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쉽다 (골3:1-4)
본문
오늘은 골로새서 13번째 강해입니다. 죽으면 쉽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골로새서 3장을 살피고 있는데 골로새서 1장의 내용은 예수님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은 신학적으로 기독론이라고 얘기합니다.골로새서 2장은 예수님의 충분성과 탁월성에 대해 도전해오는 무리들과 그러한 이론에 대한 응답입니다.
세 가지 도전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영지주의자들의 도전, 이들은 체험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말씀중심적인 신앙으로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율법주의의 도전인데 율법주의는 외형주의적인 접근을 합니다. 성장의 방향을 오도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자라나야 하는데 자꾸 겉사람만 신경쓰게 만들고 또 하나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인 십자가를 붙들기보다는 자기 의를 붙드는 잘못된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혹인 금욕주의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무서운 도전이라고 했습니다. 금욕주의의 내용은 실체되시는, 우리의 머리되시는 예수님을 붙들지 않습니다. 실체는 모르고 가짜들만 논하고난 다음에 가짜가 아닌 것이 진짜라는 접근을 합니다. 이것은 아주 어렴풋한 접근입니다. 굉장히 잘 믿어 보이지만 진짜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만드는 무서운 독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성경을 접근할 때 로마서도 그렇고 골로새서도 그렇고 에베소서도 그렇고 모두 처음에는 교리를 먼저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를 보면 1장부터 11장까지가 교리이고 12장부터 실천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골로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2장은 원리입니다. 3-4장은 실제적인 실제 행동과 연결을 맺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걸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행동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순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4절에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대원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 죽으면… 이길 수 있다!
첫째 죽으면 쉽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은 마귀와 맞서 싸워서 이기는 방법도 있지만 싸움 이전에 근본적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죽으면 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죄에는 분명히 세력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거짓말하고 음행하게 만들고 불순종, 미움, 악의, 탐욕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우리는 순종하려고 하는데 움직일수록 오히려 죄를 짓습니다. 누워서도 죄, 어떤 때는 병상에 쓰러져 있으면서도 범죄하는 생각을 갖고 어떤 사람은 꿈을 꾸어도 범죄하는 꿈을 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얽어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죄는 또 우리를 죄책으로 괴롭게 만듭니다. 죄책감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꽉 눌러버립니다. 또 죄는 죄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죄는 죄를 새끼치게 합니다. 가인이 예배드리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아벨을 죽이는 살인까지 연결되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간음했습니다. 간음에서 끝났습니까? 충신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죄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우리가 술집에 팔려간 여인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우선 포주가 돈을 꾸어줍니다. 돈을 꾸어주면서 예쁜 옷과 화장품을 사 쓰라고 합니다. 그리고서 갚지 않으면 나올 수 없도록 계속해서 돈을 빌러줍니다. 이자가 쌓여서 나중에는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죄하고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유업과 정죄로 말미암아 망하는 인생이 됩니다.
이러한 악한 마귀의 여러 가지 궤계와 우리를 죄로 얽어매는 시도들이 있는데 이것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죽으면 됩니다.
오래된 탈출영화 가운데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도망치고 잡히고 도망치고 잡히는 일이 반복됩니다. 바다 한가운데에 감옥을 만들었습니다. 탈옥이 불가능한 감옥입니다. 언제 나올 수 있습니까? 죽으면 나옵니다. 아무리 철옹성 같더라도 죽으면 나올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감옥의 창살을 뚫고 나오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통해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결국 우리도 옛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십자가 안에서 죽으면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욕 가운데 최고의 욕이 육시라고 생각합니다. 육시랄…… 이런 욕을 하지요. 강단에서 말하기 힘든데 육시(戮屍)라는 것이 한자어입니다. 이것을 쓰라고 하면 쓸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한자입니다. 시체를 때린다는 뜻입니다. 어떤 중죄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형에 처합니다. 그리고도 분이 안 풀려서 시체를 꽁꽁 묶어놓고 때리는 것을 육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굉장히 무서운 보복법이지요. 그러나 시체를 매질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시체를 때린다고 더 나은 것 있겠습니까? 죽으면 자유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죄와 죄로부터 얽어매는 율법을 남편이라고 얘기합니다. 지독한 남편입니다. 우리를 정죄하고 얽어매는 남편입니다. 무서운 남편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죽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죽을 수 있습니까? 율법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6장의 총주제입니다. 로마서 6장4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8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또 갈라디아서 2장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죽으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죽으면 마귀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런 예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옛날에 궁중에 내시가 있었습니다. 환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남성들이지만 거세를 시킨 사람들입니다. 궁중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습니다. 전국에서 뽑혀온 예쁜 여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시들에게 유혹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 되어 보아서 모릅니까? (성도들 웃음) 유혹이 안 됩니다. 