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와 죽은 자 (딤후4:1-8)
본문
성경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매우 다양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도래를 얘기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매우 충격적인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마태는 왕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서술합니다. 마가는 행동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매우 다이내믹한 필치로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또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들을 찾아보면 어린 양, 신랑, 또는 생명의 떡이나 빛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이라고 말하는군요.
우리가 사도신경에서도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합니다. 심판한다는 것은 판정한다, 혹은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누가 산 자이고 누가 죽은 자인가를 판정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판정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심판주라고 말해야겠지요.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최후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며칠 전에 연말을 지나면서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겠지만, 모든 것의 마지막에는 이처럼 평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을 다 마친 후에는 어떤 평가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9:27)고 했습니다. 한번 죽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이 결국 끝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생전에는 아무리 큰 권력이나 부를 소유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이 끝난 후에는 자신의 살았던 인생에 대하여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평생을 살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살았던 인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인생으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을 좀 더 신중하고 사려깊게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을 근거로 해서 심판 받게 될 줄을 뻔히 알면서 제멋대로 산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우리가 사는 모양을 보면 나중에 있을 그 심판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그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믿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요. 심판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이 없기 때문에 멋대로 산다고 하는 것은 매우 비도덕적인 처사이기도 합니다. 들키지 않으면 도둑질을 해도 된다는 것과 같은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혼나지 않을 거니까 나쁜 짓을 한다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 믿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양 사는 것은 왜 그럴까요? 심판이 있기는 있되 당장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아직도 우리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많이 있고 행동을 돌이킬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죽음에 관해 어떤 보장이나 약속을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건강하다고 오래 살고 젊었다고 늦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지난주에 해밀턴에 갔었는데, 한 목사님이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던 청년이 와이카토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졌는데 아직 시신을 찾지 못했다며 분위기가 온통 침울하더군요. 앞날이 창창해 보이던 그 청년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가 많이 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가 죽는다면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까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모두 멸망을 당했다고 주님이 얘기하셨지요? 내일 홍수가 나서 모조리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태평스럽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을까요? 주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도 언제 어느 날 오시겠다고 하지 않고 도적 같이 임하신다는 것도 우리로 하여금 늘 깨어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날을 준비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어디선가 이런 질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목숨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대부분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들, 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마음껏 해보겠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주로 파괴적이고 부도덕한 것들이겠지요. 예를 들면 은행강도를 해보겠다거나 가장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어보겠다거나 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제약에 의해 억제되었던 본능적인 욕망의 충족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이 동물적 수준으로 떨어지는 순간이군요. 일주일 남은 삶을 정말 가치있고 의미있게 살려고 하기보다 동물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한번 죽는다는 것은 아는데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있다는데 은행강도를 어떻게 해요?
자,
그런데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다음에도 산다는 것 아니에요? 죽어버린 사람 심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어버린 다음에는 심판해서 상을 주거나 벌을 줄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심판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결과에 따른 두 번째 삶이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재판장 앞에 서게 되면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판정을 하시는데 어떤 판정을 하시는가 하면 산 자인지 죽은 자인지를 판정하신다는 거예요.
여기서 산 자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죽은 자는 생명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생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목숨과는 전혀 다른 생명입니다. 한번은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청하기를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의 말씀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어요. 이 죽은 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이겠어요? 바로 생명을 갖지 못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 살아서 돌아다니고는 있지만 죽은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 생명을 가진 사람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바로 이 생명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생명을 가졌다고요? ‘내 말을 듣고,’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요. 요한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을 얻기 전에는 사망에 속해 있었어요. 죽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이 이제 이해가 되지요? 그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 최후의 심판에서 산 자, 즉 생명을 가진 자로 판정을 받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죽은 자가 받아야 할 형벌에 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반대로 생명,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생명을 두 개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언젠가 한번 죽게 될 목숨,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진 생명이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얻게 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무나 가진 생명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진 생명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는 판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이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나그네 길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세상의 삶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 즉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야지요. 이 세상에서의 삶도 생명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의 삶이 무척 다릅니다. 당장 일주일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태도와 생각에서부터 많은 차이가 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힘쓰라고 하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명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디모데가 얼마나 신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지 그것도 평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도 한번 죽게 될 것이고 그 후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얼마나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했는지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이 심판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평가받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렇게 심판하실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게을러지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잘못 나아가는 발걸음을 되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심판하실 그리스도가 무서워서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들이라고 해서, 자유롭다고 해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아들이면 아들로서 지켜야 할 법도와 규범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즉 생명을 소유한 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고 기대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2004년 새해를 맞으면서 생명을 소유한 자에게 합당한 삶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대하게 될 것인지 늘 기억하고 염두에 두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이라고 말하는군요.
