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평강 (빌4:6-7)
본문
개인의 행복은 마음의 평안에 있습니다. 어떤 이유이든지 마음에 불안과 공포, 절망의 폭풍우가 불어 닥치면 행복은 사라져 버립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여서 옛말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회와 국가도 평안 없이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 세계는 평화의 세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범죄한 후 지구상에 평화는 사라졌습니다. 죄는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고 무질서와 부조화, 분열과 다툼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와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1. 평화의 왕 예수님
우리가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임재하시고 다스리시는 곳에 비로소 참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19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과 불화하면 절대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운명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담이 막혀서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 공명을 가져도 마음에 평화는 결코 찾아올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은『풍성한 은혜』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참 평안을 발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내 안에 있는 사악한 마음과 더러운 허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께 품고 있는 적대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고통스러워 할 때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신다는 골로새서 1장 20절 말씀이 강하게 뇌리를 때렸다. 그 때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과 화목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존 번연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회개하며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자 그 영혼 속에 깊은 평화를 가질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은 담은 죄 밖에 없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아 놓은 담입니다. 이 죄는 우리가 스스로 회개하고 자복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우리를 정결하게 씻어 줍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이외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수양과 도덕, 고행같은 것으로 우리 죄의 담을 헐어버릴 수 없습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출신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삶에서 참 만족을 얻지 못하고 늘 죄책과 불안, 공포와 불만족으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농촌을 산책하다가 한 농부를 보았는데 그의 얼굴에는 평안이 넘치고 매우 화평하게 보여 “당신은 어떻게 이처럼 얼굴에 평화가 넘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늘 기도하며 주님과 교통하므로 마음에 이처럼 평안을 얻고 삽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때부터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어 몸찢고 피흘려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신 것을 알고 자기의 죄를 예수께 맡기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아 마음에 깊은 평안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 중에 사는 인간은 불안과 공포, 무질서와 부조화, 분열과 다툼 속에서 평안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해해야만 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는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원수가 되면 가정의 평화는 없습니다. 자녀도 부모와 등을 돌려 반목하면 평안할 수 없습니다. 화목하기 전에는 결코 평화가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 영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우리가 반목하면 우리 마음속의 평화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사단은 이 땅에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불평을 주어 가정과 사회를 분열시키는 원흉입니다. 우리가 이유 없이 마음이 불안할 때에는 사단을 쫓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사단을 대적하면 순식간에 사단은 떠나고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기쁨이 샘솟듯 넘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7-8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로마서 16장 20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불안하고 가정에 평안이 없을 때, 우리 생활에 잔잔한 평화가 사라질 때 우리는 사단을 대적하여 쫓아내야 합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에게 와서 평안을 도적질하는 갈등과 분열로 역사합니다. 이처럼 사단을 대적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참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사단이 그의 주인이고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마음속에 예수님과 자기가 공동으로 주인이 되어 살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에 늘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떻게 예수님과 공동으로 주인이 되어 마음 보좌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 ‘나’라고 하는 두 주인을 섬기면 우리 마음은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청산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새사람으로 되어 이제 우리 주인은 예수님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종이요 머슴이요 일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사는 것이지 주님과 함께 주인 노릇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섬길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자리를 빼앗고 주인과 다투면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우리가 주인과 다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의를 단호히 버리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어 우리의 인생을 예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의 참 평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치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우리의 인생을 예수께 맡기면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예수께 드려야 합니다. 내 인생을 내가 살려하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짐을 스스로 짊어져야 합니다. 또한 오늘 당장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하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우리 스스로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주님 발 앞에 던지고 주께 맡기면 그 모든 것을 주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책임져 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의 무거운 짐과 일들을 맡아 주십니다. 