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됩시다 (빌2:1-11)
본문
미국이 남북전쟁을 할 때입니다. 한 번은 어느 강을 사이에 두고서 북군과 남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면 서로 간에 아주 치열한 전투를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흐르는 강물 위에는 고요한 달빛만 적막하게 비취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아무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양쪽 편 진영에 깊은 적막감만 나돌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적막감을 깨뜨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북군과 남군 사이에서는 서로 군가가 달랐습니다. 심지어는 애국가조차도 서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쪽에서 이런 군가를 부르면 저쪽에서는 또 다른 군가로 서로가 서로를 응수하곤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군인은 모두가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 노래입니다. Home, Sweet Home(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옆에 있는 사람도 따라 불렀습니다. 또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따라 불렀습니다. 노래는 온 진영에 퍼져 나갔습니다. 급기야 그 노래는 강 건너편에 있는 상대 쪽 진영에도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함께 그 노래를 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소리내어 울면서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밝았습니다. 동이 텄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 진영에서도 진군의 나팔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더 이상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그들의 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서로 싸워야 하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한 형제인데…' 그 사실을 그들은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에베소서 4장 3-5절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여기서 몸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은 나를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교회의 지체가 되는 순간 우리는 동일한 한 소망, 하나님 나라의 소망, 천국의 소망, 꼭 같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미 하나된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들입니다. 성령께서 이미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우리는 힘써 지켜야 할 거룩한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된 것을 깨뜨리려는 악한 세력, 마귀의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는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서로가 화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화해의 메시지를 주신 것같이 우리도 이 화해의 메시지를 생활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화해의 메시지를 외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하나됨의 모범을 이룰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옛날부터 연대의식이 강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훈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왕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 온 백성이 축복을 받고 왕이 하나님을 배반하면 온 백성이 여러 재앙과 주변국들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연대 의식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세계가 다 한 혈통으로 지어졌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구속 안에 있는 형제임을 나타내 줍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은 모두가 한 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 의식이요, 형제 의식입니다. 우리의 갈등과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분기점을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움이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이 시작됩니다. 미움과 사랑, 불행과 행복의 분기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23:8)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본문 중에는 하나가 되는 길을 밝혀주는 진리가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가정도 교회도, 그리고 회사도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이 믿음을 사도 바울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였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문에서 겸손과 낮아지는 마음으로 설명합니다. 이 말씀의 근본 뜻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더불어 하나님께 복종하는 충성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진리의 승리를 확신하며, 주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서야 이에 따르는 낮아짐과 겸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곳에 하나가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그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 자랑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앙 안에 있는 자아 의식 속에서는 자기 자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 있을 뿐이요, 나를 자랑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랑이 분쟁의 씨가 됩니다. 바울은 자기를 언제나 자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로 평하였고 나는 “매일 죽노라”고 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작아질 때, 그리스도가 커지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무자격한 중에서 오늘 내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허락하신 은총이 특별한 것이지, 그 일을 맡은 내가 잘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다 같은 죄인이며 여전히 부족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즉 나만이 특별해서 이 일을 한다는 우월의식을 버리고,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일을 돌아보아서 자기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바꾸어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은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모든 이웃을 위하며, 그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즉, 중심을 자기에게서 옮겨 그리스도에게로, 그리고 다시 이웃에게로 향할 때, 거기에 하나가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6장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신앙 가운데 인내천 사상이 있습니다. ‘사람은 곧 하늘이다.’ 그리고 요즘 뉴에이지 운동에서도 ‘내가 신이다’‘신이 곧 나다’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허상입니다.
왜냐하면 신과 나는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영 안에서, 한 믿음으로 나와 주님이 하나가 된다고 고백합니다. ‘주와 합한 자는 한 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한 영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즉, 내가 하나님의 완전한 종이 되고 하나님의 완전한 도구가 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때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 영이 나를 주장하게 되고 그래서 내가 성령님께 완전히 순종하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거나 하나님이 우리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상적이고 멋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 허위가 있습니다. 거짓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믿음이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주와 내가 합해졌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큰 기쁨이며 특권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욱더 나답게 살 수 있고, 나를 회복할 수 있고, 나를 더 영화롭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주의 뜻대로 살기 위해 내 생활을 조심하고, 몸과 마음을 조심하고 나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을 닮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때 주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주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생각해봅시다. 자녀들이 부모의 뜻을 잘 받아들이고 부모의 뜻에 잘 순종하게 되면 부모와 자녀는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거역한다면 부모와 자녀의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고 분리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한 영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주와 합한 자가 됩니다.
