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되느냐 (눅10:27-42)
본문
나의 생명은 내게만 주어진 유일성을 갖고 있고, 또 내 생명은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단 한 번만 사는 일회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곡식알이 땅 속에 들어가 썩지만 그곳에서 싹이 나고 잎과 꽃이 피어서 열매를 맺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깃 들어 있는 인간의 생명은 영원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유일성, 일회성, 영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귀한 일생은 이 세상에서 갖는 시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그 생애는 앞길을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그 분만이 우리 시간을 주장하셔서 우리의 운명을 복되게도 할 수 있고 불행하게도 할 수 있는데,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지요. 사실, 우리의 출생을 보면 내 의지의 작용은 전혀 없습니다. 내가 나올때 한국 땅을 작정한 것도 아니고, 부모를 내가 골라 잡은 것도 아닙니다. 내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나라고 하는 생명이 이 땅에서 부모님을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물론 출생뿐만 아니지요. 출생 후에 살아 가는 생애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아요. 그 누가 병을 지니고 평생을 고달프게 살아 가기를 원하겠어요 그러나 병약한 몸을 가지고 평생동안 병석에 누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이 세상에서의 삶도 자신의 뜻대로는 살아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계획은 내가 합니다. 또 계획한 대로 자신이 실천할 수 있다 할지라도 마지막에 성패와 생사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뜻 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세상을 살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 그 죽음도 자신의 뜻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죽는 시간을 모르고 살고 있어요. 언제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집에 돌아 갈 수도 없이 이 현장에서 이 세상을 떠나 갈 수밖에 없어요. 출생도, 생도, 죽음도 자신의 뜻과는 관계 없이 결정 되어지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만 살기를 고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 잠언서에 보면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또한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뜻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출생에서 부터 죽기까지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의해서 주장을 받는다고 하면 개인이 모인 사회나 국가, 인류 전체의 운명도 하나님이 주장하고 섭리하시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생애는 싫던 좋던 하나님과의 깊은 연관을 갖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분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 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뜻을 그 분의 말씀인 성경을 토대로 잘 살펴서 순종하고 동역 동행하는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지역간, 계층간, 이념간, 세대간의 분열이 있는 사회와 민족을 사랑과 화해로 하나를 이루어야 할 큰 명제를 안고 있어요. 이 일을 위해서도 우리 각자가 막중한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이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정치라고 하는 것에 대해 저는 평소 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알 수 있는데 정치는 돈가지고 합니다. 돈없이 정치를 할 수가 없고, 돈을 모을려고 하면 권력이 필요하고 그래서 정치를 하기 위해선 재물과 권력이 필수 조건입니다. 그렇다고 돈과 권력만 가지면 되는가 그렇지 않아요. 정치를 하기 위해선 모략에 능해야 되요. 돈과 권력과 모략, 이 삼자가 합작을 이루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가 합작이 되면 거기엔 반드시 죄악이 남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는 본래 더러운 소관이 되지요. 동서고금 불문합니다. 정치는 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경 에베소서에도 보면 마귀는 정사와 권력을 미끼로 삼아서 역사한다는 말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정치를 안 할 수는 없지요. 백성이 오합지졸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을 다스려야 합니다.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정치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정치가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해 보자는 것이 우리가 정치에 갖는 노력일 것입니다. 결국 정치하는 사람이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정치를 잘 해야 하고 경제를 부흥시켜야만 한다고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하고 경제를 부흥시키는 주체가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고 노력이 적어요. 정치를 사람이 합니다. 경제를 사람이 합니다. 정치가 잘 되기 위해서는 경제가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로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요. 바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몇 가지 부류의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성경 본문에 보면 사람의 세 가지 유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유형'의 부자 청년,
둘째는 `사업 활동형'의 마르다.