왜 안 되지요? 남성으로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죽으면 유혹에서 자유롭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귀가 성도에게 돈으로 유혹하고 명예로 유혹하고 권력으로 유혹한다고 할지라도 이길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있습니다. 맞서 싸우는 것도 있지만 주님의 말씀은 죽으면 이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24절을 보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죽으면 자유로울 수 있고 이길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신학생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신학생세미나를 할 때 많은 목사님들이 신학생의 미래를 놓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최근 들어 교회가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교회 수가 늘고 있는데 교회들이 부흥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신학생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전공했는데 사역지가 없는 것입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 준비가 준비되더라도 사역지가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답답한 일 아닙니까? 큰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증거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르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다!’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생들이 포화상태가 되니까 부르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르는 곳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을 하자! 누가 나를 부르지 않나라고 생각하면 길이 없어 보입니다. 아무도 안 부르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서 내가 꼭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 복음이 필요한 것이 어디인가를 생각하면 갈 곳이 너무 많지요. 지금 동네만 해도 얼마나 갈 곳이 많습니까? 서울만 해도 파고다공원의 노인들도 있고 복음증거할 데가 상당히 많습니다. 지금도 복음이 증거되지 않은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군대에 가 보니까 그렇습니다. 군목들의 숫자가 줄어들어서 사단급마다 겨우 한 명씩 있고 연대에도 목사님이 안 계신 곳이 부지기수입니다. 교회는 많이 세워 놓았는데 목사가 없어서 한 목사님이 4-5군데에서 말씀 증거합니다. 그래서 민간인 목사님들을 많이 보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캠퍼스에 가 보세요. 목사가 없다고 합니다. 부르는 곳은 없어도 내가 복음 들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증거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갈 곳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왜 우리가 갈 곳이 없다고 얘기합니까? 편하게 사역하려고 대접받으면서 사역하려고 하고 안락함을 찾으면서 사역하려고 하다보니까 안 보이는 것입니다. 길이 자꾸만 좁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여건에 맞추어 가려고 하니까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 골짝이라도 가오리다 하는 마음을 먹으면 언제나 우리의 사역지가 있습니다.
결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기 힘들다 힘들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죽어서 그렇습니다. 죽으면 결혼만큼 쉬운 것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누가 나의 인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줄까, 자기 자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 자기에게 잘해 줄 사람을 찾으니까 없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을 해 보세요. 누구를 도울까, 결혼을 통해서 그 누구를 한 단계 올려줄까 하는 마음을 먹으면 지천에 깔린 것이 남자이고 지천에 깔린 것이 여자입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자를 생각해 보세요. 평강공주 같은 마음이 있으면 여기저기 온달이 있습니다. 밤낮 킹카만을 원하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안 보입니다. 눈이 낮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낮아지면 보입니다. 아예 죽으면 많이 보입니다. 안 보이는 것은 아직 안 죽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나이 서른이 되는 자매의 그 자세를 스물네 살에 가지면 최고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전성기 다 지내고난 다음에 낮아집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전성기 때에 마음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는 곳이 없다고 하지 마세요. 내가 가진 은사와 능력 가지고 섬길 곳이 어딘지, 섬기려는 마음을 먹으면 할 일은 너무 많습니다. 죽으면 길이 보입니다. 죽었다라고 선언하면 세상의 길이 엄청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쓰러지느냐 하면 내가 살았다 생각하는 순간부터 쓰러집니다. 어떤 사람이 좀 돈을 벌고 좀 명예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사람이 좁아집니다. 내가 살아나면 약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비유를 잊지 못합니다. 개구리들이 있었는데 개구리의 꿈이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개구리들의 꿈에도 소원은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개구리들 가운데 석학 개구리가 있었나 봅니다. 아이큐가 30쯤 되는 개구리가 어떻게 하면 학과 같이 날 수 있을까 학을 찾아갔습니다. 학에게 얘기하기를 “여기 긴 막대기가 있는데 이쪽을 꽉 물게. 학, 너는 저쪽을 꽉 물고 있어라. 그리고서 네가 하늘을 날면 나도 하늘을 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학이 그것 정도 못해 주겠냐 하면서 얼마든지 하자고 했다고 합니다. 학도 막대기를 물고 있고 개구리도 막대기를 물고 있다가 하늘을 진짜 날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땅에 있던 개구리들이 감탄을 하면서 “오 멋진 개구리, 하늘을 나는 개구리, 놀라운 개구리……”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밑에 있는 처녀 개구리들이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누가 저런 기가 막힌 생각을 했나, 누가 저런 기가 막힌 생각을 했나……” 자꾸만 그러니까 어깨가 으쓱한 개구리가 자기가 했다고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했지!” 하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내가 살아나고 나 자신을 주장하는 그 순간이 바로 추락하는 순간입니다. 끝까지 죽으면 삽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자기 영광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자꾸만 좌절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교만한 것만 자아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좌절하는 것도 자아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자아가 완전히 죽으면 좌절도 안 하고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덤덤하게 주님께서 주신 길을 걸어갑니다.
