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흠, 무태, 무적의 다니엘 (단6:10-18)
본문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대로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제주도를 가리켜 서 삼다삼무(三多三無) 의 섬이라고 합니다. 바람 돌 여자, 이 세가지 가 많다고 해서 삼다도라고 하며 또 세가지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거지 도적 대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三 多의 사람이 되는 동시에 오늘 말씀 드리는 다니엘처럼 三無 의 사람 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니엘을 살펴보면, 다니엘은 삼다 삼무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1) 은총을 많은 받은 사람.
(2) 지혜가 특출하고 많은 사람
(3) 더망이 높은 사람, 이렇게 삼다의 사람이었고,
(1) 무흠의 사람
(2) 무퇴의 사람
(3) 무적의 사람으로서 삼무의 사람이었습니다.
삼무의 사람 다니엘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상고해 봅시다.
사생활조차도 흠없어
다니엘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바벧론 나라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끌 려온 포로민 중에 한사람입니다. 망국민족의 한을 가슴에 품고 수치스 러운 포로민의 생활중에도 다니엘은 결코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굴욕적인 저자세로 아부하지도 아니하고 성실하게 자기 발전을 하여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역량이 인정을 받아 메데 다 리오왕 하에는 1백20명 방백을 통솔하는 세사람의 충리중에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정적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었던 같습니다.
그리하여 정적들은 다니엘에게 조그마한 흠점이라도 발견되기만 하면 그를 왕에게 고소하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흠집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 틈, 아무 허물, 아 무 근심, 아무 그릇함도 없는 무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 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그를 높이기 위한 거짓되고 과장된 선전이 아니 라 그의 정적들의 입에서 나온 솔직한 고백이었으니만큼 조금도 허위 나 과장된 말이 아닌 것입니다.
다니엘서 6:4에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 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 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 라 이란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다니엘이야말로 털어도 먼지하나 나지않는 완전무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완전 무흠한 사람이기에 포로민의 낮은 신분으로서 당당하게 총리적에 오를 수가 있었고 그 직무를 흠없이 충성되게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항상 세상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이란 그들에게 서 말과 행동에 흠잡힐 것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집중적인 비난과 공격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것이 없고 교회 의 신성을 보호할 길도 없을 뿐더러 애매하게 하나님의 영광마저 가리 우게 될 것입니다.
불의와 타협않는 대쪽
용진무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의를 위하여 용감히 나가고 어떤 위 협에도 뒤로 물러설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용진무퇴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는 나가는 앞길에 태산이 앞을 가로말고 강물이 앞길을 가로막고 친구가 극구 만류하고 대적이 위협하고 죽음 이 공포가 있다 할지라도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할 뿐, 뒤로 물러설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서 무퇴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이와같이 무퇴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을 모함하려는 정 적들이 그의 흠을 발견하지 못하자 이제는 죄를 지어내서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 왕의 법령을 발표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이러한 법령이 자신을 처치하기 위한 정적들의 간악한 술책인 것을 잘 알면서도 차라 리 왕에게 반역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반역자가 되지 않는 것이 더 올바른 도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음밀한 기도가 아니라 정적들이 보라는 뜻으로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그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계속 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사적인 신앙을 통한 무퇴의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그가 양보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순순히 기쁘 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양보해서는 안될 일에 대하여는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한걸음도 물러 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참그리스도인이라면 최후까지 고수해야 할 것은 신앙과 계명과 진리 와 정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을 양보하는 것은 세속 에 대한 항복이요 계명을 양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요, 진리 를 포기하는 것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요, 정의를 포기하는 것은 불 의와 동조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 그리스도인들은 비굴한 영광보다는 영광스러운 고난을 택할 것이요 배신자 가 되기보다는 순교자가 되는 편을 택하여왔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루 세번씩 기도 드린다는 것은 신앙과 계명에 속한 일이 요, 예루살렘을 위해 비는 것은 진리와 정의에 속한 일로서 결코 타협 하거나 중단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퇴의 사람 다니엘은 자기 혼자서라도 기도하는 일을 계속했으며 이 일을 권력이 굴하고 그 일을 하는데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하더라도 양보하거나 중지하거나 결코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들은 너무 양보하기를 잘하며 쉽게 물러서기를 잘하는 과오가 있습니다. 곤고할 때도 그러한 것처럼 형통한 후에도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하며 병들었을 때도 그러한 것처럼 건강한 후에도 계속 기도히야 하며 다수일때 그러 한 것처럼 홀로일 때도 정의를 고수하며 물러서지 말아야 참그리스도 인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장망성을 떠나 천성으로 올라가는 생활입니다. 제자리 걸음이나 작전상 후퇴라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전진 또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나가는 앞길에 광야가 가로 막아도, 홍해가 앞을 막아 도, 애굽의 병정이 뒤쫓아와도, 아말렉이 우리를 공격해도 우리 성도 들은 용진무퇴의 삶으로써 천성까지 들어가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은
(1) 은총을 많은 받은 사람.