사회에서도 이 말씀이 실천되기를 원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되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식구들 각자의 마음이 다 뿔뿔이 흩어져 있다면 집안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가정도 국가도 회사도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가 경제위기로 인하여 힘들 때, 우리 모두가 마음을 합하여 금붙이를 내놓고 헌신적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민족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한 가족인데 한 가족이 마음이 하나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13:2절에서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말하고 있고, 사도행전 5:3절에서는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되어도 사람끼리 마음이 합하여지면 당파를 짓습니다. 유다서1:19절에서는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부부간에 마음은 합해졌으나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하나님과 합하여지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6:5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한 자는'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과 연합했습니까? 사도행전13:22절에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많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마음을 안 가지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됩니다.
2. 사랑하는 마음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TV에서는 '사랑, 사랑'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거짓 사랑, 이기적인 사랑, 이용하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선물하나를 주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뺏으려는 방법으로 쓰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4: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3: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8:35절에서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하나님도 사랑이시오 예수님도 사랑이시오 성령도 사랑이십니다. 로마서8:26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 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남을 이용하는 사랑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성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3. 뜻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절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뜻도 하나되어야 합니다. 뜻은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요한복음6:38-39절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이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합니다.
뜻은 생각이고 마음이며 계획이고 각오이며 결심입니다. 내가 어디를 가고자 결심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남이 무슨 말을 한다하더라도 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을 먹지 않고 그 뜻을 정하였습니다. 다니엘서1:8절에서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 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뜻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결심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는 것입니다.
4.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낫게 여기는 가정은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버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먼 곳에 있어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주일 성수하러 올라오는 가정,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맘으로 살아가는 가정. 우리 중에는 참으로 훌륭한 가정들이 많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런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5.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5절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사성어 중에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은 사람인데 마음은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계시록 9:7-8절에 보면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굴은 사람이요 마음은 예수의 마음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그 마음을 가져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마음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사랑도 하나가 되고 뜻도 하나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됨을 어떻게 삶 속에서 이루어갈 수가 있느냐? 이 하나됨을 지키는 덕목들에 관한 교훈이 에베소서 4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여기에 4가지 덕목들이 나옵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 용납함입니다. 성도의 사이에 어떤 금이 가고 서로가 상처를 받을 때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군가는 이 4가지 덕목 중 무언가 하나가 결핍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교제는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 중의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온유하지 못했거나,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오래 참을 수 없었거나, 때문에 우리들이 피차에 사랑으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교제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사랑으로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우리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이 덕목들을 이루는 삶이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주장을 꺾을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물론 교만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역사에서 이것은 최초로 나타났던 죄악입니다. 사탄이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서 유혹 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싶은 끊임없는 유혹, 이것은 본래 사탄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인간 타락의 가장 중요한 죄가 바로 이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겸손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상대화시켜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았을 때 죄인이었던 나,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나, 나는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겸허의 자리, 거기서부터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란 단어의 뜻은 잘 통제되고 절제되고 있는 힘이란 뜻입니다. 일종의 자기 통제의 의미, 그것이 온유입니다. 자기를 잘 조절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힘은 있어도 그것을 통제 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반대는 자기 통제를 잃어버리는 사람, 그러니까 쉽게 자기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람. 쉽게 분노하고 신경질 내고 폭발시키는 사람들은 서로가 교제하기 힘들고, 또 공동체의 평화가 위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리더쉽에 있어서 이 온유는 다른 어떤 덕목보다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사람들에게 계시하면서 제일 먼저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그의 인격 가운데 첫 자리로 강조된 덕성이 온유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고백한다면 또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온유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유명한 리더였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결코 약하다는 이미지를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뻣뻣하다거나 교만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시면 이 모세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그가 온유하기가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 그보다 승했다'고 했습니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뛰어났던 사람, 그것이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이 온유함은 타고난 성격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덕성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바로 이 온유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앞에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구한다면 여러분은 이 온유함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함의 자리에 설 때 우리의 교제는 더 아름다워져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덕목은 인내입니다. 우리가 하나됨을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오래참음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종류의 인간관계 가운데서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가 서로 남남이 한 몸을 이루어서 한 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래도 갈라서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부부 사이에 무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면 구체적으로 참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참았고 참았기 때문에 부부 관계는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용서하고 용납하면서 서로 참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부부 사이에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 이웃들에게도 베풀 수 있다면 이웃들을 향해서도 그렇게 참을 수가 있다면 우리의 관계는 얼마나 더 깊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인내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인내는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또한 성경은 가르칩니다.
