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부자가 오히려 도덕적이다 (골3:12-17)
본문
오늘은 골로새서 15번째 강해입니다. “큰 부자가 오히려 도덕적이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이 제목을 듣는 순간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도덕적이고 부자는 항상 탐욕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부자들을 보면 투기나 속임수 등을 통하지 않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 환경이 부자에 대한 저항감을 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부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부도덕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도 합니다.
제가 늘 미국 서부 쪽만 다니다가 이번에는 정치의 본산인 워싱턴에 가서 말씀을 증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배울 수 있는 새로운 자극들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 20여 년 넘게 워싱턴 지역에 사시는 장세규 목사님(워싱턴 한빛지구촌교회)과 만나 얘기하는 가운데 배우고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큰 부자가 오히려 도덕적이더라.” 듣자마자 저도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들어 보니 일리가 있었습니다. 그 말은 미국 자본주의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결과를 설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가장 부패하기 쉬운 사람은 미국의 기준으로 100만 달러에서 200만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친다면 10억에서 30억 있는 사람 중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장래 꿈이 뭐냐고 하면 조용히 놀면서 먹고 지내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중간 정도의 부자들이 썩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하면 언제사람이 각성하게 됩니까? 언제사람이 가장 싱싱해집니까? 바로 가난해졌을 때,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시편 119편 67절의 말씀을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에 관한 메시지를 많이 들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를 영적으로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익숙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큰 부자를 만나는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큰 부자를 경험했던 미국 사람들은 이런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1920년대, 소위 억만장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석유개발을 중심으로 큰 부자들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부자 이상의 부자입니다. 카네기라든지 록펠러 같은 사람들은 이때 나온 부자입니다. 자기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을 만큼의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두 나라 정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의 마음에 덜컥 겁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돈이 생기니까 겁이 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타락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부자들은 오히려 경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습니다. “내게 감당 못할 부를 주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부에 대한 사명을 물었습니다.
이것이 맞아떨어졌던 시대적 환경은, 당시 미국에서는 부흥운동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런 환경 아래 부자가 말씀으로 인해서 사명감이 고취되고, 자선사업가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섬기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가진 자의 책임감, 이런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썩을 수 있는 상황에서 썩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말씀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분명히 썩을 위치인데도 썩지 않고 의미를 찾게 되고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프래드릭 랭브리지(?)라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두 사람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창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땅을 쳐다보았고 또한사람은 별을 바라보았다…… 똑같이 감옥 안에 있는 상황이지만 응시하는 곳에 따라서 그 사람의 위치가 달라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썩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어떤 사람은 썩지 않고 오히려 경건해집니다. 더 가진 것이 오히려 강하게 만듭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저는 부(富)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교회에 적용을 시켜 보았습니다. 교회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부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언제 성도들이 제일 많이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교회가 연약하고 작을 때 개척 상황일 때에는 뜨겁게 기도합니다. 믿을 것이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을 구하면서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제 생각에도 전도사 때 참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앞길이 불투명하고 은혜 없이는 하루도 설 수 없을 때, 기도 없이 설 수 없을 때, 작을 때, 가난할 때, 고난당할 때 오히려 사람은 싱싱해집니다.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중간 사이즈가 되었습니다. 성장이 정체되었습니다. 그때 가장 이기적이 됩니다. 시야가 좁아집니다. 우리의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문제 때문에 아등바등합니다. 시야가 좁아집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나 자신밖에 안 보입니다.
여러분, 아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국가와 민족이 보입니다. 서울역에 있는 홈리스들을 만나 보십시오. 논의의 수준이 우리와 다릅니다. 국가를 걱정합니다.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합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자기 걱정은 하지도 않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걱정합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부가 쌓이기 시작합니다. 먹고 살 만 해 지면 모든 관심이 내 가족의 문제, 내 일신상의 문제, 먹고 사는 문제가 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러다가 아예 더 커져 버리면,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이 되어 버리면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 다시 민족을 생각하고 국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감당 못할 은혜를 주실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함께 성장을 해야 합니다. 성장해야 큰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오히려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중간에서 정체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매몰되어서 아무 것도 깨닫지 못 하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골로새서 3장 이하는 거룩한 삶을 살라는 구호입니다. 그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골로새서 강해를 한 주 쉬어서 앞 부분의 내용들을 조금 잊어버리고 있는데 다시 기억을 되살려 보면 앞부분의 내용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인생이 된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인생은 주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접근은 어떻습니까? 거룩한 삶을 살라, 거룩한 삶을 살자는 단순한 구호적인 접근이 아니라 오히려 동기적인 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우리의 신분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 거룩한 자, 사랑하신 자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노라! 내가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해지고 사랑이 가능해지고 감사가 가능해지고 찬양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접근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변화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뿌리가 주님 앞에 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장하면 이 목록에 나오는 것들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영적인 거부(巨富)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첫째,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12절부터 쭉 목록이 나오지요.