CCC 교재 중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성공적인 전도란 무엇이냐 하면
첫째,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는 것,
둘째, 그리스도만 전하고
셋째,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참 멋있는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일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긴다. 자아가 죽은 사람의 전도하는 모습입니다. 주님께 다 맡긴다는 것입니다. 결과까지도…… 그리고 덤덤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바라보면서 철저히 죽은 사람은 일을 잘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잘합니다. 그리고 덤덤하게 걸어갑니다. 죽은 자가 이렇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말이 없습니다. 우리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 가운데 윤동주의 서시가 있지 않습니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죽은 자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아가 다 죽은 사람들이 이렇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능력과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활용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어야 됩니다.
왜 자꾸 우리가 길이 안 보인다고 하고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에 전진을 못하고 있습니까?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예배시간은 죽는 시간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신앙의 예배잖아요. 제사는 어떻게 드렸지요? 제물, 팔다리 다 잘라서 내장까지 꺼내는 완전한 죽음 상태에서 드리는 것이 제사입니다. 예배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 자아가 완전히 죽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와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자아가 죽음을 통해서 길들이 열리고 안 보이던 것들이 열리고 잃었던 능력을 회복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위의 것을 찾으라!
두 번째로 우리가 이 땅에서 능력있게 살기 위해서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17절을 보니까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모든 좋은 것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답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장1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골로새서 3장1절을 볼 때마다 꼭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5-6년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언젠가 춘천에 집회를 갔을 때 집사님 가정에 멧돼지 농장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밥 먹고서 멧돼지를 구경했습니다. 수십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 말씀이 이렇습니다. 멧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도토리라고 합니다. 멧돼지는 도토리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다 먹으면 이제 땅을 판다고 합니다. 도토리가 땅에 있는 줄 알고 밤낮 땅을 판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족보가 돼지이기 때문에 지능이 안 좋은지 계속땅을 팝니다. 제가 멧돼지의 언어를 안다고 하면 멧돼지에게 이렇게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이 돼지야! 도토리는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야. 도토리가 먹고 싶으면 도토리나무 옆에 가서 밑둥을 치든지 하늘에서 승부를 봐야지 땅을 판다고 되니? 삽질한다고 되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성도들 중 멧돼지 같은 성도가 있습니다. 뭐 좀 얻고난 다음에 그것을 계속하려고 삽질하고 있잖아요. 땅 판다고 됩니까? 온갖 좋은 것들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길입니다. 하나님과의 통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필요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18만5천명의 앗수르의 군대의 포위를 당했습니다. 완전히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했던 일이 작전회의였습니까? 전략 짰습니까? 아니었지요.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하늘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열왕기하를 보니까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 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열왕기하 19장14절)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열왕기하 19:3) “하나님 내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길이 없습니다.” 온갖 길이 다 포위되어서 막혀있지만 하늘길을 향해서 외쳤더니 하루아침에 18만5천명을 다 멸하고 승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에 능력의 원천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그러면 삽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과 불신자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열린 하늘을 향해서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잖아요.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위를 바라보는 중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주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오뚝이가 넘어지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중심추가 있으니까 다시 일어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도 중심을 확인을 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8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 바울은 많은 환난과 죽음에까지 이르는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 바라보고 의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되는 하늘길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땅의 모든 유혹에서 이길 수 있고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죽으면 삽니다. 죽으면 쉽게 일을 합니다. 그리고 하늘길이 열려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3. 하나님만 바라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을 갖고 이길 수 있습니다.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예수님의 성품이 임하고 능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 지고한 것 그것에 의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사는, 그것이 없으면 삶의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게 만드는 그 한 가지를 붙들면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붙들면, 주님을 철저히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의 힘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생각과 관심과 모든 영역을 다 지배합니다. 사랑하면 그것만 보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장님이 된다고 하잖아요. 오직 주님만 보입니다. 다른 것이 안 보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청년 중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아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그 사람의 옷이 변합니다. 거지같이 입다가 예쁘게 입는다면 그 사람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습이 변합니다. 맨날 웃습니다. 입이 튀어나와 있던 사람이 입이 찢어집니다. 여러분, 얼굴이 변화된다는 것이 어디가 변화되어야 되는지 아십니까? 입만 변화되면 얼굴이 다 변화됩니다. 입을 가만히 두고 눈을 변화시켜보세요. 되나. 눈이 움직여집니까? 가만히 두고 코를 움직여보세요. 그것이 됩니까? 안 움직이지요. 얼굴이 변화된다는 것은 입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웃는다는 것은 눈이 웃는 것이 아닙니다. 입이 움직이지 않고서는 눈웃음도 칠 수 없습니다. 입이 변화되는 것이 얼굴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입이 찢어진다고 하잖아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표정이 바뀝니다. 발걸음이 바뀝니다. 밤낮 지구가 무겁다고 걷는 사람이 발끝으로 발레하듯이 걷습니다. 기쁘면 발이 땅에 안 닫습니다. 닫으려고 하면 다른 발이 오고 다른 발이 와서 허공에 떠다닙니다.
