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4대 (딤후2:1-2)
본문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지치고 실의에 빠진 디모데를 위로하고 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처한 상황은 디모데가 처한 상황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디모데를 위로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고 그 사람의 인격과 믿음의 성숙도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집을 나가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합시다. 아이는 울고불고 하면서 슬픔과 괴로움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이 아이에게 가장 큰 괴로움은 자신이 길을 잃어버려서 집에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집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잃어버린 슬픔으로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린 아이로서는 당장 자신의 괴로움만 느껴질 뿐이지 부모가 자기 때문에 당하고 있을 괴로움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엄마 보고싶은 것만 생각할 줄 알지, 엄마가 자기를 보고싶어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좀 큰 아이가 그런 비슷한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도 심각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자기 때문에 당하고 있을 부모의 고통이 더 심각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성숙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 속에만 처박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부모가 좀 아프다고 아이들 아픈 것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습니까? 부모에게는 자기 아픈 것보다 아이들 아픈 것이 훨씬 더 급선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그렇지 않습니까? 힘들어 낙심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하는 말을 보세요. '내 아들아!' 이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묻어나고 있습니까? 지쳐서 넘어지려고 할 때, '내 아들아!'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내 아들아!' 이렇게 부르면서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영적인 아버지를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낙심하여 휘청거리고 있을 때 다가가 '내 아들아!' 하면서 손을 붙잡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다는 증거이며, 매우 보람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 하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지라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일은 매우 치열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한 전쟁에서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해야지요. 힘이 없이 비실비실 하다가는 한방만 얻어맞아도 거꾸러지고 말 것입니다. 강한 군사, 강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특히 디모데 같은 교회의 지도자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휘청거려서는 교회가 바로 설 수가 없지요. 사자가 지휘하는 양의 군대와 양이 지휘하는 사자의 군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느냐?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글쎄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론적으로는 사자가 지휘하는 양의 군대가 이긴다고 하더군요.
강한 지도자 얘기가 나오니 말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지도자가 너무 강해서 탈인 경우도 있긴 합니다. 소위 카리스마가 형성이 되는 경우지요. 카리스마는 헬라어로 은사라는 뜻인데, 매우 강력하고 도전받지 않는 지도력을 그렇게 말하더군요. 이런 경우 그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지만, 그 지도력에 도전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지도력의 생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됩니다. 결국 한 집단이 한 사람의 지도력에 의존하게 되어 그 지도력이 붕괴되었을 때 집단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지도력 역시 큰 재난을 초래합니다. 특히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교회로서는 강한 지도자가 필수적일 것입니다.
계속되는 도전에 힘을 잃고 기진맥진해 있는 디모데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야 교회가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해지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강해야 된다고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강한 의지나 정신력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디모데가 강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도 디모데 속에 있는 은사를 다시 불일 듯 일으킴으로써 그가 다시 힘을 되찾고 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습니다. 디모데를 다시 일어서게 할 수 있는 은사가 이미 디모데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탄이 떨어져서 전쟁을 할 수 없게 된 상태가 아닌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낙심하고 힘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주어져 있고, 바로 그 은혜 속에서 우리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실탄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기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깨달음으로써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아무리 강한 지도자가 된다 할지라도 디모데가 천년 만년 살면서 전쟁을 하고 교회를 이끌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강한 지도자로 거듭나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그것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디모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서 디모데처럼 싸울 사람을 양성하는 일인 것입니다.