긍휼과 자비, 따뜻한 동정의 마음입니다. 경쟁과 시기심이 아닌 그 반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언제 경쟁적이 되고 언제 시기심을 갖게 됩니까? 같은 부류라고 생각할 때 경쟁도 가능한 것입니다. 같은 부류라고 생각할 때 시기심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끼리 경쟁합니다. 딸 셋이 있는데
셋째 딸이 제일 예쁘다고 하면
첫째 딸과
둘째 딸이 시기합니다. 서로 자신이 더 예쁘다고 하면서 싸웁니다. 예쁜 옷을 서로 입으려고 합니다. 형제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끼리도 경쟁합니다. 에서와 야곱을 보십시오. 경쟁과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예쁘다고 시기해서 자고 있을 때에 뭉개버린다든지 이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대개 기뻐합니다. “내 딸이 나보다 훨씬 낫지요.” 하면서 흐믓해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낫다고 하면 싫어하는 아버지는 아무도 하나도 없습니다. 내 아들이 여러 모로 낫다고 흐믓해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아예 차원이 다르므로 경쟁의 관계, 시기의 관계에서 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성장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경쟁심이 있고 시기심이 있다는 것은 아직 내가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과 함께 더 커 버리면 경쟁의 단계, 시기의 단계를 넘어서 버립니다. 오히려 품을 수 있는 부모의 마음,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자비의 행동을 합니다. 긍휼이 마음이라고 하면 자비는 행동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액션을 취하는 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절름발이 왕자 므비보셋을 품습니다. 자기 원수의 집안이지만 그 아들을 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품습니다.
긍휼은 이렇게 품는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항상 이렇게 품는 행동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누가 이런 마음을 품습니까?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0장11절을 보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많은 사람들은 선한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선한 목자가 될 수 있지요? 내가 커져야, 내가 성장해야 선한 목자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삯군이 되어 버립니다. 주님은 우리를 성장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야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희생하는지 아십니까? 큰 사람이 희생합니다. 작은 사람은 희생 안 합니다. 제가 이번에도 미국에 가서 만나는 교민들마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주 훌륭해 보이는 분들, 예를 들어서 훌륭한 의사들, 과학자들은 만나면 정말 아깝습니다. 그래서 얘기합니다. 노후를, 마지막 여생을 조국에 와서 헌신해 달라고……
큰 대가들은 애국심에 호소해야 합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헌신해 달라고 하면 말이 통합니다. 애국심에 호소하면 옵니다. 대가들이기 때문입니다. 큰 사람들은 애국심에 호소해야 합니다. “맞다! 내가 조국의 발전을 위해서 마지막 희생하겠다!” 하면서 옵니다. 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밑에 있는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면 생각도 안 합니다.
이익을 가지고 딜링(dealing)해야 합니다. “월급 두 배 줄 테니까 와!” 그러면 움직입니다. 소인배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나의 이익 때문에 움직인다면 삯군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왜 삯군이 되는지 아십니까? 더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갖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커져야 합니다. 훨씬 더 커져야 합니다. 그래야 희생하라는 메시지에 즉각 반응할 수 있습니다.
대가가 희생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란 자가 희생합니다. 형제끼리 희생 안 합니다. 부모가 되어야 희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목자로서의 마음을 가져야 희생합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여러분 영적인 성장을 통해서 우리가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희생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겸손해집니다.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자기 자신이 겸손해집니다.
예수님 당시 겸손함이라는 것은 인기 있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만과 권세, 이런 것들이 인정받던 시대였습니다. 키케로의 글들을 보십시오. 그 때는 힘을 찬양하고 권력만이 능력이라고 하던 시대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장하는 겸손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겸손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억지로 자기 자신을 낮추겠다는 고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일부러 낮아질 것도 없습니다. 내 원래의 모습을 발견하면 다 겸손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서 6장을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부정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겸손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1장부터 5장까지는 그런 얘기가 전혀 없었는데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난 다음 자기를 부정합니다.