처녀가 결혼을 할 때쯤 되면 불효녀가 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 생각이 싹 사라집니다. 결혼하기 직전에 3개월 정도 기간에 있는 딸들은 다 도둑입니다. 이전까지 집에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물건 저 물건 계속 챙깁니다. 이것도 가져가고 싶고 저것도 가져가고 싶고…… 도둑입니다. 울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 남자 하나만 보이니까 다 가져가고 싶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만 놔두고 집까지 주면 안 될까요 할 정도로……(성도들 웃음)
지지난주 정도의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월요일 교역자 회의가 끝나고난 다음에 날씨가 좋으면 가끔 식사를 살 때가 있습니다. 서오릉 같이 경치 좋은 곳에 식사하러 가자고 얘기합니다. 우리 교역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먹기를 탐하는 교역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다고 하면 절대 안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 안 간다고 합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저 사람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무진장 먹기를 원하는 사람인데 안 간다고 합니다.
안 간다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어제 결혼한 총각이었습니다. 안 간다고 합니다. 이유가 뭔가 했더니 색시 만나고 싶어서입니다. 색시가 없는 화창한 자연보다 색시 있는 난지도가 더 좋은 것입니다. 사랑이 먹는 유혹을 이기는구나……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강력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뛰면 더 뛸 수 있습니다. 지치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면 맹수도 보이지 않습니다. 맹수에게 잡혀있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뛰어드는 것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얘기 들었지요. 자식이 위기상황에 처하니까 그 아들을 구하려고 1톤짜리 금고를 번쩍 들고 그러는 것…… 저는 충분히 그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면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베트남에 갔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끝난 지 25주년 되었을 때에 갔었습니다. 맹호부대에서 75명의 베트콩을 죽인 역전의 용사가 했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월남전 당시 미국과 한국이 오판을 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애국심을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그들의 외세를 배격하는 태도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애국심, 나라사랑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75년에 다낭전투가 있었습니다. 월남군은 1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월맹군은 700명이었다고 합니다. 1000명도 아닌 700명하고 10만 명이 싸웠는데 월맹군이 이겼다고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가지고 똘똘 뭉쳐진 목숨 건 사람에게는 도저히 당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성도가 이 땅에서 강한지 아십니까? 성도에게는 이것보다 더 강한 주님께서 주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교의 능력입니다.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을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있잖아요.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가장 강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와 삯군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선한 목자는 사랑 가지고 뛰는 사람이고 삯군은 사랑 없는 사람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라는 것은 사랑가지고 일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에 사랑을 주십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최근 들어 불신자들을 전도하러 다니는 데에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번 주에도 성결대 일반학부 학생들에게 말씀을 증거했는데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증거할 때 어떻게 하면 설교준비를 잘할까, 어떤 수사법을 쓸까 연구했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습니다. 가기 전에 그 학교를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 학교의 정보를 읽습니다. 그리고 우리 학교같이 내 학교 같이 사랑하고난 다음에 가서 자연스럽게 말씀을 증거합니다. 그러면 전달이 됩니다. 사랑하면 들립니다.
저는 목회를 잘하는 방법도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성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목회가 됩니다. 직장에서 탁월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그 직장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변화됩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하면서 일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많은 악한 마귀의 유혹과 도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세 가지 명확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죽으면 쉽습니다.
내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유혹이 유혹되는 것입니다. 죽으면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2. 또한 위로부터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땅에 있는 삽질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을 구하는 열린 하늘이 있는 인생이 되면 살아납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며 일하면 일을 쉽게 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입니다.