셋째는 `인격형'의 마리아 이 세가지 부류의 사람을 말씀해 줍니다. 먼저 소유형의 사람입니다. 무엇을 많이 갖느냐 하는 태도로 살아 가는 사람이 세상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어요. 시종 소유욕을 충족하며 살아 가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평생 무엇을 갖고 싶어서,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생을 투입하고 사는 사람의 부류가 있어요. 소유욕이라고 하는 것은 백량을 가지면 2백량을 갖고 싶고 2백량을 가지면 4백량을 갖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어요. 죽는 시간까지 이런 소유욕 충족을 위해서 갈증을 느끼며 살아 가는 사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리라 생각합니다. 호화 주택을 갖고 싶어서, 별장을 갖고 싶어서, 좋은 자동차를 갖고 싶어서, 살인하고 모략하고 횡령합니다. 국가적으로 보면 식민지를 갖고 싶어서, 식민지를 갖고 싶어서, 전쟁을 하고 수백만 명의 생명을 죽이고 침략하는 것이지요. 이 소유욕, 무엇을 갖느냐 하는 사람 때문에 세상이 온통 분쟁투성이인 것이 사실이에요. 자본주의를 토대로한 민주주의, 유물주의를 토대로한 공산주의 이 두 괴물이 맞붙어 돌아 가면서 누가 더 좋은 물건을, 싼 물건을 더 많이 생산해서 수출하고 더 많이 벌어서 소유할 수 있는가에 경쟁을 피나게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은 전체가 물질 세계로만 빠져 들어가는 기분입니다. 남의 물건을 빼앗러라도 많이만 가지면 제일이라는 것이 인류의 풍토가 됐어요. 공산주의 자들은 가진 놈이 밉다고 그들의 것을 빼앗아서 골고루 가지자고 합니다. 또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어 모두 죽여 버리는 것을 공산 혁명이라고 이름을 붙입디다.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도 자본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근본 심리와 생활 태도는 비슷한 것 같아요. 양 진영에 이런 괴물이 깔려 있는 세상이 되다 보니 거기에서 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성경에 보면, 한 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에서 와서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지닌 참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그래,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라." 부자 청년은 곧 대답하기를 "선생님, 저는 계명을 어렸을 때부터 완벽하게 지켰습니다.아 그래. 그렇지만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바른 사람되기를 원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다음에 와서 나를 쫑으라." 예수님이 대답했어요. 부자 청년은 평생 소유욕 충족을 위해서 살아 왔기 때문에 이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었어요. 부자 청년은 평생 `무엇을 갖고 사느냐'하는 소유형의 사람으로 살아 왔기 때문에 무엇을 갖고자 하는 자세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사람으로 탈바꿈을 시키기 위해서 소유욕의 충족을 위한 재산을 흩어 버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짐승과 달라서 떡만 먹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했듯이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먹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소유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 말씀을 먹고 바른 사람이 되어 살아야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기에 바른 사람이 되어 살아야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기에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떡보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먹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질 수 있느냐'하는 것보다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다 생을 바칠 수 있느냐 먼저 생각을 해야 해요. 내가 돈이 있다면 이것을 이용하여 어떻게 더 많이 소유할 것인가 하기보다는 이 돈을 무엇에다 쓰고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첫째 부류인 소유형의 사람을 경계하면서 모든 가진 것을 흩어 버리고 참 사람이 되느냐 하는 면으로 청년에게 교훈 했지만은 그는 이 소유욕을 버릴 수가 없어서 안타깝게도 근심하면서 주님을 떠나 간 후에 다시 예수를 만나지 못한 이런 비극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에서 보여 주는 부류의 사람은 사업형입니다. 활동형의 사람이지요. 무엇을 갖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겠지요. 활동형의 사람 가운데는 사업하는 사람이 많지요. 많은 기업가들이 돈을 벌지만 그것만으로는 허무하거든요. 범양상선인가 그 회사의 박회장이란 사람이 고층건물에서 자살했을 때 어느 대학교수가 쓴 추모하는 글을 신문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박형! 사람이 일생 사는데 쌀 몇 가마 필요해서 그것을 위해 일생을 마쳤느냐" 하는 내용이었어요. 인간이 돈을 많이 벌어서 쌓아 보니 70년의 생애를 쌀 몇 가마 된장 몇 동이면 되는 것을 천억, 이천억 쌓아 보았댔자 허망하거든요.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장학 사업을 하느니, 현대 고등학교를 만드느니, 호암 아트홀을 세우느니 여러 가지 사회 사업을 하는 등등 무엇을 하느냐 하는 이런 자세를 갖고 사는 마르다형을 오늘 본문이 지적해 주셨어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 기관을 세우고 친히 이사장을 하고 학원장도 되면서 삶의 보람을 느껴 보는 일이지요. 