시편 37편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글에서 한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람이 걱정하는 것 가운데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지나간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은 4%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96%에 해당하는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과 웃음을 잃고 마음의 평화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갈릴리 바다의 풍파와 같은 것들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풍파 가운데 인생이라는 작은 배를 타고 파도의 격랑에 부딪힐 때 좌절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운명과 환경은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몰려드는 파도로 인해 들어찬 물을 퍼내고 바다를 잠잠케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우리 손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막힌 담과 바다를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운명을 다스리실 예수님을 우리는 깨울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8-39절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깨우면 우리 운명의 거친 풍파를 예수께서 잠잠케 해 주십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는 바다의 거친 풍파를 잠잠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풍랑으로 위태하게 되어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자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 없는 것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풍랑 속에 침몰하려 할 때 우리 인간의 생각과 능력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깨워 일으키십시오. 우리가 회개하고 자복하며 금식으로, 철야로 부르짖고 기도할 때, 우리가 간절한 기다림으로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한 불쌍한 과부가 인정 없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나아가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간절히 부르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부의 간청에 대해 불의한 재판관은 응답하지 않았으나 과부의 끈질긴 간구와 부르짖음에 ‘이 여자가 자주 와서 나를 괴롭히므로 내가 응답해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 1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예수님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거대한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이 오기 전에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1912년 4월 어느 주일 밤이었습니다. 한 미국인 부인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그만 잠자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는데 다른 기도는 안나오고 사업차 영국으로 간 남편이 타이타닉호를 타고 오는데 남편을 위한 기도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은 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이 어리석게 생각되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영국이 만든 세계 최대의 여객선으로 안전도에 대해서는 보증수표와 같은 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꾸만 남편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생겨 기도를 하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부인이 초저녁부터 시작한 기도가 새벽 5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몸부림치며 남편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는데 5시쯤 되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져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한편, 부인이 기도하던 즈음에 타이타닉호는 거대한 얼음산에 부딪혀 난파되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남편은 가라앉는 배에 매달려 있다가 배가 물속으로 들어갈 때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아 부인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가 밑에서 확 밀어주는 힘같은 것에 의해 물 위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마침 앞에 있던 고무보트가 잡혀 그 보트를 잡고 배 위로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그 부인은 남편에 대한 불안한 마음 때문에 쉬지 않고 부르짖는 기도를 하였고 그로 인해 남편은 구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이든 마음속에 평안이 다가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면 안됩니다. 기도는 영적 싸움입니다. 운명과 환경에 대한 싸움을 하다가 중간에 그치면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평강이 우리 마음속에 다가올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부르짖어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승리는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평강
성경은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풍파로 거센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지며 평화로이 된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기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기적적인 평강입니다. 현재 우리의 일이나 환경은 많은 고난과 어려움으로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의 풍파 속에서 인간의 계산으로, 인간의 힘으로 그 모든 풍파를 제어하며 평안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기적적인 평화가 와서 우리 마음을 점령하여 평화가 우리를 둘러 진치면 불안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나 수양으로 얻은 평안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환경이 변해야 평화롭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와 다릅니다.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어 가시밭을 지나면서도 환경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마음에 다가와 우리를 점령할 때 우리는 평안과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활하는 것은 먼저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일어난 것이 환경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에 의해 우리 마음에 변화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화가 들어오고 그 풍성한 마음의 평화가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6-17절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평안이 마음에서부터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변해야 편안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화로 말미암아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모든 염려와 공포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우리는 모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하게되고 이 때 느끼는 마음에 불안과 초조, 좌절과 절망, 고통은 그 누구와도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는 것입니다. 주는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주의 양입니다. 목자는 결코 양을 사망의 골짜기에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면 목자를 바라 보십시오. 목자는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명과 광명으로 변화시키시고 주의 지팡이로 건저 주시고 막대기로 원수를 쳐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이처럼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맡기면 우리는 현재의 불안과 초조, 절망과 고통, 번뇌에서 해방되고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장식품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어떤 지식을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현재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목자로서 우리가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없는 목자를 보셨습니까? 