우선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이 아들이라고 부르는 디모데는 바울이 죽은 후에도 바울의 사역과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바울이 디모데를 가르치고 격려하는 것은 그러한 훈련과 양육의 과정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 끝날까지, 그리고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법에 의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도들이 세상 끝날까지 살아남아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던 말씀도 그 제자들이 세상 끝날까지 남아서 복음을 전하리라는 것을 의미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 할지라도, 아무리 모든 것을 깨달은 선생이라도 때가 되어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와 같은 능력의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로서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그러나 아무리 국보급 선지자라 할지라도 그가 영원토록 살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 불말과 불병거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과 역할은 갑절의 영감을 구했던 엘리사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국보급 선지자를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외적이 감히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의 가장 큰 걱정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구원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이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맺고 큰 돌을 기념비로 세우기도 하고 장로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목격하고 알았던 사람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습니다(수 24:31). 그러나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곧 이어 캄캄했던 암흑시대, 사사기 시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걱정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여기서는 바울이 디모데를 가르친 것을 말합니다. 바울에게서 디모데로, 1세대에서 2세대로 복음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2세대인 디모데는 3세대인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충성된 사람들은 4세대인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4세대만 언급되었지만, 그것뿐이겠습니까? 이 세대의 이어짐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이러한 대물림을 통해서 복음의 영역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디모데로, 디모에게서 충성된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충성된 사람들에게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어지는 이 복음의 릴레이에서 누군가가 빠져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각기 자기 역할과 책임이 있는데 그것을 수행하지 않으면 무슨 결과가 오겠습니까? 릴레이 경주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한 사람만 잘 달려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첫 번째 주자가 열심히 달렸고, 두 번째 주자도 아주 잘 달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주자에게 바톤이 넘겨졌습니다. 네 번째 주자가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주자가 그만 달리기를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첫 번째, 두 번째 주자의 선전이 헛수고가 되고, 네 번째 주자에게는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몇 번째의 주자인지는 모르지만, 중간에 이어받아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가 누군가에게 이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복음의 바톤이 우리에게서 끊어져버린다면, 중간에 달리기를 그만 둔 선수처럼 온갖 비난을 다 받아도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을 잘 보세요. '네가 내가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전달되는 것은 복음인데,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을 어느 정도까지 양육해야 하는가 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디모데가 계속 살아 남아서 가르칠 수 없다면 디모데에게서 배운 충성된 사람들이 디모데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디모데에게 80%만 전수해 주고, 또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80%만 전수해 주고, 충성된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80%만 전수해 준다면,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바울의 몇 %를 전수받게 되겠습니까? 100% =' 80% =' 64% =' 5
1.2%가 되는군요. 물론 이렇게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되고 복음을 받은 그 사람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돌봐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여기 충성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들은 디모데에게서 복음을 받아서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될 사람들입니다. 만일 이들이 충성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무슨 결과가 예상됩니까? 바울과 디모데를 통해서 내려오는 복음의 전달이 그들에게서 멈추든지, 아니면 무슨 엉터리 같은 일이 일어나든지 하겠지요. 복음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충성되지 못해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충성되기는커녕 뭔가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서 이 복음을 가지고 변질을 시키거나 돈벌이를 하거나 혹은 세상의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충성된 사람들인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복음을 받은 사람들로서 얼마나 충성된 사람들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에 대하여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대해서 얼마나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쳐 주었던 이 복음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지 전파되고 증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의 손에 이 귀한 책임과 사명이 맡겨져 있습니다. 과거에 바울과 디모데가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의 차례입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자기들 차례가 되었을 때 충성스럽게 이 복음의 책임을 맡아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복음이 우리 시대에 더욱 널리 전파되고 더 빛을 발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충성된 종들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디모데를 위로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고 그 사람의 인격과 믿음의 성숙도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집을 나가서 길을 잃어버렸다고 합시다. 아이는 울고불고 하면서 슬픔과 괴로움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이 아이에게 가장 큰 괴로움은 자신이 길을 잃어버려서 집에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집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잃어버린 슬픔으로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린 아이로서는 당장 자신의 괴로움만 느껴질 뿐이지 부모가 자기 때문에 당하고 있을 괴로움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엄마 보고싶은 것만 생각할 줄 알지, 엄마가 자기를 보고싶어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좀 큰 아이가 그런 비슷한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도 심각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자기 때문에 당하고 있을 부모의 고통이 더 심각하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인격이 성숙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 속에만 처박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부모가 좀 아프다고 아이들 아픈 것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습니까? 부모에게는 자기 아픈 것보다 아이들 아픈 것이 훨씬 더 급선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그렇지 않습니까? 힘들어 낙심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하는 말을 보세요. '내 아들아!' 이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묻어나고 있습니까? 지쳐서 넘어지려고 할 때, '내 아들아!'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내 아들아!' 이렇게 부르면서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영적인 아버지를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낙심하여 휘청거리고 있을 때 다가가 '내 아들아!' 하면서 손을 붙잡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다는 증거이며, 매우 보람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 하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지라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일은 매우 치열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한 전쟁에서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해야지요. 힘이 없이 비실비실 하다가는 한방만 얻어맞아도 거꾸러지고 말 것입니다. 강한 군사, 강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특히 디모데 같은 교회의 지도자가 바람에 흔들리듯이 휘청거려서는 교회가 바로 설 수가 없지요. 사자가 지휘하는 양의 군대와 양이 지휘하는 사자의 군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느냐?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글쎄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론적으로는 사자가 지휘하는 양의 군대가 이긴다고 하더군요.
강한 지도자 얘기가 나오니 말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지도자가 너무 강해서 탈인 경우도 있긴 합니다. 소위 카리스마가 형성이 되는 경우지요. 카리스마는 헬라어로 은사라는 뜻인데, 매우 강력하고 도전받지 않는 지도력을 그렇게 말하더군요. 이런 경우 그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지만, 그 지도력에 도전하는 것이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지도력의 생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됩니다. 결국 한 집단이 한 사람의 지도력에 의존하게 되어 그 지도력이 붕괴되었을 때 집단의 붕괴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지도력 역시 큰 재난을 초래합니다. 특히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교회로서는 강한 지도자가 필수적일 것입니다.