좋은 일이예요. 그러나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물결 풍파는 잔잔하지 않거든요. 갖은 풍파 속에서 사업을 하게 됩니다. 큰 권력이 압력으로 가해 오기도 합니다. 갖은 모략과 모함이 생겨서 그 사업을 제대로 운영하게 하질 못합니다. 이 세상의 성격이 그렇게 돼 있어요. 이렇게 되면 자기 사업을 위해서 권력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지조, 위신을 다 잃어 버리고 모리배와 결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결국에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느냐의 사업 모리배가 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 오지요.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오랜만에 자기 집에 찾아 오신다니 크게 대접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어떻게 하면 잘 대접할 수 있을까 분망했습니다. 어떻게 식탁을 준비하고, 어떻게 분위기르 꾸미고, 어떻게 해야 잘 접대할 수 있을까에 여념이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마르다야, 마르다야!" 불렀어요. "얘야, 수고하고 분주하게 뛰고 활동하는 것 대단히 좋지마는 거기에 너무 많이 마음을 쓰지 말아라. 반찬 한 가지만 가지고도 식사할 수 있는데 그것 가지고 공연히 분주하게 활동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사탄이 유혹할 때가 있지요. "내게 절만 하면 천하만국, 천하권력, 영광 다 고스란히 네게 줄 테니까 그것을 받기만 하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 다할 수 있다는 거야.사탄아 물러가라." 그가 이 유혹을 물리친 일을 여러분 아십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분주하게 활동 하다가 예수님께 자기 동생 마리아에 대해서 불평을 하게 되죠. "왜 나는 분주하게 이렇게 뛰고 사업을 하고 일을 하는데 동생은 가만히 앉아서 주님의 말씀만 듣도록 두십니까. 좀 일어나서 나를 돕도록 말씀을 해주십시오." 대접의 상대가 되는 예수에게 불평을 하고 불만을 털어 놓게 됐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면 무엇을 하느냐 하는 활동형으로서 분망한 이런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는데 예수께서 경고 했어요. 마지막 세째번 보면 또하나의 유형인데 인격형의 사람이예요. 어떤 인격의 사람이 되느냐 하는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부류가 있어요. 물론 그에게도 소유욕이 있습니다. 사업욕이 있지만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나 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 소유하고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다 이 말씀예요. 예수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헤롯 왕이나 빌라도 총독 등과 타협하기만 했더라도 얼마나 대종교가로서 성공했겠습니까 상천하지에 그렇게 출세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지만은 그는 메시아로서의 사명 그 권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잃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 참된 인자로서 참 사람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택했던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아요 사람 보기에는 다 실패인 것 같지 요. 그러나 그 길이 참된, 인류를 구원하는 구주의 길이었던 것을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 중에 참 메시아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좁을 길을 걸었습니다. 내가 무엇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그는 무엇을 소유하느냐 무슨 사업을 하느냐 그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 느냐의 자세로 살고, 죽고, 부활했어요. 모든 것을 사람이 갖습니다. 모든 일을 사람이 합니다. 소유도 사업도 그 주체는 사람이 해요. 주체가 되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선결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부정하면 그 사람의 소유는 늘 망칩니다. 사람이 옳지 못한 그 사람의 사업은 부정의 어둔 상이 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되느냐,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이 생의 기본 자세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이 주신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이런 차원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졸업생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 밑에 앉아서 조용히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고 이것을 묵상하고 나는 이런 사람이 되야 되겠구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자세를 굳히고 모든 일을 하고, 모든 소유를 갖게 됐다는 것인데, 마르다야 네 동생의 생의 자세를 빼앗아서는 안돼 마리아야 너는 그 자세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어요. 인생의 모든 준비 과정을 필하고 생의 현장으로 출발하려고 하는 여러 졸업생들, 무엇을 많이 갖느냐에 소유형도 말고, 무엇을 하느냐에 활동형도 말고, 무엇이 되느냐의 인격형의 자세로 평생을 수양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되고 나서 무엇인가 소유해야해요. 