지팡이와 막대가 없는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양을 인도하는 목자는 어디를 가든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진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오십니다. 그래서 주의 지팡이로 우리를 건져 내시고 막대기로는 우리의 원수를 쳐 없애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면 흑암은 광명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불안과 고통은 평안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선생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들에게 버림받아 마른 우물에 빠져 고통 당하다가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결국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환난과 고통의 환경 가운데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기도하던 요셉은 결국 세월이 흐르고난 뒤, 13년 후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고 유익을 이루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주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주님을 목자로 삼은 사람은 결국 주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음에 평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한 청년이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겨서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비행기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다 위를 통과할 때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비행기 창문으로 장대같은 비가 때리며 다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놀라 고함치며 스튜어디스를 불러 자신의 불안함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자 스튜어디스는 웃으면서 “지금은 폭풍우를 뚫고 가지만 잠시 후 비행기가 고도를 높여 성층권으로 들어갑니다. 성층권은 온도가 일정하고 기후의 흐름이 약하기 때문에 비행기가 편안하게 갈 수있으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 비행기는 점점 고도를 높여 스튜어디스가 말한 대로 햇빛이 보이는 성층권으로 들어섰습니다. 이제 비행기는 고요하게 순항을 하게 되어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마음의 성층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를 맡고 만지며 고통과 괴로움, 환란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우리 마음이 성층권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지게 됩니다. 성령께서 계시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로 우리의 마음이 성령께서 계시는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게되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영적 성층권으로 가게 하여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평강이 있으면
하나님의 평강이 있으면 어떤 폭풍우를 만나도 겁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우리의 운명과 환경 가운데 아무리 거센 폭풍우가 와도 우리는 마음에 평화를 얻어 환경이 주는 어려움을 능히 이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17살 어린 소년이었지만 거대한 장수 골리앗 앞에 나갈 때 담대했습니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앞에서 사울도 떨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군인들이 떨었지만 다윗은 마음이 담담했습니다. 그는 야웨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에 평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골리앗을 향해 “오늘 야웨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들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야웨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웨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치시리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담대함을 잃는 것은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어떠한 운명과 환경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치명적인 병이 들은 사람도 금식하고 기도하여 마음에 평화가 넘치면 어떠한 병도 두려워하지 않고 ‘할렐루야! 나았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에 가득히 있으면 우리는 담대해집니다.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라는 것은 마음에 평화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손에 안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게서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오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면 아버지가 운명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고통당하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마음에 평안을 가지면 믿음 또한 넘칩니다. 믿음이란 불안한 가운데에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평안이 있는 사람에게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가서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넘치는 평안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을 알고 아들을 묶어서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 마음 속에 평안과 확신이 없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평안이 강한 믿음의 근원이 됩니다. 죽음조차도 평안이 있는자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믿는 자에게는 죽으나 사나 겁날 것이 없습니다. 살면 전도요 죽으면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 보다 훨씬 더 좋은 세계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보다 더좋은 세계로 가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바울 선생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가 오신 분입니다. 성경에는 바울 선생이 그 때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나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후 항상 하늘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내가 차라리 이 몸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로마는 바울 선생이 순교한 곳이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순교당할 때 얼마나 좋고 기쁜 날이었을까요? 로마 사람들은 바울을 사형에 처하니까 그에게 가장 비극적인 날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바울은 그날을 얼마나 기다렸을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가 원수에 의해 목이 잘릴 때 그는 몸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하나님 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서 바울 선생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평화는 보석 중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돈, 지위나 명예,권세, 부귀와 영화를 가지고도 이 평안은 결국 얻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이 내 인생을 내가 살면 근심도 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주께 맡기면 주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 기도: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 풍파가 그치지 않습니다. 개인과 가정, 생활, 자녀, 사업 모든 일들은 거센 폭풍우로 몰아치기도 하고 잠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으로 인한 평화의 성층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세상 풍랑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시는 평화의 성층권이 있습니다. 그 평화 가운데 주님과 함께 사는 우리들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1. 평화의 왕 예수님
