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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 (딤후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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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지요? 사는 형편이 괜찮고 어려움이 없으면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소식 전하는 일이 뜸해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여기 뉴질랜드에 와서 살면서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연락을 자주 못하고 사는 것은 여러분이 잘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무슨 어려움이나 큰 일을 만나면 어떻게 되던가요? 자꾸 전화하고 편지하고, 이곳의 삶이 괴로울수록 옛날이 그립고 친구들 생각도 나고 가족들이 보고 싶어지지 않겠어요?

제가 몇 년 전에 중국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는데, 처음 며칠은 조선족 교회 성경공부 모임에서 강의하고 또 시간 나면 구경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한국에 있는 가족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제가 심하게 아팠네요. 그나마 그것도 백두산 간다고 여행을 떠나면서부터 아프기 시작해서 며칠 음식도 못먹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탈진이 됐어요. 그래서 연변병원에 가서 링거 주사를 맞으며 누워 있는데, 갑자기 가족들이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다섯 살이었던 우리 에스더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쏟아졌어요.

지금 바울은 캄캄한 지하 감옥에서 늙고 병든 몸으로 추위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그에게 예쁜 딸이 있었더라면, 사랑스러운 손자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런 가족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그리워할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에게 가족은 그가 세운 교회들이었고,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해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그가 영적으로 낳은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보고 싶은 얼굴들을 그리며 그리움을 달래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독과 괴로움 속에서 눈에 어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기도라는 숭고한 행위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 아닌가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바로 이것 아니겠어요? 그것도 자신의 괴로운 처지를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리운 사람들, 자신의 영적 자녀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라고 합니다. 감옥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또 앞으로 무슨 할 일이 남아 있겠어요? 머지 않아 사형이 집행될 것인데.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눈만 뜨면 기도, 눈만 감으면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지요.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살전 5:17). 사무엘 역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삼상 12:23).
그런데 우리는 너무 바빠요. 기도할 시간이 없어요. 글쎄, 시간이 없는지 기도할 마음이 없는지는 모르지만 기도할 시간이 없어요. 정 그렇게 기도할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기도할 시간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실업자가 되게 하시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하신다 해도 불만이 없겠지요?

바울이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특별히 기억되는 사람은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가 우러나오고 또 그를 보고 싶어집니다. 그만큼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했고 그에게 소중한 동역자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하여 그를 그리워한다고 말합니다. 디모데가 언제 왜 바울을 위해 눈물을 흘렸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또는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고생하는 것이 마음 아파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겠지요. 그 눈물은 바울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디모데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간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그것이 눈물로 나타납니다. 슬픔을 견딜 수 없을 때 눈물이 나오지요. 그처럼 눈물은 진실을 담보합니다. 우리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디모데의 진심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담보하는 눈물이 가식과 속임수의 수단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는 것은 참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입니다. 이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존경과 사랑의 표시인 입맞춤을 배신의 신호로 삼았던 가룟 유다처럼 말이지요.

바울이 디모데를 그리워하면서 그를 보고 싶어했던 이유는, 그리고 데모데를 만나는 것이 큰 기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디모데에게 있는 거짓없는 믿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평생 수고했던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가 무엇 때문에 가족도 없이,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을 고난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까? 비록 가는 곳마다 위험과 적의가 그를 괴롭혔던 생애였지만, 그리고 지금도 어두운 감옥에서 외롭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형편이지만, 만일 그가 그토록 수고하면서 추구했던 것을 얻었다면, 그는 무척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디모데를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가 평생 고난 속에서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서까지 전하고 가르쳤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들 마음 속에 심어져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그가 당했던 모든 고난과 부끄러움은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좋은 믿음을 갖게 된 것이 바울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에게는 무엇이 가장 큰 기쁨이 될까요?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목사를 기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맛있는 것 많이 사다 주고 대접 잘하면 목사가 기뻐할까요? 성도들이 어떻게 되었을 때 목사가 가장 기뻐하겠어요? 교인 중에서 사업에 성공하면 물론 목사가 기쁘겠지요.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을 때 목사가 물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가 아니라도 기뻐할 일입니다. 즉 목사의 기쁨은 아닌 것입니다. 목사의 기쁨은 자신이 가르친 교인들이 좋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목사의 존재 이유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존경하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고등학교 교목이셨는데, 젊은 나이에 채플 시간에 설교하시다가 쓰러져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강직한 성품에 매료되어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진리처럼 생각될 정도였는데, 한번은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얘기를 하지만, 이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잘 믿는 것 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천하의 망나니도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셨을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런데 어쩌다가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사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대하시는 내용이랄지, 혹은 그 사람의 입술의 고백이나 삶에 나타나는 증거를 통해서 그가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갖게 될 때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목사로서 그 사람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애정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보니 알겠어요. 좋은 믿음, 신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가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지,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더욱이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이 변화되어 그런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겠어요? 그 보람과 기쁨으로 목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게 없다면 목사, 이것 할 짓이 못됩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변화가 없고,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바울은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외조모에게 있던 믿음이었고, 또 어머니에게 있던 믿음이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루스드라에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는데, 그의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외할머니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구요. 유태인들이 국가라는 물리적 결속단체가 없이 2천년 동안 온 세계에 흩어져 유랑하면서도 그 민족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해 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기적같은 일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강한 선민의식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국제본부에서 각 지역에 있는 유태인들을 위한 통합업무를 수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들의 가정교육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태인의 가정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는 어머니입니다.