(2) 지혜가 특출하고 많은 사람
(3) 더망이 높은 사람, 이렇게 삼다의 사람이었고,
(1) 무흠의 사람
(2) 무퇴의 사람
(3) 무적의 사람으로서 삼무의 사람이었습니다.
삼무의 사람 다니엘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상고해 봅시다.
사생활조차도 흠없어
다니엘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바벧론 나라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끌 려온 포로민 중에 한사람입니다. 망국민족의 한을 가슴에 품고 수치스 러운 포로민의 생활중에도 다니엘은 결코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굴욕적인 저자세로 아부하지도 아니하고 성실하게 자기 발전을 하여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역량이 인정을 받아 메데 다 리오왕 하에는 1백20명 방백을 통솔하는 세사람의 충리중에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정적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었던 같습니다.
그리하여 정적들은 다니엘에게 조그마한 흠점이라도 발견되기만 하면 그를 왕에게 고소하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흠집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 틈, 아무 허물, 아 무 근심, 아무 그릇함도 없는 무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 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그를 높이기 위한 거짓되고 과장된 선전이 아니 라 그의 정적들의 입에서 나온 솔직한 고백이었으니만큼 조금도 허위 나 과장된 말이 아닌 것입니다.
다니엘서 6:4에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 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 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 라 이란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다니엘이야말로 털어도 먼지하나 나지않는 완전무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완전 무흠한 사람이기에 포로민의 낮은 신분으로서 당당하게 총리적에 오를 수가 있었고 그 직무를 흠없이 충성되게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항상 세상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이란 그들에게 서 말과 행동에 흠잡힐 것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집중적인 비난과 공격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것이 없고 교회 의 신성을 보호할 길도 없을 뿐더러 애매하게 하나님의 영광마저 가리 우게 될 것입니다.
불의와 타협않는 대쪽
용진무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의를 위하여 용감히 나가고 어떤 위 협에도 뒤로 물러설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용진무퇴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는 나가는 앞길에 태산이 앞을 가로말고 강물이 앞길을 가로막고 친구가 극구 만류하고 대적이 위협하고 죽음 이 공포가 있다 할지라도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할 뿐, 뒤로 물러설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서 무퇴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이와같이 무퇴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을 모함하려는 정 적들이 그의 흠을 발견하지 못하자 이제는 죄를 지어내서 앞으로 30일 동안 왕 이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 왕의 법령을 발표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이러한 법령이 자신을 처치하기 위한 정적들의 간악한 술책인 것을 잘 알면서도 차라 리 왕에게 반역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반역자가 되지 않는 것이 더 올바른 도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음밀한 기도가 아니라 정적들이 보라는 뜻으로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그 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계속 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사적인 신앙을 통한 무퇴의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그가 양보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순순히 기쁘 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양보해서는 안될 일에 대하여는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한걸음도 물러 서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참그리스도인이라면 최후까지 고수해야 할 것은 신앙과 계명과 진리 와 정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을 양보하는 것은 세속 에 대한 항복이요 계명을 양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요, 진리 를 포기하는 것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요, 정의를 포기하는 것은 불 의와 동조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 그리스도인들은 비굴한 영광보다는 영광스러운 고난을 택할 것이요 배신자 가 되기보다는 순교자가 되는 편을 택하여왔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루 세번씩 기도 드린다는 것은 신앙과 계명에 속한 일이 요, 예루살렘을 위해 비는 것은 진리와 정의에 속한 일로서 결코 타협 하거나 중단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퇴의 사람 다니엘은 자기 혼자서라도 기도하는 일을 계속했으며 이 일을 권력이 굴하고 그 일을 하는데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하더라도 양보하거나 중지하거나 결코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들은 너무 양보하기를 잘하며 쉽게 물러서기를 잘하는 과오가 있습니다. 곤고할 때도 그러한 것처럼 형통한 후에도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하며 병들었을 때도 그러한 것처럼 건강한 후에도 계속 기도히야 하며 다수일때 그러 한 것처럼 홀로일 때도 정의를 고수하며 물러서지 말아야 참그리스도 인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장망성을 떠나 천성으로 올라가는 생활입니다. 제자리 걸음이나 작전상 후퇴라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전진 또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나가는 앞길에 광야가 가로 막아도, 홍해가 앞을 막아 도, 애굽의 병정이 뒤쫓아와도, 아말렉이 우리를 공격해도 우리 성도 들은 용진무퇴의 삶으로써 천성까지 들어가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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