우리가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임재하시고 다스리시는 곳에 비로소 참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19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과 불화하면 절대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운명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담이 막혀서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 공명을 가져도 마음에 평화는 결코 찾아올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은『풍성한 은혜』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참 평안을 발견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내 안에 있는 사악한 마음과 더러운 허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께 품고 있는 적대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고통스러워 할 때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신다는 골로새서 1장 20절 말씀이 강하게 뇌리를 때렸다. 그 때 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과 화목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존 번연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회개하며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자 그 영혼 속에 깊은 평화를 가질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은 담은 죄 밖에 없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아 놓은 담입니다. 이 죄는 우리가 스스로 회개하고 자복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우리를 정결하게 씻어 줍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이외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수양과 도덕, 고행같은 것으로 우리 죄의 담을 헐어버릴 수 없습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출신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삶에서 참 만족을 얻지 못하고 늘 죄책과 불안, 공포와 불만족으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농촌을 산책하다가 한 농부를 보았는데 그의 얼굴에는 평안이 넘치고 매우 화평하게 보여 “당신은 어떻게 이처럼 얼굴에 평화가 넘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늘 기도하며 주님과 교통하므로 마음에 이처럼 평안을 얻고 삽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때부터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어 몸찢고 피흘려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신 것을 알고 자기의 죄를 예수께 맡기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아 마음에 깊은 평안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 중에 사는 인간은 불안과 공포, 무질서와 부조화, 분열과 다툼 속에서 평안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마음에 평안을 얻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해해야만 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는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한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원수가 되면 가정의 평화는 없습니다. 자녀도 부모와 등을 돌려 반목하면 평안할 수 없습니다. 화목하기 전에는 결코 평화가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 영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우리가 반목하면 우리 마음속의 평화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사단은 이 땅에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불평을 주어 가정과 사회를 분열시키는 원흉입니다. 우리가 이유 없이 마음이 불안할 때에는 사단을 쫓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사단을 대적하면 순식간에 사단은 떠나고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기쁨이 샘솟듯 넘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7-8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로마서 16장 20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불안하고 가정에 평안이 없을 때, 우리 생활에 잔잔한 평화가 사라질 때 우리는 사단을 대적하여 쫓아내야 합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에게 와서 평안을 도적질하는 갈등과 분열로 역사합니다. 이처럼 사단을 대적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참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사단이 그의 주인이고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마음속에 예수님과 자기가 공동으로 주인이 되어 살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에 늘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어떻게 예수님과 공동으로 주인이 되어 마음 보좌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 주인을 섬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과 ‘나’라고 하는 두 주인을 섬기면 우리 마음은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청산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새사람으로 되어 이제 우리 주인은 예수님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종이요 머슴이요 일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사는 것이지 주님과 함께 주인 노릇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섬길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자리를 빼앗고 주인과 다투면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우리가 주인과 다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의를 단호히 버리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어 우리의 인생을 예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의 참 평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치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우리의 인생을 예수께 맡기면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예수께 드려야 합니다. 내 인생을 내가 살려하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짐을 스스로 짊어져야 합니다. 또한 오늘 당장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하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우리 스스로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주님 발 앞에 던지고 주께 맡기면 그 모든 것을 주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책임져 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의 무거운 짐과 일들을 맡아 주십니다. 시편 37편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글에서 한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람이 걱정하는 것 가운데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지나간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은 4%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96%에 해당하는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과 웃음을 잃고 마음의 평화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갈릴리 바다의 풍파와 같은 것들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풍파 가운데 인생이라는 작은 배를 타고 파도의 격랑에 부딪힐 때 좌절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깨워야 합니다. 