계속되는 도전에 힘을 잃고 기진맥진해 있는 디모데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야 교회가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해지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강해야 된다고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강한 의지나 정신력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디모데가 강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도 디모데 속에 있는 은사를 다시 불일 듯 일으킴으로써 그가 다시 힘을 되찾고 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습니다. 디모데를 다시 일어서게 할 수 있는 은사가 이미 디모데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탄이 떨어져서 전쟁을 할 수 없게 된 상태가 아닌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낙심하고 힘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주어져 있고, 바로 그 은혜 속에서 우리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실탄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기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깨달음으로써 다시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아무리 강한 지도자가 된다 할지라도 디모데가 천년 만년 살면서 전쟁을 하고 교회를 이끌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강한 지도자로 거듭나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그것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디모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서 디모데처럼 싸울 사람을 양성하는 일인 것입니다.
우선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이 아들이라고 부르는 디모데는 바울이 죽은 후에도 바울의 사역과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바울이 디모데를 가르치고 격려하는 것은 그러한 훈련과 양육의 과정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 끝날까지, 그리고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방법에 의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도들이 세상 끝날까지 살아남아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던 말씀도 그 제자들이 세상 끝날까지 남아서 복음을 전하리라는 것을 의미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 할지라도, 아무리 모든 것을 깨달은 선생이라도 때가 되어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와 같은 능력의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로서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그러나 아무리 국보급 선지자라 할지라도 그가 영원토록 살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 불말과 불병거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과 역할은 갑절의 영감을 구했던 엘리사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국보급 선지자를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외적이 감히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의 가장 큰 걱정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구원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이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맺고 큰 돌을 기념비로 세우기도 하고 장로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목격하고 알았던 사람들이 사는 날 동안에는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습니다(수 24:31). 그러나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곧 이어 캄캄했던 암흑시대, 사사기 시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걱정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여기서는 바울이 디모데를 가르친 것을 말합니다. 바울에게서 디모데로, 1세대에서 2세대로 복음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 2세대인 디모데는 3세대인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충성된 사람들은 4세대인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4세대만 언급되었지만, 그것뿐이겠습니까? 이 세대의 이어짐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이러한 대물림을 통해서 복음의 영역이 확장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디모데로, 디모에게서 충성된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충성된 사람들에게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어지는 이 복음의 릴레이에서 누군가가 빠져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각기 자기 역할과 책임이 있는데 그것을 수행하지 않으면 무슨 결과가 오겠습니까? 릴레이 경주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한 사람만 잘 달려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첫 번째 주자가 열심히 달렸고, 두 번째 주자도 아주 잘 달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주자에게 바톤이 넘겨졌습니다. 네 번째 주자가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주자가 그만 달리기를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첫 번째, 두 번째 주자의 선전이 헛수고가 되고, 네 번째 주자에게는 기회조차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몇 번째의 주자인지는 모르지만, 중간에 이어받아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가 누군가에게 이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복음의 바톤이 우리에게서 끊어져버린다면, 중간에 달리기를 그만 둔 선수처럼 온갖 비난을 다 받아도 할 말이 없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을 잘 보세요. '네가 내가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전달되는 것은 복음인데,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을 어느 정도까지 양육해야 하는가 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디모데가 계속 살아 남아서 가르칠 수 없다면 디모데에게서 배운 충성된 사람들이 디모데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디모데에게 80%만 전수해 주고, 또 디모데가 충성된 사람들에게 80%만 전수해 주고, 충성된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80%만 전수해 준다면, 마지막으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바울의 몇 %를 전수받게 되겠습니까? 100% =' 80% =' 64% =' 5
1.2%가 되는군요. 물론 이렇게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되고 복음을 받은 그 사람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돌봐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여기 충성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들은 디모데에게서 복음을 받아서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될 사람들입니다. 만일 이들이 충성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무슨 결과가 예상됩니까? 바울과 디모데를 통해서 내려오는 복음의 전달이 그들에게서 멈추든지, 아니면 무슨 엉터리 같은 일이 일어나든지 하겠지요. 복음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충성되지 못해서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또 충성되기는커녕 뭔가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서 이 복음을 가지고 변질을 시키거나 돈벌이를 하거나 혹은 세상의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일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충성된 사람들인가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복음을 받은 사람들로서 얼마나 충성된 사람들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음에 대하여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대해서 얼마나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쳐 주었던 이 복음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왔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지 전파되고 증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의 손에 이 귀한 책임과 사명이 맡겨져 있습니다. 과거에 바울과 디모데가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의 차례입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자기들 차례가 되었을 때 충성스럽게 이 복음의 책임을 맡아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복음이 우리 시대에 더욱 널리 전파되고 더 빛을 발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충성된 종들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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