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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여주기 원하느냐 (눅18:35-43)

본문

현대인들은 근심은 많지만 소원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필요는 많지만 열망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늘 부족하고 늘 결핍하지만 정작 목숨과도 바꿀 만한 갈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토-옹일' 열심히 통일 의 소원을 노래하지만, 사실 통일을 목숨 처럼 열망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되면 좋고, 안되도 그냥 가자는 식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첫째 소원은 대한독립,
둘째 소원도 대한 독립,
셋째도 소원도 대한의 독립이라고 했습니다. 해방된 조국의 문지기라도 좋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 정도로 통일 을 원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적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의 불가사이가 한 가지 있습니다. 염려는 많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요구의 행위는 적 다는 것입니다. 근심과 불안의 나날을 보내지만 정작 하나님을 찾기에는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갈망에 찬 한 거지 소경이 예수를 만나는 사건 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여리고를 지날 때입니다. 유월절 순례길에 오른 군중들이 예수를 함께 따랐습니다. 예수는 지나치는 길이었 습니다. 한 거지 소경이 있었습니다.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또 들었던 터였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웅성 거리는 군중들의 떼를 향해 급하게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 이 침묵을 강요했지요. 그러자 더 크게 소리쳤어요. 지나가 던 예수가 머물러 섰어요. '원하는 것이 무었이냐 보는것 입니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즉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소경은 예수님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상대가 예수님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소경은 아무나 보고 소리치지는 않았을 거 예요. 예수님이니까 소리를 친것이지요. 만약 여리고의 길 가는 사람들이었다면 언제나 처럼 손을 내밀었을 거예요. 단지 돈을 구걸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은 돈 뿐이었지요. 그러나 예수에게 요구한 것은 돈이 아 니었습니다.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뿐이기 때문이지요. 이 거지 소경은 길을 가며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것을 들었고, 확신하게 되었고, 수 많은 날들을 기다렸을 겁니다. 그래서 이 소경 은 몇 푼의 돈대신에, 예수에게는 눈 뜨는 걸 요구했어요. 예수에게도 돈을 구걸했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요. 여러분도 다른 필요는 되는 대로 그냥 조달을 하세요. 여러분 자신의 능력으로 해도 좋습니다. 인간을 통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 만이 공급하실 수 있는 것은 주님에게만 구하세요. 정말 주님이 아니시고는 그 누구도 해결 할 수 없는 것, 이것은 주님에게만 구하세요. 필요의 출구를 주님 에게 열어 놓아야 합니다.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모든 게 다 소원이라고 하는 것은 소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게 다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정작 절실하게 필요한 것 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게 다 시급하다는 것은 시급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원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 은 그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그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가장 시급한 것, 가장 현안이 되는 것, 가장 절실한 것, 이것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져서는 볼 수 없습니다. 촛점이 흐려 서는 집광 렌즈로 물건을 태울 수 없습니다. 촛점이 분명해 야 얻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보기를 원하나이다." 간단 명료한 대답입니다. 머뭇거리지도 않았어요. 보는 것이 무에 그리 대단합니까 우리는 매일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에게는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목숨 을 걸고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바람이기에 명확 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어떠했습니 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보아라!'입니다. 요구도 명 확하고, 응답도 명확합니다. 절차도 간단합니다. 명확한 요 구에는 명확하게 응답하십니다. 똑같이 소경을 고친 사건인데도 예수님께서 다르게 처방한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예루살렘의 한 거지 소 경 이야기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낫게 해줍니다. 그 때의 소경은 자신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서 구걸하던 자였는 데,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 질문한 소재가 바로 이 소경이었드랬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뜬겁니다. '나면서 부터 소경된 이 자는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러고 있습니까' 뭐 이런 질문에 동원된 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엉겹결에 눈 을 뜨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교육시키다가 눈을 뜨게해준 것이지요. 이 소경에게는 명확한 요구도, 산 같은 믿음도 없었어요.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덜렁 고쳐줄 수는 없는 문제였습니다. 믿음은 차치하고 최소한의 요구라도 있 어야 했어요. 내가 눈을 떠야지! 이런 쥐꼬리 만한 간절함 이라도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도적 장치를 하 신 것입니다. 그 이후에 눈을 뜨게 했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발라주고, 성전 남쪽 에 있는 실로암 못 까지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시간과 절 차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엉겹결에 당한 소경에게 믿음을 가질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간절한 요구와 열망이 일어 날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눈에 진흙을 바르고 더듬거리 며 실로암 못을 찾아가는 그 길에서 의심을 뛰어 넘는 믿음 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입니다' '보아라!' 명확한 필요에 명확한 응답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필요를 명확히 해야합니다. 