운명과 환경은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몰려드는 파도로 인해 들어찬 물을 퍼내고 바다를 잠잠케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운명은 우리 손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막힌 담과 바다를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운명을 다스리실 예수님을 우리는 깨울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38-39절에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깨우면 우리 운명의 거친 풍파를 예수께서 잠잠케 해 주십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는 바다의 거친 풍파를 잠잠하게 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풍랑으로 위태하게 되어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자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 없는 것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풍랑 속에 침몰하려 할 때 우리 인간의 생각과 능력으로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깨워 일으키십시오. 우리가 회개하고 자복하며 금식으로, 철야로 부르짖고 기도할 때, 우리가 간절한 기다림으로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한 불쌍한 과부가 인정 없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나아가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간절히 부르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부의 간청에 대해 불의한 재판관은 응답하지 않았으나 과부의 끈질긴 간구와 부르짖음에 ‘이 여자가 자주 와서 나를 괴롭히므로 내가 응답해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 1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예수님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거대한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이 오기 전에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1912년 4월 어느 주일 밤이었습니다. 한 미국인 부인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그만 잠자기를 포기하고 일어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는데 다른 기도는 안나오고 사업차 영국으로 간 남편이 타이타닉호를 타고 오는데 남편을 위한 기도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은 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이 어리석게 생각되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영국이 만든 세계 최대의 여객선으로 안전도에 대해서는 보증수표와 같은 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꾸만 남편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생겨 기도를 하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부인이 초저녁부터 시작한 기도가 새벽 5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몸부림치며 남편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는데 5시쯤 되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져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한편, 부인이 기도하던 즈음에 타이타닉호는 거대한 얼음산에 부딪혀 난파되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남편은 가라앉는 배에 매달려 있다가 배가 물속으로 들어갈 때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아 부인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가 밑에서 확 밀어주는 힘같은 것에 의해 물 위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마침 앞에 있던 고무보트가 잡혀 그 보트를 잡고 배 위로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그 부인은 남편에 대한 불안한 마음 때문에 쉬지 않고 부르짖는 기도를 하였고 그로 인해 남편은 구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이든 마음속에 평안이 다가올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다가 중간에 포기하면 안됩니다. 기도는 영적 싸움입니다. 운명과 환경에 대한 싸움을 하다가 중간에 그치면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평강이 우리 마음속에 다가올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부르짖어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승리는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평강
성경은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풍파로 거센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지며 평화로이 된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기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기적적인 평강입니다. 현재 우리의 일이나 환경은 많은 고난과 어려움으로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의 풍파 속에서 인간의 계산으로, 인간의 힘으로 그 모든 풍파를 제어하며 평안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기적적인 평화가 와서 우리 마음을 점령하여 평화가 우리를 둘러 진치면 불안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나 수양으로 얻은 평안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환경이 변해야 평화롭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와 다릅니다.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어 가시밭을 지나면서도 환경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마음에 다가와 우리를 점령할 때 우리는 평안과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활하는 것은 먼저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 마음에 일어난 것이 환경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에 의해 우리 마음에 변화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화가 들어오고 그 풍성한 마음의 평화가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16-17절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평안이 마음에서부터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변해야 편안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그리스도의 평화로 말미암아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모든 염려와 공포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우리는 모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하게되고 이 때 느끼는 마음에 불안과 초조, 좌절과 절망, 고통은 그 누구와도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는 것입니다. 주는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주의 양입니다. 목자는 결코 양을 사망의 골짜기에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면 목자를 바라 보십시오. 목자는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명과 광명으로 변화시키시고 주의 지팡이로 건저 주시고 막대기로 원수를 쳐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이처럼 목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맡기면 우리는 현재의 불안과 초조, 절망과 고통, 번뇌에서 해방되고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장식품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어떤 지식을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현재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목자로서 우리가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없는 목자를 보셨습니까? 지팡이와 막대가 없는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양을 인도하는 목자는 어디를 가든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진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오십니다. 