해졌습니다. 이것 여러 번 경험하는 사실 아닙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주님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한배를 타고 계시다는 것이 우리의 낙관의 근거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폭풍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운명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 없어 (No problem)"의 근거가 됩니다. 문제의 폭풍 앞에서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이 런 믿음의 경험을 매순간하고 사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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