네 번째 덕목은 사랑 가운데 용납함입니다. 이것은 거의 용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사랑한다면 용납하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4장8절에 보시면 사도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평화가 흔들릴 때 교제가 상처를 받을 때보면 항상 남의 허물을 그리고 약점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가운데 허물을 덮어주기 보다 드러내고 공격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공동체의 문화는 축복의 문화가 아니라 그것은 정죄의 문화가 됩니다. 우리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아프게 한 그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용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일 수가 있다는 것이요, 그럴 때 우리는 더 이상 벽을 쌓는 사람들이 아니라 벽을 허무는 자가 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군인은 모두가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 노래입니다. Home, Sweet Home(즐거운 나의 집)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옆에 있는 사람도 따라 불렀습니다. 또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따라 불렀습니다. 노래는 온 진영에 퍼져 나갔습니다. 급기야 그 노래는 강 건너편에 있는 상대 쪽 진영에도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함께 그 노래를 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소리내어 울면서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밝았습니다. 동이 텄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 진영에서도 진군의 나팔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더 이상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그들의 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서로 싸워야 하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한 형제인데…' 그 사실을 그들은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에베소서 4장 3-5절에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여기서 몸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은 나를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교회의 지체가 되는 순간 우리는 동일한 한 소망, 하나님 나라의 소망, 천국의 소망, 꼭 같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미 하나된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들입니다. 성령께서 이미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우리는 힘써 지켜야 할 거룩한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된 것을 깨뜨리려는 악한 세력, 마귀의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는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서로가 화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화해의 메시지를 주신 것같이 우리도 이 화해의 메시지를 생활화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화해의 메시지를 외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하나됨의 모범을 이룰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옛날부터 연대의식이 강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훈련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왕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 온 백성이 축복을 받고 왕이 하나님을 배반하면 온 백성이 여러 재앙과 주변국들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연대 의식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세계가 다 한 혈통으로 지어졌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구속 안에 있는 형제임을 나타내 줍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은 모두가 한 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 의식이요, 형제 의식입니다. 우리의 갈등과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분기점을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움이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이 시작됩니다. 미움과 사랑, 불행과 행복의 분기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23:8)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본문 중에는 하나가 되는 길을 밝혀주는 진리가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가정도 교회도, 그리고 회사도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이 믿음을 사도 바울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였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문에서 겸손과 낮아지는 마음으로 설명합니다. 이 말씀의 근본 뜻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더불어 하나님께 복종하는 충성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진리의 승리를 확신하며, 주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서야 이에 따르는 낮아짐과 겸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곳에 하나가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그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 자랑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앙 안에 있는 자아 의식 속에서는 자기 자랑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 있을 뿐이요, 나를 자랑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랑이 분쟁의 씨가 됩니다. 바울은 자기를 언제나 자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로 평하였고 나는 “매일 죽노라”고 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작아질 때, 그리스도가 커지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무자격한 중에서 오늘 내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허락하신 은총이 특별한 것이지, 그 일을 맡은 내가 잘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다 같은 죄인이며 여전히 부족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즉 나만이 특별해서 이 일을 한다는 우월의식을 버리고,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일을 돌아보아서 자기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바꾸어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은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모든 이웃을 위하며, 그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즉, 중심을 자기에게서 옮겨 그리스도에게로, 그리고 다시 이웃에게로 향할 때, 거기에 하나가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6장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신앙 가운데 인내천 사상이 있습니다. ‘사람은 곧 하늘이다.’ 그리고 요즘 뉴에이지 운동에서도 ‘내가 신이다’‘신이 곧 나다’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허상입니다.
왜냐하면 신과 나는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영 안에서, 한 믿음으로 나와 주님이 하나가 된다고 고백합니다. ‘주와 합한 자는 한 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한 영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즉, 내가 하나님의 완전한 종이 되고 하나님의 완전한 도구가 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때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 영이 나를 주장하게 되고 그래서 내가 성령님께 완전히 순종하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거나 하나님이 우리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상적이고 멋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 허위가 있습니다. 거짓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믿음이 성경적인 믿음입니다.
주와 내가 합해졌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큰 기쁨이며 특권입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욱더 나답게 살 수 있고, 나를 회복할 수 있고, 나를 더 영화롭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주의 뜻대로 살기 위해 내 생활을 조심하고, 몸과 마음을 조심하고 나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을 닮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때 주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입니까?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주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생각해봅시다. 자녀들이 부모의 뜻을 잘 받아들이고 부모의 뜻에 잘 순종하게 되면 부모와 자녀는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거역한다면 부모와 자녀의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고 분리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한 영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 우리는 주와 합한 자가 됩니다.
사회에서도 이 말씀이 실천되기를 원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되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식구들 각자의 마음이 다 뿔뿔이 흩어져 있다면 집안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가정도 국가도 회사도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할 줄 믿습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가 경제위기로 인하여 힘들 때, 우리 모두가 마음을 합하여 금붙이를 내놓고 헌신적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민족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한 가족인데 한 가족이 마음이 하나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13:2절에서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말하고 있고, 사도행전 5:3절에서는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되어도 사람끼리 마음이 합하여지면 당파를 짓습니다. 유다서1:19절에서는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부부간에 마음은 합해졌으나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하나님과 합하여지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서6:5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한 자는'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과 연합했습니까? 사도행전13:22절에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들이 많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마음을 안 가지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됩니다.