700명으로 10만 명을 이깁니다. 바로 그 힘 가지고 승리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골로새서 3장을 살피고 있는데 골로새서 1장의 내용은 예수님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은 신학적으로 기독론이라고 얘기합니다.골로새서 2장은 예수님의 충분성과 탁월성에 대해 도전해오는 무리들과 그러한 이론에 대한 응답입니다.
세 가지 도전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영지주의자들의 도전, 이들은 체험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말씀중심적인 신앙으로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율법주의의 도전인데 율법주의는 외형주의적인 접근을 합니다. 성장의 방향을 오도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이 자라나야 하는데 자꾸 겉사람만 신경쓰게 만들고 또 하나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인 십자가를 붙들기보다는 자기 의를 붙드는 잘못된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혹인 금욕주의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무서운 도전이라고 했습니다. 금욕주의의 내용은 실체되시는, 우리의 머리되시는 예수님을 붙들지 않습니다. 실체는 모르고 가짜들만 논하고난 다음에 가짜가 아닌 것이 진짜라는 접근을 합니다. 이것은 아주 어렴풋한 접근입니다. 굉장히 잘 믿어 보이지만 진짜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만드는 무서운 독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성경을 접근할 때 로마서도 그렇고 골로새서도 그렇고 에베소서도 그렇고 모두 처음에는 교리를 먼저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서를 보면 1장부터 11장까지가 교리이고 12장부터 실천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골로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2장은 원리입니다. 3-4장은 실제적인 실제 행동과 연결을 맺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걸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행동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순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4절에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대원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 죽으면… 이길 수 있다!
첫째 죽으면 쉽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은 마귀와 맞서 싸워서 이기는 방법도 있지만 싸움 이전에 근본적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죽으면 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죄에는 분명히 세력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거짓말하고 음행하게 만들고 불순종, 미움, 악의, 탐욕으로 가득차게 합니다. 우리는 순종하려고 하는데 움직일수록 오히려 죄를 짓습니다. 누워서도 죄, 어떤 때는 병상에 쓰러져 있으면서도 범죄하는 생각을 갖고 어떤 사람은 꿈을 꾸어도 범죄하는 꿈을 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얽어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죄는 또 우리를 죄책으로 괴롭게 만듭니다. 죄책감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꽉 눌러버립니다. 또 죄는 죄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죄는 죄를 새끼치게 합니다. 가인이 예배드리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아벨을 죽이는 살인까지 연결되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간음했습니다. 간음에서 끝났습니까? 충신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죄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우리가 술집에 팔려간 여인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우선 포주가 돈을 꾸어줍니다. 돈을 꾸어주면서 예쁜 옷과 화장품을 사 쓰라고 합니다. 그리고서 갚지 않으면 나올 수 없도록 계속해서 돈을 빌러줍니다. 이자가 쌓여서 나중에는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죄하고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유업과 정죄로 말미암아 망하는 인생이 됩니다.
이러한 악한 마귀의 여러 가지 궤계와 우리를 죄로 얽어매는 시도들이 있는데 이것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죽으면 됩니다.
오래된 탈출영화 가운데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도망치고 잡히고 도망치고 잡히는 일이 반복됩니다. 바다 한가운데에 감옥을 만들었습니다. 탈옥이 불가능한 감옥입니다. 언제 나올 수 있습니까? 죽으면 나옵니다. 아무리 철옹성 같더라도 죽으면 나올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감옥의 창살을 뚫고 나오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통해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결국 우리도 옛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십자가 안에서 죽으면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욕 가운데 최고의 욕이 육시라고 생각합니다. 육시랄…… 이런 욕을 하지요. 강단에서 말하기 힘든데 육시(戮屍)라는 것이 한자어입니다. 이것을 쓰라고 하면 쓸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한자입니다. 시체를 때린다는 뜻입니다. 어떤 중죄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형에 처합니다. 그리고도 분이 안 풀려서 시체를 꽁꽁 묶어놓고 때리는 것을 육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굉장히 무서운 보복법이지요. 그러나 시체를 매질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시체를 때린다고 더 나은 것 있겠습니까? 죽으면 자유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죄와 죄로부터 얽어매는 율법을 남편이라고 얘기합니다. 지독한 남편입니다. 우리를 정죄하고 얽어매는 남편입니다. 무서운 남편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죽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죽을 수 있습니까? 율법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6장의 총주제입니다. 로마서 6장4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8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또 갈라디아서 2장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죽으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죽으면 마귀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런 예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옛날에 궁중에 내시가 있었습니다. 환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남성들이지만 거세를 시킨 사람들입니다. 궁중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습니다. 전국에서 뽑혀온 예쁜 여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시들에게 유혹이 됩니까, 안됩니까? 안 되어 보아서 모릅니까? (성도들 웃음) 유혹이 안 됩니다. 