우리가 사도신경에서도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합니다. 심판한다는 것은 판정한다, 혹은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누가 산 자이고 누가 죽은 자인가를 판정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판정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심판주라고 말해야겠지요.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최후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며칠 전에 연말을 지나면서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겠지만, 모든 것의 마지막에는 이처럼 평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을 다 마친 후에는 어떤 평가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9:27)고 했습니다. 한번 죽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이 결국 끝을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생전에는 아무리 큰 권력이나 부를 소유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이 끝난 후에는 자신의 살았던 인생에 대하여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평생을 살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살았던 인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인생으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면,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을 좀 더 신중하고 사려깊게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인생을 근거로 해서 심판 받게 될 줄을 뻔히 알면서 제멋대로 산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우리가 사는 모양을 보면 나중에 있을 그 심판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그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믿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요. 심판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이 없기 때문에 멋대로 산다고 하는 것은 매우 비도덕적인 처사이기도 합니다. 들키지 않으면 도둑질을 해도 된다는 것과 같은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혼나지 않을 거니까 나쁜 짓을 한다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우리 믿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양 사는 것은 왜 그럴까요? 심판이 있기는 있되 당장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아직도 우리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많이 있고 행동을 돌이킬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죽음에 관해 어떤 보장이나 약속을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건강하다고 오래 살고 젊었다고 늦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지난주에 해밀턴에 갔었는데, 한 목사님이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던 청년이 와이카토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졌는데 아직 시신을 찾지 못했다며 분위기가 온통 침울하더군요. 앞날이 창창해 보이던 그 청년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가 많이 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내가 죽는다면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까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모두 멸망을 당했다고 주님이 얘기하셨지요? 내일 홍수가 나서 모조리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태평스럽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했을까요? 주님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도 언제 어느 날 오시겠다고 하지 않고 도적 같이 임하신다는 것도 우리로 하여금 늘 깨어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날을 준비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어디선가 이런 질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목숨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대부분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들, 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마음껏 해보겠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주로 파괴적이고 부도덕한 것들이겠지요. 예를 들면 은행강도를 해보겠다거나 가장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어보겠다거나 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제약에 의해 억제되었던 본능적인 욕망의 충족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이 동물적 수준으로 떨어지는 순간이군요. 일주일 남은 삶을 정말 가치있고 의미있게 살려고 하기보다 동물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한번 죽는다는 것은 아는데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있다는데 은행강도를 어떻게 해요?
자,
그런데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다음에도 산다는 것 아니에요? 죽어버린 사람 심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어버린 다음에는 심판해서 상을 주거나 벌을 줄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심판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결과에 따른 두 번째 삶이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재판장 앞에 서게 되면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판정을 하시는데 어떤 판정을 하시는가 하면 산 자인지 죽은 자인지를 판정하신다는 거예요.
여기서 산 자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죽은 자는 생명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생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목숨과는 전혀 다른 생명입니다. 한번은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청하기를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의 말씀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어요. 이 죽은 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이겠어요? 바로 생명을 갖지 못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 살아서 돌아다니고는 있지만 죽은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 생명을 가진 사람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바로 이 생명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생명을 가졌다고요? ‘내 말을 듣고,’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요. 요한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을 얻기 전에는 사망에 속해 있었어요. 죽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이 이제 이해가 되지요? 그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 최후의 심판에서 산 자, 즉 생명을 가진 자로 판정을 받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죽은 자가 받아야 할 형벌에 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반대로 생명,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생명을 두 개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언젠가 한번 죽게 될 목숨,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진 생명이고, 또 하나는 예수께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얻게 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무나 가진 생명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진 생명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는 판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이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나그네 길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세상의 삶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 즉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야지요. 이 세상에서의 삶도 생명을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의 삶이 무척 다릅니다. 당장 일주일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태도와 생각에서부터 많은 차이가 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힘쓰라고 하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명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디모데가 얼마나 신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지 그것도 평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도 한번 죽게 될 것이고 그 후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얼마나 부지런히 말씀을 전파했는지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이 심판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평가받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렇게 심판하실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게을러지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잘못 나아가는 발걸음을 되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심판하실 그리스도가 무서워서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들이라고 해서, 자유롭다고 해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아들이면 아들로서 지켜야 할 법도와 규범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즉 생명을 소유한 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고 기대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2004년 새해를 맞으면서 생명을 소유한 자에게 합당한 삶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대하게 될 것인지 늘 기억하고 염두에 두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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