수많은 필 요가 있겠지만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야 하는 필요를 확정해야 합니다. 목록을 정하고 그 요구가 내 가슴에 박힐 때 까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의심은 요구의 초점을 흩트려 놓지만, 믿음은 요구를 명확하게 해 줍니다. 이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소리쳐서! '외쳐 가로되'(38절) 외쳤어요. 앞서가던 자들이 떠들 지 말라고 윽박지릅니다. 잠잠하라고 핀잔을 줍니다. 그랬 더니 더 큰 소리로 외쳤어요. 노예 노동자로 살던 에굽에 서의 이스라엘도 고통에 찬 소리로 외쳤어요. 하나님께서 이집트 탈출을 응답으로 주셨습니다. 시편 기자도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 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142:1)"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외침의 신학(crying theology)'을 주장 하기도 했습니다. 소리치는 것 중요합니다. 요구를 하는 것 입니다. 필요는 요구를 해야합니다. 오늘 이 소경이 지나가 던 예수에게 소리치지 않았다면 그냥 묻혔을 거예요. 윽박 지르는 사람들 때문에 요구를 중단했다면 또 상황이 달라졌 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필요는 요구를 해야 합니다. 영어로 NEED라는 말은 '필요'이기도 하지만 '요구'로도 해 석 됩니다 필요는 요구를 해야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필 요를 '수요需要'라고합니다. 공급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수 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습니다. 소리치는 것은 필요를 외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필요를 하나님께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드러 내지 않는 것은 불신의 행위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필요 와 수요를 온 몸으로 요청하는 것입니다. 아무나에게 하지 않습니다. 믿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요. 절박하게! 절박하다는 것은 끈질기다는 것과 같습니다. '더 큰 소리 로, 더욱 심히(39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은 먼 길입니다. 거지 소경이 걸음을 멈추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 습니다. 시간도 짧고, 장벽은 높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는 요구를 전달하고 관철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목소 리는 절박하고 높아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면 끝 장입니다. 절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필요하니 까 구하지요. 잃어 버렸으니 찾습니다. 문이 닫혀 캄캄 절 벽이니 두드립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그러했습니다. 과부 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1-8)도 그런 것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라고 예수님은 소경 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내가 행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원하는 게 뭐여 그냥 궁금해서, 소원이 뭔데 이것이 아닙니다. 그냥 묻고만 마는 그런 질문이 아닙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말은 엄청난 무게 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창조의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 하늘의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내가 굳이 손을 걷고 하늘 의 능력을 동원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이런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늘의 능력을 동원할 일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주님이 직접 개입하셔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요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요구를 공급받는 방 식은 다 다릅니다. 필요가 신앙을 불러 옵니다. 더 많은 필 요를 가지고 있으면 더 절실해 집니다. 필요가 절실해 지면 하나님도 절실해 집니다. 절실함 없이 신앙은 성립되지 않 습니다. 우리 집
첫째 딸 은솔이는 요즈음 자전거를 사달라고 석달 째 조르고 있습니다. 주어온 고물 자전거가 세발 자전거라 서 초등학교 3학년에게 키가 맡지 않습니다. 그나마도 몇 일전 보조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안장이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전거 사달라고 조르는 게 입에 붙어 버렸습니다. 제가 몇 일전에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수학80점 이상에, 달 리기 일등! 은솔이는 수학하고 달리기가 밑바닥입니다. 수 학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고, 달리기는 모르긴 몰라도 엄마를 닮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만한 조건이면 지금 당장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자전거는 꽤나 비쌉니다. 그렇 다고 반찬 절약하면 못 사줄건 없지요. 그러나 덜렁 사준다 면 몇 일 타다가 시들할 지도 모릅니다. 자전거 하나를 얻 기 위해 젖먹던 힘 까지 다 내어 불가능에 도전해 보고 얻 은 것이라면 제산목록 일호가 될 것입니다. 자전거에 대함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가 보고 싶었습니다. 절실하지 않은 자녀에게 선물을 주는 것 만큼 낭비가 없습니다. 자녀에게 선물을 사 줄 때는 절실할 때 까지 기다려 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은 두배가 되고, 효용가치도 높아집니다. 절실하지 않는 데, 안겨줘 봐야 감사한 줄 모릅니다. 물건을 아껴 쓸 줄 몰라요, 물건을 아껴 쓸 줄 모르는 것은 괜찮지만, 부모에 대한 고마움이 절실하지 않습니다. 당연 히 주는 사람, 필요하지 않아도 주는 사람이 됩니다. 커서 도 그렇습니다. 인격의 관계가 아닙니다. 부모가 소중하지 도 않습니다. 부모의 존재가 커 보일리도 없습니다. 부모의 존재가 절실하지도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입니다. 아 나에게는 부모가 있어서 이렇게 장남감도 사 주는 구나 학용품도 공급해 주는구나. 잘집도 있고, 보호해 주는 사람도 있구나. 여기에서 감격이 나오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있는 기적을 총 동원해서 쏟아 부어도 무덤덤할 사람은 무덤덤합니다. 절실함이 없어 서 그래요. 간절하면 조그만 공급에도 감격할 수 있습니다. 필요가 오래된 것일수록 응답에 대한 기쁨은 두배가 됩니다. 우리 주님께 강렬한 요구를 가져 봅시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수 많은 수요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수요 자체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신앙의 휴화산 들이 있습니다. 필요는 있지만 소리쳐서 구하지 않습니다. 구하다가도 중단합니다. 구하기는 하되 절실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지금 절실한 필요는 무엇입니까 가장 절실한 현 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강력하게 요구를 하십시다. 큰 믿음을 일으켜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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