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참된 행복인가 (눅6:20-26)
본문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마태복음에서는 세 장(5-7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6장 한 장에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차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마태복음은 특별히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해석과 관련된 내용(마5:17-6:18)을 더 많이 포함시킨 것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복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5:1-12에는 여덟 가지 복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팔복 교훈이라고 부르는데 누가복음의 본문에서는 네 가지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면 거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우리가 그것에 못 미치거나 그것이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던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부러울 것이 없었으나 마음이 언제나 불안하여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는 날 왕은 원로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러자 한 원로가 “폐하의 병은 이 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면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즉시 신하들에게 그런 사람을 찾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며칠 후 왕이 만난 사람은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속옷을 달라는 왕의 말에 당황하며 말했습니다. “폐하, 저는 속옷을 입지 않고 지내는 천민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저 산 너머 먼 곳에 행복이 살고 있다기에 찾아 갔다가 눈물만 흘리고 돌아오는 모습을 시어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좌절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신 교훈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20절). 요즘 신문을 보면 심심찮게 여러 가지 여론 조사 결과를 접하게 됩니다. 그 조사기관 중 유명한 곳이 한국 갤럽연구소입니다. 이 기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이름에서 보듯이 미국 여론연구소를 창설한 조지 갤럽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심리학을 전공하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이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그 후 대통령 선거의 예상과 다른 많은 문제에 대한 여론을 조사 발표하여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사람이 원숙한 나이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행복”이란 것을 알고 여론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젼 방송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생생한 종교적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고 불행한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 좌우로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 중 한 강도에게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4:43). 뼛속까지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의식이 마비될 지경에 놓여 있었지만 그 강도는 주님의 그 말씀에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죄악된 삶 전체를 청산하며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확신으로 한 순간이나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요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집사 스데반도 죽는 순간에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미래의 만족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21,24-25절). 현재 주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을 비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배부를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웃을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상 받을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과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고난이 자기에게만 있는 것으로 믿고 과대 포장하면 삶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6.25 전쟁을 겪은 세대 중 그 누가 45년이 지난 오늘날의 물질적인 풍요와 번영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카알라일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이란 기쁨의 연속도 아니고 슬픔의 연속도 아니다. 사람은 너무 기쁨에 들떠 있지 도 말 일이며 슬픔에 깊이 빠져서도 안 될 일이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나아가는 슬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커다란 기쁨은 커다란 슬픔을 불러 올 수도 있을 것이며 또 깊은 슬픔은 깊은 기쁨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이치를 터득한 후 자기의 할 일을 발견하고 자기의 하는 일에 신념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처럼 물질적인 면에 적용할 수도 있지만 원래 의도된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가난한 자는 저소득층과 빈곤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게 됩니다(마5:3). 주린 자는 끼니를 걸러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음식만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의를 사모하는 자입니다(마5:6). 우는 자는 고난으로 인해 눈물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기쁨이 넘펴 비로소 웃을 수 있게 됩니다.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셋째로, 하늘의 상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22-23).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목표를 향해서 전력투구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목표를 이루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노년이 되어서 특별히 할 일 없이 공원을 배회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목표가 없습니다. 삶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빨리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가진 사람은 그 목표를 이루기까지 결코 순탄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삶에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느낍니다. 지난 19일에 우리나라의 탐험대가 북극해 도보 횡단에 성공했습니다. 그 원정대의 대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산악인 허 영호씨입니다. 그는 에베레스트 산 겨울 원정을 세계에서 세번째로 마쳤으며 세계 최초로 마나슬루봉 무산소 단독 등정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북극해 도보 횡단은 성공 확률이 5%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번 원정에 나선 그와 네 명의 대원은 97일간의 극지 여행에서 모두가 얼굴과 손발에 동상이 걸렸습니다. 곰의 습격도 수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추운 극지에서 얼음 사이로 군데 군데 있는 개수면에 여러 번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매스콤에 비쳐진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번 횡단에서는 비행기로 세 차례 물품 보급을 받았는데, 허 대장은 성공 직후 이제는 “무보급 횡단만이 남았다”고 무전을 통해서 밝혔다고 합니다. 그는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에서 받게 될 상을 염두에 두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지키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과정에서 받게 되는 핍박이 당장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장차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서 상 주실 것을 믿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좇아 바울 사도는 복음으로 더불어 고난받으며 상을 바라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 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린도전서 9:24-27)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18)