누가복음 5장의 베드로를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그물을 던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nets'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물들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베드로는 'net', 그물 하나를 던졌습니다. 그리고난 다음 깨달은 것은 자기를 부정하면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영광 앞에 서니까 자기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논리는 억지논리가 아닙니다. 겸손해지자고 말하는 구호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겸손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손에 쥔 것보다 더 큰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에 그런 비유를 하나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출신 자매, 결혼해서 얼마 되지 않은 신혼인 자매와 시합을 해 보았습니다. 손에 무언가를 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 손으로 이것을 뜯어보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심판을 보면서 한번 해 보았습니다. 저도 힘이 있는 남자이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꽉 쥐고 있는 것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여자 하나가 이를 악 물고 손에 쥐고 있으니까 힘으로도 뺏을 수가 없었습니다. 뺏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그 손에 든 것보다 더 큰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러면 자기 스스로 손을 폅니다.
비전은 손에 있는 것을 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손에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애착을 갖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뛰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자기 부인하라고 해서 부인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큰 것을 보면 자기부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사람이 왜 교만한지 아십니까? 성장하지 않으니까 교만한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성장하면 내가 커지면…… 커지는 사람치고 교만한 사람을 보았습니까? 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영광과 나를 비교하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성장을 통해서 겸손함을 유지하는 주님의 귀중한 종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힘의 절제가 가능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힘의 절제가 가능합니다. 힘이 생기고 절제가 가능합니다. 언제 힘의 절제가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안에서 역사하게 될 때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목록이 쭉 나옵니다.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사랑 다섯 가지 목록이 나옵니다.
온유는 이런 정의가 있습니다. 부드러운 바람, 병을 치유하는 약, 길들여진 말…… 길들여진다는 것이 온유입니다.
우리가 온유를 정의하기를 controled power라 합니다. 악센트는 힘에 있습니다. 바람도 폭풍으로 변화되는 힘이 있잖아요. 지나친 약도 죽음으로 가게 만드는 힘이 있잖아요. 다 힘입니다.
그런데 힘인 힘인데 통제된 힘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성장하면 그 힘을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된 힘으로 우리 안에 남게 됩니다. 그래서 오래 참습니다. 자제하고 용납하고 용서합니다. 누가 용서합니까? 강한 자가 용서합니다. 약한 자는 용서 못 합니다. 강하니까 용서하고 사랑하고 품습니다.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힘을 가지고 집중하는 법을 깨닫게 만듭니다.
‘Focus on the family’의 창시자이자 대표인 제임스 답슨(James Dobson)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최근 이분이 최근에 쓴 책 하나를 읽어보았습니다. ‘bring up boys’ 남자아이 양육법이라는 책입니다. 금년에 나왔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보면 미국의 많은 문제들은 남자아이를 사내아이답게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전혀 다르게 만들었는데 페미니스트들이 남여자는 똑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의 장난감까지도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면 안 되도록 법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남자 아이들이 자기 성 정체성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화장발이 안 받아요.” 하면서 고민하는 남자들이 나왔습니다.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임스 답슨의 비서되는 사람이 원래 동성연애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나중에는 정체성을 깨닫고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동성연애하는 사람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태어날 때의 문제, 유전자의 문제라고 하는데 이 책은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비서 부인도 또 레즈비언이었는데 돌아왔습니다. 남자는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특별히 남자는 힘이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남성의 힘이 무엇인지 알고 그 힘을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남성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에 금년도 계속해서 남성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합니다. 여자같이 변화되면 안 됩니다. 여자들은 여자다운 모습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원리 아닙니까? 왜 이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까? 이제 깨닫고 돌아옵시다. 이것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도 말씀드렸지만 미국 정치를 보면서 제가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조금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존경하고 우리를 이끌어갔던 사람은 선비였습니다. 우리는 대학교수님이라고 하면 참 존경합니다. 선비이고 아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비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지식만 있지 현실을 잘 모른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지만 대학교수뿐만 아니라 지식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것은 실제 힘은 아닙니다. 지식입니다.