왜 안 되지요? 남성으로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혹이 되지 않습니다. 죽으면 유혹에서 자유롭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귀가 성도에게 돈으로 유혹하고 명예로 유혹하고 권력으로 유혹한다고 할지라도 이길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있습니다. 맞서 싸우는 것도 있지만 주님의 말씀은 죽으면 이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24절을 보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죽으면 자유로울 수 있고 이길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신학생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신학생세미나를 할 때 많은 목사님들이 신학생의 미래를 놓고 걱정이 많았습니다. 최근 들어 교회가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교회 수가 늘고 있는데 교회들이 부흥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신학생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전공했는데 사역지가 없는 것입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 준비가 준비되더라도 사역지가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답답한 일 아닙니까? 큰 어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증거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르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다!’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생들이 포화상태가 되니까 부르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르는 곳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을 하자! 누가 나를 부르지 않나라고 생각하면 길이 없어 보입니다. 아무도 안 부르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서 내가 꼭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 복음이 필요한 것이 어디인가를 생각하면 갈 곳이 너무 많지요. 지금 동네만 해도 얼마나 갈 곳이 많습니까? 서울만 해도 파고다공원의 노인들도 있고 복음증거할 데가 상당히 많습니다. 지금도 복음이 증거되지 않은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군대에 가 보니까 그렇습니다. 군목들의 숫자가 줄어들어서 사단급마다 겨우 한 명씩 있고 연대에도 목사님이 안 계신 곳이 부지기수입니다. 교회는 많이 세워 놓았는데 목사가 없어서 한 목사님이 4-5군데에서 말씀 증거합니다. 그래서 민간인 목사님들을 많이 보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캠퍼스에 가 보세요. 목사가 없다고 합니다. 부르는 곳은 없어도 내가 복음 들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증거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갈 곳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왜 우리가 갈 곳이 없다고 얘기합니까? 편하게 사역하려고 대접받으면서 사역하려고 하고 안락함을 찾으면서 사역하려고 하다보니까 안 보이는 것입니다. 길이 자꾸만 좁아지는 것입니다. 자기 여건에 맞추어 가려고 하니까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 골짝이라도 가오리다 하는 마음을 먹으면 언제나 우리의 사역지가 있습니다.
결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기 힘들다 힘들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죽어서 그렇습니다. 죽으면 결혼만큼 쉬운 것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누가 나의 인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줄까, 자기 자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 자기에게 잘해 줄 사람을 찾으니까 없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을 해 보세요. 누구를 도울까, 결혼을 통해서 그 누구를 한 단계 올려줄까 하는 마음을 먹으면 지천에 깔린 것이 남자이고 지천에 깔린 것이 여자입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자를 생각해 보세요. 평강공주 같은 마음이 있으면 여기저기 온달이 있습니다. 밤낮 킹카만을 원하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안 보입니다. 눈이 낮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낮아지면 보입니다. 아예 죽으면 많이 보입니다. 안 보이는 것은 아직 안 죽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나이 서른이 되는 자매의 그 자세를 스물네 살에 가지면 최고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전성기 다 지내고난 다음에 낮아집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전성기 때에 마음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는 곳이 없다고 하지 마세요. 내가 가진 은사와 능력 가지고 섬길 곳이 어딘지, 섬기려는 마음을 먹으면 할 일은 너무 많습니다. 죽으면 길이 보입니다. 죽었다라고 선언하면 세상의 길이 엄청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쓰러지느냐 하면 내가 살았다 생각하는 순간부터 쓰러집니다. 어떤 사람이 좀 돈을 벌고 좀 명예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사람이 좁아집니다. 내가 살아나면 약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비유를 잊지 못합니다. 개구리들이 있었는데 개구리의 꿈이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개구리들의 꿈에도 소원은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개구리들 가운데 석학 개구리가 있었나 봅니다. 아이큐가 30쯤 되는 개구리가 어떻게 하면 학과 같이 날 수 있을까 학을 찾아갔습니다. 학에게 얘기하기를 “여기 긴 막대기가 있는데 이쪽을 꽉 물게. 학, 너는 저쪽을 꽉 물고 있어라. 그리고서 네가 하늘을 날면 나도 하늘을 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학이 그것 정도 못해 주겠냐 하면서 얼마든지 하자고 했다고 합니다. 학도 막대기를 물고 있고 개구리도 막대기를 물고 있다가 하늘을 진짜 날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땅에 있던 개구리들이 감탄을 하면서 “오 멋진 개구리, 하늘을 나는 개구리, 놀라운 개구리……”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밑에 있는 처녀 개구리들이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누가 저런 기가 막힌 생각을 했나, 누가 저런 기가 막힌 생각을 했나……” 자꾸만 그러니까 어깨가 으쓱한 개구리가 자기가 했다고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했지!” 하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합니다. 내가 살아나고 나 자신을 주장하는 그 순간이 바로 추락하는 순간입니다. 끝까지 죽으면 삽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자기 영광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자꾸만 좌절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교만한 것만 자아가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좌절하는 것도 자아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자아가 완전히 죽으면 좌절도 안 하고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덤덤하게 주님께서 주신 길을 걸어갑니다.