사람이 되고 나서 무엇인가 행해야 하겠기에 그런 거예요. 우리 일생은 내가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합니다만 계획은 내가 하지요. 실천을 내가 하지요. 성패는 내 소관이 아닙니다. 제비는 내가 뽑는데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 있다고 했어요. 내 출생과 내 일생을 주관하는 분이 저 높은 곳에 계십니다. 내 마음속에 임재해 계십니다. 그분을 무관하고, 그 분과 불신하고, 그분의 뜻에 무관심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험난한 이 세상을 향해 나갑니다. 푸른 초장이 아닙니다. 꽃피고 아름다운 새가 지저귀는 세상이 아닙니다. 마귀가 득실거리는 죄악의 풍파가, 죽음의 풍파가 형용하는 세상을 향해서 여러분이 나갑니다. 누구를 의지할 것입니까, 누구의 뜻을 좇을 것입니까, 깊이 생각하면서 무엇이 되느냐 이 자세로 일생을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만 살기를 고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 잠언서에 보면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또한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뜻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출생에서 부터 죽기까지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의해서 주장을 받는다고 하면 개인이 모인 사회나 국가, 인류 전체의 운명도 하나님이 주장하고 섭리하시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생애는 싫던 좋던 하나님과의 깊은 연관을 갖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분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 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뜻을 그 분의 말씀인 성경을 토대로 잘 살펴서 순종하고 동역 동행하는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지역간, 계층간, 이념간, 세대간의 분열이 있는 사회와 민족을 사랑과 화해로 하나를 이루어야 할 큰 명제를 안고 있어요. 이 일을 위해서도 우리 각자가 막중한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이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정치라고 하는 것에 대해 저는 평소 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알 수 있는데 정치는 돈가지고 합니다. 돈없이 정치를 할 수가 없고, 돈을 모을려고 하면 권력이 필요하고 그래서 정치를 하기 위해선 재물과 권력이 필수 조건입니다. 그렇다고 돈과 권력만 가지면 되는가 그렇지 않아요. 정치를 하기 위해선 모략에 능해야 되요. 돈과 권력과 모략, 이 삼자가 합작을 이루어야 정치를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가 합작이 되면 거기엔 반드시 죄악이 남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는 본래 더러운 소관이 되지요. 동서고금 불문합니다. 정치는 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경 에베소서에도 보면 마귀는 정사와 권력을 미끼로 삼아서 역사한다는 말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정치를 안 할 수는 없지요. 백성이 오합지졸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을 다스려야 합니다.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정치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정치가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해 보자는 것이 우리가 정치에 갖는 노력일 것입니다. 결국 정치하는 사람이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정치를 잘 해야 하고 경제를 부흥시켜야만 한다고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하고 경제를 부흥시키는 주체가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고 노력이 적어요. 정치를 사람이 합니다. 경제를 사람이 합니다. 정치가 잘 되기 위해서는 경제가 올바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로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요. 바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몇 가지 부류의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성경 본문에 보면 사람의 세 가지 유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유형'의 부자 청년,
둘째는 `사업 활동형'의 마르다.
셋째는 `인격형'의 마리아 이 세가지 부류의 사람을 말씀해 줍니다. 먼저 소유형의 사람입니다. 무엇을 많이 갖느냐 하는 태도로 살아 가는 사람이 세상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어요. 시종 소유욕을 충족하며 살아 가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평생 무엇을 갖고 싶어서,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일생을 투입하고 사는 사람의 부류가 있어요. 소유욕이라고 하는 것은 백량을 가지면 2백량을 갖고 싶고 2백량을 가지면 4백량을 갖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어요. 죽는 시간까지 이런 소유욕 충족을 위해서 갈증을 느끼며 살아 가는 사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리라 생각합니다. 호화 주택을 갖고 싶어서, 별장을 갖고 싶어서, 좋은 자동차를 갖고 싶어서, 살인하고 모략하고 횡령합니다. 국가적으로 보면 식민지를 갖고 싶어서, 식민지를 갖고 싶어서, 전쟁을 하고 수백만 명의 생명을 죽이고 침략하는 것이지요. 이 소유욕, 무엇을 갖느냐 하는 사람 때문에 세상이 온통 분쟁투성이인 것이 사실이에요. 