우리나라는 계속해서 그런 사람들이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현실성이 없습니다.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문외한입니다. 백성들이 굶는지 먹는지 경제가 뭔지 모릅니다. 논리만 들고 나옵니다. 외국에서부터 적이 쳐들어오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있을 때에도 논리를 가지고 나옵니다. 총칼을 들고 준비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에 다 깨진 것입니다. 구한말을 보십시오. 왕궁도 지킬 수 있는 병력이 없었습니다. 늘 논리싸움입니다. 선비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면에 미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번에 특별히 링컨기념관을 가서 묵상한 것이 많은데 그중 하나는 “미국은 리더에 의해서 이끌려가는 나라다!”라는 것입니다. 리더는 한손에는 꿈과 비전, 사명감, 또한 손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꿈을 이룰 있는 능력, 현실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은 대부분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정치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일을 해 봤던 사람입니다.
제임스 답슨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여성운동을 벌이는 얘기를 들어 보면 그 여자들의 상당수가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없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들, 애를 낳아본 경험도 없는 여자들이 뭘 안다고 아이들 양육을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아이들의 양육을 배우고 따라온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 결과 미국이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실제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꿈과 비전과 그것 실제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변화가 되지요. 우리는 링컨에 관해서 너무 감상적인 생각들만 하고 있습니다. 링컨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의 피부에 관계없이 평등하다는 흑백평등에 관한 이론, 자유의 이론, 평등과 자유…… 그런 고상한 생각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리더이기 때문에 그런 고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념이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리더였습니다. 단순한 선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남부 쪽 많은 주에 있는 사람들과 설득하고 협상했습니다. 그리고도 안 되자 마지막에 전쟁이라는 도구를 썼습니다.
저는 전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리더는 그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권리, 천부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을 때 전쟁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리더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좋은 말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책임지지 않고 회피합니다. 리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가 리더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귀중한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품고 설득해야 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을 막는 엄청난 악의 세력이 있다고 하면 전쟁을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리더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 말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뿌리박겠다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리더로 부르셨습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집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내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그리고 힘이 있더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밑에 사는 존재입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일하는 자입니다.
3. 그리고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의 마음,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자리,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 나와야 합니다. 힘 있는 자가 십자가를 집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 받는 믿음의 종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마 이 제목을 듣는 순간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도덕적이고 부자는 항상 탐욕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부자들을 보면 투기나 속임수 등을 통하지 않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 환경이 부자에 대한 저항감을 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부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부도덕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도 합니다.
제가 늘 미국 서부 쪽만 다니다가 이번에는 정치의 본산인 워싱턴에 가서 말씀을 증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배울 수 있는 새로운 자극들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 20여 년 넘게 워싱턴 지역에 사시는 장세규 목사님(워싱턴 한빛지구촌교회)과 만나 얘기하는 가운데 배우고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그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큰 부자가 오히려 도덕적이더라.” 듣자마자 저도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들어 보니 일리가 있었습니다. 그 말은 미국 자본주의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결과를 설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가장 부패하기 쉬운 사람은 미국의 기준으로 100만 달러에서 200만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친다면 10억에서 30억 있는 사람 중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장래 꿈이 뭐냐고 하면 조용히 놀면서 먹고 지내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중간 정도의 부자들이 썩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에 의하면 언제사람이 각성하게 됩니까? 언제사람이 가장 싱싱해집니까? 바로 가난해졌을 때, 고난을 당할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시편 119편 67절의 말씀을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에 관한 메시지를 많이 들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를 영적으로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익숙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큰 부자를 만나는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큰 부자를 경험했던 미국 사람들은 이런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1920년대, 소위 억만장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석유개발을 중심으로 큰 부자들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부자 이상의 부자입니다. 카네기라든지 록펠러 같은 사람들은 이때 나온 부자입니다. 자기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을 만큼의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두 나라 정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들의 마음에 덜컥 겁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돈이 생기니까 겁이 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타락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부자들은 오히려 경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습니다. “내게 감당 못할 부를 주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부에 대한 사명을 물었습니다.