CCC 교재 중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성공적인 전도란 무엇이냐 하면
첫째,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는 것,
둘째, 그리스도만 전하고
셋째,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참 멋있는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일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긴다. 자아가 죽은 사람의 전도하는 모습입니다. 주님께 다 맡긴다는 것입니다. 결과까지도…… 그리고 덤덤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바라보면서 철저히 죽은 사람은 일을 잘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잘합니다. 그리고 덤덤하게 걸어갑니다. 죽은 자가 이렇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말이 없습니다. 우리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 가운데 윤동주의 서시가 있지 않습니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죽은 자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아가 다 죽은 사람들이 이렇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능력과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활용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죽어야 됩니다.
왜 자꾸 우리가 길이 안 보인다고 하고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에 전진을 못하고 있습니까?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예배시간은 죽는 시간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신앙의 예배잖아요. 제사는 어떻게 드렸지요? 제물, 팔다리 다 잘라서 내장까지 꺼내는 완전한 죽음 상태에서 드리는 것이 제사입니다. 예배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 자아가 완전히 죽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와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자아가 죽음을 통해서 길들이 열리고 안 보이던 것들이 열리고 잃었던 능력을 회복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위의 것을 찾으라!
두 번째로 우리가 이 땅에서 능력있게 살기 위해서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17절을 보니까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모든 좋은 것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답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장1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골로새서 3장1절을 볼 때마다 꼭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5-6년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언젠가 춘천에 집회를 갔을 때 집사님 가정에 멧돼지 농장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밥 먹고서 멧돼지를 구경했습니다. 수십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 말씀이 이렇습니다. 멧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도토리라고 합니다. 멧돼지는 도토리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다 먹으면 이제 땅을 판다고 합니다. 도토리가 땅에 있는 줄 알고 밤낮 땅을 판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족보가 돼지이기 때문에 지능이 안 좋은지 계속땅을 팝니다. 제가 멧돼지의 언어를 안다고 하면 멧돼지에게 이렇게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이 돼지야! 도토리는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야. 도토리가 먹고 싶으면 도토리나무 옆에 가서 밑둥을 치든지 하늘에서 승부를 봐야지 땅을 판다고 되니? 삽질한다고 되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성도들 중 멧돼지 같은 성도가 있습니다. 뭐 좀 얻고난 다음에 그것을 계속하려고 삽질하고 있잖아요. 땅 판다고 됩니까? 온갖 좋은 것들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길입니다. 하나님과의 통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필요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18만5천명의 앗수르의 군대의 포위를 당했습니다. 완전히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했던 일이 작전회의였습니까? 전략 짰습니까? 아니었지요.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하늘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열왕기하를 보니까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 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열왕기하 19장14절)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열왕기하 19:3) “하나님 내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길이 없습니다.” 온갖 길이 다 포위되어서 막혀있지만 하늘길을 향해서 외쳤더니 하루아침에 18만5천명을 다 멸하고 승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에 능력의 원천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그러면 삽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과 불신자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열린 하늘을 향해서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잖아요.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위를 바라보는 중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주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오뚝이가 넘어지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중심추가 있으니까 다시 일어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도 중심을 확인을 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8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 바울은 많은 환난과 죽음에까지 이르는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 바라보고 의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되는 하늘길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땅의 모든 유혹에서 이길 수 있고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죽으면 삽니다. 죽으면 쉽게 일을 합니다. 그리고 하늘길이 열려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3. 하나님만 바라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을 갖고 이길 수 있습니다.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예수님의 성품이 임하고 능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 지고한 것 그것에 의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사는, 그것이 없으면 삶의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게 만드는 그 한 가지를 붙들면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붙들면, 주님을 철저히 사랑하는 그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의 힘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생각과 관심과 모든 영역을 다 지배합니다. 사랑하면 그것만 보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장님이 된다고 하잖아요. 오직 주님만 보입니다. 다른 것이 안 보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청년 중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아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그 사람의 옷이 변합니다. 거지같이 입다가 예쁘게 입는다면 그 사람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습이 변합니다. 맨날 웃습니다. 입이 튀어나와 있던 사람이 입이 찢어집니다. 여러분, 얼굴이 변화된다는 것이 어디가 변화되어야 되는지 아십니까? 입만 변화되면 얼굴이 다 변화됩니다. 입을 가만히 두고 눈을 변화시켜보세요. 되나. 눈이 움직여집니까? 가만히 두고 코를 움직여보세요. 그것이 됩니까? 안 움직이지요. 얼굴이 변화된다는 것은 입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웃는다는 것은 눈이 웃는 것이 아닙니다. 입이 움직이지 않고서는 눈웃음도 칠 수 없습니다. 입이 변화되는 것이 얼굴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입이 찢어진다고 하잖아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표정이 바뀝니다. 발걸음이 바뀝니다. 밤낮 지구가 무겁다고 걷는 사람이 발끝으로 발레하듯이 걷습니다. 기쁘면 발이 땅에 안 닫습니다. 닫으려고 하면 다른 발이 오고 다른 발이 와서 허공에 떠다닙니다.
