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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인 것이 죄? (딤전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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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전 세계의 매스컴이 뉴질랜드는 여인천하라고 크게 보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총리도 여자이고, 야당 당수도 여자인데, 이번에 총독에까지 여자가 임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어차피 현대사회는 능력 위주로 질서가 재편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여자이기 때문에 나서면 안되었고,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 매우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인식 아래, 또 그동안 성장한 여권에 힘입어 그러한 전통적인 가치체계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능력에 따라 총리도 여자가 되고 총독도 여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제자신이 현대적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래서 아무런 불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현대적 지성과 교회생활, 또는 성경의 가르침이 얼마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현대적 지성의 가치체계에 따라 교회 안의 여성의 리더십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여자 장로나 여자 목사, 또는 여자 사제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속해 있는 교단에서는 신학교 교수 한 분이 마치 여성안수 문제에 동조하는 것 같은 발언을 했다가 신학사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거기에 불려나가 조사를 받고, 동료 교수들로부터 비난과 고발을 당하고, 그야말로 학자와 선생으로서의 품위와 권위가 모두 짓밟힌 채 전통의 권위와 가치체계에 의해 목졸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이 매우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집단으로 내비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교단들도 물론 여성안수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숱한 난관이 있었지만, 이제 교회 안의 능력있는 여성 지도자들을 발굴해내고, 그로 인한 많은 유익들을 누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교회들이 이단이나 사이비인 것은 물론 아니지요. 현대적이고 변화에 대처할 줄 아는 교회, 시대를 읽고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교회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교단같은 교회는 그런 수구적이고 비합리적인 집단이라는 오명을 무릅쓰고 전통의 가치를 고수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번 국회에서는 민법의 동성동본 결혼금지 조항을 삭제하려고 한다는데, 유림에서는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대법원에서 헌법에 위배되는 조항이라고 판결이 났기 때문에 아무런 효력이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삭제를 한다는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내 목을 잘라라 하면서 반대를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현대적 지성으로 본다면 매우 불합리하고 쓸데없이 사람을 옭아매는 악법인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축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는 데 큰 장애물을 놓으려 하는 이 사람들의 행동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것이 진실이고 가치있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에 그것은 거짓이고 위선일 뿐이며, 가치가 아니라 악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적 지성의 요구에 따른 여성안수를 끝까지 반대하고 있는 우리 교단도 그렇게 과거의 진실 속에서 오늘날의 가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인가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전통의 가치나 현대적 지성보다도 항상 우선하는 기준과 규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기록된 계시, 성경입니다. 물론 우리가 불만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성경이야 당연히 수천 년 전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지성보다 과거의 가치를 두둔하고 편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시대와 공간과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기초하고 있는 반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즉 이단으로 보아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같은 성경을 가지고 그렇게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심지어는 심하게 싸우기까지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성경은 해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되고 계시가 밝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주어진 상황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아들이 없이 형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야 한다는 법칙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대신에 그 제도의 의도와 정신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 맞게 시행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의지할 곳 없게 된 우리의 친척을 돌아보고 살 길을 찾도록 해 주는 것이 그 법의 현대적 적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말합니다. 여자는 배우기만 하고 가르치면 안된다는 것입니까?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말하기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 예수께 위임받은 사도의 권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성경의 가르침은, 즉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의 여성 안수, 여자의 리더십에 관해 매우 부정적이라고 하겠지요.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현대적 지성, 오늘날의 일반적인 상황으로 볼 때 어느 집단에서든지 여자들도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상식적으로 열린 사회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현실적으로 여자들의 역할이 남자들의 역할에 비해 결코 적은 것이 아니지요.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수적인 면에서 여자성도가 남자성도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현대적 지성과 현실적 상황은 여성 리더십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는 반면, 바울 사도는 단호한 어조로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은 해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되고 계시가 파악된다고 했습니다. 즉 오늘날에 와서 이 상반된 두 주장의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는 해석에 엄청난 분량의 노력이 퍼부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해석을 달리 해서 이 바울의 말이 여성의 리더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려는 것이 신학자들의 최대 과제가 되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여자들의 역할과 활동이 최대한 억제되고 있었던 1세기의 상황에서 주어진 말입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부분에서 바울은 기도에 대해서 말했었지요? 그런 다음에 말하기를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각처라는 것은 여기저기 생겨난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서 남자들이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원래 유대교의 회당에서는 남자들에게만 기도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그러한 관습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여자들의 역할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아담한 옷을 입으며… 예배드리러 올 때 배꼽티에 샌들 신은 복장으로 오지 말고, 또 무슨 무도회에 가는 현란한 복장으로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하지도 말라는 것이죠. 만약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이 복장으로 자신에게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게 된다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목적 자체를 손상시키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복장문제가 언급된 것은 교회 안에서의 여자들의 역할을 말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톡톡 튀어야 하는 곳은 파티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래서는 안되고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는 것입니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무슨 죄라고 할 말도 못하고 조용히 있으라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바울이 여자들에 대해서 무슨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극단적인 여성신학자들은 바울이 남자이기 때문에, 더 나아가 하나님이 남성이기 때문에 이런 여성의 비하가 이루어졌다고 기독교 자체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여성으로 표현하도록 성경을 다시 번역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마음에 안든다는 것과 객관적인 진리를 구별할 줄 알아야지요. 노란색이 싫다고 해서 노란색에게 '너는 이제부터 노란색이 아니라 파란색이야. 난 너를 파란색이라고 부를거야.' 이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고 시대에 역행하는 것 같을지라도 성경이 너무나 명확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재해석한다 할지라도 노란색을 파란색으로 바꾸는 것은 무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여자들이 지도자로 활약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도 있었고 드보라 같은 사사도 있었습니다. 또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했지만 브리스길라는 당대의 명설교자였던 아볼로를 데려다가 집에서 잘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물론 브리스길라는 바울의 제자이자 동역자였지요. 이처럼 여자들이 지도력을 행사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들이 공식적으로 확립된 지도자의 직책을 수행하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여왕이나 여제사장이 없었고, 지도자격의 탁월한 선지자도 배출되지 못했습니다. 잠정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역할은 수행하되 공식적으로 고정된 지도자가 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자는 절대로 가르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예요. 가르치는 일을 할 수는 있으나 계속해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직분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이라는 단어에는 현재분사가 사용되었습니다. 똑같은 의미로 부정과거분사가 사용될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부정과거(aeorist)는 과거의 의미보다도 어떤 행위가 완성되어버린 경우를 표시합니다. 그래서 부정과거분사가 사용되었다면 모든 개별적인 가르침이나 주관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의미가 되는 거예요. 반면에 현재시제는 어떤 행위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표시합니다. 여기서 현재분사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계속해서 가르치는 일 수행하는 것, 즉 선생이 되는 것, 또 계속해서 남자를 주관하는 일을 하는 것, 지도자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는 거지요.