이것이 맞아떨어졌던 시대적 환경은, 당시 미국에서는 부흥운동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런 환경 아래 부자가 말씀으로 인해서 사명감이 고취되고, 자선사업가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섬기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가진 자의 책임감, 이런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썩을 수 있는 상황에서 썩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말씀의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분명히 썩을 위치인데도 썩지 않고 의미를 찾게 되고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프래드릭 랭브리지(?)라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두 사람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창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땅을 쳐다보았고 또한사람은 별을 바라보았다…… 똑같이 감옥 안에 있는 상황이지만 응시하는 곳에 따라서 그 사람의 위치가 달라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썩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어떤 사람은 썩지 않고 오히려 경건해집니다. 더 가진 것이 오히려 강하게 만듭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저는 부(富)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교회에 적용을 시켜 보았습니다. 교회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부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언제 성도들이 제일 많이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교회가 연약하고 작을 때 개척 상황일 때에는 뜨겁게 기도합니다. 믿을 것이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을 구하면서 얼마나 많이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제 생각에도 전도사 때 참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앞길이 불투명하고 은혜 없이는 하루도 설 수 없을 때, 기도 없이 설 수 없을 때, 작을 때, 가난할 때, 고난당할 때 오히려 사람은 싱싱해집니다.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중간 사이즈가 되었습니다. 성장이 정체되었습니다. 그때 가장 이기적이 됩니다. 시야가 좁아집니다. 우리의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문제 때문에 아등바등합니다. 시야가 좁아집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나 자신밖에 안 보입니다.
여러분, 아주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국가와 민족이 보입니다. 서울역에 있는 홈리스들을 만나 보십시오. 논의의 수준이 우리와 다릅니다. 국가를 걱정합니다.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합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자기 걱정은 하지도 않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걱정합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부가 쌓이기 시작합니다. 먹고 살 만 해 지면 모든 관심이 내 가족의 문제, 내 일신상의 문제, 먹고 사는 문제가 되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러다가 아예 더 커져 버리면,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이 되어 버리면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 다시 민족을 생각하고 국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감당 못할 은혜를 주실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함께 성장을 해야 합니다. 성장해야 큰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오히려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중간에서 정체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매몰되어서 아무 것도 깨닫지 못 하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골로새서 3장 이하는 거룩한 삶을 살라는 구호입니다. 그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골로새서 강해를 한 주 쉬어서 앞 부분의 내용들을 조금 잊어버리고 있는데 다시 기억을 되살려 보면 앞부분의 내용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인생이 된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인생은 주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접근은 어떻습니까? 거룩한 삶을 살라, 거룩한 삶을 살자는 단순한 구호적인 접근이 아니라 오히려 동기적인 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우리의 신분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 거룩한 자, 사랑하신 자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노라! 내가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해지고 사랑이 가능해지고 감사가 가능해지고 찬양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접근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변화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뿌리가 주님 앞에 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장하면 이 목록에 나오는 것들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영적인 거부(巨富)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첫째,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12절부터 쭉 목록이 나오지요.
긍휼과 자비, 따뜻한 동정의 마음입니다. 경쟁과 시기심이 아닌 그 반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언제 경쟁적이 되고 언제 시기심을 갖게 됩니까? 같은 부류라고 생각할 때 경쟁도 가능한 것입니다. 같은 부류라고 생각할 때 시기심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끼리 경쟁합니다. 딸 셋이 있는데
셋째 딸이 제일 예쁘다고 하면
첫째 딸과
둘째 딸이 시기합니다. 서로 자신이 더 예쁘다고 하면서 싸웁니다. 예쁜 옷을 서로 입으려고 합니다. 형제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끼리도 경쟁합니다. 에서와 야곱을 보십시오. 경쟁과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예쁘다고 시기해서 자고 있을 때에 뭉개버린다든지 이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대개 기뻐합니다. “내 딸이 나보다 훨씬 낫지요.” 하면서 흐믓해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낫다고 하면 싫어하는 아버지는 아무도 하나도 없습니다. 내 아들이 여러 모로 낫다고 흐믓해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아예 차원이 다르므로 경쟁의 관계, 시기의 관계에서 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성장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경쟁심이 있고 시기심이 있다는 것은 아직 내가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과 함께 더 커 버리면 경쟁의 단계, 시기의 단계를 넘어서 버립니다. 오히려 품을 수 있는 부모의 마음,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자비의 행동을 합니다. 긍휼이 마음이라고 하면 자비는 행동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액션을 취하는 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절름발이 왕자 므비보셋을 품습니다. 자기 원수의 집안이지만 그 아들을 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품습니다.