자본주의를 토대로한 민주주의, 유물주의를 토대로한 공산주의 이 두 괴물이 맞붙어 돌아 가면서 누가 더 좋은 물건을, 싼 물건을 더 많이 생산해서 수출하고 더 많이 벌어서 소유할 수 있는가에 경쟁을 피나게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은 전체가 물질 세계로만 빠져 들어가는 기분입니다. 남의 물건을 빼앗러라도 많이만 가지면 제일이라는 것이 인류의 풍토가 됐어요. 공산주의 자들은 가진 놈이 밉다고 그들의 것을 빼앗아서 골고루 가지자고 합니다. 또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어 모두 죽여 버리는 것을 공산 혁명이라고 이름을 붙입디다. 믿는 사람도 안 믿는 사람도 자본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근본 심리와 생활 태도는 비슷한 것 같아요. 양 진영에 이런 괴물이 깔려 있는 세상이 되다 보니 거기에서 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성경에 보면, 한 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에서 와서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선생님,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지닌 참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그래,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라." 부자 청년은 곧 대답하기를 "선생님, 저는 계명을 어렸을 때부터 완벽하게 지켰습니다.아 그래. 그렇지만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바른 사람되기를 원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다음에 와서 나를 쫑으라." 예수님이 대답했어요. 부자 청년은 평생 소유욕 충족을 위해서 살아 왔기 때문에 이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었어요. 부자 청년은 평생 `무엇을 갖고 사느냐'하는 소유형의 사람으로 살아 왔기 때문에 무엇을 갖고자 하는 자세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사람으로 탈바꿈을 시키기 위해서 소유욕의 충족을 위한 재산을 흩어 버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짐승과 달라서 떡만 먹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했듯이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먹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소유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 말씀을 먹고 바른 사람이 되어 살아야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기에 바른 사람이 되어 살아야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기에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떡보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먹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질 수 있느냐'하는 것보다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다 생을 바칠 수 있느냐 먼저 생각을 해야 해요. 내가 돈이 있다면 이것을 이용하여 어떻게 더 많이 소유할 것인가 하기보다는 이 돈을 무엇에다 쓰고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첫째 부류인 소유형의 사람을 경계하면서 모든 가진 것을 흩어 버리고 참 사람이 되느냐 하는 면으로 청년에게 교훈 했지만은 그는 이 소유욕을 버릴 수가 없어서 안타깝게도 근심하면서 주님을 떠나 간 후에 다시 예수를 만나지 못한 이런 비극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에서 보여 주는 부류의 사람은 사업형입니다. 활동형의 사람이지요. 무엇을 갖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겠지요. 활동형의 사람 가운데는 사업하는 사람이 많지요. 많은 기업가들이 돈을 벌지만 그것만으로는 허무하거든요. 범양상선인가 그 회사의 박회장이란 사람이 고층건물에서 자살했을 때 어느 대학교수가 쓴 추모하는 글을 신문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박형! 사람이 일생 사는데 쌀 몇 가마 필요해서 그것을 위해 일생을 마쳤느냐" 하는 내용이었어요. 인간이 돈을 많이 벌어서 쌓아 보니 70년의 생애를 쌀 몇 가마 된장 몇 동이면 되는 것을 천억, 이천억 쌓아 보았댔자 허망하거든요.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장학 사업을 하느니, 현대 고등학교를 만드느니, 호암 아트홀을 세우느니 여러 가지 사회 사업을 하는 등등 무엇을 하느냐 하는 이런 자세를 갖고 사는 마르다형을 오늘 본문이 지적해 주셨어요.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 기관을 세우고 친히 이사장을 하고 학원장도 되면서 삶의 보람을 느껴 보는 일이지요. 좋은 일이예요. 그러나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물결 풍파는 잔잔하지 않거든요. 갖은 풍파 속에서 사업을 하게 됩니다. 큰 권력이 압력으로 가해 오기도 합니다. 갖은 모략과 모함이 생겨서 그 사업을 제대로 운영하게 하질 못합니다. 이 세상의 성격이 그렇게 돼 있어요. 이렇게 되면 자기 사업을 위해서 권력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지조, 위신을 다 잃어 버리고 모리배와 결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결국에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느냐의 사업 모리배가 되고 마는 결과를 가져 오지요.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오랜만에 자기 집에 찾아 오신다니 크게 대접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어떻게 하면 잘 대접할 수 있을까 분망했습니다. 