처녀가 결혼을 할 때쯤 되면 불효녀가 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 생각이 싹 사라집니다. 결혼하기 직전에 3개월 정도 기간에 있는 딸들은 다 도둑입니다. 이전까지 집에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물건 저 물건 계속 챙깁니다. 이것도 가져가고 싶고 저것도 가져가고 싶고…… 도둑입니다. 울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 남자 하나만 보이니까 다 가져가고 싶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만 놔두고 집까지 주면 안 될까요 할 정도로……(성도들 웃음)
지지난주 정도의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월요일 교역자 회의가 끝나고난 다음에 날씨가 좋으면 가끔 식사를 살 때가 있습니다. 서오릉 같이 경치 좋은 곳에 식사하러 가자고 얘기합니다. 우리 교역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먹기를 탐하는 교역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다고 하면 절대 안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이 안 간다고 합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저 사람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무진장 먹기를 원하는 사람인데 안 간다고 합니다.
안 간다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어제 결혼한 총각이었습니다. 안 간다고 합니다. 이유가 뭔가 했더니 색시 만나고 싶어서입니다. 색시가 없는 화창한 자연보다 색시 있는 난지도가 더 좋은 것입니다. 사랑이 먹는 유혹을 이기는구나……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강력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뛰면 더 뛸 수 있습니다. 지치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면 맹수도 보이지 않습니다. 맹수에게 잡혀있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뛰어드는 것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 얘기 들었지요. 자식이 위기상황에 처하니까 그 아들을 구하려고 1톤짜리 금고를 번쩍 들고 그러는 것…… 저는 충분히 그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면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베트남에 갔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끝난 지 25주년 되었을 때에 갔었습니다. 맹호부대에서 75명의 베트콩을 죽인 역전의 용사가 했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월남전 당시 미국과 한국이 오판을 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애국심을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그들의 외세를 배격하는 태도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애국심, 나라사랑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75년에 다낭전투가 있었습니다. 월남군은 1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월맹군은 700명이었다고 합니다. 1000명도 아닌 700명하고 10만 명이 싸웠는데 월맹군이 이겼다고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가지고 똘똘 뭉쳐진 목숨 건 사람에게는 도저히 당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성도가 이 땅에서 강한지 아십니까? 성도에게는 이것보다 더 강한 주님께서 주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교의 능력입니다.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을 수 있는 이름을 갖고 있잖아요.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가장 강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와 삯군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선한 목자는 사랑 가지고 뛰는 사람이고 삯군은 사랑 없는 사람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라는 것은 사랑가지고 일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에 사랑을 주십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최근 들어 불신자들을 전도하러 다니는 데에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번 주에도 성결대 일반학부 학생들에게 말씀을 증거했는데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증거할 때 어떻게 하면 설교준비를 잘할까, 어떤 수사법을 쓸까 연구했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습니다. 가기 전에 그 학교를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 학교의 정보를 읽습니다. 그리고 우리 학교같이 내 학교 같이 사랑하고난 다음에 가서 자연스럽게 말씀을 증거합니다. 그러면 전달이 됩니다. 사랑하면 들립니다.
저는 목회를 잘하는 방법도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성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목회가 됩니다. 직장에서 탁월한 사람이 되는 방법은 그 직장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변화됩니다.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하면서 일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많은 악한 마귀의 유혹과 도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세 가지 명확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죽으면 쉽습니다.
내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유혹이 유혹되는 것입니다. 죽으면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2. 또한 위로부터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땅에 있는 삽질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을 구하는 열린 하늘이 있는 인생이 되면 살아납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며 일하면 일을 쉽게 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입니다.
700명으로 10만 명을 이깁니다. 바로 그 힘 가지고 승리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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