긍휼은 이렇게 품는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항상 이렇게 품는 행동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누가 이런 마음을 품습니까?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0장11절을 보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많은 사람들은 선한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선한 목자가 될 수 있지요? 내가 커져야, 내가 성장해야 선한 목자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삯군이 되어 버립니다. 주님은 우리를 성장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야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희생하는지 아십니까? 큰 사람이 희생합니다. 작은 사람은 희생 안 합니다. 제가 이번에도 미국에 가서 만나는 교민들마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주 훌륭해 보이는 분들, 예를 들어서 훌륭한 의사들, 과학자들은 만나면 정말 아깝습니다. 그래서 얘기합니다. 노후를, 마지막 여생을 조국에 와서 헌신해 달라고……
큰 대가들은 애국심에 호소해야 합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헌신해 달라고 하면 말이 통합니다. 애국심에 호소하면 옵니다. 대가들이기 때문입니다. 큰 사람들은 애국심에 호소해야 합니다. “맞다! 내가 조국의 발전을 위해서 마지막 희생하겠다!” 하면서 옵니다. 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밑에 있는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면 생각도 안 합니다.
이익을 가지고 딜링(dealing)해야 합니다. “월급 두 배 줄 테니까 와!” 그러면 움직입니다. 소인배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나의 이익 때문에 움직인다면 삯군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왜 삯군이 되는지 아십니까? 더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갖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커져야 합니다. 훨씬 더 커져야 합니다. 그래야 희생하라는 메시지에 즉각 반응할 수 있습니다.
대가가 희생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란 자가 희생합니다. 형제끼리 희생 안 합니다. 부모가 되어야 희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목자로서의 마음을 가져야 희생합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여러분 영적인 성장을 통해서 우리가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희생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겸손해집니다.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자기 자신이 겸손해집니다.
예수님 당시 겸손함이라는 것은 인기 있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만과 권세, 이런 것들이 인정받던 시대였습니다. 키케로의 글들을 보십시오. 그 때는 힘을 찬양하고 권력만이 능력이라고 하던 시대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장하는 겸손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겸손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억지로 자기 자신을 낮추겠다는 고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일부러 낮아질 것도 없습니다. 내 원래의 모습을 발견하면 다 겸손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서 6장을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라고 하면서 자기를 부정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겸손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1장부터 5장까지는 그런 얘기가 전혀 없었는데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난 다음 자기를 부정합니다.
누가복음 5장의 베드로를 기억하십니까? 주님께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그물을 던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nets'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물들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베드로는 'net', 그물 하나를 던졌습니다. 그리고난 다음 깨달은 것은 자기를 부정하면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영광 앞에 서니까 자기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논리는 억지논리가 아닙니다. 겸손해지자고 말하는 구호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겸손한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손에 쥔 것보다 더 큰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에 그런 비유를 하나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출신 자매, 결혼해서 얼마 되지 않은 신혼인 자매와 시합을 해 보았습니다. 손에 무언가를 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 손으로 이것을 뜯어보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심판을 보면서 한번 해 보았습니다. 저도 힘이 있는 남자이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꽉 쥐고 있는 것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여자 하나가 이를 악 물고 손에 쥐고 있으니까 힘으로도 뺏을 수가 없었습니다. 뺏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그 손에 든 것보다 더 큰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그러면 자기 스스로 손을 폅니다.
비전은 손에 있는 것을 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손에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애착을 갖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뛰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자기 부인하라고 해서 부인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큰 것을 보면 자기부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사람이 왜 교만한지 아십니까? 성장하지 않으니까 교만한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성장하면 내가 커지면…… 커지는 사람치고 교만한 사람을 보았습니까? 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영광과 나를 비교하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성장을 통해서 겸손함을 유지하는 주님의 귀중한 종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힘의 절제가 가능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말씀과 함께 성장하면 힘의 절제가 가능합니다. 힘이 생기고 절제가 가능합니다. 언제 힘의 절제가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안에서 역사하게 될 때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목록이 쭉 나옵니다.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사랑 다섯 가지 목록이 나옵니다.
온유는 이런 정의가 있습니다. 부드러운 바람, 병을 치유하는 약, 길들여진 말…… 길들여진다는 것이 온유입니다.
우리가 온유를 정의하기를 controled power라 합니다. 악센트는 힘에 있습니다. 바람도 폭풍으로 변화되는 힘이 있잖아요. 지나친 약도 죽음으로 가게 만드는 힘이 있잖아요. 다 힘입니다.