어떻게 식탁을 준비하고, 어떻게 분위기르 꾸미고, 어떻게 해야 잘 접대할 수 있을까에 여념이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마르다야, 마르다야!" 불렀어요. "얘야, 수고하고 분주하게 뛰고 활동하는 것 대단히 좋지마는 거기에 너무 많이 마음을 쓰지 말아라. 반찬 한 가지만 가지고도 식사할 수 있는데 그것 가지고 공연히 분주하게 활동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사탄이 유혹할 때가 있지요. "내게 절만 하면 천하만국, 천하권력, 영광 다 고스란히 네게 줄 테니까 그것을 받기만 하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 다할 수 있다는 거야.사탄아 물러가라." 그가 이 유혹을 물리친 일을 여러분 아십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분주하게 활동 하다가 예수님께 자기 동생 마리아에 대해서 불평을 하게 되죠. "왜 나는 분주하게 이렇게 뛰고 사업을 하고 일을 하는데 동생은 가만히 앉아서 주님의 말씀만 듣도록 두십니까. 좀 일어나서 나를 돕도록 말씀을 해주십시오." 대접의 상대가 되는 예수에게 불평을 하고 불만을 털어 놓게 됐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면 무엇을 하느냐 하는 활동형으로서 분망한 이런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는데 예수께서 경고 했어요. 마지막 세째번 보면 또하나의 유형인데 인격형의 사람이예요. 어떤 인격의 사람이 되느냐 하는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부류가 있어요. 물론 그에게도 소유욕이 있습니다. 사업욕이 있지만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나 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 소유하고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다 이 말씀예요. 예수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헤롯 왕이나 빌라도 총독 등과 타협하기만 했더라도 얼마나 대종교가로서 성공했겠습니까 상천하지에 그렇게 출세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지만은 그는 메시아로서의 사명 그 권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잃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 참된 인자로서 참 사람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택했던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아요 사람 보기에는 다 실패인 것 같지 요. 그러나 그 길이 참된, 인류를 구원하는 구주의 길이었던 것을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 중에 참 메시아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좁을 길을 걸었습니다. 내가 무엇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그는 무엇을 소유하느냐 무슨 사업을 하느냐 그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 느냐의 자세로 살고, 죽고, 부활했어요. 모든 것을 사람이 갖습니다. 모든 일을 사람이 합니다. 소유도 사업도 그 주체는 사람이 해요. 주체가 되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선결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부정하면 그 사람의 소유는 늘 망칩니다. 사람이 옳지 못한 그 사람의 사업은 부정의 어둔 상이 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되느냐,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이 생의 기본 자세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섬길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이 주신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이런 차원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졸업생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 밑에 앉아서 조용히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고 이것을 묵상하고 나는 이런 사람이 되야 되겠구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자세를 굳히고 모든 일을 하고, 모든 소유를 갖게 됐다는 것인데, 마르다야 네 동생의 생의 자세를 빼앗아서는 안돼 마리아야 너는 그 자세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어요. 인생의 모든 준비 과정을 필하고 생의 현장으로 출발하려고 하는 여러 졸업생들, 무엇을 많이 갖느냐에 소유형도 말고, 무엇을 하느냐에 활동형도 말고, 무엇이 되느냐의 인격형의 자세로 평생을 수양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되고 나서 무엇인가 소유해야해요. 사람이 되고 나서 무엇인가 행해야 하겠기에 그런 거예요. 우리 일생은 내가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합니다만 계획은 내가 하지요. 실천을 내가 하지요. 성패는 내 소관이 아닙니다. 제비는 내가 뽑는데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 있다고 했어요. 내 출생과 내 일생을 주관하는 분이 저 높은 곳에 계십니다. 내 마음속에 임재해 계십니다. 그분을 무관하고, 그 분과 불신하고, 그분의 뜻에 무관심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험난한 이 세상을 향해 나갑니다. 푸른 초장이 아닙니다. 꽃피고 아름다운 새가 지저귀는 세상이 아닙니다. 마귀가 득실거리는 죄악의 풍파가, 죽음의 풍파가 형용하는 세상을 향해서 여러분이 나갑니다. 누구를 의지할 것입니까, 누구의 뜻을 좇을 것입니까, 깊이 생각하면서 무엇이 되느냐 이 자세로 일생을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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