다음으로 사도는 왜 여자가 교회에서 리더가 되어서는 안되는지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만약 그 이유가 당시에는 여자들의 역할이 그런 것이었고 문화적인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여자들의 역할과 지위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 조항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될 수 없겠지요.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이유는 그러한 문화적이고 시대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남자를 지으셨고 여자는 돕는 배필로 지으셨기 때문에 이 질서가 교회 안에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유라면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바뀌었을지라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창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식구가 아닌 것이지요.

또 하나 바울이 말하는 이유는 인류의 타락이 남자가 꾀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꾀임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젠장, 옛날에 한번 실수한 것을 지금까지 갖고 내려와서 치사하게 써먹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은 인류의 타락이 여자 책임이라고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담이 범죄함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지요? 책임은 남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자가 꾀임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자가 남자보다 손상받기 쉬운 존재라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베드로 사도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 그야 물론 그렇지요.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연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헬렌 클락이나 제니 쉬플리는 남자보다 더 당차지 않습니까? 그래서 총리도 하는 것이고…

여자가 꾀임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의미는 그것보다도 당시 타락의 현장에서 남자가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고 여자가 지도력을 발휘함으로써 하나님이 애초에 창조하실 때 의도했던 것과 반대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꾀임을 받은 후에 남자를 또 이끌어서 금지된 열매를 먹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의 잘잘못을 떠나서 남자가 해야 할 역할을 여자가 했었던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아담은 자신의 역할을 찾아서 지도력을 행사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와의 실수를 교정하고 어떻게든 인류의 타락을 막으려고 했어야 했는데, 자신의 직무를 유기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성안수에 대해서 매우 동조적인 사람입니다.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여자분들에게 좀더 희망적인 말씀을 찾아보려고 생각했었는데, 결론은 의도와 달리 매우 절망적이군요. 그러니까 아직 저는 현실적인 필요나 현대적 지성과 아무리 해석을 다르게 하려고 해도 안되는 명확한 말씀 사이에서 갈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여자의 역할을 말합니다.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아니, 여자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아기 낳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뜻이 아니지요. 여자가 인류를 죄로 밀어넣은 그 치욕과 오점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의로운 자녀들을 길러냄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은 남자가 대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여자만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여자들은 나서려고 하지 말고 집에서 애나 길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고 기르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로써 인류를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과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에베소서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여자와 남자가 서로 질서를 지키며 협력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 다투며 밀고 당기는 긴장관계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남자는 '하나님이 남자에게 여자의 머리가 되게 하셨으니까 내가 다스린다' 하는 식으로 여자를 대하거나, 여자가 '세상이 바뀌었는데 나도 좀 나서자' 하면서 투쟁에 나서는 것을 하나님이 보신다면 얼마나 속상해 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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