그런데 힘인 힘인데 통제된 힘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성장하면 그 힘을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된 힘으로 우리 안에 남게 됩니다. 그래서 오래 참습니다. 자제하고 용납하고 용서합니다. 누가 용서합니까? 강한 자가 용서합니다. 약한 자는 용서 못 합니다. 강하니까 용서하고 사랑하고 품습니다.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힘을 가지고 집중하는 법을 깨닫게 만듭니다.
‘Focus on the family’의 창시자이자 대표인 제임스 답슨(James Dobson)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최근 이분이 최근에 쓴 책 하나를 읽어보았습니다. ‘bring up boys’ 남자아이 양육법이라는 책입니다. 금년에 나왔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보면 미국의 많은 문제들은 남자아이를 사내아이답게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전혀 다르게 만들었는데 페미니스트들이 남여자는 똑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의 장난감까지도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면 안 되도록 법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남자 아이들이 자기 성 정체성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화장발이 안 받아요.” 하면서 고민하는 남자들이 나왔습니다.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임스 답슨의 비서되는 사람이 원래 동성연애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나중에는 정체성을 깨닫고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동성연애하는 사람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태어날 때의 문제, 유전자의 문제라고 하는데 이 책은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비서 부인도 또 레즈비언이었는데 돌아왔습니다. 남자는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특별히 남자는 힘이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남성의 힘이 무엇인지 알고 그 힘을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남성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에 금년도 계속해서 남성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합니다. 여자같이 변화되면 안 됩니다. 여자들은 여자다운 모습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원리 아닙니까? 왜 이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까? 이제 깨닫고 돌아옵시다. 이것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도 말씀드렸지만 미국 정치를 보면서 제가 이런 것을 느꼈습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와 조금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존경하고 우리를 이끌어갔던 사람은 선비였습니다. 우리는 대학교수님이라고 하면 참 존경합니다. 선비이고 아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비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지식만 있지 현실을 잘 모른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지만 대학교수뿐만 아니라 지식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것은 실제 힘은 아닙니다. 지식입니다.
우리나라는 계속해서 그런 사람들이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현실성이 없습니다.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문외한입니다. 백성들이 굶는지 먹는지 경제가 뭔지 모릅니다. 논리만 들고 나옵니다. 외국에서부터 적이 쳐들어오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있을 때에도 논리를 가지고 나옵니다. 총칼을 들고 준비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에 다 깨진 것입니다. 구한말을 보십시오. 왕궁도 지킬 수 있는 병력이 없었습니다. 늘 논리싸움입니다. 선비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면에 미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번에 특별히 링컨기념관을 가서 묵상한 것이 많은데 그중 하나는 “미국은 리더에 의해서 이끌려가는 나라다!”라는 것입니다. 리더는 한손에는 꿈과 비전, 사명감, 또한 손에는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꿈을 이룰 있는 능력, 현실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은 대부분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정치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일을 해 봤던 사람입니다.
제임스 답슨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여성운동을 벌이는 얘기를 들어 보면 그 여자들의 상당수가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없는 여자라는 것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들, 애를 낳아본 경험도 없는 여자들이 뭘 안다고 아이들 양육을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아이들의 양육을 배우고 따라온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 결과 미국이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실제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꿈과 비전과 그것 실제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변화가 되지요. 우리는 링컨에 관해서 너무 감상적인 생각들만 하고 있습니다. 링컨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의 피부에 관계없이 평등하다는 흑백평등에 관한 이론, 자유의 이론, 평등과 자유…… 그런 고상한 생각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리더이기 때문에 그런 고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념이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리더였습니다. 단순한 선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남부 쪽 많은 주에 있는 사람들과 설득하고 협상했습니다. 그리고도 안 되자 마지막에 전쟁이라는 도구를 썼습니다.
저는 전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리더는 그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권리, 천부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을 때 전쟁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리더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좋은 말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책임지지 않고 회피합니다. 리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가 리더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귀중한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품고 설득해야 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을 막는 엄청난 악의 세력이 있다고 하면 전쟁을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리더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 말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뿌리박겠다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리더로 부르셨습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집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내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그리고 힘이 있더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밑에 사는 존재입니다.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일하는 자입니다.
3. 그리고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의 마음,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자리,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 나와야 합니다. 힘 있는 자가 십자가를 집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 받는 믿음의 종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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