그래서 주의 지팡이로 우리를 건져 내시고 막대기로는 우리의 원수를 쳐 없애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면 흑암은 광명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불안과 고통은 평안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선생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들에게 버림받아 마른 우물에 빠져 고통 당하다가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결국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환난과 고통의 환경 가운데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기도하던 요셉은 결국 세월이 흐르고난 뒤, 13년 후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고 유익을 이루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 없을지라도 주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주님을 목자로 삼은 사람은 결국 주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음에 평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한 청년이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겨서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비행기가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다 위를 통과할 때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비행기 창문으로 장대같은 비가 때리며 다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놀라 고함치며 스튜어디스를 불러 자신의 불안함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러자 스튜어디스는 웃으면서 “지금은 폭풍우를 뚫고 가지만 잠시 후 비행기가 고도를 높여 성층권으로 들어갑니다. 성층권은 온도가 일정하고 기후의 흐름이 약하기 때문에 비행기가 편안하게 갈 수있으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 비행기는 점점 고도를 높여 스튜어디스가 말한 대로 햇빛이 보이는 성층권으로 들어섰습니다. 이제 비행기는 고요하게 순항을 하게 되어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마음의 성층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를 맡고 만지며 고통과 괴로움, 환란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우리 마음이 성층권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지게 됩니다. 성령께서 계시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로 우리의 마음이 성령께서 계시는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게되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영적 성층권으로 가게 하여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평강이 있으면
하나님의 평강이 있으면 어떤 폭풍우를 만나도 겁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우리의 운명과 환경 가운데 아무리 거센 폭풍우가 와도 우리는 마음에 평화를 얻어 환경이 주는 어려움을 능히 이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17살 어린 소년이었지만 거대한 장수 골리앗 앞에 나갈 때 담대했습니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앞에서 사울도 떨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군인들이 떨었지만 다윗은 마음이 담담했습니다. 그는 야웨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에 평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골리앗을 향해 “오늘 야웨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들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야웨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웨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치시리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담대함을 잃는 것은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어떠한 운명과 환경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치명적인 병이 들은 사람도 금식하고 기도하여 마음에 평화가 넘치면 어떠한 병도 두려워하지 않고 ‘할렐루야! 나았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에 가득히 있으면 우리는 담대해집니다. 강하고 담대한 신앙이라는 것은 마음에 평화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손에 안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게서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오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면 아버지가 운명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고통당하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만이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마음에 평안을 가지면 믿음 또한 넘칩니다. 믿음이란 불안한 가운데에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평안이 있는 사람에게 생깁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가서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넘치는 평안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을 알고 아들을 묶어서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 마음 속에 평안과 확신이 없었으면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평안이 강한 믿음의 근원이 됩니다. 죽음조차도 평안이 있는자에게는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믿는 자에게는 죽으나 사나 겁날 것이 없습니다. 살면 전도요 죽으면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 보다 훨씬 더 좋은 세계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보다 더좋은 세계로 가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바울 선생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가 오신 분입니다. 성경에는 바울 선생이 그 때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나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후 항상 하늘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내가 차라리 이 몸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로마는 바울 선생이 순교한 곳이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순교당할 때 얼마나 좋고 기쁜 날이었을까요? 로마 사람들은 바울을 사형에 처하니까 그에게 가장 비극적인 날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바울은 그날을 얼마나 기다렸을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가 원수에 의해 목이 잘릴 때 그는 몸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하나님 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서 바울 선생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의 평화는 보석 중 다이아몬드와 같습니다. 이것은 주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돈, 지위나 명예,권세, 부귀와 영화를 가지고도 이 평안은 결국 얻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이 내 인생을 내가 살면 근심도 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을 주께 맡기면 주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 기도: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세상 풍파가 그치지 않습니다. 개인과 가정, 생활, 자녀, 사업 모든 일들은 거센 폭풍우로 몰아치기도 하고 잠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으로 인한 평화의 성층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세상 풍랑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시는 평화의 성층권이 있습니다. 그 평화 가운데 주님과 함께 사는 우리들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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