그런데 멀리서 보면 거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우리가 그것에 못 미치거나 그것이 우리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던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부러울 것이 없었으나 마음이 언제나 불안하여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는 날 왕은 원로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러자 한 원로가 “폐하의 병은 이 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면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즉시 신하들에게 그런 사람을 찾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며칠 후 왕이 만난 사람은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속옷을 달라는 왕의 말에 당황하며 말했습니다. “폐하, 저는 속옷을 입지 않고 지내는 천민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저 산 너머 먼 곳에 행복이 살고 있다기에 찾아 갔다가 눈물만 흘리고 돌아오는 모습을 시어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좌절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신 교훈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20절). 요즘 신문을 보면 심심찮게 여러 가지 여론 조사 결과를 접하게 됩니다. 그 조사기관 중 유명한 곳이 한국 갤럽연구소입니다. 이 기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이름에서 보듯이 미국 여론연구소를 창설한 조지 갤럽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심리학을 전공하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이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그 후 대통령 선거의 예상과 다른 많은 문제에 대한 여론을 조사 발표하여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사람이 원숙한 나이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행복”이란 것을 알고 여론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젼 방송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생생한 종교적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고 불행한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 좌우로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 중 한 강도에게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24:43). 뼛속까지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의식이 마비될 지경에 놓여 있었지만 그 강도는 주님의 그 말씀에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죄악된 삶 전체를 청산하며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확신으로 한 순간이나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요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집사 스데반도 죽는 순간에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면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미래의 만족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21,24-25절). 현재 주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을 비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배부를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웃을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상 받을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과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고난이 자기에게만 있는 것으로 믿고 과대 포장하면 삶이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6.25 전쟁을 겪은 세대 중 그 누가 45년이 지난 오늘날의 물질적인 풍요와 번영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카알라일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이란 기쁨의 연속도 아니고 슬픔의 연속도 아니다. 사람은 너무 기쁨에 들떠 있지 도 말 일이며 슬픔에 깊이 빠져서도 안 될 일이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나아가는 슬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커다란 기쁨은 커다란 슬픔을 불러 올 수도 있을 것이며 또 깊은 슬픔은 깊은 기쁨으로 통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이치를 터득한 후 자기의 할 일을 발견하고 자기의 하는 일에 신념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처럼 물질적인 면에 적용할 수도 있지만 원래 의도된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가난한 자는 저소득층과 빈곤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게 됩니다(마5:3). 주린 자는 끼니를 걸러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음식만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의를 사모하는 자입니다(마5:6). 우는 자는 고난으로 인해 눈물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기쁨이 넘펴 비로소 웃을 수 있게 됩니다.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셋째로, 하늘의 상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22-23).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목표를 향해서 전력투구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목표를 이루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노년이 되어서 특별히 할 일 없이 공원을 배회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목표가 없습니다. 삶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빨리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가진 사람은 그 목표를 이루기까지 결코 순탄한 길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삶에 보람을 느끼고 행복을 느낍니다. 지난 19일에 우리나라의 탐험대가 북극해 도보 횡단에 성공했습니다. 그 원정대의 대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산악인 허 영호씨입니다. 그는 에베레스트 산 겨울 원정을 세계에서 세번째로 마쳤으며 세계 최초로 마나슬루봉 무산소 단독 등정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북극해 도보 횡단은 성공 확률이 5%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번 원정에 나선 그와 네 명의 대원은 97일간의 극지 여행에서 모두가 얼굴과 손발에 동상이 걸렸습니다. 곰의 습격도 수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추운 극지에서 얼음 사이로 군데 군데 있는 개수면에 여러 번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매스콤에 비쳐진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번 횡단에서는 비행기로 세 차례 물품 보급을 받았는데, 허 대장은 성공 직후 이제는 “무보급 횡단만이 남았다”고 무전을 통해서 밝혔다고 합니다. 그는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에서 받게 될 상을 염두에 두며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지키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과정에서 받게 되는 핍박이 당장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장차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서 상 주실 것을 믿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좇아 바울 사도는 복음으로 더불어 고난받으며 상을 바라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 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린도전서 9:24-27)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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