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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게 예수 믿읍시다 (단6:10-18)

본문

저는 이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 믿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와 한국의 교회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메시지로 복음 대세일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성공한 사람들, 예수 믿고 병 나은 사람들 이야기가 메시지의 주요 내용이 되었어요. 그 결과 특정 교단을 중심으로 상당한 양적 팽창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메시지는 예수 믿고 고난 받은 사람들, 핍박을 당한 사람들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이 매우 공공연하고 빈번하게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도중에 남편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또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어린 딸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막으려고 아버지는 토요일 밤에 내일 아침에 밭에 가서 목화를 모두 뽑으라고 했다는 얘기는 당시의 그런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는 스토리입니다. 낙심하고 절망하던 소녀는 밤중에 목화밭으로 달려가 밤새 달빛 아래서 맨손으로 목화를 다 뽑아놓고 새벽에 교회에 가서 쓰러져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일요일 아침에 밭에 나가본 아버지는 목화다발마다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보고 자신의 가혹했음을 반성하고 어린 딸의 믿음에 감복해서 딸을 만나러 교회로 발걸음을 돌리게 됩니다. 당시의 교회가 이런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그렇게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고난이 한 영혼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도구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선언함으로써 그런 믿음을 촉구하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와 물질적 풍요의 추구가 일반인들의 우선적인 관심사로 대두하면서 60년대식의 멜로드라마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물질적인 축복에 예수 끼워 팔기 시작했습니다.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교회와 복음의 본질이 훼손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다니엘과 같은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다시 다니엘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 되어 그의 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이 그 조서에 사인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 돌아가 늘 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즉시 사자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그 사실을 모르고 그랬다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잡혀와 사자굴에 던져졌다면 그래도 우리의 마음이 덜 심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형식인 것입니다. 뭔지도 모르고 한 일로 보상을 받거나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에는 인식작용과 의지작용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믿음을 자신의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강제에 의해 드려지는 예배, 억지로 드리는 헌금,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선행… 이런 것이 효력이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고 말씀하십니다. 의례적으로 드려지는 예배, 참된 헌신의 자의식이 결여된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라고 부르짖습니다. 자발적인 순종의 분명한 인식이 수반된 제사와 예배, 헌신만이 참된 믿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과 의지를 통해 믿음을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알기 때문에 고민이 되고 고통스러운 것 아닙니까? 사자굴에 던져지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배행위를 포기하지 않는 다니엘의 행동은 누구의 행동을 생각나게 합니까? 바로 그의 친구들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뻔히 풀무불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왕의 금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것과 똑같은 상황 아닌가요? 아브라함을 보세요. 백세에 낳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놈을 잡아서 번제를 드리라는 말씀에 그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배신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바로 그 이삭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니까요. 만약 그가 정상적인 이성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즉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말로 할 수 없는 갈등과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물질적인 축복에 예수를 끼워 판 결과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기쁨만을 누리려 하고 예수로 인한 고난과 고통은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불완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다니엘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그들에게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본다는 것은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게 하는 예수, 사자굴에 던져지게 하는 하나님은 더 이상 믿고 예배할 대상이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아들을 낳게 해 주시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지만, 그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과는 함께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여기서 믿음의 포기와 배신이 발생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가 믿고 따르던 예수는 자기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할 메시야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자기 말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로마 당국에 붙잡혀 반역죄로 처형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칫하면 자신도 그 일당으로 체포되어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말할 것 없이 스승을 배신하고 팔아넘기게 되었던 것이지요. 다니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총리가 되고 초고속 승진을 시켜주시는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사자굴에도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데, 그것은 너무 예수를 편하게, 또 쉽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때문에 겪는 치열한 몸부림 같은 것이 없단 말이지요. 한 세대 전만 해도 예수 믿는 것이 큰 핍박을 받아야 했던 이유는 제사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핍박을 당하던 세대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제사 문제로 핍박이 일어나는 경우는 예전처럼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회가 핵가족화되고 개인주의의 발달과 함께 또한 다원화의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 신념 때문에 불이익 당하는 것을 사회통념이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게 되었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 우리는 아주 쉽고 편하게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마치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처럼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약한 기독교인들이 양산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승진을 시켜주시는 하나님은 찬양과 감사를 받으시지만, 사자굴에 들어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배척당하고 맙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품위와 취미의 문제로 치부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믿음을 지키기 위해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한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들도 자신의 선택으로 예수를 부인하고 살 길을 찾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손해보지 않는 길, 오히려 이익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식과 의지에 의해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믿음을 가졌느냐에 따라 이처럼 큰 차이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에 폴리캅이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이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입니다. 이분의 인격과 믿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도 성자로 추앙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교회에 큰 박해가 닥쳤을 때 이 노감독을 살리기 위해 주위에서 피신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습니다. 그 권유를 따라 피신을 했던 폴리캅은 마음을 돌이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그는 물론 당장 체포되었습니다. 폴리캅을 체포해서 호송하던 장교가 그를 살리기 위해 길에서 무척이나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딱 한번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부인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폴리캅이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목은 오직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총독이 말합니다. “내가 당장 너를 석방하겠다. 그리스도를 저주하기만 해라.”

폴리캅이 총독에게 대답합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분은 나에게 한번도 섭섭하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오?” 마침내 재판정의 관리가 군중을 향해 세 번 외칩니다. “폴리캅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백했다.” 그러자 군중이 폴리캅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폴리캅은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당하고 신체적인 손상을 당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지구상의 다른 곳에서는 아직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지난 이천년간의 기독교 역사에서 그러한 사탄의 방법은 대체로 실패로 끝났습니다. 예수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은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확연하고 구별짓고 믿음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훨씬 간교하고 포착하기 힘든 방법으로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즉 옛날에는 죽고 사는 문제로 믿음을 시험했지만 지금은 사소한 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일에서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실패하는 수가 많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 불편하고 힘든 일인가요? 아니면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일인가요? 기본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편하고 힘들고 손해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중시하고 세상이 가는 데로 따라가면 불편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한다면 부딪치는 것이 너무 많고 불편한 일도 셀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진정으로 예수 믿는 모습 아닌가요? 예수 믿고 복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고생하는 것이 진짜 예수 믿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구체화되고 내 안에 사는 것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입니다. 이름만 그리스도인, 무늬만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예수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하는 삶으로 여러분의 믿음을 보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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