같은 셈족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이슬람 세계에서는 여자가 무슬림이 아닌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남자가 무슬림 아닌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은 허용됩니다. 강력한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무슬림 사회의 근간이기 때문에 남자가 무슬림이면 나머지 식구는 자동으로 무슬림이 되지만, 여자가 무슬림 아닌 집에 시집가서는 무슬림의 정체성을 상실한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유태인들은 정반대였어요. 아버지가 유태인이고 어머니가 유태인이 아니면 자녀들은 유태인이 되지 못하는 수가 많아요. 그러나 아버지가 유태인이 아니더라도 어머니가 유태인이면 자녀는 반드시 유태인이 됩니다. 유태인 가정교육에서 핵심은 어머니라는 것이 증명된 것 아닌가요?

정 이상하게 생각되시는 분은 모세의 어머니를 생각해 보세요. 이집트 왕궁의 왕자를 노예 민족의 지도자와 해방자로 만든 것은 유모로 변장한 어머니의 가정교육이었습니다. 반면에 가는 곳마다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며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민족이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요? 그 여자들이 자기 민족의 신들에게 제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초청하니 모두 넘어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절을 했어요. 하나님이 진노하셨지요. 솔로몬도 그랬어요. 그렇게 훌륭하던 남자가 정략결혼으로 외국의 공주들과 결혼한 후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합 왕을 보세요. 시돈에서 데려온 왕비 이세벨이 나라를 말아먹도록 내버려두었지 않아요?

유대인이었던 어머니의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 전수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어머니의 믿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또 누구에게서 그 좋은 믿음을 전수받았을까요? 역시 자신의 어머니에게서지요. 디모데의 외할머니 로이스는 아들이라고 잘 가르치고 딸이라고 소홀히 한 게 아니었어요. 아들이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가장 소중한 믿음을 얼마나 잘 물려주었습니까? 그래서 할머니의 믿음이 어머니에게, 어머니의 믿음이 아들에게, 이렇게 3대에 걸쳐 믿음이 이어내려오는 것을 보면 믿음의 부모, 믿음의 조상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또 우리 자신이 자녀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믿음을 물려준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가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자녀가 자동으로 좋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믿음이 없었는데도 자녀는 좋은 믿음을 갖게 되는 수도 얼마든지 있지요. 부모의 좋은 믿음이 곧 나의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조상의 아름다운 믿음의 덕을 보아서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요. 우리 집안은 3대째 믿는 집안이네, 4대째 믿어 왔네, 하면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문 대대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물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 자랑스러운 전통에 자신의 믿음을 무임승차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조상이 아무리 믿음 좋았으면 뭐해요? 자기는 믿음이 없는데.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의 이빨이 시다고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에스겔 선지자가 말했습니다(겔 18:2).

또 반대로 그렇게 부모의 핍박 속에서도 귀하게 믿음을 지키며 승리한 이야기들, 우리가 얼마나 감명깊게 많이 들었습니까? 그런 사람 앞에서 우리 집안은 4대째 믿었네, 5대째 믿었네 하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4대, 5대가 무슨 대단한 것입니까? 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야말로 수백 대를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왔을 텐데 거기다 비교하겠어요? 새발의 피나 돼요? 또 그렇게 오래 믿었다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도 가관 아닙니까? 조상의 좋은 믿음을 자랑하기 전에 그 믿음을 본받지 못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지요. 중요한 것은, 만일 우리에게 유니게 같은 믿음의 어머니, 로이스 같은 믿음의 할머니가 있었다면 우리도 디모데처럼 그 믿음을 잘 물려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좋은 믿음을 내 것인 양 착각하는 것과 그 믿음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가 유니게나 로이스처럼 믿음을 아들과 딸에게 물려줄 차례입니다. 믿음을 무슨 용돈 주듯이 물려줄 수 있는 줄 아십니까? 재산처럼 유서에다 기록만 하면 믿음이 자녀에게 상속이 됩니까? 모세의 어머니가 어떻게 믿음을 물려주었겠어요? 여러분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믿음이 좋았지만 그 믿음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못한 사람들의 비애가 얼마나 클 것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무엘을 보세요. 엘리의 아들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불량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던 사무엘이었는데, 그의 아들들 역시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을, 그래서 엘리의 아들들의 전철을 밟게 된 것을 보고 사무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글쎄, 나라 일을 돌보느라 자녀교육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을까요? 교회일이 바쁘다고, 또는 직장일이 고되다고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하는 일을 소홀히 했다가는 사무엘처럼 후회막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모쪼록 조상의 좋은 믿음을 잘 물려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라고, 또 자녀에게 귀한 믿음 물려주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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