2. 사랑하는 마음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TV에서는 '사랑, 사랑'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거짓 사랑, 이기적인 사랑, 이용하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선물하나를 주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뺏으려는 방법으로 쓰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4: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3: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예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8:35절에서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하나님도 사랑이시오 예수님도 사랑이시오 성령도 사랑이십니다. 로마서8:26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 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남을 이용하는 사랑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성도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3. 뜻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절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뜻도 하나되어야 합니다. 뜻은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요한복음6:38-39절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이란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합니다.
뜻은 생각이고 마음이며 계획이고 각오이며 결심입니다. 내가 어디를 가고자 결심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남이 무슨 말을 한다하더라도 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을 먹지 않고 그 뜻을 정하였습니다. 다니엘서1:8절에서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 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뜻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결심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는 것입니다.
4.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본문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낫게 여기는 가정은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버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먼 곳에 있어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주일 성수하러 올라오는 가정,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맘으로 살아가는 가정. 우리 중에는 참으로 훌륭한 가정들이 많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런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5.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5절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사성어 중에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은 사람인데 마음은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계시록 9:7-8절에 보면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굴은 사람이요 마음은 예수의 마음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그 마음을 가져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마음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사랑도 하나가 되고 뜻도 하나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됨을 어떻게 삶 속에서 이루어갈 수가 있느냐? 이 하나됨을 지키는 덕목들에 관한 교훈이 에베소서 4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여기에 4가지 덕목들이 나옵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 용납함입니다. 성도의 사이에 어떤 금이 가고 서로가 상처를 받을 때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군가는 이 4가지 덕목 중 무언가 하나가 결핍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교제는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 중의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온유하지 못했거나,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오래 참을 수 없었거나, 때문에 우리들이 피차에 사랑으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교제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사랑으로 용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우리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이 덕목들을 이루는 삶이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고 자기의 주장을 꺾을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물론 교만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역사에서 이것은 최초로 나타났던 죄악입니다. 사탄이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서 유혹 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싶은 끊임없는 유혹, 이것은 본래 사탄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인간 타락의 가장 중요한 죄가 바로 이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겸손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상대화시켜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았을 때 죄인이었던 나,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나, 나는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겸허의 자리, 거기서부터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란 단어의 뜻은 잘 통제되고 절제되고 있는 힘이란 뜻입니다. 일종의 자기 통제의 의미, 그것이 온유입니다. 자기를 잘 조절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힘은 있어도 그것을 통제 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반대는 자기 통제를 잃어버리는 사람, 그러니까 쉽게 자기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람. 쉽게 분노하고 신경질 내고 폭발시키는 사람들은 서로가 교제하기 힘들고, 또 공동체의 평화가 위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리더쉽에 있어서 이 온유는 다른 어떤 덕목보다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사람들에게 계시하면서 제일 먼저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그의 인격 가운데 첫 자리로 강조된 덕성이 온유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고백한다면 또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온유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유명한 리더였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결코 약하다는 이미지를 전혀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뻣뻣하다거나 교만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시면 이 모세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그가 온유하기가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 그보다 승했다'고 했습니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뛰어났던 사람, 그것이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이 온유함은 타고난 성격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덕성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바로 이 온유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앞에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구한다면 여러분은 이 온유함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함의 자리에 설 때 우리의 교제는 더 아름다워져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덕목은 인내입니다. 우리가 하나됨을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오래참음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종류의 인간관계 가운데서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가 서로 남남이 한 몸을 이루어서 한 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래도 갈라서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고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부부 사이에 무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면 구체적으로 참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참았고 참았기 때문에 부부 관계는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용서하고 용납하면서 서로 참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부부 사이에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 이웃들에게도 베풀 수 있다면 이웃들을 향해서도 그렇게 참을 수가 있다면 우리의 관계는 얼마나 더 깊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인내한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인내는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라고 또한 성경은 가르칩니다.
네 번째 덕목은 사랑 가운데 용납함입니다. 이것은 거의 용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사랑한다면 용납하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4장8절에 보시면 사도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평화가 흔들릴 때 교제가 상처를 받을 때보면 항상 남의 허물을 그리고 약점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가운데 허물을 덮어주기 보다 드러내고 공격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공동체의 문화는 축복의 문화가 아니라 그것은 정죄의 문화가 됩니다. 우리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아프게 한 그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용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일 수가 있다는 것이요, 그럴 때 우리는 더 이상 벽을 쌓는 사람들이 아니라 벽을 허무는 자가 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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